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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0)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1-28, 막 7:24~30).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쫓아가노라면 예수님과 만났던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 했던 로마의 백부장,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치료해주시되 모두 그들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누가 7:9 에서 로마의 백부장에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셨고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각각 그들의 믿음을 크다 칭찬하시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하인과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그들의 어떠한 면을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믿음이 크다 하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을까요?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믿음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떤 점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셨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의 믿음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그 사건의 개요를 살펴봅시다.
가나안 여인,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여인은 헬라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들려서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장면입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오니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26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많은 분들이 예수님께서 그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셨다,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저도 그러한 설교를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해설해 놓은 책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해석에 반대합니다.
저는 이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두 가지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말씀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해 보았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즉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해석상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개라고 한 것은 원문에 의하면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에는 애완용 개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개라고 하면 모두 집안 마당이나 집밖에 두고 기르는 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헬라-그리스-에서는 그러한 애완용 개를 기르고 있어 그러한 개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여인이면서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유대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그냥 개라고 알아들은 반면에 이 여자는 예수님이 말하는 속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의 일이 한 가지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의 일이었는데 눈이 펑펑 오는 겨울에 학교에 갔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께서 저를 맞이하시면서 "아이구 추웠지, 내 강아지 어서 들어와 몸 좀 녹여라"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저를 귀여워 하셔서 강아지라고 부르시던 그 다정한 그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은데 만일 한국문화를 모르거나 전혀 그 상황을 모르는 미국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 한다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오 ! 저 할머니 나빠요! 자기 손자를 개라고 불러요" 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여인에게 개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문자 그대로 개라고 그 여인을 모욕하며 부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완용 개라는 단어를 통하여 그 여인과 통할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그 속에서 둘만의 대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 주변에 둘러 서 있던 주변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른 것처럼 들렸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로 들었던 저의 경우처럼 할머니가 나를 강아지라 부르셨을 때에 미국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겠지만, 저와 저의 할머니 사이에는 그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만큼의 뜨거운 정이 넘쳤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둘의 대화를 해석하여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앞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냐 하는 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가슴에 말일망정 상처를 주시는 분은 전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만일 그런데도 그렇게 해석이 되는 말씀을 했다면 표면적인 언어의 뜻보다는 더 깊은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확실히 인식한 다음 거기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아무리 당시에 대접받지 못하던 여인, 그것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시며 상처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식의 개가 아니라 더 깊은 뜻 – 애완용 개- 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서 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크다 하셨는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예수님과 통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서로 통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여자의 반응을 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을 이 주변에 서 있는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저 여자만은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여자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윽고 여자가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이 어떤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의도한 바대로 그 말씀을 완벽히 애완용 개라고 이해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 헬라에서는 집안에 있는 애완용 개들은 집안에서 주인과 함께 기거하면서 밥도 같이 먹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는 실제로 부스러기가 아니라 주인과 같이 먹는 밥입니다."
이렇게 그 여인이 화답을 했으니 한마디로 얼마나 센스 있고 부드러운 대답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거기에 화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게 예수님이 여인의 말에 응답하시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결과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가복음 7:29 -30 에서는 마태복음과 약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바로 그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절묘한 대답이 예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들었던 해석에서는 그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침 받게 된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님이 개라고 부르는 모욕을 참고 끝까지 견디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욕하는 말씀을 하실지라도 참아라, 라고 말입니다.
글쎄, 저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모욕을 주는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신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런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 해석이 다르면 거기에 따라 얻어지는 교훈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개라고 모욕했다고 해석해서는 성경을 백 번을 읽어도 거기에서 바른 교훈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 얻는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하여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고, 제대로 응답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쁘게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 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개라고 모욕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좀 더 깊은 차원에서 교통하시고 싶어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우리가 올바르게 대답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시며 기쁘게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1-28, 막 7:24~30).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쫓아가노라면 예수님과 만났던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 했던 로마의 백부장,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치료해주시되 모두 그들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누가 7:9 에서 로마의 백부장에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셨고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각각 그들의 믿음을 크다 칭찬하시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하인과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그들의 어떠한 면을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믿음이 크다 하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을까요?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믿음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떤 점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셨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의 믿음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그 사건의 개요를 살펴봅시다.
가나안 여인,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여인은 헬라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들려서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장면입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오니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26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많은 분들이 예수님께서 그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셨다,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저도 그러한 설교를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해설해 놓은 책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해석에 반대합니다.
저는 이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두 가지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말씀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해 보았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즉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해석상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개라고 한 것은 원문에 의하면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에는 애완용 개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개라고 하면 모두 집안 마당이나 집밖에 두고 기르는 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헬라-그리스-에서는 그러한 애완용 개를 기르고 있어 그러한 개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여인이면서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유대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그냥 개라고 알아들은 반면에 이 여자는 예수님이 말하는 속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의 일이 한 가지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의 일이었는데 눈이 펑펑 오는 겨울에 학교에 갔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께서 저를 맞이하시면서 "아이구 추웠지, 내 강아지 어서 들어와 몸 좀 녹여라"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저를 귀여워 하셔서 강아지라고 부르시던 그 다정한 그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은데 만일 한국문화를 모르거나 전혀 그 상황을 모르는 미국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 한다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오 ! 저 할머니 나빠요! 자기 손자를 개라고 불러요" 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여인에게 개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문자 그대로 개라고 그 여인을 모욕하며 부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완용 개라는 단어를 통하여 그 여인과 통할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그 속에서 둘만의 대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 주변에 둘러 서 있던 주변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른 것처럼 들렸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로 들었던 저의 경우처럼 할머니가 나를 강아지라 부르셨을 때에 미국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겠지만, 저와 저의 할머니 사이에는 그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만큼의 뜨거운 정이 넘쳤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둘의 대화를 해석하여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앞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냐 하는 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가슴에 말일망정 상처를 주시는 분은 전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만일 그런데도 그렇게 해석이 되는 말씀을 했다면 표면적인 언어의 뜻보다는 더 깊은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확실히 인식한 다음 거기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아무리 당시에 대접받지 못하던 여인, 그것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시며 상처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식의 개가 아니라 더 깊은 뜻 – 애완용 개- 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서 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크다 하셨는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예수님과 통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서로 통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여자의 반응을 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을 이 주변에 서 있는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저 여자만은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여자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윽고 여자가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이 어떤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의도한 바대로 그 말씀을 완벽히 애완용 개라고 이해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 헬라에서는 집안에 있는 애완용 개들은 집안에서 주인과 함께 기거하면서 밥도 같이 먹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는 실제로 부스러기가 아니라 주인과 같이 먹는 밥입니다."
이렇게 그 여인이 화답을 했으니 한마디로 얼마나 센스 있고 부드러운 대답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거기에 화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게 예수님이 여인의 말에 응답하시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결과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가복음 7:29 -30 에서는 마태복음과 약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바로 그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절묘한 대답이 예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들었던 해석에서는 그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침 받게 된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님이 개라고 부르는 모욕을 참고 끝까지 견디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욕하는 말씀을 하실지라도 참아라, 라고 말입니다.
글쎄, 저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모욕을 주는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하신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런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 해석이 다르면 거기에 따라 얻어지는 교훈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개라고 모욕했다고 해석해서는 성경을 백 번을 읽어도 거기에서 바른 교훈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 얻는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하여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고, 제대로 응답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쁘게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 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개라고 모욕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좀 더 깊은 차원에서 교통하시고 싶어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우리가 올바르게 대답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시며 기쁘게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2007.05.19 08:32:09
브니엘남님, 댓글 감사합니다.
지난번에도 몇 번 글을 남겨주셨지요.....그래서 제가 다시 거기에 댓글을 달았는데 바쁘셨는지 응답이 없더군요. 알고 계시는 것 혼자만 간직할 게 아니라 같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예컨대.....사흘 길..이라는 것을 부활과 관련시켜 말씀하신 부분 말입니다.
이번 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
<목사님 여기서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28절의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란 그 말을 언급한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먼저 <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두 부분을 그렇게 바로 연결시키지 않았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부분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님의 글이 약간 애매해서, 제가 이해한 대로 답변했습니다. 혹 다른 뜻이라면 양해해주십시오)
그리고 <문맥을 잘 살펴보면 28절의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란 그 말을 언급한 것입니다. >라고 하신 부분.
제 말이 그 말 아닌가요?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것이 '그 여인이 그렇게 28절의 말로 응답했으니'라는 뜻으로 제가 글을 썼는데요.. 제 글이 그렇게 읽히지 않는가 봅니다.
그런 말을 한 후에 내린 결론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무리 중에 오직 그 여인 만이 애완용 개의 속 뜻을 알아듣고 알맞는 대답을 하였다....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꺼집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애완용 개에 대하여 설명하신 것은 저의 글에서도 적절하게 언급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도 때로는 독자를 피곤하게 만드니까요.....
무엇보다도, 제글의 주안점은 예수님께서 말로라도 결코 사람에게 상처주시는 분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상 님의 댓글에 대한 저의 대답인데, 혹 제가 님의 댓글을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십시오.
지난번에도 몇 번 글을 남겨주셨지요.....그래서 제가 다시 거기에 댓글을 달았는데 바쁘셨는지 응답이 없더군요. 알고 계시는 것 혼자만 간직할 게 아니라 같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예컨대.....사흘 길..이라는 것을 부활과 관련시켜 말씀하신 부분 말입니다.
이번 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
<목사님 여기서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28절의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란 그 말을 언급한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먼저 <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두 부분을 그렇게 바로 연결시키지 않았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부분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님의 글이 약간 애매해서, 제가 이해한 대로 답변했습니다. 혹 다른 뜻이라면 양해해주십시오)
그리고 <문맥을 잘 살펴보면 28절의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란 그 말을 언급한 것입니다. >라고 하신 부분.
제 말이 그 말 아닌가요?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것이 '그 여인이 그렇게 28절의 말로 응답했으니'라는 뜻으로 제가 글을 썼는데요.. 제 글이 그렇게 읽히지 않는가 봅니다.
그런 말을 한 후에 내린 결론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무리 중에 오직 그 여인 만이 애완용 개의 속 뜻을 알아듣고 알맞는 대답을 하였다....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꺼집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애완용 개에 대하여 설명하신 것은 저의 글에서도 적절하게 언급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도 때로는 독자를 피곤하게 만드니까요.....
무엇보다도, 제글의 주안점은 예수님께서 말로라도 결코 사람에게 상처주시는 분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상 님의 댓글에 대한 저의 대답인데, 혹 제가 님의 댓글을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십시오.
2007.05.19 10:07:21
목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전의 글에 대한 댓글을 보지 못해서 답을 못 드렸습니다. 가서 다시 보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말로라도 결코 사람에게 상처주시는 분은 아니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믿음의 말"인 28절에 저는 강조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은 혹시 성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로라도 결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염려가 되어 하신 말씀인 것을 저도 압니다.
제가 사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듯한 말이나 문장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주 안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하시를 기도할께요.
제가 전의 글에 대한 댓글을 보지 못해서 답을 못 드렸습니다. 가서 다시 보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말로라도 결코 사람에게 상처주시는 분은 아니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믿음의 말"인 28절에 저는 강조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은 혹시 성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로라도 결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염려가 되어 하신 말씀인 것을 저도 압니다.
제가 사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듯한 말이나 문장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주 안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하시를 기도할께요.
2007.05.19 11:51:08
브니엘남님, 바로 곁에 계셨군요...ㅎㅎㅎ 빠른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이 글 속에서 본문에 대하여 두가지로 접근을 하겠다고 말하고
예수님과 그 여인간의 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점과 그리고, 예수님은 결코 '사람'을 허투루 대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라는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해석해 오던 내용 -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셨다, 그러니 그런 경우라도 참고 매달리면 응답해주신다 - 이 제 생각과 다르기에, 이점을 언급하며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실상 저의 글에는 <"그 여자의 믿음의 말"인 28절>도 균형있게 언급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글쎄요.....아무래도 저의 글쓰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제 글이 부족해도,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글 속에서 본문에 대하여 두가지로 접근을 하겠다고 말하고
예수님과 그 여인간의 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점과 그리고, 예수님은 결코 '사람'을 허투루 대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라는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해석해 오던 내용 - 여인을 개라고 모욕하셨다, 그러니 그런 경우라도 참고 매달리면 응답해주신다 - 이 제 생각과 다르기에, 이점을 언급하며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실상 저의 글에는 <"그 여자의 믿음의 말"인 28절>도 균형있게 언급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글쎄요.....아무래도 저의 글쓰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제 글이 부족해도,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2007.05.19 12:08:39
위디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쑥스럽습니다.
그런 해석이 ......조금 거시기 해서,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힘이 없는 자라도 모욕을 주면서까지 일을 처리하시는 분은 아니다, 라는데
생각이 미처 이 본문을 이런 방향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나니, 예수님이 조금 더 '예수님' 답게 해석했다, 고 느껴집니다.
혹, 모르지요....저만의 착각인지도 ....
그런 해석이 ......조금 거시기 해서,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힘이 없는 자라도 모욕을 주면서까지 일을 처리하시는 분은 아니다, 라는데
생각이 미처 이 본문을 이런 방향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나니, 예수님이 조금 더 '예수님' 답게 해석했다, 고 느껴집니다.
혹, 모르지요....저만의 착각인지도 ....
2007.05.19 12:10:45
오 목사님 존경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고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부분들을 집어내셔서
아주 명쾌하고 설득력있게 이해를 도와 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팬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여러번 설교하고
설교 중에 예로 든 경우도 있는데
오늘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름으로 느끼는 것은
목사님의 글 중에 본문을 해석하시는 이유를
'믿음에의 적용'에 두신 것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믿음에 적용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잘못하면 말장난이 될 수 있기는 한데.....
지난번 정목사님의 어느 분 설교비평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던
큐티 중심의 설교자들에게서 보이는 문제점 중에
너무 빠른 적용 위주의 말씀해석이 보이는 편협성이랄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믿음이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시는데로
'이 산을 명해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그대로 된다는 대전제가 있는 것이죠.
그것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믿는 부분이 따로 있고
다음에 적용된 어떤 행위(?)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그런 면에서
믿음이란 의미에 대해서
이해소통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뭐 다른 개념들도 어떤 면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특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개념은
제가 보기에는 따로 어떤 적용이 필요없는 상태라고 할까요
물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적용이 필요한 상황은
확실하게 표현하자면 믿음의 상태 이전에
어떤 깨우침을 느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그래서 믿음이 되는 것을 말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정목사님의 지난 설교 중에
"믿음은 가능한가?" 라는 제목의 말씀이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리고 가능'하다는 결론이었죠.
즉 믿음이 무엇이냐를 물은 것이었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그 분 만이 하나님을 홀로 완전히 아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러기에 그분은 세상을 살지만 세상에 지배 아래 있기 보다는
창조주의 능력과 그 권위로 세상을 섭리하시는거죠.
그래서 기적이 일상이 될 수 있는 모습을 보이시는거겠구요.
별다는 적용의 결단이나 행동없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부분이 되기도 하죠.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런 존재로 불리워졌다는 의미에서
우리도 가능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읽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시각이 필요한 해석이
오늘 본문을 보는 안목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본문에 가나안 여인의 특이한 점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성도됨이
어찌 이방 여인인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깨우쳐졌을까 하는것이죠.
그래서 아마도 주님께서
'이런 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제 생각입니다.
즉 그것이 인간의 논리와 추리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지혜요 능력이란 표현이겠죠.
믿음은 정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오 목사님의 표현대로 통했다는 의미도 되구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가능한가?
그렇다면 과연 그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면에서 믿음의 결과적 모습(응답?)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음 그 자체로 이미 해결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기 마음의 상태요 신앙고백일테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상황과 관계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신거겠죠.
그런 면에서 조금 비약된 해석이 되겠지만
주님의 칭찬은 당시의 그 주인공들 보다는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그런 칭찬은 필요없어도 될만하거든요.
그것이 믿음이라고 보니까요.
그 칭찬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한 것도 아닌 것이죠.
문제는 그러면 그 믿음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실은 바로 여기가 가장 중요한 적용의 부분이 될 겁니다.
기도해야 되고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뭐하고....
이런 지금까지의 어떤 결론적 내용들은
아마도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할 겁니다.
저는 여기 적용이
정 목사님이 늘 주장하시는 그 외침(?)
소극적 신앙생활(이거 말이되나요?) 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란거죠.
은혜를 기다리는 거죠.
그것도 처량하게 말입니다.
근데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못합니다.
인간의 속성이 기다리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뭔가를 나름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알면
기다리는 용기가 생깁니다.
저는 그것을 정 목사님이 "소극적"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정 목사님을 잘못 이해했을 수 도 있을겁니다.
저는 이런 자세야 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나름으로 해석하는
본문이나 주님의 칭찬을 들은 성경인물의
바른 해석이라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고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부분들을 집어내셔서
아주 명쾌하고 설득력있게 이해를 도와 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팬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여러번 설교하고
설교 중에 예로 든 경우도 있는데
오늘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름으로 느끼는 것은
목사님의 글 중에 본문을 해석하시는 이유를
'믿음에의 적용'에 두신 것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믿음에 적용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잘못하면 말장난이 될 수 있기는 한데.....
지난번 정목사님의 어느 분 설교비평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던
큐티 중심의 설교자들에게서 보이는 문제점 중에
너무 빠른 적용 위주의 말씀해석이 보이는 편협성이랄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믿음이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시는데로
'이 산을 명해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그대로 된다는 대전제가 있는 것이죠.
그것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믿는 부분이 따로 있고
다음에 적용된 어떤 행위(?)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그런 면에서
믿음이란 의미에 대해서
이해소통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뭐 다른 개념들도 어떤 면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특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개념은
제가 보기에는 따로 어떤 적용이 필요없는 상태라고 할까요
물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적용이 필요한 상황은
확실하게 표현하자면 믿음의 상태 이전에
어떤 깨우침을 느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그래서 믿음이 되는 것을 말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정목사님의 지난 설교 중에
"믿음은 가능한가?" 라는 제목의 말씀이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리고 가능'하다는 결론이었죠.
즉 믿음이 무엇이냐를 물은 것이었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그 분 만이 하나님을 홀로 완전히 아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러기에 그분은 세상을 살지만 세상에 지배 아래 있기 보다는
창조주의 능력과 그 권위로 세상을 섭리하시는거죠.
그래서 기적이 일상이 될 수 있는 모습을 보이시는거겠구요.
별다는 적용의 결단이나 행동없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부분이 되기도 하죠.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런 존재로 불리워졌다는 의미에서
우리도 가능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읽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시각이 필요한 해석이
오늘 본문을 보는 안목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본문에 가나안 여인의 특이한 점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성도됨이
어찌 이방 여인인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깨우쳐졌을까 하는것이죠.
그래서 아마도 주님께서
'이런 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제 생각입니다.
즉 그것이 인간의 논리와 추리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지혜요 능력이란 표현이겠죠.
믿음은 정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오 목사님의 표현대로 통했다는 의미도 되구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가능한가?
그렇다면 과연 그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면에서 믿음의 결과적 모습(응답?)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음 그 자체로 이미 해결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기 마음의 상태요 신앙고백일테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상황과 관계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신거겠죠.
그런 면에서 조금 비약된 해석이 되겠지만
주님의 칭찬은 당시의 그 주인공들 보다는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그런 칭찬은 필요없어도 될만하거든요.
그것이 믿음이라고 보니까요.
그 칭찬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한 것도 아닌 것이죠.
문제는 그러면 그 믿음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실은 바로 여기가 가장 중요한 적용의 부분이 될 겁니다.
기도해야 되고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뭐하고....
이런 지금까지의 어떤 결론적 내용들은
아마도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할 겁니다.
저는 여기 적용이
정 목사님이 늘 주장하시는 그 외침(?)
소극적 신앙생활(이거 말이되나요?) 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란거죠.
은혜를 기다리는 거죠.
그것도 처량하게 말입니다.
근데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못합니다.
인간의 속성이 기다리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뭔가를 나름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알면
기다리는 용기가 생깁니다.
저는 그것을 정 목사님이 "소극적"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정 목사님을 잘못 이해했을 수 도 있을겁니다.
저는 이런 자세야 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나름으로 해석하는
본문이나 주님의 칭찬을 들은 성경인물의
바른 해석이라는 입장입니다.
2007.05.19 12:19:09
김목사님,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저는 그냥 도입부에서 살짝 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의 깊은 곳, 속에 그런 마음이 잠재하고 있었나 봅니다.
< 문제는 그러면 그 믿음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실은 바로 여기가 가장 중요한 적용의 부분이 될 겁니다.
기도해야 되고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뭐하고....
이런 지금까지의 어떤 결론적 내용들은 아마도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할 겁니다. >
결국 그런데로 가고 말았네요.....
고친다 고친다 하면서도 ...결국은 그런 데로 빠지고 마는 이 ...어리석음을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그러네요...
저는 그냥 도입부에서 살짝 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의 깊은 곳, 속에 그런 마음이 잠재하고 있었나 봅니다.
< 문제는 그러면 그 믿음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실은 바로 여기가 가장 중요한 적용의 부분이 될 겁니다.
기도해야 되고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뭐하고....
이런 지금까지의 어떤 결론적 내용들은 아마도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할 겁니다. >
결국 그런데로 가고 말았네요.....
고친다 고친다 하면서도 ...결국은 그런 데로 빠지고 마는 이 ...어리석음을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그러네요...
2007.05.19 14:50:55
평소에 오세용 목사님의 '리더십'관련 글에서는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에너지와,
날랜 백정의 손놀림 같은 아우라 마저 느꼈었지요.
그런데 각주없이 성경읽기를 대하다 보면,
이와는 다른 감동과 함께
목사님의 인품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는군요.
꼭 한 달만에 올려주신 글...
즐거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무언가 모르게 달콤함이 느껴지네요.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어지기도 하구요.^^
정말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다만,
'믿음의 적용'이라던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거기서 교훈을 얻어내는 부분들은,
저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었는데...
김인범 목사님의 자상하고 꼼꼼하신 댓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나름대로 해결을 보았지요.
두 분께서 이렇게 조금은 다른 지평에 계시면서도
상호 소통하심이 가능하고, 서로를 존중하시는 모습에
진정 경의를 표하고 싶어 지는군요.
이 공간을 통해서
귀한 목사님들 자주 뵈오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복된 주일 맞으소서!!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에너지와,
날랜 백정의 손놀림 같은 아우라 마저 느꼈었지요.
그런데 각주없이 성경읽기를 대하다 보면,
이와는 다른 감동과 함께
목사님의 인품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는군요.
꼭 한 달만에 올려주신 글...
즐거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무언가 모르게 달콤함이 느껴지네요.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어지기도 하구요.^^
정말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다만,
'믿음의 적용'이라던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거기서 교훈을 얻어내는 부분들은,
저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었는데...
김인범 목사님의 자상하고 꼼꼼하신 댓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나름대로 해결을 보았지요.
두 분께서 이렇게 조금은 다른 지평에 계시면서도
상호 소통하심이 가능하고, 서로를 존중하시는 모습에
진정 경의를 표하고 싶어 지는군요.
이 공간을 통해서
귀한 목사님들 자주 뵈오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복된 주일 맞으소서!!
2007.05.19 15:24:32
믿음이 우엇일까?
1. 믿음의 문제
1)객관적 신앙(믿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 우리가 믿는 대상
2)주관적 믿음: 내가 믿는 행위; 나의 믿음; 실은 이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임; 히 12;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
우리가 홍해 사건을 믿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는 성경의 귀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 객관적인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을 산출합니다.
요 1;12 영접=믿음; 내 안에 들어오신 그 분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유 20절)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올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즉 믿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벧후 1:4).
지금 우리는 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이 가진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믿지만 그 믿음은 바로 산위일체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창시자:시작, 기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잇는 것입니다.
내가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될 때 진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됩니다.
1. 믿음의 문제
1)객관적 신앙(믿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 우리가 믿는 대상
2)주관적 믿음: 내가 믿는 행위; 나의 믿음; 실은 이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임; 히 12;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
우리가 홍해 사건을 믿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는 성경의 귀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 객관적인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을 산출합니다.
요 1;12 영접=믿음; 내 안에 들어오신 그 분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유 20절)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올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즉 믿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벧후 1:4).
지금 우리는 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이 가진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믿지만 그 믿음은 바로 산위일체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창시자:시작, 기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잇는 것입니다.
내가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될 때 진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됩니다.
2007.05.19 15:52:05
<브니엘남>님!
결국은 이 꼭지에 까지 오셔서 한 수 가르치고 계시군요.
우리가 지겨워하던 예전의 그 모습으로~
여기는 '쟁토방'이 아닙니다.
제목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각주 없이 성경 읽기>아닙니까?
더욱이 두 분 목사님께서 남선생님에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을 구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님은 님대로 그 길을 가시지요.
괜히 분위기 경직시키지 마시구요.
제발 ~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이 꼭지를 아끼는 독자들 불편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다수의 눈팅님들 궁시렁대는 소리가 안 들리시나요?
결국은 이 꼭지에 까지 오셔서 한 수 가르치고 계시군요.
우리가 지겨워하던 예전의 그 모습으로~
여기는 '쟁토방'이 아닙니다.
제목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각주 없이 성경 읽기>아닙니까?
더욱이 두 분 목사님께서 남선생님에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을 구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님은 님대로 그 길을 가시지요.
괜히 분위기 경직시키지 마시구요.
제발 ~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이 꼭지를 아끼는 독자들 불편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다수의 눈팅님들 궁시렁대는 소리가 안 들리시나요?
2007.05.19 18:04:52
브니엘 남님이 다음과 같이< 믿음이 우엇일까?>란 글을 댓글로 남겨 주셨군요.
1. 믿음의 문제
1)객관적 신앙(믿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 우리가 믿는 대상
2)주관적 믿음: 내가 믿는 행위; 나의 믿음; 실은 이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임; 히 12;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
우리가 홍해 사건을 믿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는 성경의 귀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 객관적인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을 산출합니다.
요 1;12 영접=믿음; 내 안에 들어오신 그 분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유 20절)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올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즉 믿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벧후 1:4).
지금 우리는 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이 가진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믿지만 그 믿음은 바로 산위일체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창시자:시작, 기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잇는 것입니다.
내가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될 때 진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이해가 안되는 군요.
이 글을 저더러 읽어보고 어떤 답을 달라는 말씀인지
아니면 위의 글이 그냥 님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말씀인지
또 구도자님이 말씀하신대로 한수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번호가 1 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2번도 있다는 것인데 ........
그 나머지는 언제 올리실지 궁금하기조차 합니다.
저의 글에 댓글로 올려주셨으니까
분명 저의 글 어딘가 연결이 되리라 생각되어 열심히 저의 글과 님의 글을 읽으며
관련성을 찾아 보았지만 딱부러지게 '이거다'라고 짚히는 데가 없군요.
뭐, 추상적으로 연결시키자면 모든게 믿음의 문제이니 다 연결이 될 터이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연결이 되어야
답글을 쓰던 할게 아니겠습니까?
저의 글과 님의 글이 구체적으로 관련이 되지 않는다면
( 연결이 되는 글이라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독립된 글로 올리시는게 어떨찌요?
1. 믿음의 문제
1)객관적 신앙(믿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 우리가 믿는 대상
2)주관적 믿음: 내가 믿는 행위; 나의 믿음; 실은 이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임; 히 12;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
우리가 홍해 사건을 믿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는 성경의 귀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 객관적인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을 산출합니다.
요 1;12 영접=믿음; 내 안에 들어오신 그 분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유 20절)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올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즉 믿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벧후 1:4).
지금 우리는 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이 가진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믿지만 그 믿음은 바로 산위일체 하나님 즉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창시자:시작, 기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잇는 것입니다.
내가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될 때 진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이해가 안되는 군요.
이 글을 저더러 읽어보고 어떤 답을 달라는 말씀인지
아니면 위의 글이 그냥 님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말씀인지
또 구도자님이 말씀하신대로 한수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번호가 1 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2번도 있다는 것인데 ........
그 나머지는 언제 올리실지 궁금하기조차 합니다.
저의 글에 댓글로 올려주셨으니까
분명 저의 글 어딘가 연결이 되리라 생각되어 열심히 저의 글과 님의 글을 읽으며
관련성을 찾아 보았지만 딱부러지게 '이거다'라고 짚히는 데가 없군요.
뭐, 추상적으로 연결시키자면 모든게 믿음의 문제이니 다 연결이 될 터이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연결이 되어야
답글을 쓰던 할게 아니겠습니까?
저의 글과 님의 글이 구체적으로 관련이 되지 않는다면
( 연결이 되는 글이라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독립된 글로 올리시는게 어떨찌요?
2007.05.19 18:23:05
求道者 님, 댓글 감사합니다.
정말 그렇군요..한달 만이군요.
쓴따 쓴다 했었는데 ...리더십 책 때문에 정신이 쏠려
늦게 올렸습니다.
그래도 브니엘남님이랑, 또 김목사님 그리고 위디님, 구도자님이 댓글로 환영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모처럼 긴 댓글들이 올라와
저의 글 읽으시려면 스크롤의 압박이 상당하게 되었는데....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모르는 일이 그것뿐인가요?
브니엘남님이 올리신 글의 의도도 모르겠고 ....
또 브니엘 남님에게 글의 의도를 명확하게 해주십사, 라고 말한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런 일이 이곳 다비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지도 역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구도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진심으로......
정말 그렇군요..한달 만이군요.
쓴따 쓴다 했었는데 ...리더십 책 때문에 정신이 쏠려
늦게 올렸습니다.
그래도 브니엘남님이랑, 또 김목사님 그리고 위디님, 구도자님이 댓글로 환영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모처럼 긴 댓글들이 올라와
저의 글 읽으시려면 스크롤의 압박이 상당하게 되었는데....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모르는 일이 그것뿐인가요?
브니엘남님이 올리신 글의 의도도 모르겠고 ....
또 브니엘 남님에게 글의 의도를 명확하게 해주십사, 라고 말한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런 일이 이곳 다비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지도 역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구도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진심으로......
2007.05.19 22:01:43
항상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배웠습니다.예수님이 말한 '개'가 애견이었군요..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예수님이 애완견과 가축용개를 구분하셨다면 그리스문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건데, 그럼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연구결과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은 분으로 봐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예수님이 애완견과 가축용개를 구분하셨다면 그리스문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건데, 그럼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연구결과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은 분으로 봐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2007.05.20 14:46:16
바우로님, 질문중에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연구결과> 가 어떤 것인지 제가 모르기 때문에 하신 질문에 '예스' 또는'노'로는 대답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희랍어이지만, 희랍어가 예수님의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국어는 아람어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갈릴리 판 서부 아람어> 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람어 이외에도 히브리어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4:16-20 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성경- 즉 히브리어로 된 구약 - 을 읽으신 기사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이야기 하실 수 없었던 몇가지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이 다른 언어 - 예컨데 희랍어 - 를 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본디오 빌라도와의 대화(막15:2- )라던가, 병을 앓던 종을 둔 백부장과의 대화(마 8:5-13), 그리고 가나안 여인과 의 대화이지요.
그런데, 언어를 안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의 이해가 수반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하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희랍어이지만, 희랍어가 예수님의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국어는 아람어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갈릴리 판 서부 아람어> 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람어 이외에도 히브리어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4:16-20 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성경- 즉 히브리어로 된 구약 - 을 읽으신 기사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이야기 하실 수 없었던 몇가지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이 다른 언어 - 예컨데 희랍어 - 를 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본디오 빌라도와의 대화(막15:2- )라던가, 병을 앓던 종을 둔 백부장과의 대화(마 8:5-13), 그리고 가나안 여인과 의 대화이지요.
그런데, 언어를 안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의 이해가 수반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하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05.20 17:51:46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덕분에 성서속의 문화를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읽은 구약성서는 제가 알기로는 70인역 성서로 알고 있습니다. 외경에 대해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 70인역성서번역본으로 구약성서를 읽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2007.05.20 20:11:14
와우 !!! 점점 질문이 제게 버거워집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를 넘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
물론 70인역 성서의 연도와 예수님의 연도를 비교하면 얼추 답이 나오겠지만
아직까지 제가 읽어오고, 들어 본 바로는
그렇게 연결시키는 견해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이럴 때 실감하지요...
제가 알고 있는 한도를 넘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
물론 70인역 성서의 연도와 예수님의 연도를 비교하면 얼추 답이 나오겠지만
아직까지 제가 읽어오고, 들어 본 바로는
그렇게 연결시키는 견해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이럴 때 실감하지요...
2007.05.21 20:48:27
오목사님이 부족하시면 저는 얼마나 부족한 것이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의도는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약성서가 외경이고, 그 외경이 70인역 성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뭐 목사님이 평신도인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실 것입니다만..
유대인들은 개를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레 11:26).
목사님 여기서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28절의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란 그 말을 언급한 것입니다.
즉 이 여자의 믿음은 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한 주님의 그 말씀도 옳습니다만 28절의 제 말도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아이들(유대인들의 상징)이 먹는 상위의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상 아래의 떡을 먹을 권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애완용개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