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31)
- 몇몇 리더님들의 기분은 안녕하십니까?    

리더십 주창자들 바라고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 교회의 모든 성도가 리더가 되라는 그들의 말에 고무되어 열심히 노력하여 모두 리더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 내에 많은 리더가 생기게 되고, 또 앞으로도 리더가 만들어 지는 것이 그들이 꿈속에서도 그리는 소원이다. “리더는 만들어진다.”는 그들의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그들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또 현실을 살펴보면,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져 교회 내의 모든 성도가 ‘리더’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여기 필자가 궁금해 하는 것을 조금은 풀어줄 힌트가 있다. 이상수 목사가 쓴 책 <교회성장 남성 리더십을 승부하라>에서 그 단서가 보인다.

그렇게 교회안의 성도가 모두 리더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리더 적체’ 현상이 생긴다. 이상수 목사는 그의 책 에서 리더적체가 생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배우기 위해 따르던 성도’가 어느 정도 배우게 되면 자신의 의견을 내게 된다. 그 때부터 ‘배움을 주던 리더’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리더 적체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60)

물론 이 현상은 대형교회에 국한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교회에 리더가 많이 만들어져 리더 적체 현상이라고 까지 할 정도로 리더가 많이 있다니 행복한 비명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적체될 정도로 리더들이 많이 있으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리더의 자질과 품성을 가진 리더들이 모였으니 교회에는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일을 사심없이 논의하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면서- 그들의 표현대로 ‘섬기면서’- 그러는 가운데 교회는 더욱 더 부흥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널리 전해지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날까?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이 모인 사회에서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상수 목사의 설명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보자. 어느 담임목회자는 대표기도자가 강단위로 올라가 설교강대상에서 기도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다. 교회의 중대한 방향 전환이 아닌 사항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항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고 – 아니 이것은 가상의 일인지도 모른다 - 이목사는 말한다.  

<하지만 최고리더는 “담임목사님만이 가실 수 있는 성스러운 강단위로 어떻게 평신도가 올라갈 수 있느냐?”하며 반발했다.>

결국 문제가 생긴 것이다. 교회내 최고리더가 담임목회자의 이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것이다. 잠깐, 여기에서 최고리더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리더에도 최고가 있고 안 최고가 있는가? 생각해보라,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되었으니 자연 리더중에서도 구분이 필요하게 될 것은 정한 이치다. 이게 바로 모든 성도들을 리더가 되라고 부추긴 리더십 주창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또 하나의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리더라는 말에 계층을 나타내는 말을 붙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리더라는 말 앞에 다시 무언가를 붙여 그냥 리더와는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더가 하도 많으니 이제는 리더에도 종류가 있게 된 것이다. “최고 리더”, “톱 리더”, “핵심 리더” 등등 어떻게 그것들을 구분하는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이름을 잘도 만들어 붙인다. 그런 노력들이 가상할 정도이다. 리더십 주창자들이 말하는 ‘최고리더’라 함은 담임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중에서 장로를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다른 리더들은 담임목회자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그 최고리더인 장로 혼자만이 왜 유독 반대하면서 못하게 할까? 그 리더의 마음을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궁금하기는 이목사도,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리더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자.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정으로 담임목회자를 존경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리더들은 담임목회자의 의견에 순종하여 동의하는데 왜 혼자만이 유독 반대하면서 못하게 할까? 여기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담임목회자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설교강대상에 담임 목회자만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명분이고 실상은 다른 생각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첫째, 사실은 최고 리더 또한 마음속으로는 좋은 의견이라고 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과정에서 자신이 관여하지 못한 소외감이 무조건 거부하는 마음으로 변질될 수 있다. 따라서 반대하는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담임목회자가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에게 미리 와서 정중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자기의 의견을 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기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공론화시켜 버렸으니, 결국은 자기를 특별 대우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자, 그러면 생각해보자. 그런 것이 최고리더로서 마음이 상할 노릇인가? 리더의 품성 중에 어떤 것이 있는가? 아니, 굳이 리더의 성품을 운위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섬김’이란 과연 무엇인가? 서번트 리더십이 과연 무엇인가?
그렇게 고상하고 우아한 개념은 뒷전에 제쳐두고,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않으니, 그것에 마음이 상한 것이 아닌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주장대로 되지 않으니, 결국 딴지를 걸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바로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리더의 모습이다.

<둘째, 강대상에서 기도를 드리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기도순서자인 모든 리더들이 동일하게 배려받게 된다.  따라서 이제까지 교회서열을 따라 최고리더의 위치에 있는 자기의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성 발언일 수 있다. 장로 피택 선거 시 득표순위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를 보면 공감할 것이다. >(57-58)
  
자, 이렇게 최고리더가 담임목회자가 자기에게 미리 상의하지 않았다고 목회자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사건에 공감할 것이다. 다들 경험들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목사는 다음과 같은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간단하다. “ 첫걸음을 내딛기 전에 반드시 최고리더들과 사전 조율하라”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최고리더의 서운한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최고리더와  일대일로 식사를 하는 것이다.” (119)

최고리더와 일대일로 식사를 하되 ‘그렇게 서운하셨어요’,라고 하면서 마음을 다독거려 주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러니 담임목회자가 교회의 본질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항인 ‘예배시에 대표기도를 어디에서 하는 것이 좋은가’ 라는 사항을 가지고 교회 내에서 최고리더라는 리더들과 일대일로 만나서 일일이 의견을 구하여야 하며 그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그런데 실상, 여기에서 ‘최고 리더’가 누구인가를 가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최고리더라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 생각에 최고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는 리더까지 다 포함시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제외하고 일을 추진하다가는 목회자의 생명이 위태롭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다. 그런 사전 조율단계를 마쳤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이번에는 최고리더보다는 약간 서열이 밑인 중간 리더들과 협의를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또 같은 일이 벌어진다. 물론, 이때 협의 순서가 어긋나서는 안 된다. 한치라도 서열이 높은 리더에게 먼저 선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리더십 주창자들이 만들어 놓은 ‘리더’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이다. 어떤가? 목회자라는 사실이 처량하지 않은가? 전해야 할 복음을 들고 나가 비신자들을 일대일로 만나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시간의 대부분을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일대일로 최고리더를 만나 그들의 비위를 긁지 않기 위해, 몇몇 리더들의 기분이 안녕한지를 체크하기 위하여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십 주창자들이 만들어 놓은 리더가 많이 있는 교회에서 영적 리더된 목회자의 수첩에는 최고리더와의 식사 약속 시간이 빼곡하게 적혀 있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리더십 주창자들이 만들어 놓은 ‘리더’들이 벌이고 있는 한판의 잔치자리이다. 리더십 주창자들은 이런 식사시간이 즐겁겠지만 막상 당하는 목회자들은 참 고역스런 자리일 것이다.

참, 깜빡 할 뻔 했다. 이상과 같이 문제되는 리더는 교회 내에 극히 일부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나 사고치고 신문에 나는 것은 언제나 소수가 아니던가? 필자 말인즉, 이러한 상황이 교회 내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리더십 주창자는 알고 있으라는 말이다, 제발 부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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