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30)
제발, 그들이 한치 앞이라도 제대로 보기를…  

리더의 자질 중에 ‘미래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 리더십 주창자들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여덟 가지 축복 중 하나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 시대를 본募?것이고, 미래를 본다는 것이며, 탁월한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비전을 보는 것은 리더십에 있어서 필수 요건인데, 이것을 가지려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여기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이 시대를 본다는 것’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별개로 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 ‘미래를 보는 것’을 리더십 주창자들은 리더십의 필수요건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어느 누구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리더는 앞서가는 비전과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리더들을 기르고 키우는 리더십 주창자들은 과연 그러한 안목을 가지고 있을까?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리더십 이론이 전파되면 교회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안목을 한번 검증해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리더십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리더십 이론은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리더들이 과연 리더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리더십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들은 궁금하지도 않는가? 그들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지금쯤 무언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야 할 것인데, 그대신 목회현장에서 한숨 소리가 진동하고 있으니 문제다.    

지금까지 많은 리더십 책들이 나왔지만 리더십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은 거의 없다. 아마 양형주 목사의 <청년 리더 사역 핵심 파일>과 이상수 목사의 <교회성장 남성 리더십으로 승부하라>가 유이(唯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책들도 순수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저술된 책은 아니다. 리더십 이론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문제점들이 노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공론화 시켰다는 점만으로도 그 책들의 가치는 훌륭하다.  

그 둘이 말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은, 리더를 길러내면 “교회 안에서 리더들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남성 리더십, 68)

자, 이제 그러한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청년들을 현장에서 지도하는 양형주 목사는 리더와 관련하여 생기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먼저 ‘리더’라는 말이 만들어 내는 문제점이다.
<청년사역을 하다 보면 의외로 많은 청년들의 생각 속에 리더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직분을 마치 무슨 계급처럼 생각한다.>(15쪽)

이것은 달리 그런 게 아니다. 바로 리더십 주창자들이 리더라는 말을 그렇게 자리매김해 놓았으니 그렇다. 아니 원래 계급적인 의미가 그 말 속에 들어 있어서 ‘리더’라는 말을 빌려온 것이 아닌가? 리더라는 말이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고, 그리고 ‘앞선 자’, ‘똑똑한 자’ 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 용어를 차용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 와서 리더라는 말을 계급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애꿎은 청년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 책임은 그들에게 돌릴 일이 아니라 리더라는 말을 차용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리더십 주창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양목사는 청년들을 나무라며, 리더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부리더보다 리더가 높고 소그룹 리더보다 중그룹 리더가 높은 것은 아니다. 청년 리더는 리더로 섬기기 전에 리더란 누구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15쪽)

그는 ‘리더’와 ‘부리더’로 리더를 계층화 하여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리더의 개념이 ‘직위’로 자리매김을 한 경우이다. 이때의 ‘리더’와 ‘부리더’는 리더십의 영역에서 벗어나 조직의 이론으로 다스려야 할 부분이다. 어떤 부서의 장(長)이 있으면 그 밑에 vice(副)가 있듯이 리더도 이제 그 밑에 부(副)리더가 생겼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부리더’라는 희한한 직책명을 누가 먼저 만들어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사장 밑에 부사장이 있고 사령관 밑에 부사령관이 위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리더’가 ‘리더’ 아래 있다는 것쯤은 다 알 게 아니겠는가? 애초에 직책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부르지 말아야지, 그렇게 직책 이름을 부르고 또 그렇게 임무를 맡기면서 ‘부리더’ 보다 ‘리더’가 높은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는 것은 우스운 노릇이다.

양목사는 그 말에 이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종종 왜곡된 리더상을 가진 리더는 관계에 갈등을 일으킨다.>(15쪽)  

관계에 갈등을 야기하는 리더는 왜곡된 리더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리더들에게 왜곡된 리더상을 심어주었을까? 그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 이런 계급적인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15쪽)

맞는 말이다.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는 팁貪沮層?계급에 대한 그러한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 한다.
이것은 웬만한 리더십 주창자들도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 오늘날 우리는 서로 리더가 되려고 하고, 아이들에게도 “다음 시대를 책임지는 리더가 되라” 고 아우성이다. 그것은 리더를 역할에 대한 인식이 아닌 신분 상승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홍, 칼과 칼집,107쪽)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요즈음 리더십이 전성시대를 구가하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는가? 우리국민들에게 그런 계급에 대한 의식구조가 있음을 기화로 하여 리더십 이론이 활발하게 도입되었고, 교인들에게 리더가 되라고 부추겨 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온 것이 바로 리더십 주창자들인데 이제 와서는 개인의 의식구조를 들먹이며 리더가 왜곡된 리더상을 가졌기에, 갈등을 일으킨다고 진단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너무 무책임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양목사는 진단을 계속한다.
<한국교회의 청년 대학부에서 ‘리더’라고 하면 보통 소그룹 성경공부 리더를 떠올린다. 그러나 임원이라고 불리는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또한 리더이다. 많은 교회들이 임원단과 소그룹 리더 제도를 사용하고 있는데, ‘누가 위냐’라는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다. 임원과 리더라는 명칭 또한 이런 갈등에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 리더 사역 핵심 파일, 10쪽)

그는 ‘임원과 리더라는 명칭 또한 이런 갈등에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말로 그 문제점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실토하고 있다. 리더라는 이름이 그러한 갈등에 일조하고 있음을.

이런 결과는, 교인(청년)에게 리더가 되라고 강조하던 때부터 예견되어 온 것이다. 맨 처음에는 리더를 따라가는 것이 배울 것도 있고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웬만큼 알고 조직내 업무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기도 리더들처럼 되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 (참고로 여기에서 ’경마’는 말을 경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의 고삐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일정 기간이 지나고 훈련이 끝나면 지금까지 팔로워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리더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리더가 되었으면 리더에 걸 맞는 행동과 역할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떤 리더라도 – 일찍 리더가 된 사람이든, 늦게 된 사람이든 - 당연히 조직 내에서 리더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 웬만큼 업무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기가 배웠던 리더에게서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 같으면 저렇게 하지 않을 터인데,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리더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다.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노자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은 똑똑하고 유식하고 현명한 것을 세상이 높이 사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똑똑하고 아는 것을 서로 재고 경쟁해서 보다 잘난 사람이 위로 가는 게 이 세상 이치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경쟁과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 받들지 않아야만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된다고 노자는 말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란 존재를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정의해 놓았으니 누군들 리더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리더가 되기 위해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리더로 인하여 생기는 갈등은 한국교회에서 어쩌다 생기는 희귀한 케이스가 아니라 다반사로 일어나는 문제가 되었다. 모두 다 리더가 되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리더십주창자들의 성경 해석에서 배태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는 욕망이 잘못이라고 책망하시지 않으셨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열망은 지극히 좋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성서적이다. 주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식으로 크고자 하는 마음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며, 얼마든지 크고 으뜸이 되라고 가르쳤으니 리더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갈등이 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한 목회자가 아니다. 양형주 목사가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사역하는 양목사는 그렇게 리더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하며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책으로 엮어 내었다. 리더가 가져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여과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가 쓴 책의 가치가 있다.

리더십 주창자들은 그저 일반 리더십에서 나오는 이론들을 적당히 배합하여 영적 리더십이라고 재가공하여 이론화 시켜 주장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강의와 책 저술로 명성도 얻고, 또한 실리도 챙긴다. 그렇지만 그들이 부르짖는 리더십 이론은 교회 현장에 적용되면서 문제점들을 낳게 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은 고스란히 현장 목회자들의 몫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는 말이 있는데, 필자는 이게 안타까운 것이다.
자, 이런 문제점들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좀 더 양목사의 뒤를 따라가며 살펴보도록 하자.

양형주 목사는 먼저 그 문제를 시스템 측면에서 접근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풀어가고 있다.
<성경의 지혜를 빌어 소그룹을 인도하는 리더를 ‘목양리더’, 행정을 담당하는 임원은 ‘행정리더’ 라고 칭했다.>(10쪽)

그런 해결방법을 성경에서 가져 왔다고 양목사는 말하고 있으나, 그런 방법은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목양 리더와 행정리더 사이에도 얼마든지 갈등은 일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양목사는 갈등의 유형을 진단하면서 행정리더와 목양리더의 갈등을 예로 들고 있다. (36쪽)  

그 다음으로, 양목사가 생각하는 갈등 해소방법은 운영 측면에서 접근하는 방법이다. 갈등의 유형을 분류한 다음에 그 유형에 맞추어 갈등해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행정 리더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목양 리더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행정 리더와 목양 리더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교역자와 리더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등으로 분류하여 각각 갈등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소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갈등 원인과 해소 방법 등은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없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써서라도 양목사가 고민하며 풀어보려는 그 심정은 이해가 된다. 오죽했으면 그런 방법들을 만들었을까?

그러나 그런 방법들은 일시적이고 미봉책에 불과하다. 리더십이 적용되는 현장에서 그런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양목사 같은 목회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끝없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한발을 겨우 빼면 다시 한발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과 흡사하다.

똑똑하고 현명한 ‘리더’들을 세워놓으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고 노자가 몇 천년 전에 갈파한 간단한 이치조차 모를뿐더러 이렇듯, 리더십 주창자들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리더십 이론이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한치 앞을 바라보는 안목만 있었더라면 그들의 리더십 이론은 지금 모습을 달리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리더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라고 주장하는 리더십 주창자들에게 부탁하노니, 멀리 미래까지 내다 볼 필요는 없으니, 제발 한치 앞이라도 제대로 보아주기를 바란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15:14) 는 말씀을 떠올리지 않도록 말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