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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33)
- 예수님은 비전을 가지고나 계셨던가?
비전, 비전 하는데 예수님은 비전을 가지고 계셨던가요? 정말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빌 하이벨스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몇 년후 정식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명백한 비전을 갖고 계셨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셔서 그들을 제자로 훈련하는 전략적인 3개년 계획을 세우셨다. 또한 복음 전도의 중심을 밖으로 확대하는 탁월한 복음 전도전략을 갖고 계셨다. 처음엔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그리고는 사마리아로, 지구의 가장 먼 곳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정한 과업을 주셨다. 제자들이 과업을 잘 수행하면 그들을 칭찬하셨고 상을 주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 문제에 대면하셨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여 주신 후 다시 그들을 보내셨다. 그러면 제자들은 더 잘 해냈다.> (리더십의 용기, 74)
빌 하이벨스는 자기의 경험과 목회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다가 예수님의 삶을 해석하는 표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빌 하이벨스가 묘사해 놓은 예수님의 행적이 그가 교회에서 목회하는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밑의 리더들을 닦달하는 버릇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투영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같은 리더십 주창자인 헨리 블랙커비는 예수님의 비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은 너무 심오한데다, 인간의 통상적인 경험을 훨씬 뛰어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 중시하는 리더십 이론에 따라 움직이셨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 (40)
예수님의 삶을 우리 인간의 경험으로, 우리 인간의 잣대로 재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블랙커비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빌 하이벨스가 범하고 있는 잘못을 옆에서 지켜본 듯이,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랙커비의 그 다음 말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은 계획을 세우거나 비전을 내 걸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 ….간혹 리더십 전문가들은 마치 예수님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혼자 말하는 것처럼 그분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추종세력을 모아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할 것인가? 기성 종교인들을 설득해야 할까? 군중들에게 설교해야 할까? 거창한 기적들을 연달아 행하여야 할까? 아니다. 열두명의 인생에 나 자신을 투자하자. 내가 떠난 뒤에 내 대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리더들에게도 또 투자하면 그 수가 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내 나라가 전 세계로 확장되게 하자.”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너무 오해한 것이다.> (40)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두 사람의 말을 비교해보면 예수님에 대해 엄청난 편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 세대를 풍미하는 리더십 주창자 두 분이 같이 믿고 있는 예수님을 그토록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그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궁금해 집니다.
블랙커비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말에 덧붙여 한번 더 강조를 합니다.
< 예수님이 열두명의 제자를 훈련시키는데 주력하였음을 들어 이 리더십 모델이야말로 모든 리더가 따라야 할 유형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오산이다.>(40 )
그렇게 예수님의 행적을 다르게 해석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그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서 끝나는게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각각 다르게 보여주게 되고 결국은 우리의 반응을 다르게 만들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이 비전의 사람이요, 제자들을 훈련시킬 전략적인 3개년 계획을 세우셨다고 이해하는 빌 하이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의 리더들이 훌륭한 교회를 세우는데 최고의 노력을 쏟을 것을 기대하고 계시리라 나는 확신한다. > (74)
그런 확신에 의지해서 그는 자기의 목적을 ‘최고의 지도력 훈련’을 하는데 두게 됩니다.
그러나 블랙커비는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열 두명의 제자를 훈련시키는데 주력하셨음을 들어 이 리더십 모델이 이야 말로 모든 리더가 따라야 할 유형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오산이다. …..예수님의 리더십 핵심은 아버지와 관계였다.> (40)
한 사람은 리더가 되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리더 훈련장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반하여 다른 사람은 교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몰고 갑니다. 이게 그들의 차이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후의 우리들이 취해야 믿음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결국 빌 하이벨스와 블랙커비가 인식한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성경을 읽었고, 성경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행적을 읽었으면서도 그들이 믿고 따라가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리더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결국은 그들의 사역 형태가 달라집니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마저 ‘다른’ 예수를 믿게 되고, 다른 믿음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한 것은 그들 –리더십 주창자들 –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냥 영적 리더십, 하면 다 같은 줄 아는데 실상은 서로간에 큰 편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편차를 보이는 여러 견해 중에서 한꺼번에 두 가지를 취할 수 없으니 불가피하게도 우리는 두 가지 중 한가지를 취해야 합니다.
리더십 관련 책을 읽고 나서 ‘그저 그런 것이 있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바에야 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책을 사 읽습니까? 분명 어느 한쪽을 택하여 실행으로 옮겨야만 책을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옳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분명 둘 중 하나만을 택하여야 합니다.
참고로, 그런 결단을 이미 내린 분의 견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삼는 사역을 묵상하라. 예수님은 제자 삼는 사역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목표를 정하셨다. 세계복음화를 위하여 제자들을 모집하셨다. 제자들과 동거하셨다.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셨다. 모범으로,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전수해야 할 진리와 그 진리 전수를 위해 터득해야 할 기술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목표는 뚜렷했고, 한번도 그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 (강준민, 존재와 비전혁명, 96-97)
빌 하이벨스의 견해를 충실히 따라가는 분인데, 블랙커비의 견해에 의하면 그는 완벽한 ‘오산’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어떻습니까? 강목사가 취한 견해가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 예수님은 비전을 가지고나 계셨던가?
비전, 비전 하는데 예수님은 비전을 가지고 계셨던가요? 정말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빌 하이벨스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몇 년후 정식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명백한 비전을 갖고 계셨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셔서 그들을 제자로 훈련하는 전략적인 3개년 계획을 세우셨다. 또한 복음 전도의 중심을 밖으로 확대하는 탁월한 복음 전도전략을 갖고 계셨다. 처음엔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그리고는 사마리아로, 지구의 가장 먼 곳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정한 과업을 주셨다. 제자들이 과업을 잘 수행하면 그들을 칭찬하셨고 상을 주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 문제에 대면하셨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여 주신 후 다시 그들을 보내셨다. 그러면 제자들은 더 잘 해냈다.> (리더십의 용기, 74)
빌 하이벨스는 자기의 경험과 목회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다가 예수님의 삶을 해석하는 표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빌 하이벨스가 묘사해 놓은 예수님의 행적이 그가 교회에서 목회하는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밑의 리더들을 닦달하는 버릇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투영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같은 리더십 주창자인 헨리 블랙커비는 예수님의 비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은 너무 심오한데다, 인간의 통상적인 경험을 훨씬 뛰어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 중시하는 리더십 이론에 따라 움직이셨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 (40)
예수님의 삶을 우리 인간의 경험으로, 우리 인간의 잣대로 재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블랙커비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빌 하이벨스가 범하고 있는 잘못을 옆에서 지켜본 듯이,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랙커비의 그 다음 말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은 계획을 세우거나 비전을 내 걸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 ….간혹 리더십 전문가들은 마치 예수님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혼자 말하는 것처럼 그분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추종세력을 모아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할 것인가? 기성 종교인들을 설득해야 할까? 군중들에게 설교해야 할까? 거창한 기적들을 연달아 행하여야 할까? 아니다. 열두명의 인생에 나 자신을 투자하자. 내가 떠난 뒤에 내 대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리더들에게도 또 투자하면 그 수가 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내 나라가 전 세계로 확장되게 하자.”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너무 오해한 것이다.> (40)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두 사람의 말을 비교해보면 예수님에 대해 엄청난 편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 세대를 풍미하는 리더십 주창자 두 분이 같이 믿고 있는 예수님을 그토록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그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궁금해 집니다.
블랙커비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말에 덧붙여 한번 더 강조를 합니다.
< 예수님이 열두명의 제자를 훈련시키는데 주력하였음을 들어 이 리더십 모델이야말로 모든 리더가 따라야 할 유형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오산이다.>(40 )
그렇게 예수님의 행적을 다르게 해석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그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서 끝나는게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각각 다르게 보여주게 되고 결국은 우리의 반응을 다르게 만들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이 비전의 사람이요, 제자들을 훈련시킬 전략적인 3개년 계획을 세우셨다고 이해하는 빌 하이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의 리더들이 훌륭한 교회를 세우는데 최고의 노력을 쏟을 것을 기대하고 계시리라 나는 확신한다. > (74)
그런 확신에 의지해서 그는 자기의 목적을 ‘최고의 지도력 훈련’을 하는데 두게 됩니다.
그러나 블랙커비는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열 두명의 제자를 훈련시키는데 주력하셨음을 들어 이 리더십 모델이 이야 말로 모든 리더가 따라야 할 유형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오산이다. …..예수님의 리더십 핵심은 아버지와 관계였다.> (40)
한 사람은 리더가 되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리더 훈련장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반하여 다른 사람은 교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몰고 갑니다. 이게 그들의 차이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후의 우리들이 취해야 믿음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결국 빌 하이벨스와 블랙커비가 인식한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성경을 읽었고, 성경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행적을 읽었으면서도 그들이 믿고 따라가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리더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결국은 그들의 사역 형태가 달라집니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마저 ‘다른’ 예수를 믿게 되고, 다른 믿음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한 것은 그들 –리더십 주창자들 –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냥 영적 리더십, 하면 다 같은 줄 아는데 실상은 서로간에 큰 편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편차를 보이는 여러 견해 중에서 한꺼번에 두 가지를 취할 수 없으니 불가피하게도 우리는 두 가지 중 한가지를 취해야 합니다.
리더십 관련 책을 읽고 나서 ‘그저 그런 것이 있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바에야 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책을 사 읽습니까? 분명 어느 한쪽을 택하여 실행으로 옮겨야만 책을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다 옳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분명 둘 중 하나만을 택하여야 합니다.
참고로, 그런 결단을 이미 내린 분의 견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삼는 사역을 묵상하라. 예수님은 제자 삼는 사역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목표를 정하셨다. 세계복음화를 위하여 제자들을 모집하셨다. 제자들과 동거하셨다.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셨다. 모범으로,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전수해야 할 진리와 그 진리 전수를 위해 터득해야 할 기술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목표는 뚜렷했고, 한번도 그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 (강준민, 존재와 비전혁명, 96-97)
빌 하이벨스의 견해를 충실히 따라가는 분인데, 블랙커비의 견해에 의하면 그는 완벽한 ‘오산’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어떻습니까? 강목사가 취한 견해가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2007.03.06 12:41:29
안녕하세요 목사님 지면으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글을 읽다가 문득 책에서 유사한(?)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나서 올립니다.
결론은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소개만 합니다.
성프랜시스의 전기를 소설화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라는 책 가운데
수도회의 조직화를 외치는 책중 인물인 엘리야스라는 인물과 이를 반대하는 프랜시스의 태도가
오늘 목사님의 질문과 매우 유사합니다.
프랜시스가 정말 그랬는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빈 컵속의 공기를 빼내는 방법은
첬째, 컵에 랩을 덮어 씌운 후 주사기를 이용하여 강제로 공기를 빼내는 것
둘째, 물을 컵에 부어서 자연적으로 공기가 컵 밖으로 밀려 나가게 하는 것
저 같으면 하나님을 대망하며 하나님의 것들이 제 마음속에 채워지기를 기다립니다.
글을 읽다가 문득 책에서 유사한(?)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나서 올립니다.
결론은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소개만 합니다.
성프랜시스의 전기를 소설화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라는 책 가운데
수도회의 조직화를 외치는 책중 인물인 엘리야스라는 인물과 이를 반대하는 프랜시스의 태도가
오늘 목사님의 질문과 매우 유사합니다.
프랜시스가 정말 그랬는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빈 컵속의 공기를 빼내는 방법은
첬째, 컵에 랩을 덮어 씌운 후 주사기를 이용하여 강제로 공기를 빼내는 것
둘째, 물을 컵에 부어서 자연적으로 공기가 컵 밖으로 밀려 나가게 하는 것
저 같으면 하나님을 대망하며 하나님의 것들이 제 마음속에 채워지기를 기다립니다.
2007.03.06 13:46:46
無名齋님 , thinkbible 님, 댓글 감사합니다.
<유사한(?) 대목을 읽은 기억> 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혹시 제 글이 표절의 징후가 보이는 것은 아닌지죠?
이제 출판을 앞두고 있는데 양쪽 내용이 - 질문일망정 - 유사하다면, 문제가 있게 되어서 말입니다.
말씀하신 책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지금 읽고 확인할 여유가 없으니
혹시 표절 징후가 다분하다면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출판을 미루더라도 그책을 읽고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댓글의 의도가 표절이니 하는 뜻으로 유사하다는 말을 쓰지 않으신줄 압니다만, 부탁드립니다.
<유사한(?) 대목을 읽은 기억> 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혹시 제 글이 표절의 징후가 보이는 것은 아닌지죠?
이제 출판을 앞두고 있는데 양쪽 내용이 - 질문일망정 - 유사하다면, 문제가 있게 되어서 말입니다.
말씀하신 책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지금 읽고 확인할 여유가 없으니
혹시 표절 징후가 다분하다면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출판을 미루더라도 그책을 읽고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댓글의 의도가 표절이니 하는 뜻으로 유사하다는 말을 쓰지 않으신줄 압니다만, 부탁드립니다.
2007.03.06 20:04:25
목사님 죄송합니다.
목사님의 댓글을 보고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아 매우 송구합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표절」부분입니다.
절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의 글은 처음으로 들어온 목사님사이트에서 맨 처음 읽은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오늘의 글을 대하면서 느낀 저의 생각을 올린 것입니다. 목사님의 글이 책으로 편찬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몰랐습니다. 사전에 알았더라면 전체를 읽고 “유사” 운운 하였을 텐데 「표절」을 생각해 본적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목사님 오늘 제가 댓 글 올린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목사님의 글에서 제가 느낀점은 교회의 발전을 위한 영적 리더쉽의 자세에 있어서의 리더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첫째가 “교회의 조직화”이고 두 번째가 “하나님과의 관계”이었습니다. 물론 이 느낌은 저만의 고유한 느낌이고 목사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주제가 저의 신앙생활 현주소에서 지대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렇게 판단되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위의 주제와 관련하여 제가 읽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라는 소설중의 한 부분이 연상되어져 답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각설하고
목사님 동 소설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성 프랜시스의 생애를 소설화한 책입니다. 프랜시스의 회심과 수도회생활과 죽음에 대하여 소설의 허구성을 이용하여 강조한 책입니다. 따라서 약간의 허구는 존재하지만 그런 허구성조차 프랜시스를 더욱 나타내기 위함 이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인용한 책의 내용인즉, 프랜시스가 수도회를 조직하였을 때 수도회의 방향을 청빈,겸손,사랑,평화 의 주제로 수도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때 다른 한 형제인 엘리야스라는 형제가 수도회의 나아갈 장차 방향에 대하여 수도회의 조직화, 대학의 설립, 부를 통한 구제등과 같은 방법으로 수도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장면에서 프랜시스가 본래의 수도회의 방향대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엘리야스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한 부분입니다.
저는 오늘 목사님의 글을 읽어 나가면서 이 책이 내용이 떠올랐읍니다..
오늘날 교회의 발전을 위한 비젼이 과거의 프랜시스 수도회에서 비슷하게 있었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한쪽은 인본주의적인 판단,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가 옳다고 생각되어집니다. 하여 오늘 목사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본문을 생각하며 글을 올린 것입니다.
정말이지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처음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잠잠히 하나님을 대망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져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님 두서없는 글이지만 제가 어떻게 댓글을 올리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나마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의 글이 이 방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글에서 느겼던 것이 저의 평소의 관심사였기에 주제넘게 저의 생각을 올렸던 것입니다.
제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일면식도 없는 목사님을 당황케 하여 드린 것 정말 목사님께 사과드립니다.
제가 직장에 있어서 집에 있는 책의 역자와 출판사를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다시한번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목사님의 댓글을 보고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아 매우 송구합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표절」부분입니다.
절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의 글은 처음으로 들어온 목사님사이트에서 맨 처음 읽은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오늘의 글을 대하면서 느낀 저의 생각을 올린 것입니다. 목사님의 글이 책으로 편찬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몰랐습니다. 사전에 알았더라면 전체를 읽고 “유사” 운운 하였을 텐데 「표절」을 생각해 본적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목사님 오늘 제가 댓 글 올린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목사님의 글에서 제가 느낀점은 교회의 발전을 위한 영적 리더쉽의 자세에 있어서의 리더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첫째가 “교회의 조직화”이고 두 번째가 “하나님과의 관계”이었습니다. 물론 이 느낌은 저만의 고유한 느낌이고 목사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주제가 저의 신앙생활 현주소에서 지대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렇게 판단되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위의 주제와 관련하여 제가 읽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라는 소설중의 한 부분이 연상되어져 답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각설하고
목사님 동 소설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성 프랜시스의 생애를 소설화한 책입니다. 프랜시스의 회심과 수도회생활과 죽음에 대하여 소설의 허구성을 이용하여 강조한 책입니다. 따라서 약간의 허구는 존재하지만 그런 허구성조차 프랜시스를 더욱 나타내기 위함 이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인용한 책의 내용인즉, 프랜시스가 수도회를 조직하였을 때 수도회의 방향을 청빈,겸손,사랑,평화 의 주제로 수도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때 다른 한 형제인 엘리야스라는 형제가 수도회의 나아갈 장차 방향에 대하여 수도회의 조직화, 대학의 설립, 부를 통한 구제등과 같은 방법으로 수도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장면에서 프랜시스가 본래의 수도회의 방향대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엘리야스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한 부분입니다.
저는 오늘 목사님의 글을 읽어 나가면서 이 책이 내용이 떠올랐읍니다..
오늘날 교회의 발전을 위한 비젼이 과거의 프랜시스 수도회에서 비슷하게 있었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한쪽은 인본주의적인 판단,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가 옳다고 생각되어집니다. 하여 오늘 목사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본문을 생각하며 글을 올린 것입니다.
정말이지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처음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잠잠히 하나님을 대망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져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님 두서없는 글이지만 제가 어떻게 댓글을 올리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나마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의 글이 이 방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글에서 느겼던 것이 저의 평소의 관심사였기에 주제넘게 저의 생각을 올렸던 것입니다.
제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일면식도 없는 목사님을 당황케 하여 드린 것 정말 목사님께 사과드립니다.
제가 직장에 있어서 집에 있는 책의 역자와 출판사를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다시한번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2007.03.06 21:48:05
감사합니다, 답변.
제가 오히려 죄송하고, 긴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의 댓글에서도 밝혔지만 '댓글의 의도가 표절이니 하는 뜻으로 유사하다는 말을 쓰지 않으신줄'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탁을 드린 것이니 이 점, 역시 오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표절한 다른 글들을 비판한 일이 있어 적어도 그부분만은 확실히 해놓고 싶었습니다.
만에 하나, 저도 모르는 가운데 남의 글에서 힌트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거나, 제가 읽지 않았고 또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글과 유사하다거나, 동일한 내용을 담게 되면
그것은 저에게 표절의 책임이 있게 되고, 결국은 제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부탁드릴 것은 혹시라도 저의 글을 읽으시다가 그럴만한 부분이 발견되면
망서리지 마시고 저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도 좋습니다. (seyoh@hotmail.com)
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란 책을 알게 되었군요.
기회를 내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Yes 24 에 가보니 그책 이름은 검색에 나오지 않는군요. 정확한 제목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하고, 긴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의 댓글에서도 밝혔지만 '댓글의 의도가 표절이니 하는 뜻으로 유사하다는 말을 쓰지 않으신줄'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탁을 드린 것이니 이 점, 역시 오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표절한 다른 글들을 비판한 일이 있어 적어도 그부분만은 확실히 해놓고 싶었습니다.
만에 하나, 저도 모르는 가운데 남의 글에서 힌트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거나, 제가 읽지 않았고 또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글과 유사하다거나, 동일한 내용을 담게 되면
그것은 저에게 표절의 책임이 있게 되고, 결국은 제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부탁드릴 것은 혹시라도 저의 글을 읽으시다가 그럴만한 부분이 발견되면
망서리지 마시고 저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도 좋습니다. (seyoh@hotmail.com)
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란 책을 알게 되었군요.
기회를 내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Yes 24 에 가보니 그책 이름은 검색에 나오지 않는군요. 정확한 제목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7.03.06 21:56:21
목사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내일 집에 도착하여 출판사와 역자를 알려드리겠읍니다.
15년전에 읽은 책이라서 지금의 형편은 잘 모르겠읍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내일 집에 도착하여 출판사와 역자를 알려드리겠읍니다.
15년전에 읽은 책이라서 지금의 형편은 잘 모르겠읍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2007.03.07 07:45:06
리더쉽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목적과 야망'을 성취하는 탐욕으로 범람하는 교회공동체에 목사님의 글은 늘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글쓰는 분들은 출판을 곧 잘 잉태와 출산에 비유하시던데, 순풍하십시오. 기대가 됩니다. 기도합니다. 샬롬-
2007.03.07 13:59:34
쓰신 내용으로 추측하기론 <성프란시스> (Saint Francis) 같은데요. 아마도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도 번역/출판이 되었던 모양이네요.
2007.03.07 22:30:40
빈이님, 고맙습니다. 한번 찾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목사님, 댓글 그리고 격려 감사합니다. 지금 또 눈이 오는군요.
여기에서도 정목사님 모시고 <인문학적 성서읽기>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임목사님, 댓글 그리고 격려 감사합니다. 지금 또 눈이 오는군요.
여기에서도 정목사님 모시고 <인문학적 성서읽기>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2007.03.07 23:16:55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말씀드린 책의 출처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 니코스카잔차키스
제목 :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 상,하 2권
역자 : 최성민
출판사 : 도서출판 장원
좋은 하루 되십시요
말씀드린 책의 출처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 니코스카잔차키스
제목 : <완전한 가난을 위하여> 상,하 2권
역자 : 최성민
출판사 : 도서출판 장원
좋은 하루 되십시요
2007.03.08 06:43:13
리더쉽에 관한 목사님의 글은
리더쉽으로 어찌 해 보겠다는 환상을 버리게 하는군요!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리더쉽을 팔지는 말라는.
thinkbible 님 덕분에 좋은 책도 알게 됐군요.
좋은 봄 되시길!
-텍사스에서
리더쉽으로 어찌 해 보겠다는 환상을 버리게 하는군요!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리더쉽을 팔지는 말라는.
thinkbible 님 덕분에 좋은 책도 알게 됐군요.
좋은 봄 되시길!
-텍사스에서
2007.03.08 10:29:38
thinkbible 님, 감사합니다. 일부러 시간내서 찾아서 알려주시니 정말 읽어봐야 겠습니다.
riveroad 님, 정말 리더십은 실체가 없는 환상, 환각속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점점 학신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목을 메고 있으니 안타깝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riveroad 님, 정말 리더십은 실체가 없는 환상, 환각속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점점 학신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목을 메고 있으니 안타깝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2007.03.08 10:56:51
목사님 글 읽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결국 희생, 섬김, 순종, 겸손의 모습이었는데, 리더쉽이라는 단어의 '리더'란 말 자체를 아무리 기독교적으로 해석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참 모습과 괴리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리더'라는, 그 지도자라는 단어에 사람들의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투사한다고나 할까요? 교회에서 아무리 참 되고 바른 리더쉽의 가치를 이야기 한하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리더'라는 말에서 세상적인 시각에서 남보다 앞서 간자, 성공한 자, 승리한 자를 연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리더라는 말 자체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까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책 열심히 '능동적'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리더라는 말 자체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까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책 열심히 '능동적'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 생각에,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솔직하게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들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습니다.
무술에서,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 제대로 주먹을 쓸 수 없다 하던데요.
안식을 주는 참된 만남에 초대받았는데도, 그 보물의 값어치를 거꾸로 셈하고들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