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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38장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옵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머리 속에 맴도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왜, "손들고 옵니다"일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고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이지 않는가?
그러면 당연히 가사가 "옵니다"가 아니라 "갑니다"가 맞지.
그래서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저혼자 이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꿔 불렀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예배중에 이 찬송을 가사를 바꿔 부르고 있었는데 문득 가슴 한복판이 찌르르르 하며 떨림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 갔다 와서, 집에 들어서며 어머니께 " 학교 갔다 왔습니다." 하며 책가방을 놓던 생각이 나면서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이냐?"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있는 곳이 주님의 앞인데, 주님 앞에서 찬송을 부르며 "갑니다"라고 하는 찬송은 아직도 주님 앞에 도달하지 못하고 멀리서 부르는 찬송이구나.
주님 앞에 가까이 왔다면 당연히 "예수님, 제가 여기 왔습니다."라고 하는게 정상이구나.
이 찬송은 그렇게 저에게 그런 깨달음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가사 하나까지도 내 마음 대로 재단하며 살던 내 마음을 변화시킨 은혜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다녀왔습니다" 하며 책가방(이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장면이 떠오르는 기쁨이 있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옵니다"의 은혜라 이름짓고 주님을 항상 만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옵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머리 속에 맴도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왜, "손들고 옵니다"일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고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이지 않는가?
그러면 당연히 가사가 "옵니다"가 아니라 "갑니다"가 맞지.
그래서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저혼자 이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꿔 불렀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예배중에 이 찬송을 가사를 바꿔 부르고 있었는데 문득 가슴 한복판이 찌르르르 하며 떨림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 갔다 와서, 집에 들어서며 어머니께 " 학교 갔다 왔습니다." 하며 책가방을 놓던 생각이 나면서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이냐?"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있는 곳이 주님의 앞인데, 주님 앞에서 찬송을 부르며 "갑니다"라고 하는 찬송은 아직도 주님 앞에 도달하지 못하고 멀리서 부르는 찬송이구나.
주님 앞에 가까이 왔다면 당연히 "예수님, 제가 여기 왔습니다."라고 하는게 정상이구나.
이 찬송은 그렇게 저에게 그런 깨달음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가사 하나까지도 내 마음 대로 재단하며 살던 내 마음을 변화시킨 은혜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다녀왔습니다" 하며 책가방(이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장면이 떠오르는 기쁨이 있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옵니다"의 은혜라 이름짓고 주님을 항상 만납니다.
귀한분은 사람으로만 한정 짓는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 보다 더 귀하기에 귀한것으로 부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