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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刻舟)하며 성경 읽기' (2) – 이삭 번제 사건은 인신제사를 금하도록 한 것인가?
‘인신제사’(人身祭祀)는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말합니다.
인신제사는 미개한 종족들은 물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중국과 인도, 로마와 그리스, 잉카를 비롯한 중남미의 여러 문화권, 한마디로 모든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도 행해졌던 관습이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이방신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해 졌음을 시사하고 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이방신 몰록에게 ‘인신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금지하도록 한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로켓마을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아브라함 관련해서 예전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계몽주의를 경험한 근대인이 아니라 고대인이기 때문에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근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 제사를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근동에서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자주 있었던 일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다른 개념의 일일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인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쳤다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 '나는 아들을 바치는 것만큼의 헌신을 바라지만 인신제사라는 그릇된 헌신을 요구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들과는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신이다'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바치려는 사건을 통해서 고대인들이 생각해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었던 다른 '신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박종수 교수님(강남대 구약학)의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뜨이는군요.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을 낳고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여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결박한 후에 칼을 들고 죽이려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찬사를 보낸다거나 부러워해서는 결코 안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그토록 항의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아브라함의 처량한 모습만이 우리 눈에 아른거릴 뿐이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성서기자는 왜 이런 끔직한 시험 과정을 독자에게 알리려 하고 있을까?
고대 사회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비록 인육 제사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통용될 때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으로부터 이러한 풍습을 전수 받은 것 같다. 사사 입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은 인신 제사를 서약하여 자기의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친 이야기라든지(삿 11장), 왕국 후반기까지 어린이를 불사르거나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종교적 풍습을 볼 때 인신 제사는 한 때 이스라엘 민중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왕하 17:31; 23:10).
아브라함이 인신 제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가나안의 인신제사 풍습에 익숙했다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를 어떻게 전수 받았을까?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5권)에 나오는 ‘손순매아(孫順埋兒) 설화’는 손순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려고 한 이야기이다. 아이를 땅에 묻으려고 할 때 땅 속에서 석종(石鍾)이 발견되어 그 종 때문에 아이도 살고 온 가족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극한 정성과 믿음은 하늘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오직 생명을 바치는 일 외에 없다는 사고방식은 고대인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에 항의 한번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순순히 따라 나서는 이삭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삭은 자기를 태울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백 세가 훨씬 넘은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결박당한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하심으로 이삭의 생명을 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지켜졌다는 내용이 창세기 22장에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의 생명처럼 귀하다는 가르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으로 소개된 것이다. >
또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 끔찍한 신의 이 요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한다. 소위 "인신 제사" 특히 "자녀 제사"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판관 11:29-40; 열왕 하 17:31, 23:10), 페니키아, 아몬족, 모아브족(열왕 하 3:21), 이집트, 카나안 등 주변 국가들에서도 한정된 기간 동안에 행해졌다. "인신 제사"가 동물 제사로 바뀐 것 역시 폭넓게 발견된다. 구약에는 탈출기 22:39과 34:19에 첫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있는데 동물로 대신하였으며(탈출 34:20), "인신 제사"는 후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취급되어 금지되었다(레비 20:2-5). 따라서 본 설화의 최초의 모습은 "인신 제사"를 동물 제사로 대치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 즉 인신 희생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전형적인 설화였겠지만, 수 세대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는 가운데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첨가되고 신학적 의도가 개입되어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의 신에 대한 순종을 시험하는 설화로 정착되었다.> (종교비판 자유실현 시민연대, 석동신의 오경해제중에서)
위의 의견에 대한 다비안의 comment를 기다립니다.
commentary가 별건가요?
collection of comments 이니, comment 가 모여서 commentary가 된 것이지요
이런 코멘트가 쌓이면 <Dabian’s commentary>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성경해석의 준거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신제사’(人身祭祀)는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말합니다.
인신제사는 미개한 종족들은 물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중국과 인도, 로마와 그리스, 잉카를 비롯한 중남미의 여러 문화권, 한마디로 모든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도 행해졌던 관습이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이방신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해 졌음을 시사하고 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이방신 몰록에게 ‘인신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금지하도록 한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로켓마을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아브라함 관련해서 예전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계몽주의를 경험한 근대인이 아니라 고대인이기 때문에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근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 제사를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근동에서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자주 있었던 일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다른 개념의 일일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인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쳤다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 '나는 아들을 바치는 것만큼의 헌신을 바라지만 인신제사라는 그릇된 헌신을 요구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들과는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신이다'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바치려는 사건을 통해서 고대인들이 생각해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었던 다른 '신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박종수 교수님(강남대 구약학)의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뜨이는군요.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을 낳고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여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결박한 후에 칼을 들고 죽이려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찬사를 보낸다거나 부러워해서는 결코 안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그토록 항의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아브라함의 처량한 모습만이 우리 눈에 아른거릴 뿐이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성서기자는 왜 이런 끔직한 시험 과정을 독자에게 알리려 하고 있을까?
고대 사회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비록 인육 제사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통용될 때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으로부터 이러한 풍습을 전수 받은 것 같다. 사사 입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은 인신 제사를 서약하여 자기의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친 이야기라든지(삿 11장), 왕국 후반기까지 어린이를 불사르거나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종교적 풍습을 볼 때 인신 제사는 한 때 이스라엘 민중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왕하 17:31; 23:10).
아브라함이 인신 제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가나안의 인신제사 풍습에 익숙했다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를 어떻게 전수 받았을까?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5권)에 나오는 ‘손순매아(孫順埋兒) 설화’는 손순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려고 한 이야기이다. 아이를 땅에 묻으려고 할 때 땅 속에서 석종(石鍾)이 발견되어 그 종 때문에 아이도 살고 온 가족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극한 정성과 믿음은 하늘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오직 생명을 바치는 일 외에 없다는 사고방식은 고대인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에 항의 한번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순순히 따라 나서는 이삭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삭은 자기를 태울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백 세가 훨씬 넘은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결박당한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하심으로 이삭의 생명을 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지켜졌다는 내용이 창세기 22장에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의 생명처럼 귀하다는 가르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으로 소개된 것이다. >
또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 끔찍한 신의 이 요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한다. 소위 "인신 제사" 특히 "자녀 제사"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판관 11:29-40; 열왕 하 17:31, 23:10), 페니키아, 아몬족, 모아브족(열왕 하 3:21), 이집트, 카나안 등 주변 국가들에서도 한정된 기간 동안에 행해졌다. "인신 제사"가 동물 제사로 바뀐 것 역시 폭넓게 발견된다. 구약에는 탈출기 22:39과 34:19에 첫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있는데 동물로 대신하였으며(탈출 34:20), "인신 제사"는 후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취급되어 금지되었다(레비 20:2-5). 따라서 본 설화의 최초의 모습은 "인신 제사"를 동물 제사로 대치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 즉 인신 희생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전형적인 설화였겠지만, 수 세대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는 가운데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첨가되고 신학적 의도가 개입되어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의 신에 대한 순종을 시험하는 설화로 정착되었다.> (종교비판 자유실현 시민연대, 석동신의 오경해제중에서)
위의 의견에 대한 다비안의 comment를 기다립니다.
commentary가 별건가요?
collection of comments 이니, comment 가 모여서 commentary가 된 것이지요
이런 코멘트가 쌓이면 <Dabian’s commentary>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성경해석의 준거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07.04.11 10:13:32
세 번째로 인용한 석동신의 오경해제중에서, 구약에는 탈출기 22:39과 34:19에 첫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있는데 동물로 대신하였으며(탈출 34:20), ----- 이 부분 '탈출기 22:39'는 22:29 의 오식인듯합니다. 물론 '탈출기'는 '출애굽기'를 말하는 것이구요..
2007.04.11 21:35:01
seyoh목사님!
<Dabian's commentary>란 말씀에 고무 되어서
성미 급한 제가 먼저 comment하게 되는군요.*^^*
그냥 저의 사사로운 생각이오니..
큰 의미는 두지 마시고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창세기의 '족장 설화' 중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 기자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당시의 기자들의 글쓰기가 오늘날 목사님처럼
그렇게 합리적이었을까요?
그들은 '야훼 하나님의 약속과 그 분의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독자들에게 해명 내지 해설해 주고자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족장들의 이야기를
신앙적으로 미화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리얼리즘에 입각한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이야기들 까지도..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오직하나, 그들의 삶에 개입 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분께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성서기자들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백세가 된 마당에도
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롬4:19~20)
폐일언하고~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라거나,
즉시 순종하는 마음과 행위를 보시고 나서야
비로소 믿음을 인정해 주시겠다는 식의 하나님이시라면
저는 믿는 걸 잠시 쉬고 싶습니다.^^*
<Dabian's commentary>란 말씀에 고무 되어서
성미 급한 제가 먼저 comment하게 되는군요.*^^*
그냥 저의 사사로운 생각이오니..
큰 의미는 두지 마시고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창세기의 '족장 설화' 중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 기자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당시의 기자들의 글쓰기가 오늘날 목사님처럼
그렇게 합리적이었을까요?
그들은 '야훼 하나님의 약속과 그 분의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독자들에게 해명 내지 해설해 주고자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족장들의 이야기를
신앙적으로 미화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리얼리즘에 입각한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이야기들 까지도..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오직하나, 그들의 삶에 개입 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분께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성서기자들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백세가 된 마당에도
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롬4:19~20)
폐일언하고~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라거나,
즉시 순종하는 마음과 행위를 보시고 나서야
비로소 믿음을 인정해 주시겠다는 식의 하나님이시라면
저는 믿는 걸 잠시 쉬고 싶습니다.^^*
2007.04.11 21:43:18
이제 다비안 주석에 테이프를 끊어 한걸음 내딛었으니, 조만간 다비안 주석이 나올 것 같습니다.
求道者님의 내공이 이소룡은 저리가라 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인용과 해석, 적용을 하시니
완전히 도사급입니다. 참, 아까 감사 빼먹었습니다.
불타오르는 .... 저의 글에 렘브란트 그림 소개 하는 것을 잊었는데
마침, 저의 부족을 채우듯 求道者님이 해주셨더군요......감사!!!!
求道者님의 내공이 이소룡은 저리가라 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인용과 해석, 적용을 하시니
완전히 도사급입니다. 참, 아까 감사 빼먹었습니다.
불타오르는 .... 저의 글에 렘브란트 그림 소개 하는 것을 잊었는데
마침, 저의 부족을 채우듯 求道者님이 해주셨더군요......감사!!!!
2007.04.16 15:02:31
제 생각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로 가는 중에
얼마나 괴로워했겠냐는 것에 약간의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22:5절의 말씀을 보면 모리아 산밑에 이르러 사환들에게 하는
아브라함의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개역한글 성경은 사환들에게 돌아올 때 이삭과 함께인지 아니면 혼자인지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되지만
NIV 영어성경은 "Stay here with the donkey while I and the boy go over there.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선명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히브리서 11:19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찌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으로
생각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이삭을 내리쳐서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가로 막으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로 예수님을 정하셨기 때문은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님 말구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로 가는 중에
얼마나 괴로워했겠냐는 것에 약간의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22:5절의 말씀을 보면 모리아 산밑에 이르러 사환들에게 하는
아브라함의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개역한글 성경은 사환들에게 돌아올 때 이삭과 함께인지 아니면 혼자인지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되지만
NIV 영어성경은 "Stay here with the donkey while I and the boy go over there.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선명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히브리서 11:19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찌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으로
생각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이삭을 내리쳐서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가로 막으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로 예수님을 정하셨기 때문은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님 말구요....
2007.04.17 16:24:50
사오정님 , 예, 히 11: 19 은 히브리서 기자가 그렇게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었다는 말이지만 .
아브라함의 속 마음을 읽어내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지요...
그 구절을 빼놓고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는 것은 헛다리 긁는 격이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속 마음을 읽어내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지요...
그 구절을 빼놓고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는 것은 헛다리 긁는 격이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2007.05.09 16:05:06
이 부분에 대해 제가 나름대로 답을 얻은 것은 김홍전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서를 통하여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고대근동의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임을 전제로 그분이 스스로 인신제사가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선언을 하신 분인데 스스로가 자신의 선언과는 배치되는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인신제사로 해석을 하여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는 제물인 이삭을 죽이기 이전까지의 행동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께 열납이 된것으로 보아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물리적으로 이삭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라는 취지는 아닌것 같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12:1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권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되네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인 예배니라
안녕하세요 다비안에는 처음 글을 남기네요. 저는 목회자는 아니구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글고 아직 여기 글을 쓰시는 분들에 비하면 한참 멀었구요. 여기서 많은 도움을 받았네요... 앞으로 좋은 교제들을 기대합니다...
안녕하세요 다비안에는 처음 글을 남기네요. 저는 목회자는 아니구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글고 아직 여기 글을 쓰시는 분들에 비하면 한참 멀었구요. 여기서 많은 도움을 받았네요... 앞으로 좋은 교제들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