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0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9) - 양을 찾은 목자는 왜 잔치를 벌였을까?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4-6)
양을 잃었던 목자는 그 양을 찾은 다음에 이웃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잃었던 양을 찾은 것이 아무리 기쁘다고 해도 잔치를 벌일 정도일까요? 그게 그리 기쁜 일일까요? 잃었던 양을 찾았다는 말은 재산의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고작해야 본전이라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면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 아닐까요? 잔치를 하려면 불가불 여러 가지 음식들도 준비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사람들이 슬픔과 기쁨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그 격언은 흔히 남이 슬픔을 당했을 때 위로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까? 뭐, 손에 들고 있는 빵처럼 반절로 뚝 떼어서 나눠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먼저 슬픔을 나누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이때 굳이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까요? 무어라 할 말 없습니다.”
그런 다음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면 됩니다. 슬픔을 당하는 사람편에서도 역시 이런 인사말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슬픔이 어느 정도인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위로하는 사람 손을 잡고 같이 울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도 슬픔은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면 이것을 기쁨을 나누는 경우에 적용해 봅시다.
축하해주러 간 사람이 말을 합니다. “무슨 말로 축하를 드려야 할까요?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어때요? 약간 이상하지요.
그리고 기쁜 사람이 축하해 주러 온 사람에게 아무런 말이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다가가서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축하합니다.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이런 축하의 말에 아무 말도 대꾸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언가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축하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기뻐하고 축하를 받는 기분이 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냥 말로만 해서는 별로입니다. 말과 더불어 무언가를 더 해야 합니다. 어떻게 기쁨을 축하하고, 나눌 것인가? 그것은 기쁨의 단계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본인 속으로만 기쁜 정도입니다. 콧노래가 나오고 즐겁기는 한데 그냥 혼자서도 견딜만한 정도 - 물론 견딘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지만 - 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축하해주는데 별 다른 행동이 필요없습니다. 본인이 혼자 즐거워하는 단계이니까요.
두번째 단계는 그것이 겉으로 표현이 되는 단계입니다. 이 경우는 우리나라 말 ‘입이 귀에 걸린다’ 라는 표현이 적당한 단계로 그래서 다른 사람이 척 보면 그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단계에서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그냥 줄줄줄 자기가 어때서 기분이 좋은지 이야기를 해 버리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기쁨의 가장 최고 단계는 그 기쁨을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친구를 불러 모아 밥을 같이 먹거나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잔치를 벌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함께하는 단계가 되면, 그 잔치자리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연스럽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해서 기쁨이 나누어 지고 결국은 기쁨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목자는 잃었던 양을 찾은 후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하자 그럽니다. 6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기자 했으니 뒤이어 잔치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6절로 보아, 지금까지 검토한 기쁨의 3단계중에서 가장 최상의 단계인 이웃과 친구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는 단계입니다.
그렇게 이웃과 친구를 불러모아 잔치를 벌이게 되는 원인은 잃었던 한마리 양을 찾아온 것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잃은 양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잃은 양을 되찾은 것은 실상은 자기의 재산에 더 프러스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없어질 뻔한 재산을 그냥 유지하는 차원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그 양을 다시 찾은 것을 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줄거워하되 1단계나 2단계도 아니고 기쁨의 가장 높은 단계인 잔치를 벌여서까지 그 기쁨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어느날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애를 쓰고 찾았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일 때문에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 양과 주인과의 사이가 무언가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있다, 무언가 특별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그 주인이 양을 단순한 하나의 물건이나, 재산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양을 생각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을 들여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만약 양을 그냥 하나의 재산으로 생각했다면 굳이 잔치를 벌일 필요가 없겠지요. 잔치하자면 돈이 드는데, 재산의 일부인 양을 찾은 것을 가지고 다시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여기 둘사이를 그 이상의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시편을 읽어볼까요. 시편 100편입니다.
시편 100: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
바로 여기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는 말속에 누가복음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지! 그런 관계가 있구나, 그러니 그렇게 힘들여 찾아 헤메는 것이고, 또 찾은즉 돌아와 잔치를 벌이는 것이구나.'
그래서 이런 시편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을 때에 별다른 보충 설명없이도 그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청중들에게 할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 말씀인 시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바로 시편 100편, 그리고 시편 23편을 떠올리면서 여기의 목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양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바로 양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양은 그의 백성인 우리를 말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기르시는 양인 '우리'를 끝까지 찾아 다니시다가 찾은즉 즐거워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기초로 하여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가면서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가서 드디어 양을 발견합니다.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여기서 '즐거워'는 자기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단계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속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말입니다.
그 다음 5절 하반절, ‘어깨에 메고.’ 이 말을 다르게도 해석할 수가 있겠지만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와 아이들을 어깨에 무동태워주던 그런 시간들을 기억 해 보았습니다. 그때 나와 아이들은 얼마나 기뻤던가? 그래서 '어깨에 메고'라는 말은 이제 기쁨이 밖으로 표현되는 단계입니다. 기쁨이 넘쳐서 혼자 속으로만 감당할 수가 없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양을 찾은 일이 기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양 때문에 애쓰고 헤맨 것을 분하게 생각했다면 어깨에 양을 메고 오는게 아니라, 아마 양의 목에다 줄을 걸어서 마구 마구 끌고 올 것입니다. 개 끌듯이 끌고 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는 그렇게 힘들게 양을 찾았던 그 고생은 다 잊어버리고 양을 찾았다는 기쁨에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른 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단계로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이는 단계는 아까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게 그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낸 것을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양이 '그의 기르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자는 그렇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양은 주인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입니다. 만약 기쁨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성가신 존재라면 그 양이 없어졌을 때에 ‘아이구 속시원하다 십년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하면서 좋아라 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 17)
그래서 우리는 한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게 되었으며, 그러길래 그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품에 돌아왔을 때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기쁨의 잔치를 벌이셨다는 10절의 말씀이 이제 충분히 이해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4-6)
양을 잃었던 목자는 그 양을 찾은 다음에 이웃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잃었던 양을 찾은 것이 아무리 기쁘다고 해도 잔치를 벌일 정도일까요? 그게 그리 기쁜 일일까요? 잃었던 양을 찾았다는 말은 재산의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고작해야 본전이라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면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 아닐까요? 잔치를 하려면 불가불 여러 가지 음식들도 준비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사람들이 슬픔과 기쁨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그 격언은 흔히 남이 슬픔을 당했을 때 위로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까? 뭐, 손에 들고 있는 빵처럼 반절로 뚝 떼어서 나눠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먼저 슬픔을 나누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이때 굳이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까요? 무어라 할 말 없습니다.”
그런 다음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면 됩니다. 슬픔을 당하는 사람편에서도 역시 이런 인사말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슬픔이 어느 정도인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위로하는 사람 손을 잡고 같이 울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도 슬픔은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면 이것을 기쁨을 나누는 경우에 적용해 봅시다.
축하해주러 간 사람이 말을 합니다. “무슨 말로 축하를 드려야 할까요?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어때요? 약간 이상하지요.
그리고 기쁜 사람이 축하해 주러 온 사람에게 아무런 말이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다가가서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축하합니다.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이런 축하의 말에 아무 말도 대꾸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언가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축하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기뻐하고 축하를 받는 기분이 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냥 말로만 해서는 별로입니다. 말과 더불어 무언가를 더 해야 합니다. 어떻게 기쁨을 축하하고, 나눌 것인가? 그것은 기쁨의 단계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본인 속으로만 기쁜 정도입니다. 콧노래가 나오고 즐겁기는 한데 그냥 혼자서도 견딜만한 정도 - 물론 견딘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지만 - 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축하해주는데 별 다른 행동이 필요없습니다. 본인이 혼자 즐거워하는 단계이니까요.
두번째 단계는 그것이 겉으로 표현이 되는 단계입니다. 이 경우는 우리나라 말 ‘입이 귀에 걸린다’ 라는 표현이 적당한 단계로 그래서 다른 사람이 척 보면 그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단계에서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그냥 줄줄줄 자기가 어때서 기분이 좋은지 이야기를 해 버리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기쁨의 가장 최고 단계는 그 기쁨을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친구를 불러 모아 밥을 같이 먹거나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잔치를 벌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함께하는 단계가 되면, 그 잔치자리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연스럽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해서 기쁨이 나누어 지고 결국은 기쁨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목자는 잃었던 양을 찾은 후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하자 그럽니다. 6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기자 했으니 뒤이어 잔치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6절로 보아, 지금까지 검토한 기쁨의 3단계중에서 가장 최상의 단계인 이웃과 친구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는 단계입니다.
그렇게 이웃과 친구를 불러모아 잔치를 벌이게 되는 원인은 잃었던 한마리 양을 찾아온 것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잃은 양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잃은 양을 되찾은 것은 실상은 자기의 재산에 더 프러스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없어질 뻔한 재산을 그냥 유지하는 차원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그 양을 다시 찾은 것을 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줄거워하되 1단계나 2단계도 아니고 기쁨의 가장 높은 단계인 잔치를 벌여서까지 그 기쁨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어느날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애를 쓰고 찾았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일 때문에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 양과 주인과의 사이가 무언가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있다, 무언가 특별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그 주인이 양을 단순한 하나의 물건이나, 재산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양을 생각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을 들여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만약 양을 그냥 하나의 재산으로 생각했다면 굳이 잔치를 벌일 필요가 없겠지요. 잔치하자면 돈이 드는데, 재산의 일부인 양을 찾은 것을 가지고 다시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여기 둘사이를 그 이상의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시편을 읽어볼까요. 시편 100편입니다.
시편 100: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
바로 여기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는 말속에 누가복음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지! 그런 관계가 있구나, 그러니 그렇게 힘들여 찾아 헤메는 것이고, 또 찾은즉 돌아와 잔치를 벌이는 것이구나.'
그래서 이런 시편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을 때에 별다른 보충 설명없이도 그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청중들에게 할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 말씀인 시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바로 시편 100편, 그리고 시편 23편을 떠올리면서 여기의 목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양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바로 양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양은 그의 백성인 우리를 말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기르시는 양인 '우리'를 끝까지 찾아 다니시다가 찾은즉 즐거워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기초로 하여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가면서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가서 드디어 양을 발견합니다.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여기서 '즐거워'는 자기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단계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속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말입니다.
그 다음 5절 하반절, ‘어깨에 메고.’ 이 말을 다르게도 해석할 수가 있겠지만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와 아이들을 어깨에 무동태워주던 그런 시간들을 기억 해 보았습니다. 그때 나와 아이들은 얼마나 기뻤던가? 그래서 '어깨에 메고'라는 말은 이제 기쁨이 밖으로 표현되는 단계입니다. 기쁨이 넘쳐서 혼자 속으로만 감당할 수가 없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양을 찾은 일이 기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양 때문에 애쓰고 헤맨 것을 분하게 생각했다면 어깨에 양을 메고 오는게 아니라, 아마 양의 목에다 줄을 걸어서 마구 마구 끌고 올 것입니다. 개 끌듯이 끌고 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는 그렇게 힘들게 양을 찾았던 그 고생은 다 잊어버리고 양을 찾았다는 기쁨에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른 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단계로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이는 단계는 아까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게 그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낸 것을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양이 '그의 기르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자는 그렇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양은 주인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입니다. 만약 기쁨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성가신 존재라면 그 양이 없어졌을 때에 ‘아이구 속시원하다 십년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하면서 좋아라 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 17)
그래서 우리는 한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게 되었으며, 그러길래 그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품에 돌아왔을 때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기쁨의 잔치를 벌이셨다는 10절의 말씀이 이제 충분히 이해되는 것입니다.
2007.04.18 21:11:47
스바냐 3:17절은
구약 성구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지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니 이게 웬 은혜인가요?
일상적인 언어로,
잃은 양을 찾아낸 목자의 기쁜 마음을
재미있게 보여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구약 성구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지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니 이게 웬 은혜인가요?
일상적인 언어로,
잃은 양을 찾아낸 목자의 기쁜 마음을
재미있게 보여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2007.04.18 21:18:26
소나기님, 제가 자주 보지 못한 분인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글 속에서 시편 23편의 은혜를 다시 느끼셨다니, 복된 일입니다.
핑안 .......중국어 하시나 봅니다. 역시 저도 핑안...
저의 글 속에서 시편 23편의 은혜를 다시 느끼셨다니, 복된 일입니다.
핑안 .......중국어 하시나 봅니다. 역시 저도 핑안...
2007.04.18 21:20:17
求道者 님, 제가 열거한 '기쁨의 단계와 기쁨 나누는 방법'이 혹 틀리지나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만약 저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고쳐주십시오....댓글 감사합니다. 항상 ....
그게 만약 저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고쳐주십시오....댓글 감사합니다. 항상 ....
2007.04.18 22:15:00
신앙을, 만남과 관계의 문제로 보면, 쉽게 풀려간다고 저는 생각해 왔는데,
목사님 또한 그렇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신앙과 구원, 이런 주제들을 굳이 거창하게 볼 필요는 없고,
지극히 일상적으로 바라보면, 도리어 쉽지 않나라고, 어렴풋이나마 감이 오기 시작하던데요.
그런데, 목사님의 글을 보니, 이, 쉽게 보는 시각으로 성서를 보면,
지금껏 놓쳤던 것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목사님 또한 그렇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신앙과 구원, 이런 주제들을 굳이 거창하게 볼 필요는 없고,
지극히 일상적으로 바라보면, 도리어 쉽지 않나라고, 어렴풋이나마 감이 오기 시작하던데요.
그런데, 목사님의 글을 보니, 이, 쉽게 보는 시각으로 성서를 보면,
지금껏 놓쳤던 것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2007.04.19 03:36:17
제 심보가 원래 비뚤어져서요^^;
좋은거 보면 괜히 시비한판 겁니다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입장과 자녀의 입장이 다르다는거.....
그러니까 생각이 다른거겠죠.
아버지는 아들의 먼 장래까지 계획하시고 오늘을 보는거고 자녀들은 오늘만 보고 미래는 못보는데서 오는 아버지와의 소통의 부재....
가령,
기도역시 부자간의 대화이며 그 이전에 부자라는 관계가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지금 당장 원하기를 때를쓴다는거.....
아버지는 아무리 좋은거를 좋은길을 일러줘도
우리는 그게 아닌데요...잉잉...빨리줘잉..
제는 주면서 난왜 안주냐고 가출한다니까요.ㅎㅎㅎ
뭔 소린지 지도 헷갈림다ㅡ.ㅡ;
에이레네^^;
좋은거 보면 괜히 시비한판 겁니다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입장과 자녀의 입장이 다르다는거.....
그러니까 생각이 다른거겠죠.
아버지는 아들의 먼 장래까지 계획하시고 오늘을 보는거고 자녀들은 오늘만 보고 미래는 못보는데서 오는 아버지와의 소통의 부재....
가령,
기도역시 부자간의 대화이며 그 이전에 부자라는 관계가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지금 당장 원하기를 때를쓴다는거.....
아버지는 아무리 좋은거를 좋은길을 일러줘도
우리는 그게 아닌데요...잉잉...빨리줘잉..
제는 주면서 난왜 안주냐고 가출한다니까요.ㅎㅎㅎ
뭔 소린지 지도 헷갈림다ㅡ.ㅡ;
에이레네^^;
2007.04.19 18:05:51
빈의자 님, 잔뜩 기대하고 읽었는데요...시비건다고 해서.
그런데 시시비비가 없어요..... 다, 좋은 이야기 아녜요?
<아버지는 아무리 좋은 거를 좋은 길을 일러줘도 우리는 그게 아닌데요...잉잉...빨리줘잉.. >
이정도면 얼마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까? 우리의 모습을 그려 내기로는 더 이상 잘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시시비비가 없어요..... 다, 좋은 이야기 아녜요?
<아버지는 아무리 좋은 거를 좋은 길을 일러줘도 우리는 그게 아닌데요...잉잉...빨리줘잉.. >
이정도면 얼마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까? 우리의 모습을 그려 내기로는 더 이상 잘 할 수가 없지요...
2007.04.22 23:50:25
오 목사님이 드신 예화를 보면서 애견몽이가출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약 8년전에 우리집 개 몽이가 가출한 적이 있는데, 온 가족이 찾아다녔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밥을 먹지도 못하고 찾아다녔습니다. 가장 잘 찍은 몽이사진을 스캔해서 가톨릭대학교 학생들이 피씨통신 천리안에 개설한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고요..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친구이자 동생인 몽이가 없어졌다는 거였습니다. 다행히 다음날 오후에 찾아서 침울하던 집 분위기가 웃음이 가득한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달라지더라고요..물론, 동네사람 불러서 잔치를 하지는 않았지만, 밥상분위기가 달라져서 매우 행복했죠..아마 우리를 잃었다가 성자 예수님을 보내서 되찾은 성부 하느님의 마음이 그러하셨을 것 같아요..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르고.
그때 당시 유목민들의 삶은 양의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삶이 였다죠.ㅋ
그러니..
시편 23편이 더 은혜로 다가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핑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