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5) – 이삭을 ‘언제(까지)’ 번제로 바쳐야 했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성경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그렇습니다. 태초에, 또 그리고 빛을 만드신 날 .. 이는 첫째 날이라….등등.    
또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과 2절에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장 1절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
여기 1절과 2절 사이에는 13개월의 시간이 아니라, 모세에게는 형 아론도 있고 누나 미리암도 있으니 적어도 3-4년의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성경에서는 일일이 밝혀놓았습니다. 뭐, 그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읽다 보니 허전한게 느껴집니다. 2절에도 뭔가 빠졌고 그리고 2절과 3절 사이에도 무언가 빠져 있는 기분이 드는 겁니다. 물론 그 빠진 것을 찾아내지 않아도, 그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은혜로운 해석이 가능하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바로 - 비록 우리 성경에 그런 말이 없지만 - 그 명령을 준행하였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여러모로 성경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한글성경이 조금 긴장감이 없게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은 아주 박진감이 넘치는 사건인데, 시작에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다른 게 아니라 ‘시간개념을 나타내는 말’이 거기서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 본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17장 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하는 식으로 시간을 분명히 나타냈는데(On that
very day) 본문 2절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까지) 이삭을 바치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것뿐입니다. 여기에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는 보이지 않지요.

사건에 시간개념이 들어가서 그 ‘시간’이 사건에서 작용하는 게 드러나야 되는데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없으니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나타내 주는 말이 명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 명령이 조금 루즈하게 들립니다.
언제까지 이삭을 바쳐야 되는 거야? 아무 때나 아브라함이 편할 때 바치면 되나? 그리고 3절에 나오는 ‘아침’이 다음날 아침인지, 아니면 시간이 많이 흘러 이삭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난 다음날인지를 모릅니다. (물론, 그 다음 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두번째 가정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나지만)

이런 의문점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사장이 비서에게 말합니다. “김비서! 할 일이 있는데, 내방으로 오게!!”    
자, 이런 경우에 김비서는 언제 사장실에 가서 사장이 지시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객관식입니다.
1번, 김비서가 시간이 나면, 예컨대 사흘 후,
2번, 김비서가 사장이 맘에 들어 그 일을 하고 싶은 맘이 생길 때, 예컨대 이틀 뒤,
3번, 지금 즉시.

3 번이 맞습니다. ‘지금 즉시’이지요. 김비서는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사장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이 경우 김비서가 사장의 말에 시간부사가 빠진 것을 느끼고 사장님에게 ‘언제 들어갈까요?’ 하고 물어본다면  
눈치 없는 비서로 찍힐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습관에 의하면 한번의 동작으로 그 일이 끝나는 일-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 에 대하여 시간을 나타나는 부사가 붙지 않는다면 그 일은 ‘바로 즉시’ 하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여러분의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손에 흙을 잔뜩 묻혀가지고 집에 들어왔어요.
방에 들어오는 즉시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이 그게 뭐냐? 가서 씻어라!”
이런 말을 들은 아이는 언제 손을 씻어야 합니까? 이 명령에 대한 실행은 한번으로 끝나니 바로 해야 됩니다.
그 다음 씻고 나오는 아이에게는 뭐라 합니까?  “깨끗이 하고 다녀라”
이 명령은 한번으로 그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 바로가 아니라 나중에 해야 하고 또한 이는 계속적으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조금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입시켜 보겠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이것은 분명히 한번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즉시, 지금> 이라는 시간적 부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22장 2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네 아들 이삭을 지금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저는 우리 언어습관을 기본으로 하여 본문에 대하여 해석을 하였는데, 그럼 그 해석이 맞는지를 영어성경 번역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NIV “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region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I will tell you about.”

NKJV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of which I shall tell you.”

NASB “ Take now your son,”

NKJV 와 NASB 은 모두 now를 집어 넣어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3절입니다. 2절에 나우(now) 라는 말을 집어 넣지 않은 뉴 인터내셔날 버전(NIV)에는 early the next morning 라고 되어 있어 그 나우라는 말을 집어넣지 않은 시간적 개념을 보완해 주고 있고, 나우라는 말을 넣은 킹제임스 버전(NKJV)에서는 3절을 평이하게 early in the morning 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이 2절과 3절을 시간개념을 집어 넣어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 우리 성경에 의하면 시간개념이 2절과 3절 두 문장에 들어 있지를 않아 그냥 각자 알아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문장으로는 불분명하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아브라함이 바로 순종을 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탈피하여 우리 말 용법과 영어성경을 참작해서 그렇게 '지금'이란 말을 넣어 해석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개념을 넣어 해석을 하니, 문장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명시하는 말이 나오면 자연히 그 다음 언제 그 일을 하기 시작하는지 궁금하게 됩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주게 됩니다. ’지금, 즉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과연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나, 하는데 관심의 초점이 모여진다는 말입니다.

당장, 지금이라는 말이 2절의 말씀에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러면 3절의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의 아침은 당연히 그 다음날 아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 또한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

그렇게 시간개념을 집어넣으면 아브라함의 행동 하나하나에 더욱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삭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니, 그 말씀을 준행하려고 아브라함의 행동이 얼마나 민첩했을까? 아울러 그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을까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마음가짐은 4절로 이어집니다. “제3일에 아브라함이 멀리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산은 모리아 산입니다. 3일째 되는 날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눈을 들어 그 산을 바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발해서 3일째 되는 날이니 꼬박 이틀간을 그 산을 향해 걸어간 것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도착했다 가정하고, 이틀 동안에 얼마나 걸었나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출발한 곳은 브엘세바입니다. 도착지인 모리아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 바로 이삭을 바치려 했던 그 곳입니다. 거리를 재보니,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90킬로입니다. 이틀 걸렸으니 하루에 45킬로를 가야 합니다. 하루에 45킬로를 가려면, 사람이 한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약 4킬로이니 꼬박 11시간을 걸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도착하였다면, 가는 길이 이틀 반이고, 하루에 36킬로를 가야 하니 이틀은 9시간을 꼬박 걸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제3일에는 새벽부터 5시간을 걸어 겨우 그 산에 도착하여, 그곳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100세가 넘었습니다. 이삭을 낳은 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입니다.
(창 21: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그러니 그때 아브라함은 이미 110세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노새를 (한 마리) 데리고 갔지만, 짐을 실어 가기 위한 것이지 사람이 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길을 재촉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그 산까지 가는 동안 일체 한눈을 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도저히 딴눈을 팔지 못할 시간입니다. 주변에 경치를 바라보거나 조금 일정을 늦추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부지런히 모리아산으로 가는 방향을 잡고는 그 방향대로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길을 줄여 그 산에 이르러서야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삭을 바치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없을까 하는 꾀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발걸음을 재촉하여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바로 산으로 올라갑니다. 단을 쌓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 일의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12절, 사자가 가로사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일지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c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lonely son.” )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 이제야 !!! 이제야 !!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벼락치는 말씀입니까?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러서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순종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이제야 …..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제야’ 라는 말이 now 입니다.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바로 즉시,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려고 그 힘들고 어려운 삼일 길을 걸어 산에 올라 이삭의 목에 칼을 대자, 다시 now를 사용하시어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이라고 칭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까운 아들을 아낌없이, 하나님이 바치라니 그날로 즉시, 바로 다른 군소리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고 나선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로, 당장’ 번제로 바치기 위해 길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억할 단어는 나우(now )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지금, 나우(NOW)’ 하면서 나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나우(NOW I know that ..)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지금, 나우(NOW) 하고 나서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경외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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