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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刻舟)하며 성경 읽기' (1) – 하루가 천년같은 사흘길
(이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공부하느라 언젠가 갈무리해 놓은 자료중의 하나입니다.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5) – 이삭을 ‘언제(까지)’ 번제로 바쳐야 했나>에 대해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길래 다시 여러가지 자료들을 꺼내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것도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참고할만한 각주(脚註)가 될지 아니면 구검(求劍) 한답시고 헛되게 각주(刻舟)해 놓은 것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글의 정확한 출처는 이진희 목사의 <유대인과 함께 읽는 창세기>, 231쪽입니다. 앞으로도 각주(脚註)없이 성경을 읽는 동안에 흥미로운 해석이 발견되면 같이 올려보고자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그가 있는 곳에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부러 모리아까지 사흘길을 걸어가서 바치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 랍비들은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만 시험이 아니라, 사흘길을 걸어가게 한 것도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믿는다.
모리아까지 사흘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겠는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민을 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겠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끝까지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가게 하신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사흘 길을 가면서 받은 시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미드라쉬가 전해 내려온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사탄이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그리고는 어디에 가는지를 물었다.
“기도하기 위해서 갑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기도하러 가는 사람이 나무와 칼은 왜 갖고 가는 거요?”
“혹시 며칠 묵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장막도 치고 음식도 해 먹어야 할 것 아니오?”
“이것 보시오. 나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할 때 옆에 있었소. 아들을 죽이려고 하다니, 당신 지금 정신 나간 것 아니오? 당신 지금 백살도 넘지 않았소? 그 아들 얻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잘 아오. 그런데 그에게 칼을 대려고 하는 거요?”
아브라함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소.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오.”
사탄이 물었다. “만일 하나님이 더 어려운 일을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소?”
“내가 아무리 어려운 시험을 만나더라도,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리 어려운 요구를 하시더라도 나는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소.”
사탄은 안되겠다 싶어서 이삭에게 젊은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나타났다.
“너 지금 어디를 가는 거니?”
“토라를 공부하러 가는 길입니다.”
“이 친구야! 참 불쌍하기도 하구나. 너는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야. 네 어머니가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니? 네 어머니가 너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의 아버지가 너를 지금 죽이려고 한단 말이다.”
이삭이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 뜻이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겁니다.”
사탄은 이삭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알고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는 그들이 모리아 산까지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는 길에 깊은 강을 만들어 놓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점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만일 제 아들이 빠져 죽게 되면, 어떻게 아들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저나 제 아들녀석이 물에 빠져 죽으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이행할 수가 없사오니 주여,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해주셨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흘 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은 수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떠날 때 마음을 굳게 먹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점점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얼마든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아마 하나님은 끝까지 아브라함이 순종하는지, 아니면 도중에 돌이키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 사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 같다.
위에 소개한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였다.
유대인들의 역사야말로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만큼 고난을 받은 민족도 없다.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서 고난을 받을 때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특히 중세시대에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잘 알려져 있다. 위의 미드라쉬에 나오는 사탄은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비극의 역사 가운데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박해했던 세력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게 하고도 남을 수 있을 만큼 가혹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신앙을 져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신실하였다. 사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였던 것처럼!
(이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공부하느라 언젠가 갈무리해 놓은 자료중의 하나입니다.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5) – 이삭을 ‘언제(까지)’ 번제로 바쳐야 했나>에 대해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길래 다시 여러가지 자료들을 꺼내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것도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참고할만한 각주(脚註)가 될지 아니면 구검(求劍) 한답시고 헛되게 각주(刻舟)해 놓은 것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글의 정확한 출처는 이진희 목사의 <유대인과 함께 읽는 창세기>, 231쪽입니다. 앞으로도 각주(脚註)없이 성경을 읽는 동안에 흥미로운 해석이 발견되면 같이 올려보고자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그가 있는 곳에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부러 모리아까지 사흘길을 걸어가서 바치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 랍비들은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만 시험이 아니라, 사흘길을 걸어가게 한 것도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믿는다.
모리아까지 사흘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겠는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민을 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겠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끝까지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가게 하신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사흘 길을 가면서 받은 시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미드라쉬가 전해 내려온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사탄이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그리고는 어디에 가는지를 물었다.
“기도하기 위해서 갑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기도하러 가는 사람이 나무와 칼은 왜 갖고 가는 거요?”
“혹시 며칠 묵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장막도 치고 음식도 해 먹어야 할 것 아니오?”
“이것 보시오. 나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할 때 옆에 있었소. 아들을 죽이려고 하다니, 당신 지금 정신 나간 것 아니오? 당신 지금 백살도 넘지 않았소? 그 아들 얻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잘 아오. 그런데 그에게 칼을 대려고 하는 거요?”
아브라함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소.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오.”
사탄이 물었다. “만일 하나님이 더 어려운 일을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소?”
“내가 아무리 어려운 시험을 만나더라도,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리 어려운 요구를 하시더라도 나는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소.”
사탄은 안되겠다 싶어서 이삭에게 젊은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나타났다.
“너 지금 어디를 가는 거니?”
“토라를 공부하러 가는 길입니다.”
“이 친구야! 참 불쌍하기도 하구나. 너는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야. 네 어머니가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니? 네 어머니가 너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의 아버지가 너를 지금 죽이려고 한단 말이다.”
이삭이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 뜻이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겁니다.”
사탄은 이삭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알고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는 그들이 모리아 산까지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는 길에 깊은 강을 만들어 놓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점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만일 제 아들이 빠져 죽게 되면, 어떻게 아들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저나 제 아들녀석이 물에 빠져 죽으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이행할 수가 없사오니 주여,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해주셨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흘 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은 수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떠날 때 마음을 굳게 먹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점점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얼마든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아마 하나님은 끝까지 아브라함이 순종하는지, 아니면 도중에 돌이키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 사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 같다.
위에 소개한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였다.
유대인들의 역사야말로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만큼 고난을 받은 민족도 없다.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서 고난을 받을 때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특히 중세시대에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잘 알려져 있다. 위의 미드라쉬에 나오는 사탄은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비극의 역사 가운데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박해했던 세력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게 하고도 남을 수 있을 만큼 가혹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신앙을 져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신실하였다. 사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였던 것처럼!
2007.04.10 22:09:11
모리아 산으로 떠나기 전날 밤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 묵상으로는 이삭을 잡을 칼을 갈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아비로써 해 줄 수 있는 선물은 고통없이 단칼에 죽이는 것이다" 혹시 칼이 날이 서지 않아 잘 들지 않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아브라함은 기도하며 밤이 늦도록 칼을 갈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 한방입니다' 칼을 가는 그 밤이 천년처럼 길었을까요? 아니면 빨리 날이 밝아라 기다렸을까요? 창 22장 3절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라고 말하는 군요.
2007.04.10 22:32:14
동네 목사님, 아니 임목사님이군요. 안 보이신다 했는데 이런 이름으로 나타나실 줄이야..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바로 "해석의 기쁨" 아닐까요?
새벽 닭아 어서 울어라,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을 정도는 아니었겠다고 생각하지만, 창 22장 3절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에 대한 부분은 제가 쓴 <이삭을... > 과 상통하는 곳이 있군요.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바로 "해석의 기쁨" 아닐까요?
새벽 닭아 어서 울어라,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을 정도는 아니었겠다고 생각하지만, 창 22장 3절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에 대한 부분은 제가 쓴 <이삭을... > 과 상통하는 곳이 있군요.
2007.04.10 22:39:04
동네목사님께서는 여전히 장르를 불문하고 정곡을 찌르시네요.
'주님, 한방입니다' ㅎㅎㅎ.. 이런, 불경스럽게 웃기는~
목사님들 성경해석 하시는 자리에..이해 하세요.
그래도 읽기는 진지하게 읽었답니다. *^^*
'주님, 한방입니다' ㅎㅎㅎ.. 이런, 불경스럽게 웃기는~
목사님들 성경해석 하시는 자리에..이해 하세요.
그래도 읽기는 진지하게 읽었답니다. *^^*
2007.04.11 02:20:38
늦은 밤에 들어왔는데 아는 분이 보여 반갑군요.
모르긴해도 오 목사님이 인용하신 이진희 목사라는 분
제가 아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달라스에서 웨슬리감리교회를 목회하시는 분이신 것 같은데
글을 많이 쓰시는 분으로 조금 안면이 있었는데....
이름이라도 들으니 많이 반가운데요.
위에 임 목사님의 뉘앙스로는 빨리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으로 들리는데....
저도 그 의견에 한표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 창세기 22장의 그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간섭과 손길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맛 본 존재로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란 표현이 등장한다고 보는거죠.
심하게 말하면 소풍가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좀 심한가요?
아브라함의 지금은 그만큼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본문에는 삼 일 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3절 뒷부분에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그리고
4절에는 바로"제 삼일에...."로 이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삼일 길에 대한 우리들 나름의 추측을 원천 봉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정지되어 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만을 떼어내서 생각하면 정말 무수한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신앙이 어떻게 자라나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이삭을 드리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그럼에도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분명할 겁니다.
그러나 제가 제 나름의 이해를 덧붙인다면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존재를 돗보이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샘플을 보여주고 싶으신 거라는 생각인거죠.
즉 하나님이 붙드시면 누구나 아브라함이 된다는,
아브라함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의 조상,
즉 분명한 한 샘플을 보여 주고 싶으신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이삭에 대해서 마저도
침묵을 하거나 아주 간단한 언급만으로
그 초점을 흐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모르긴해도 오 목사님이 인용하신 이진희 목사라는 분
제가 아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달라스에서 웨슬리감리교회를 목회하시는 분이신 것 같은데
글을 많이 쓰시는 분으로 조금 안면이 있었는데....
이름이라도 들으니 많이 반가운데요.
위에 임 목사님의 뉘앙스로는 빨리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으로 들리는데....
저도 그 의견에 한표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 창세기 22장의 그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간섭과 손길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맛 본 존재로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란 표현이 등장한다고 보는거죠.
심하게 말하면 소풍가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좀 심한가요?
아브라함의 지금은 그만큼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본문에는 삼 일 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3절 뒷부분에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그리고
4절에는 바로"제 삼일에...."로 이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삼일 길에 대한 우리들 나름의 추측을 원천 봉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정지되어 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만을 떼어내서 생각하면 정말 무수한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신앙이 어떻게 자라나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이삭을 드리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그럼에도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분명할 겁니다.
그러나 제가 제 나름의 이해를 덧붙인다면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존재를 돗보이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샘플을 보여주고 싶으신 거라는 생각인거죠.
즉 하나님이 붙드시면 누구나 아브라함이 된다는,
아브라함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의 조상,
즉 분명한 한 샘플을 보여 주고 싶으신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이삭에 대해서 마저도
침묵을 하거나 아주 간단한 언급만으로
그 초점을 흐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07.04.11 03:40:19
목사님, "각주없이" 플러스 "각주하며" 이렇게 성경을 소개시켜 주시니 고맙습니다.
주제와 밀접하지 않은 딴지 하나 걸자면,
위 인용 본문 중 "유대인들 만큼 고난을 받은 민족도 없다"라는 식으로
수없이 회자되는 이러한 최면술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예 사라진 민족도 많고, 그들 이상으로 고난 받았던 민족도 많으며, 바로 그들로 인해서
현재도 고난 받고 있는 민족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계속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주제와 밀접하지 않은 딴지 하나 걸자면,
위 인용 본문 중 "유대인들 만큼 고난을 받은 민족도 없다"라는 식으로
수없이 회자되는 이러한 최면술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예 사라진 민족도 많고, 그들 이상으로 고난 받았던 민족도 많으며, 바로 그들로 인해서
현재도 고난 받고 있는 민족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계속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2007.04.11 07:14:06
감동입니다~
더이상 딴지걸 이유도 없구요^^
퇴근시간이 가까와서.... 잠시 틈을내서 오길 잘했네요^^
제 홈에 펌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더이상 딴지걸 이유도 없구요^^
퇴근시간이 가까와서.... 잠시 틈을내서 오길 잘했네요^^
제 홈에 펌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2007.04.11 09:59:59
김목사님, 이진희 목사님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입니다.
저는 이 글을 출처도 모르고 스크랩해 놓았었는데, 나중에 이목사님의 <유대인~ 창세기>를 읽고 나서
이글이 이 책속에 있는 내용임을 알았습니다.
누군가 이글을 워딩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수고를 하신 덕분에
제가 인용하는데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드래그하고 몇번의 키만 조작해서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또 해도 끝 없이 할 이어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조차 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한' 인물 한다는 말이겠지요?
하나님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인물' 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출처도 모르고 스크랩해 놓았었는데, 나중에 이목사님의 <유대인~ 창세기>를 읽고 나서
이글이 이 책속에 있는 내용임을 알았습니다.
누군가 이글을 워딩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수고를 하신 덕분에
제가 인용하는데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드래그하고 몇번의 키만 조작해서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또 해도 끝 없이 할 이어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조차 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한' 인물 한다는 말이겠지요?
하나님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인물' 말입니다.
2007.04.11 09:15:21
자꾸 딴지, 딴지 하니 김어준의 딴지 일보가 생각나네요...
딴지라는 말을 흔히들 사용하시는데 저도 딴지(?) 한번 걸어볼까요...
딴지라는 말의 뉴앙스가 좀 거시기 하니 그냥 코멘트 라고 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이곳 댓글자리는 다비안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자리이니까
굳이 '딴지'니 뭐니 하면서 코멘트의 성격을 정할 것 없이 그냥 코멘트하시면 어떨까요?
commentary 가 별건가요?
collection of comments 이니, comment 가 모여서 commentary가 된 것이지요.
딴지라는 말을 흔히들 사용하시는데 저도 딴지(?) 한번 걸어볼까요...
딴지라는 말의 뉴앙스가 좀 거시기 하니 그냥 코멘트 라고 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이곳 댓글자리는 다비안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자리이니까
굳이 '딴지'니 뭐니 하면서 코멘트의 성격을 정할 것 없이 그냥 코멘트하시면 어떨까요?
commentary 가 별건가요?
collection of comments 이니, comment 가 모여서 commentary가 된 것이지요.
2007.04.11 09:49:58
'딴지'라는 말을 생각없이 쓰곤 했는데,
목사님 지적을 받고 공인기관(?)에 연락했더니
당연히 표준어가 아니며 대부분의 국어 사전에도 없는 단어라는
최종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 지적을 받고 공인기관(?)에 연락했더니
당연히 표준어가 아니며 대부분의 국어 사전에도 없는 단어라는
최종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007.04.11 10:08:21
'딴지'라는 말이 표준어가 아니며 국어 사전에도 없는 단어라는 보고 감사합니다.
물론 딴지라는 말이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딴지걸이는 없어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여기 다비아에서 우리들이 토로하는 의견들은 결코 '딴지'수준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제가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딴지라는 말이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딴지걸이는 없어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여기 다비아에서 우리들이 토로하는 의견들은 결코 '딴지'수준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제가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007.04.11 10:27:10
seyoh목사님께서 딴지의 원산지인 '딴지일보'를 알고 계신 것 보니
과거에 '한 딴지~'하신게 아닌가 의심해 봅니다.ㅋㅋ..
님들의 고담 준론(?)에 방해가 된 듯 싶어
심십육계 줄행랑 하렵니다. 퓽~~!
과거에 '한 딴지~'하신게 아닌가 의심해 봅니다.ㅋㅋ..
님들의 고담 준론(?)에 방해가 된 듯 싶어
심십육계 줄행랑 하렵니다. 퓽~~!
2007.04.11 10:35:26
과거에 '한 딴지~'하신게 아닌가 의심해 봅니다.ㅋㅋ.. 하신 그 의심의 눈길, 정확합니다.
저는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아에서만은, 다비안에 대해서만은 그러고 싶지 않네요....
특히 구도자님에게 대해서는 특히나 ....
저는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아에서만은, 다비안에 대해서만은 그러고 싶지 않네요....
특히 구도자님에게 대해서는 특히나 ....
2007.05.05 18:46:49
"제 삼일에...." 가 부활을 의미하는 문구가 아닐까요,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위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브니엘님의 독창적인 해석인지 또는 다른 분이 그렇게 해석하신 것인지,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브니엘님의 독창적인 해석인지 또는 다른 분이 그렇게 해석하신 것인지,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2007.05.19 10:28:32
목사님
저는 성경에서의 숫자가 항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주역의 숫자와도 같이 어떤 의미가 반드시 있지요.
성경에서 "제 삼일에...." 라는 문구는 부활을 의미할 때 쓰입니다.
눅 13;32, 고전 15:4 주님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지요.
물론 삼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숫자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팔(8)이 부활의 숫자이지만 금요일부터 삼일째에 하면 삼일이 부활의 날이 됩니다.
그러면 이 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롬 4:17)께로 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도로 돌려드리니 하나님은 부활 안에서 도로 우리에게 돌려 주시더라는 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재능, 은사 등-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하여 죽음의 시험을 겪어야 한다. 그러면 결국 그것은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 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은 사명, 우리가 하는 일,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까지도 다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어떤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드린 후 주님께로 부터 도로 받은 부활안에서 얻은 어떤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이런 해석은 고래의 신학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닌데요.
저는 성경에서의 숫자가 항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주역의 숫자와도 같이 어떤 의미가 반드시 있지요.
성경에서 "제 삼일에...." 라는 문구는 부활을 의미할 때 쓰입니다.
눅 13;32, 고전 15:4 주님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지요.
물론 삼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숫자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팔(8)이 부활의 숫자이지만 금요일부터 삼일째에 하면 삼일이 부활의 날이 됩니다.
그러면 이 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롬 4:17)께로 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도로 돌려드리니 하나님은 부활 안에서 도로 우리에게 돌려 주시더라는 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재능, 은사 등-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하여 죽음의 시험을 겪어야 한다. 그러면 결국 그것은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 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은 사명, 우리가 하는 일,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까지도 다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어떤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드린 후 주님께로 부터 도로 받은 부활안에서 얻은 어떤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이런 해석은 고래의 신학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닌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