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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7) – 저물어 해질 때에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막 1: 32-33)
본문을 읽다가 유독 제 눈을 끄는 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첫 부분 “저물어 해질 때에”란 부분입니다.
마가가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종이도 귀하고 그럴 때인데 글자 한자라도 줄일 것이지 굳이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같은 의미의 말을 되풀이 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해가 진 후”라던가 “그날 밤에”라고 기록하면 될 터인데 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니지 … 성경의 기록은 말 한마디가 다 그 뜻이 있지..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차분히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개역 한글에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번역을 해 놓았고 아가페 쉬운성경을 찾아 보았더니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라고 제가 맨처음 먹었던 생각과 같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찾아 보았습니다.
“해질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0)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6)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해질 적에, 해가 질 때, 저물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마태 복음에 비해서 마가는 유달리 ‘ 해가 진 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마가는 해가 진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 해가, 해가 지자… 해 ..혹시 이 말이 그냥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그 무언가 해와 관련되는 그 무엇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소설식으로 말하면 복선이 깔린 단어이다. 무언가 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래서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1절에 와서 제 눈이 다시 한번 멈췄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
안식일이라 .. 이말에 일단 마크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 특히 신약에서- 안식일이란 말이 나타나면 그 뒤에 무언가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이 ‘해가 진 후에’ 라는 말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래서 우선 그 안식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21-22) 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시고 ( 23- 28)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걸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셨습니다.( 29-31)
그렇게 21절로부터 31절까지가 그날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면 32절도 역시 같은 그 안식일에 일어난 일인가?
저물어 해질 때에 …. 그렇지 같은 날, 그러니 안식일이지 라고 생각하다가 … 이게 유대인의 날짜이니 …우리나라 식으로 계산으로 하면 안되지 ..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식의 계산으로는 분명 같은 날인데 그런데 유대식으로 보면 이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시간 계산으로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은 해가 진후 하루가 시작되어서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를 그날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해가 져도 그날, 같은 날인데 비하여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해가 지면 이제 다음 날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종합해서 32절을 읽어보니 32절의 “저물어 해질 때에”라는 말은 그 날, 안식일이 지나고 … 안식일의 해가 떨어지자 마자 … 이런 말이 되겠고 그렇게 안식일이 지나니 병들고 귀신들린 백성들이 모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지 못하니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해가 지니 비로소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비로소 해가 지자 모여들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해가 쨍쨍 비칠 때 와서 고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잡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나오지 못하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진 후 비로소 나올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가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는 말 속에 담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석이 되니까 그제서야 마가가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기록한 그 행간에는, 어서 안식일이 지나 갔으면 하는 그 백성들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런 마음을 담아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기록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막 1: 32-33)
본문을 읽다가 유독 제 눈을 끄는 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첫 부분 “저물어 해질 때에”란 부분입니다.
마가가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종이도 귀하고 그럴 때인데 글자 한자라도 줄일 것이지 굳이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같은 의미의 말을 되풀이 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해가 진 후”라던가 “그날 밤에”라고 기록하면 될 터인데 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니지 … 성경의 기록은 말 한마디가 다 그 뜻이 있지..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차분히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개역 한글에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번역을 해 놓았고 아가페 쉬운성경을 찾아 보았더니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라고 제가 맨처음 먹었던 생각과 같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찾아 보았습니다.
“해질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0)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6)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해질 적에, 해가 질 때, 저물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마태 복음에 비해서 마가는 유달리 ‘ 해가 진 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마가는 해가 진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 해가, 해가 지자… 해 ..혹시 이 말이 그냥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그 무언가 해와 관련되는 그 무엇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소설식으로 말하면 복선이 깔린 단어이다. 무언가 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래서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1절에 와서 제 눈이 다시 한번 멈췄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
안식일이라 .. 이말에 일단 마크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 특히 신약에서- 안식일이란 말이 나타나면 그 뒤에 무언가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이 ‘해가 진 후에’ 라는 말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래서 우선 그 안식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21-22) 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시고 ( 23- 28)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걸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셨습니다.( 29-31)
그렇게 21절로부터 31절까지가 그날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면 32절도 역시 같은 그 안식일에 일어난 일인가?
저물어 해질 때에 …. 그렇지 같은 날, 그러니 안식일이지 라고 생각하다가 … 이게 유대인의 날짜이니 …우리나라 식으로 계산으로 하면 안되지 ..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식의 계산으로는 분명 같은 날인데 그런데 유대식으로 보면 이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시간 계산으로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은 해가 진후 하루가 시작되어서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를 그날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해가 져도 그날, 같은 날인데 비하여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해가 지면 이제 다음 날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종합해서 32절을 읽어보니 32절의 “저물어 해질 때에”라는 말은 그 날, 안식일이 지나고 … 안식일의 해가 떨어지자 마자 … 이런 말이 되겠고 그렇게 안식일이 지나니 병들고 귀신들린 백성들이 모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지 못하니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해가 지니 비로소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비로소 해가 지자 모여들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해가 쨍쨍 비칠 때 와서 고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잡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나오지 못하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진 후 비로소 나올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가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는 말 속에 담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석이 되니까 그제서야 마가가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기록한 그 행간에는, 어서 안식일이 지나 갔으면 하는 그 백성들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런 마음을 담아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기록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2007.04.11 21:13:46
德松 님, '단걸음'이란 말을 사용하셔서 예삿 분이 아니리라 생각하고 살펴보니 정말 그렇군요.
인생의 선배님이십이다.
저의 글을 여러모로 살피시며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글은 아직도 체계가 잡히지 않아 습작 같은 부분이 많습니다.
잘 살펴주시고, 고칠 부분 말씀해주십시요....
인생의 선배님이십이다.
저의 글을 여러모로 살피시며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글은 아직도 체계가 잡히지 않아 습작 같은 부분이 많습니다.
잘 살펴주시고, 고칠 부분 말씀해주십시요....
2007.04.11 21:45:32
德松님!
오늘 <세상읽기>꼭지에서 소개해 주신 글 읽고 감동 받았는데,
여기서 또 반가운 이름 뵙는군요.
저도 인생의 선배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자주 뵙지요.*^^*
오늘 <세상읽기>꼭지에서 소개해 주신 글 읽고 감동 받았는데,
여기서 또 반가운 이름 뵙는군요.
저도 인생의 선배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자주 뵙지요.*^^*
2007.04.11 21:54:01
求道者님과 德松님은 이미 구면이네요...벌써 소개를 마치고 댓글도 나누셨더군요.
그래서 저도 德松님이 옮겨 놓으신 <신앙적 해결 >을 가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소개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우리끼리(?) 니까 하는 말이지만, 요즈음 옛것을 자꾸 잃어버리고 잊어버려 문제가 많지요?
그래서 시세에 영합하는 가벼운 글들이 득세하는 이 때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님들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오히려 믿음에 나을 듯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德松님이 옮겨 놓으신 <신앙적 해결 >을 가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소개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우리끼리(?) 니까 하는 말이지만, 요즈음 옛것을 자꾸 잃어버리고 잊어버려 문제가 많지요?
그래서 시세에 영합하는 가벼운 글들이 득세하는 이 때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님들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오히려 믿음에 나을 듯 싶습니다.
2007.04.11 21:56:21
퇴근하여 집에 와서 보니 벌써 답장이!
개인 정보를 보신것 같군요. 인생의 후반부에 다비아를 만나 즐겁고 기쁩니다
다만 이기쁨을 마음놓고 나눌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살짝 주위 사람에게 말하여 보니 펄쩍!
아직 나의 지식으로 녹이지 못하였나봅니다
나에게 꿈이 있다면 다비아에 올린 목사님의 글들에 딴지를 걸어보는 것인데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의심의 구름을 걷어내는 것인데
우선 열심히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개인 정보를 보신것 같군요. 인생의 후반부에 다비아를 만나 즐겁고 기쁩니다
다만 이기쁨을 마음놓고 나눌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살짝 주위 사람에게 말하여 보니 펄쩍!
아직 나의 지식으로 녹이지 못하였나봅니다
나에게 꿈이 있다면 다비아에 올린 목사님의 글들에 딴지를 걸어보는 것인데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의심의 구름을 걷어내는 것인데
우선 열심히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2007.04.11 22:17:16
저도 맨처음 이글을 시작할 때 책들의 여백과 행간에 의문점들을 가득 적어나가면서
며칠씩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글이랍시고 쓰기는 했지만, 아직도 거기 보면 설 풀어놓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의심의 구름을 걷어내는 것> 이란 말씀이 바로 제 생각입니다.
혹 보시고 그런 사항들 있으면 알려주십시요. 그래서 같이 연구하도록 하십시다.
그런데, 퇴근후 쉬지시도 않고 바로 이리로 오셨습니까?
혹 가슴에 무언가 불 붙은 것 아닌가요? 무슨 타는 냄새가 나는 듯 합니다.
며칠씩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글이랍시고 쓰기는 했지만, 아직도 거기 보면 설 풀어놓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의심의 구름을 걷어내는 것> 이란 말씀이 바로 제 생각입니다.
혹 보시고 그런 사항들 있으면 알려주십시요. 그래서 같이 연구하도록 하십시다.
그런데, 퇴근후 쉬지시도 않고 바로 이리로 오셨습니까?
혹 가슴에 무언가 불 붙은 것 아닌가요? 무슨 타는 냄새가 나는 듯 합니다.
2007.04.12 01:48:08
'저물어 해질 때에' 가 그런 기이픈 , 가슴아픈,
애가타는 내용들이 있었다는게 놀랍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뭔가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던
바로 그 부분이 목사님덕분에 잡혔습니다.
어서 빨리 안식일이 지나기를 고대했던 그 상한 심령들의 갈급함을....
이제는 예수께서 다 이루심으로 우린 언제 어느 시 어느곳과 상관없이
아버지앞으로 갈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것입니까^^
아니 그보다도
내가 아버지께 가기도 전에
나와 항상 같이계신다니 이보다 더 좋을수가^.^
딴지라는말을 생각없이 남용한것 용서해 주십시오~
늘 주님의 사랑이^^
애가타는 내용들이 있었다는게 놀랍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뭔가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던
바로 그 부분이 목사님덕분에 잡혔습니다.
어서 빨리 안식일이 지나기를 고대했던 그 상한 심령들의 갈급함을....
이제는 예수께서 다 이루심으로 우린 언제 어느 시 어느곳과 상관없이
아버지앞으로 갈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것입니까^^
아니 그보다도
내가 아버지께 가기도 전에
나와 항상 같이계신다니 이보다 더 좋을수가^.^
딴지라는말을 생각없이 남용한것 용서해 주십시오~
늘 주님의 사랑이^^
2007.04.12 12:43:42
빈의자님, 댓글 감사합니다.
위에 쓴 것처럼, 성경 기록자가 말 한마디를 그냥 할리는 없다는 저의 생각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단, 그런 전제 위에 위와 같은 생각을 해 보았는데, 그게 '정통적인 해석'(?)에 맞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겠구나, 정도로 읽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위에 쓴 것처럼, 성경 기록자가 말 한마디를 그냥 할리는 없다는 저의 생각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단, 그런 전제 위에 위와 같은 생각을 해 보았는데, 그게 '정통적인 해석'(?)에 맞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겠구나, 정도로 읽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2007.04.12 15:18:33
얼마전 주일 설교 말씀과 본문이 같아서 더 재미있게 의미있게 읽었습니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신, 안식일의 주인되신 분을 언제인가 부터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각주 없이 성경 읽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항상 갈구하던 성경읽기의 방법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07.04.12 23:06:00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귀납법 성경읽기의 묘미를 느낍니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께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면 다 먹고도 모자라 아쉬워 혓바닥으로 접시를 핣듯이 마치 성경을 맛있게 씹어 먹고 핣아 먹는 기분입니다. 시편기자의 '주의 말씀이 내 입에 꿀송이 보다 달다'는 고백을 경험합니다. 주의 은총이.....
2007.04.14 14:12:30
로켓마을님, 임목사님 댓글 감사합니다.
글 속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다 담겨 있는지, 이럴 때 글재주가 없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읽고 댓글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댓글 보면 제가 다시 한번 글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글 속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다 담겨 있는지, 이럴 때 글재주가 없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읽고 댓글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댓글 보면 제가 다시 한번 글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지난해 느헤미야서로 리더쉽에 관한 설교를 몇개월 들을 때 과연 저게 나한테 필요한 것인가?
느헤미야서가 왜 리더쉽교제가 되었나? 등으로 불편한 시간들을 보냈든 기억이 새롭습니다
단 걸음으로 읽느라 세밀히 읽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잡게 되었습니다
'칼과 칼집'은 읽었지만 기억에 남은것이 없어 다행이지만 아들에게 추천한게 좀 쑥스럽군요.
'저물에 해질때에'는 마지막 글이라 느긋하게 읽었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좋은 316' 읽느라 늦어진 퇴근 할랍니다
이후 여유로운 마음으로 정독으로 한번 더 읽어볼랍니다
우선 인사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