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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5) – 이삭을 ‘언제(까지)’ 번제로 바쳐야 했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성경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그렇습니다. 태초에, 또 그리고 빛을 만드신 날 .. 이는 첫째 날이라….등등.
또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과 2절에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장 1절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
여기 1절과 2절 사이에는 13개월의 시간이 아니라, 모세에게는 형 아론도 있고 누나 미리암도 있으니 적어도 3-4년의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성경에서는 일일이 밝혀놓았습니다. 뭐, 그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읽다 보니 허전한게 느껴집니다. 2절에도 뭔가 빠졌고 그리고 2절과 3절 사이에도 무언가 빠져 있는 기분이 드는 겁니다. 물론 그 빠진 것을 찾아내지 않아도,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은혜로운 해석이 가능하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바로 - 비록 우리 성경에 그런 말이 없지만 - 그 명령을 준행하였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여러모로 성경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한글성경이 조금 긴장감이 없게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은 아주 박진감이 넘치는 사건인데, 시작에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다른 게 아니라 ‘시간개념을 나타내는 말’이 거기서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 본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17장 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하는 식으로 시간을 분명히 나타냈는데(On that
very day) 본문 2절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까지) 이삭을 바치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것뿐입니다. 여기에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는 보이지 않지요.
사건에 시간개념이 들어가서 그 ‘시간’이 사건에서 작용하는 게 드러나야 되는데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없으니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나타내 주는 말이 명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 명령이 조금 루즈하게 들립니다.
언제까지 이삭을 바쳐야 되는 거야? 아무 때나 아브라함이 편할 때 바치면 되나? 그리고 3절에 나오는 ‘아침’이 다음날 아침인지, 아니면 시간이 많이 흘러 이삭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난 다음날인지를 모릅니다. (물론, 그 다음 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두번째 가정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나지만)
이런 의문점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사장이 비서에게 말합니다. “김비서! 할 일이 있는데, 내방으로 오게!!”
자, 이런 경우에 김비서는 언제 사장실에 가서 사장이 지시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객관식입니다.
1번, 김비서가 시간이 나면, 예컨대 사흘 후,
2번, 김비서가 사장이 맘에 들어 그 일을 하고 싶은 맘이 생길 때, 예컨대 이틀 뒤,
3번, 지금 즉시.
3 번이 맞습니다. ‘지금 즉시’이지요. 김비서는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사장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이 경우 김비서가 사장의 말에 시간부사가 빠진 것을 느끼고 사장님에게 ‘언제 들어갈까요?’ 하고 물어본다면
눈치 없는 비서로 찍힐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습관에 의하면 한번의 동작으로 그 일이 끝나는 일-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 에 대하여 시간을 나타나는 부사가 붙지 않는다면 그 일은 ‘바로 즉시’ 하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여러분의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손에 흙을 잔뜩 묻혀가지고 집에 들어왔어요.
방에 들어오는 즉시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이 그게 뭐냐? 가서 씻어라!”
이런 말을 들은 아이는 언제 손을 씻어야 합니까? 이 명령에 대한 실행은 한번으로 끝나니 바로 해야 됩니다.
그 다음 씻고 나오는 아이에게는 뭐라 합니까? “깨끗이 하고 다녀라”
이 명령은 한번으로 그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 바로가 아니라 나중에 해야 하고 또한 이는 계속적으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조금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입시켜 보겠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이것은 분명히 한번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즉시, 지금> 이라는 시간적 부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22장 2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네 아들 이삭을 지금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저는 우리 언어습관을 기본으로 하여 본문에 대하여 해석을 하였는데, 그럼 그 해석이 맞는지를 영어성경 번역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NIV “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region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I will tell you about.”
NKJV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of which I shall tell you.”
NASB “ Take now your son,”
NKJV 와 NASB 은 모두 now를 집어 넣어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3절입니다. 2절에 나우(now) 라는 말을 집어 넣지 않은 뉴 인터내셔날 버전(NIV)에는 early the next morning 라고 되어 있어 그 나우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시간적 개념을 보완해 주고 있고, 나우라는 말을 넣은 킹제임스 버전(NKJV)에서는 3절을 평이하게 early in the morning 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이 2절과 3절을 시간개념을 집어 넣어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 우리 성경에 의하면 시간개념이 2절과 3절 두 문장에 들어 있지를 않아 그냥 각자 알아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문장으로는 불분명하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아브라함이 바로 순종을 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탈피하여 우리 말 용법과 영어성경을 참작해서 그렇게 '지금'이란 말을 넣어 해석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개념을 넣어 해석을 하니, 문장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명시하는 말이 나오면 자연히 그 다음 언제 그 일을 하기 시작하는지 궁금하게 됩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주게 됩니다. ’지금, 즉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과연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나, 하는데 관심의 초점이 모여진다는 말입니다.
당장, 지금이라는 말이 2절의 말씀에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러면 3절의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의 아침은 당연히 그 다음날 아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 또한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
그렇게 시간개념을 집어넣으면 아브라함의 행동 하나하나에 더욱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삭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니, 그 말씀을 준행하려고 아브라함의 행동이 얼마나 민첩했을까? 아울러 그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을까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마음가짐은 4절로 이어집니다. “제3일에 아브라함이 멀리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산은 모리아 산입니다. 3일째 되는 날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눈을 들어 그 산을 바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발해서 3일째 되는 날이니 꼬박 이틀간을 그 산을 향해 걸어간 것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도착했다 가정하고, 이틀 동안에 얼마나 걸었나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출발한 곳은 브엘세바입니다. 도착지인 모리아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 바로 이삭을 바치려 했던 그 곳입니다. 거리를 재보니,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90킬로입니다. 이틀 걸렸으니 하루에 45킬로를 가야 합니다. 하루에 45킬로를 가려면, 사람이 한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약 4킬로이니 꼬박 11시간을 걸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도착하였다면, 가는 길이 이틀 반이고, 하루에 36킬로를 가야 하니 이틀은 9시간을 꼬박 걸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제3일에는 새벽부터 5시간을 걸어 겨우 그 산에 도착하여, 그곳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100세가 넘었습니다. 이삭을 낳은 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입니다.
(창 21: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그러니 그때 아브라함은 이미 110세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노새를 (한 마리) 데리고 갔지만, 짐을 실어 가기 위한 것이지 사람이 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길을 재촉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그 산까지 가는 동안 일체 한눈을 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도저히 딴눈을 팔지 못할 시간입니다. 주변에 경치를 바라보거나 조금 일정을 늦추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부지런히 모리아산으로 가는 방향을 잡고는 그 방향대로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길을 줄여 그 산에 이르러서야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삭을 바치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없을까 하는 꾀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발걸음을 재촉하여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바로 산으로 올라갑니다. 단을 쌓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 일의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12절, 사자가 가로사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일지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c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lonely son.” )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 이제야 !!! 이제야 !!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벼락치는 말씀입니까?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러서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순종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이제야 …..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제야’ 라는 말이 now 입니다.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바로 즉시,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려고 그 힘들고 어려운 삼일 길을 걸어 산에 올라 이삭의 목에 칼을 대자, 다시 now를 사용하시어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이라고 칭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까운 아들을 아낌없이, 하나님이 바치라니 그날로 즉시, 바로 다른 군소리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고 나선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로, 당장’ 번제로 바치기 위해 길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억할 단어는 나우(now )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지금, 나우(NOW)’ 하면서 나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나우(NOW I know that ..)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지금, 나우(NOW) 하고 나서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경외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성경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그렇습니다. 태초에, 또 그리고 빛을 만드신 날 .. 이는 첫째 날이라….등등.
또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과 2절에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장 1절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
여기 1절과 2절 사이에는 13개월의 시간이 아니라, 모세에게는 형 아론도 있고 누나 미리암도 있으니 적어도 3-4년의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성경에서는 일일이 밝혀놓았습니다. 뭐, 그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읽다 보니 허전한게 느껴집니다. 2절에도 뭔가 빠졌고 그리고 2절과 3절 사이에도 무언가 빠져 있는 기분이 드는 겁니다. 물론 그 빠진 것을 찾아내지 않아도,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은혜로운 해석이 가능하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바로 - 비록 우리 성경에 그런 말이 없지만 - 그 명령을 준행하였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여러모로 성경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한글성경이 조금 긴장감이 없게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은 아주 박진감이 넘치는 사건인데, 시작에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다른 게 아니라 ‘시간개념을 나타내는 말’이 거기서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 본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17장 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하는 식으로 시간을 분명히 나타냈는데(On that
very day) 본문 2절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까지) 이삭을 바치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것뿐입니다. 여기에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는 보이지 않지요.
사건에 시간개념이 들어가서 그 ‘시간’이 사건에서 작용하는 게 드러나야 되는데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없으니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나타내 주는 말이 명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 명령이 조금 루즈하게 들립니다.
언제까지 이삭을 바쳐야 되는 거야? 아무 때나 아브라함이 편할 때 바치면 되나? 그리고 3절에 나오는 ‘아침’이 다음날 아침인지, 아니면 시간이 많이 흘러 이삭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난 다음날인지를 모릅니다. (물론, 그 다음 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두번째 가정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나지만)
이런 의문점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사장이 비서에게 말합니다. “김비서! 할 일이 있는데, 내방으로 오게!!”
자, 이런 경우에 김비서는 언제 사장실에 가서 사장이 지시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객관식입니다.
1번, 김비서가 시간이 나면, 예컨대 사흘 후,
2번, 김비서가 사장이 맘에 들어 그 일을 하고 싶은 맘이 생길 때, 예컨대 이틀 뒤,
3번, 지금 즉시.
3 번이 맞습니다. ‘지금 즉시’이지요. 김비서는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사장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이 경우 김비서가 사장의 말에 시간부사가 빠진 것을 느끼고 사장님에게 ‘언제 들어갈까요?’ 하고 물어본다면
눈치 없는 비서로 찍힐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습관에 의하면 한번의 동작으로 그 일이 끝나는 일-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 에 대하여 시간을 나타나는 부사가 붙지 않는다면 그 일은 ‘바로 즉시’ 하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여러분의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손에 흙을 잔뜩 묻혀가지고 집에 들어왔어요.
방에 들어오는 즉시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이 그게 뭐냐? 가서 씻어라!”
이런 말을 들은 아이는 언제 손을 씻어야 합니까? 이 명령에 대한 실행은 한번으로 끝나니 바로 해야 됩니다.
그 다음 씻고 나오는 아이에게는 뭐라 합니까? “깨끗이 하고 다녀라”
이 명령은 한번으로 그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 바로가 아니라 나중에 해야 하고 또한 이는 계속적으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조금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입시켜 보겠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이것은 분명히 한번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즉시, 지금> 이라는 시간적 부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22장 2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네 아들 이삭을 지금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저는 우리 언어습관을 기본으로 하여 본문에 대하여 해석을 하였는데, 그럼 그 해석이 맞는지를 영어성경 번역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NIV “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region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I will tell you about.”
NKJV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of which I shall tell you.”
NASB “ Take now your son,”
NKJV 와 NASB 은 모두 now를 집어 넣어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3절입니다. 2절에 나우(now) 라는 말을 집어 넣지 않은 뉴 인터내셔날 버전(NIV)에는 early the next morning 라고 되어 있어 그 나우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시간적 개념을 보완해 주고 있고, 나우라는 말을 넣은 킹제임스 버전(NKJV)에서는 3절을 평이하게 early in the morning 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이 2절과 3절을 시간개념을 집어 넣어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 우리 성경에 의하면 시간개념이 2절과 3절 두 문장에 들어 있지를 않아 그냥 각자 알아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문장으로는 불분명하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아브라함이 바로 순종을 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탈피하여 우리 말 용법과 영어성경을 참작해서 그렇게 '지금'이란 말을 넣어 해석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개념을 넣어 해석을 하니, 문장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명시하는 말이 나오면 자연히 그 다음 언제 그 일을 하기 시작하는지 궁금하게 됩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주게 됩니다. ’지금, 즉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과연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나, 하는데 관심의 초점이 모여진다는 말입니다.
당장, 지금이라는 말이 2절의 말씀에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러면 3절의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의 아침은 당연히 그 다음날 아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 또한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
그렇게 시간개념을 집어넣으면 아브라함의 행동 하나하나에 더욱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삭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니, 그 말씀을 준행하려고 아브라함의 행동이 얼마나 민첩했을까? 아울러 그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을까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마음가짐은 4절로 이어집니다. “제3일에 아브라함이 멀리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산은 모리아 산입니다. 3일째 되는 날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눈을 들어 그 산을 바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발해서 3일째 되는 날이니 꼬박 이틀간을 그 산을 향해 걸어간 것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도착했다 가정하고, 이틀 동안에 얼마나 걸었나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출발한 곳은 브엘세바입니다. 도착지인 모리아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 바로 이삭을 바치려 했던 그 곳입니다. 거리를 재보니,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90킬로입니다. 이틀 걸렸으니 하루에 45킬로를 가야 합니다. 하루에 45킬로를 가려면, 사람이 한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약 4킬로이니 꼬박 11시간을 걸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도착하였다면, 가는 길이 이틀 반이고, 하루에 36킬로를 가야 하니 이틀은 9시간을 꼬박 걸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제3일에는 새벽부터 5시간을 걸어 겨우 그 산에 도착하여, 그곳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100세가 넘었습니다. 이삭을 낳은 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입니다.
(창 21: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그러니 그때 아브라함은 이미 110세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노새를 (한 마리) 데리고 갔지만, 짐을 실어 가기 위한 것이지 사람이 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길을 재촉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그 산까지 가는 동안 일체 한눈을 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도저히 딴눈을 팔지 못할 시간입니다. 주변에 경치를 바라보거나 조금 일정을 늦추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부지런히 모리아산으로 가는 방향을 잡고는 그 방향대로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길을 줄여 그 산에 이르러서야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삭을 바치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없을까 하는 꾀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발걸음을 재촉하여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바로 산으로 올라갑니다. 단을 쌓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 일의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12절, 사자가 가로사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일지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c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lonely son.” )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 이제야 !!! 이제야 !!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벼락치는 말씀입니까?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러서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순종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이제야 …..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제야’ 라는 말이 now 입니다.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바로 즉시,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려고 그 힘들고 어려운 삼일 길을 걸어 산에 올라 이삭의 목에 칼을 대자, 다시 now를 사용하시어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이라고 칭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까운 아들을 아낌없이, 하나님이 바치라니 그날로 즉시, 바로 다른 군소리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고 나선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로, 당장’ 번제로 바치기 위해 길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억할 단어는 나우(now )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지금, 나우(NOW)’ 하면서 나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나우(NOW I know that ..)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지금, 나우(NOW) 하고 나서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경외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2007.04.07 17:17:03
김목사님, 저의 글엔 과찬이시고 목사님의 글엔 너무 겸손하십니다.
제가 빠트린 부분이 '지금 바로(now)'로부터 '이제야(now)' 까지에 이르는 중간과정입니다.
그것을 언급하지 못하고, 앞에서 너무 종이를 많이 잡아먹는 바람에 빼먹어 그만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 많은 시간과 사건들이 지나간 후였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제 생각으로는 바로 그 과정이 신앙생활의 진수가 아닐까 하는데요.
이삭을 바치는 문제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결론적인 모습일거라는 생각입니다> 하는 부분들을
중간에서 건너 뛴 채 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목사님이 대신해서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제가 빠트린 부분이 '지금 바로(now)'로부터 '이제야(now)' 까지에 이르는 중간과정입니다.
그것을 언급하지 못하고, 앞에서 너무 종이를 많이 잡아먹는 바람에 빼먹어 그만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 많은 시간과 사건들이 지나간 후였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제 생각으로는 바로 그 과정이 신앙생활의 진수가 아닐까 하는데요.
이삭을 바치는 문제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결론적인 모습일거라는 생각입니다> 하는 부분들을
중간에서 건너 뛴 채 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목사님이 대신해서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2007.04.07 20:04:10
오목사님의 '영적리더십'에 관한 글들을
관심있게 읽어오던 독자입니다.
한동안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각주~'시리즈가 이어지는군요.
우선 반갑고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성경을 대하는 시각이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입장에 있는 저와는 다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글을 즐겁게 읽으며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점들도 챙겼답니다.^^*
어쩌면 그렇게 꼼꼼하고 자세하게 성경을 읽으시나요?
우리의 언어습관과 관련된 친절한 해설도 재미있습니다.
또한 무언가 거시기했던 부분을 댓글로 자상하게 짚어주신
김목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두 분 목사님!
복되고 희망찬 부활주일 되소서!!
관심있게 읽어오던 독자입니다.
한동안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각주~'시리즈가 이어지는군요.
우선 반갑고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성경을 대하는 시각이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입장에 있는 저와는 다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글을 즐겁게 읽으며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점들도 챙겼답니다.^^*
어쩌면 그렇게 꼼꼼하고 자세하게 성경을 읽으시나요?
우리의 언어습관과 관련된 친절한 해설도 재미있습니다.
또한 무언가 거시기했던 부분을 댓글로 자상하게 짚어주신
김목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두 분 목사님!
복되고 희망찬 부활주일 되소서!!
2007.04.07 21:44:30
求道者 님, 댓글 감사합니다.
<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입장에 있는 저와는 다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글을 즐겁게 읽으며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점들도 챙겼답니다.^^*>는 말씀 들으니 웬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또 무엇이 님과 다른가도 생각해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글을 읽고 챙길 것이 있다 하시니, 그 구도의 열정이 뜨거운 것만이 아니라
폭도 넓다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읽어주시고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우리의 언어습관과 관련된 해설>이 틀린 점은 없는지요?
<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입장에 있는 저와는 다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글을 즐겁게 읽으며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점들도 챙겼답니다.^^*>는 말씀 들으니 웬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또 무엇이 님과 다른가도 생각해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글을 읽고 챙길 것이 있다 하시니, 그 구도의 열정이 뜨거운 것만이 아니라
폭도 넓다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읽어주시고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우리의 언어습관과 관련된 해설>이 틀린 점은 없는지요?
2007.04.08 03:08:43
딴죽걸기~~
이삭의 심정이 빠졌네요^^
제 짧은 소견에는 묵묵히 따라가는 이삭은 왼지...
자꾸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오버랩되는것은 왜일까요^.^
여기의 중심은/ 하나님.아브라함. 이삭...
부활 찬미 예수^^
이삭의 심정이 빠졌네요^^
제 짧은 소견에는 묵묵히 따라가는 이삭은 왼지...
자꾸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오버랩되는것은 왜일까요^.^
여기의 중심은/ 하나님.아브라함. 이삭...
부활 찬미 예수^^
2007.04.08 07:22:26
빈의자님, 딴죽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에 글을 쓰면서 반응을 보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시는것 같아요.
저는 이글에서 창 22장의 그 사흘간 이야기만
그것도 now를 중심으로 해서 담으려고 했는데........
이삭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글로 해도 될 것 같아서 ....제가 안했어요.....용서해주세요...
제가 여기에 글을 쓰면서 반응을 보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시는것 같아요.
저는 이글에서 창 22장의 그 사흘간 이야기만
그것도 now를 중심으로 해서 담으려고 했는데........
이삭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글로 해도 될 것 같아서 ....제가 안했어요.....용서해주세요...
2007.04.08 07:30:26
벌써 일어나셨네요^^
참 오늘 부활주일이라서
이쁜 성도님들과 다함께 잔치하셔야죠^^
전 아직 근무중임당~
이따가 9시에 퇴근을 하고요 정신 바짝 챙겨서
부활주일 준비한 설교 해야함,
엄청 힘들었슴당~~
제 성질이 안그런거 같은데 급한가봅니다^.^
물론 다 알고 계셔서 천천히 하신거 저도 아는데요~
걍 참견하고 싶어서리^^
죄송 스럽구요 미안하구만요~
복된 부활을 찬송합니다!!!
참 오늘 부활주일이라서
이쁜 성도님들과 다함께 잔치하셔야죠^^
전 아직 근무중임당~
이따가 9시에 퇴근을 하고요 정신 바짝 챙겨서
부활주일 준비한 설교 해야함,
엄청 힘들었슴당~~
제 성질이 안그런거 같은데 급한가봅니다^.^
물론 다 알고 계셔서 천천히 하신거 저도 아는데요~
걍 참견하고 싶어서리^^
죄송 스럽구요 미안하구만요~
복된 부활을 찬송합니다!!!
2007.04.08 07:35:43
아니, 바로 옆에 계신 것처럼 바로 댓글을 주시니 ....감사...
<죄송스럽구요 미안하구만요~> 라는 말은 빼시고요
앞으로도 계속 <걍 참견하고 싶어서리^^ >라는 맘 쭈욱 품어주세요........ㅇ..
복된,그리고 희망의 부활주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죄송스럽구요 미안하구만요~> 라는 말은 빼시고요
앞으로도 계속 <걍 참견하고 싶어서리^^ >라는 맘 쭈욱 품어주세요........ㅇ..
복된,그리고 희망의 부활주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2007.04.10 12:43:35
오 목사님 반갑습니다. 늘 가까이 뵙다가 사이버 공간에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글을 잘 안남기는 편인데 목사님의 성경읽기에 "시비"?걸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 오목사님의 추적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렇게 깔끔하고 철저하게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나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이 그렇게 영화로운가요? 자식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내쳐버렸을까요? 지금 즉시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되면 내자식이라도 희생시키고 내 믿음의 위대성을 하나님에게 혹은 타인에게 보여야 하나요?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으로 살라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남겨 놓았을까요? 아직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만 잘 이해가 안갑니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이야기로 저에게는 남아있습니다. 건강하시고 금요일에 뵈었으면 합니다.
2007.04.10 16:03:51
양목사님, 드디어 등장하셨군요...아이구, 저보다 몇수가 위이신 분이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늘 아침, 저녁으로 뵙다가 이렇게 다비아에서 뵈오니 더 반갑고 그렇습니다.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 항상 목사님 말씀에 힘을 얻고 목사님의 형님같은 너그러움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 아직까지 못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마음, 다 알고 계시지요?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 항상 목사님 말씀에 힘을 얻고 목사님의 형님같은 너그러움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 아직까지 못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마음, 다 알고 계시지요?
2007.04.10 15:47:12
항상 목사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꼼꼼하게 성경 읽기가 쉽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주체적으로 꼼꼼하게 읽을 수 있는 교육이 교회에서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목사님께 그런 강의를 받으면 재밌고 깊이까지 겸비한 유익한 시간이 될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브라함 관련해서 예전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계몽주의를 경험한 근대인이 아니라 고대인이기 때문에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근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 제사를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근동에서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자주 있었던 일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다른 개념의 일일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인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쳤다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 '나는 아들을 바치는 것만큼의 헌신을 바라지만 인신제사라는 그릇된 헌신을 요구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들과는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신이다'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바치려는 사건을 통해서 고대인들이 생각해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었던 다른 '신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는 평신도인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프로그램의 내용은 잊혀지지 깊이 남아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다음 글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브라함 관련해서 예전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계몽주의를 경험한 근대인이 아니라 고대인이기 때문에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근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 제사를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근동에서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자주 있었던 일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다른 개념의 일일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인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쳤다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 '나는 아들을 바치는 것만큼의 헌신을 바라지만 인신제사라는 그릇된 헌신을 요구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들과는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신이다'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바치려는 사건을 통해서 고대인들이 생각해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었던 다른 '신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는 평신도인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프로그램의 내용은 잊혀지지 깊이 남아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다음 글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04.10 16:19:55
로켓마을 님,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그런 프로그램은 보지 못했지만, 그런 학설은 접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각주 없이 성경읽기>의 취지가 그런 고차원적인 학설 한번 무시하고 성경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는 취지니까
어디까지나 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의 학설 다 참고하려면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그러다 보면 여기에 치여 차빼고, 저기에 치여 포 빼고 ..해서 앙상한 뼈만 남을 것 같아, 각주 ..등 참고서적을 읽기는 하되 영향을 받지 않겠다, 는 신념을 여기에서는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 코너의 발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밝힌 바 있지만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어느 교수님이 학생들의 의견을 묻다가 어느 학생이 자꾸만 칼빈 어쩌구,,,,하고 이야기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네가 칼빈이냐? 나는 너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너의 (독창적인) 생각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라고 말입니다. 그후로 저는 그 교수님을 무척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교수님 이름도 희미하지만...
그래도 여기 제 글에 댓글다시는 분들의 이름은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지요? 그런 프로그램은 보지 못했지만, 그런 학설은 접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각주 없이 성경읽기>의 취지가 그런 고차원적인 학설 한번 무시하고 성경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는 취지니까
어디까지나 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의 학설 다 참고하려면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그러다 보면 여기에 치여 차빼고, 저기에 치여 포 빼고 ..해서 앙상한 뼈만 남을 것 같아, 각주 ..등 참고서적을 읽기는 하되 영향을 받지 않겠다, 는 신념을 여기에서는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 코너의 발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밝힌 바 있지만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어느 교수님이 학생들의 의견을 묻다가 어느 학생이 자꾸만 칼빈 어쩌구,,,,하고 이야기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네가 칼빈이냐? 나는 너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너의 (독창적인) 생각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라고 말입니다. 그후로 저는 그 교수님을 무척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교수님 이름도 희미하지만...
그래도 여기 제 글에 댓글다시는 분들의 이름은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말씀을 묵상하시고 글로 잘 표현하는 목사님이 부럽습니다.
난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를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몇번씩 글을 써 보다가는 그냥 지워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만 끝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떠오르는 제 생각을 나눠보기 위합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장면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불려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고도
많은 시간과 사건들이 지나간 후였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시간과 사건들 속에는 정말 인간적으로 설명이 않되는 것들도 많았죠.
아니 어떤 면에서는 거의 그런 일들만 기록에 있다고 보죠.
그 일에 절정이 아마도 이삭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겠죠.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문제는 그것을 본인이 분명히 알고 믿느냐 하는 것이겠고요.
제 생각으로는 바로 그 과정이 신앙생활의 진수가 아닐까 하는데요.
이삭을 바치는 문제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결론적인 모습일거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아브라함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알게하시려는 의도라는 생각입니다.
즉 누구나 이런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라면
그 하나님께 항복치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는 웅변이라고요.
아브라함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런 관계 속에,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면
누구라도 이삭을 받칠거라는 거구요.
그러기에 누구나 아브라함 일 수 있다는 거죠.
우리 하나님께 불려진 자라면요.
저는 실제의 시간 속에서
우리들과 이런 관계적 교제, 사귐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일상의 모든 삶들이
그 분의 이런 손길과 인도하심 속에 있음을
설명하는 일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삭의 사건은 그 결과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이 종교적 형태로 설명되는 이 시대속에서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귐을 갖는
우리의 모든 시간의 삶들이 얼마나 의미있는가를
무슨 특별한 종교적 형태의 일을 하는것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 분과 함께하기에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