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36)
- 영적 리더십의 주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필자가 맨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에 품었던 생각은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글의 제목도 그렇게 잡았다. 그렇다면, 그 영적 리더십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물론 리더십 주창자들은 필자의 생각에 반대하겠지만, 영적 리더십은 사람이 아닌 오직 성령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며 사람에게 성공을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서 ‘영적 리더십’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 원천인 성령님께 돌려 드려 성령님이 교회에 대한 주권적 역사를 인간을 매개로 하여 펼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리더십의 회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은 영적 리더십의 주체적 행사자가 아닌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역사를 매개하는 도구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영적 리더십의 회복’이란 변질되고 이지러진 현재의 영적 리더십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에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가짜 주인인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해 오던 영적 리더십을 진짜 주인인 성령님에게 행사권한을 돌려 드리자는 차원에서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다른 분들이 쓴 리더십 책을 읽어 오고 있었다. 처음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영적 리더십이 성령님에게 속한다는 생각은 필자만의 독창적이고 유일한 생각인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런 필자의 생각은 오산임이 드러났다. 상당수의 많은 리더십 주창자들이 영적 리더십에 있어 성령님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은 좀 미지근하게 성령님의 개입을 언급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더 강력하게 성령님이 영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주체임을 밝혀 놓고 있었다. 그래서 영적 리더십 행사에 있어 성령님의 개입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밝힌 바와 같이 영적 리더십의 다른 부분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하는 분들도, 또 그들간에 다른 주장을 가지고 있는 분조차도 그 부분에 한해서만은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지 필자가 너무 기쁠 정도였다.

그래서 리더십을 영향력이라 정의하여, 리더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쳐서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대 전제하에 리더십을 주장하는 분들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기할 정도이다.

<궁극적으로 영적 리더는 사람들 안에 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없되, 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블랙커비, 36)
<리더는 사람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 성령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명임을 시종  인식해야 한다. >(불랙커비, 36-37)

그렇게 말한 블랙커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말을 하는 분도 있다. 김광건 교수가 그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리더십이란 것은 매우 복잡하다. 사실 이런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어떤가? 김교수도 실토하지 않는가? 리더십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도 더 들어 보자. 아주 확실하게 하자는 의미에서.  

<그 미션 자체가, 죄성 있는 공동체의 일을 죄인인 리더가 가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야 되니 이것이 어찌 평범한 임무란 말인가. 마귀의 공격도 많고 사람들도 제 각각이고, 또 시대가 변하고 사회, 가치관이변하고 여러 능력이  요구되고,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또한 그뿐 아니라 낮춰야 하고, 격려하고 싸매고 때로는 정말 이적도 일으켜야만 한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직까지도 긴가 민가인가? 그렇다면, 좀더 들어보자.
< ……인간이 노력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김광건, 154-155)

그렇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영향력이 강한 리더라 해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의 영역 밖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필자의 주자에 동의하는 듯 불랙커비는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궁극적으로 영적 리더십은 성령의 사역 결과다.> (331)

이 정도 말을 들었으면,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이 있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님이 주시고 성령님이 행사하시는 영적 리더십을 다만 흘려 보내는 통로에 불과하며, 도구에 불과한 사람이 자기 것 인양 행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빌 하이벨스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 30년 동안의 나의 리더십을 돌아보면, 나를 현명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결정이 내 통찰력이나 내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성령님의 자비로운 인도에 따른 것이다.> (리더십의 용기, 196)

<수년동안 수백명의 크리스천 리더가 내게 소명에 관해 질문했다. “내가 올바른 곳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새로운 도전으로 나를 부르시는 겁니까? 이런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범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왜 나에게 묻습니까? 그것은 성령께 해야 할 질문입니다. 성령님 앞에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 (257)

이렇게 다른 사람에 줄 모범적인 답안을 알고 있는 빌 하이벨스가 자신의 경우에는 모범답안을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스왈드 샌더스도 다음과 같은 명쾌한 답변을 마련해 놓고 있다.
<요컨대, 영적 지도력이란 성령의 사역이며 하나님 한 분만이 수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지도력,24)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영적 리더십이란 분명히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인 리더가 하고 있다고 감히 주장하는 그 담대함은 어디서 온 용기인가? 그게 용기있는 리더십인가?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정용섭 목사는 아주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변화에 앞서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만남이 우선하며, 삶의 변화는 목사의 능력이나 영역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273)

이렇게 사람이 변화하는 원리를 무시한 채 어떤 리더가, 목회자가 영적 리더십을 주장하며 그 영향력으로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영적 리더십을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킨다는 발상도 잘못된 것이다. 영적 리더십의 주체가 성령님이 아니라면 인간이 보기에 교회가 성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백사장에 쌓아 올린 모래성에 불과할 것이다. 백보 양보해서 그렇게 리더가 애쓰고 수고해서 교회가 성장했다고 하자, 이럴 때 그 리더가 가진 영적 리더십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분석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을 가지고 사람인 리더가 그 영광을 가로채고 있는 것이니, 이 어찌 무서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필자가 펼쳤던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직 문제는 남아있다. 바로 성령님을 영적 리더십의 실체적인 행사 주체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필자야말로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주장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도 필자가 굳이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 다음과 같은 발언이 이미 리더십 주창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 발언의 주체는 명성훈 목사이다. 그는 성령 하나님을 지도자로 인식하는 것이 전혀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을 지도자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생활과 교회 성장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 흔히 지도자 하면 목사나 장로와 같은 인간 지도자만을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성령을 그들의 진정한 지도자로 생각하고 모든 삶과 체험에서 최우선 자리에 모셔 들였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리적으로 초대교회는 성령을 신적 인격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리더십 마스터 키, 111)  

과연 성령님을 영적 리더십의 실체적인 행사 주체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을까, 하는 필자의 걱정을 말 한마디로 싹 씻어준 명목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초대교회는 성령을 신적 인격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그랬으면 현재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도 미심쩍은 분이 있을 것이니 몇 마디 더 인용해보자.

<성령과의 동행 및 동역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이론이 아니라 삶의 실체였던 것이다.> (111)
<초대교회와 사도행전을 연구해보면 성령의 신적 리더십에 대하여 세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성령은 교회 일의 감독자요, 전도와 선교의 동인자(動因者)요. 그리고 교회 회의의 결정자로 그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11)

이정도 말을 듣고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사도행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이 된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 명목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금도 동일하게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의 궁극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110)  

명목사와 필자는 이점에 있어 완벽한 의견의 일치를 이룬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는 기쁨은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즉 영적 리더십이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꾸중을 명목사가 하는 것도 필자가 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다.  

<반면 현대의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성령의 지도력과 감독하시는 역사를 무시하고 있다. 우리의 사역은 너무도 많은 경우에 인간중심, 기술 중심, 프로그램 중심이 되고 있다. 교회사역에 성령을 총감독으로 모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의 감독을 실제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갱신운동이 필요하다. 우리의 교회가 성정하기 위해서 교회 성장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성령지도자에게 더욱 더 마음을 열고 순종해야 한다. 성령은 교회의 창시자요, 또한 궁극적인 관리자이다.> (112)

어떤가? 꾸중하는 자세도 당당할뿐더러, 그 내용도 어디 한마디 그른 데가 있는가? 성령의 지도력과 감독하시는 역사를 무시하는 리더십 주창자들은 명목사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결론적으로, 영적 리더십은 결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만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명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그의 말을 마친다.
<성령이여! 우리와 우리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시옵소서.> (114)

필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서 명목사로 하여금 그의 책을 여기까지만 쓰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성령님을 우리와 한국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로 모시고자 하는 갈망과 열망이 그의 가슴속에 넘치는 그 순간, <리더십 마스터 키>라는 책이 114쪽에 이르렀을 때에, 시간이 딱, 하고 멈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그가 그 다음 다시 원래의 원기를 회복하여 무려 200여 쪽을 할애하며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영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러나 그런 필자의 바람은 부질없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 리더십에 대한 성령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만천하에 공포하였으면서도 영적 리더십 주창자들은 태도를 바로 돌변하여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계속한다. 그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한편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다음에 다른 한 페이지를 펼치면 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명목사는 이렇게 자가 진단하고 있다.
<오늘날 여차하면 회의도중 언성을 높이고 인간적 자존심과 자리다툼 때문에 교단과 교회가 분열되고 논쟁이 그치지 않는 현실을 갱신하는 길은 오직 성령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높여 드리는 일이다.> (13-114)

그 이유를 명목사는 ‘인간적 자존심’과 ‘자리다툼’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성령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며, 서로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 것이다. 서로 서로 리더라고 추겨주며 이 자리 저 자리 돌려가며 앉아 ‘리더’의 위세를 즐기다가도, 어느 순간 자기의 자리가 남보다 낮다고 느끼는 그 순간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 3)라는 말씀은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자기가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서로 상투를 잡고 싸우는 것이다.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순교할 각오라며 삭발을 단행하는 리더들은 -- 아니, 잠깐만 ...생각을 달리 ...해보자 ....좋은 의미로 -- 그것을 염두에 두고 서로 상투를 잡지 못하도록 아예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것이 혹 아닐까? 그렇게 해서라도 서로 싸우지 말자고 결단하여 내린 고육지책인지도 모르겠다. 또하나 가능성있는 해석은 그들이 바쁜 탓에 혹시 성경 이해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CEO 형 목회자가 되어 바쁘게 뛰어다니니 성경을 제대로 묵상할 시간이나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빌립보서 2장 3절의 말씀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생각 할 여지없이 ‘남을 낮게 여기’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인간적 자존심’과 ‘자리다툼’ 때문에 바쁘게 뛰어 다니는 ‘현실’을 순교할 각오라는 말로 호도하는 ‘현실’을 갱신하는 길은 명목사가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오직 성령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높여 드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필자의 주장을 그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을 것이다. 블랙커비는 ‘영적 리더십의 주인은 성령님이십니다’ 라고 외치는 필자의 수고가 당분간 헛될 것임을 예견했음인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은 성령이 하실 일이다.” (블랙커비, 100)
성령님은 차분히, 천천히 일을 진행해 나가실 것이기에, 앞으로도 영적 리더십이 사람에게 있다는 주장이 수십 몇 년간 대세를 이루며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오직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그래도, 명목사가 외친 다음과 같은 구호를 그와 함께 크게 외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가  너무 너무 인간적이라 그런가?
<성령이여! 우리와 우리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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