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0)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1-28, 막 7:24~30).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쫓아가노라면 예수님과 만났던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 했던 로마의 백부장,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치료해주시되 모두 그들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누가 7:9 에서 로마의 백부장에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셨고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각각 그들의 믿음을 크다 칭찬하시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하인과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그들의 어떠한 면을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믿음이 크다 하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을까요?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믿음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떤 점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셨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의 믿음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그 사건의 개요를 살펴봅시다.
가나안 여인,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여인은 헬라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들려서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장면입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오니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26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많은 분들이 예수님께서 그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셨다,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저도 그러한 설교를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해설해 놓은 책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해석에 반대합니다.  

저는 이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두 가지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말씀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해 보았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즉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해석상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개라고 한 것은 원문에 의하면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에는 애완용 개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개라고 하면 모두 집안 마당이나 집밖에 두고 기르는 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헬라-그리스-에서는 그러한 애완용 개를 기르고 있어 그러한 개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여인이면서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유대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그냥 개라고 알아들은 반면에 이 여자는 예수님이 말하는 속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의 일이 한 가지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의 일이었는데 눈이 펑펑 오는 겨울에 학교에 갔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께서 저를 맞이하시면서 "아이구 추웠지, 내 강아지 어서 들어와 몸 좀 녹여라"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저를 귀여워 하셔서 강아지라고 부르시던 그 다정한 그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은데 만일 한국문화를 모르거나 전혀 그 상황을 모르는 미국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 한다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오 ! 저 할머니 나빠요! 자기 손자를 개라고 불러요" 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여인에게 개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문자 그대로 개라고 그 여인을 모욕하며 부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완용 개라는 단어를 통하여 그 여인과 통할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그 속에서 둘만의 대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 주변에 둘러 서 있던 주변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른 것처럼 들렸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로 들었던 저의 경우처럼 할머니가 나를 강아지라 부르셨을 때에 미국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겠지만, 저와 저의 할머니 사이에는 그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만큼의 뜨거운 정이 넘쳤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둘의 대화를 해석하여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앞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냐 하는 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가슴에 말일망정 상처를 주시는 분은 전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만일 그런데도 그렇게 해석이 되는 말씀을 했다면 표면적인 언어의 뜻보다는 더 깊은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확실히 인식한 다음 거기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아무리 당시에 대접받지 못하던 여인, 그것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시며 상처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식의 개가 아니라 더 깊은 뜻 – 애완용 개- 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서 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크다 하셨는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예수님과 통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서로 통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여자의 반응을 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을 이 주변에 서 있는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저 여자만은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여자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윽고 여자가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이 어떤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의도한 바대로 그 말씀을 완벽히 애완용 개라고 이해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 헬라에서는 집안에 있는 애완용 개들은 집안에서 주인과 함께 기거하면서 밥도 같이 먹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는 실제로 부스러기가 아니라 주인과 같이 먹는 밥입니다."
이렇게 그 여인이 화답을 했으니 한마디로 얼마나 센스 있고 부드러운 대답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거기에 화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게 예수님이 여인의 말에 응답하시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결과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가복음 7:29 -30 에서는 마태복음과 약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바로 그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절묘한 대답이 예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들었던 해석에서는 그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침 받게 된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님이 개라고 부르는 모욕을 참고 끝까지 견디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욕하는 말씀을 하실지라도 참아라, 라고 말입니다.

글쎄, 저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모욕을 주는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신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런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 해석이 다르면 거기에 따라 얻어지는 교훈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개라고 모욕했다고 해석해서는 성경을 백 번을 읽어도 거기에서 바른 교훈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 얻는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하여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고, 제대로 응답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쁘게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 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개라고 모욕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좀 더 깊은 차원에서 교통하시고 싶어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우리가 올바르게 대답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시며 기쁘게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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