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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3) -
우리가 두드리는 문은 누가 열어주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7)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는 마 7: 7의 예수님 말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구하라 했고, 그래서 우리가 구할 때에 주신다고 하는데 대체 누가 주는가?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누가 문을 열어주는가? 이 말씀이 우리더러 열심히 찾고 구하라는, 노력을 강조하는 말씀인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은 개역성경입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고 했지 그것을 누가 주는가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하면 우리 노력의 결과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분석해 보기 위해 같은 본문을 다른 성경으로 찾아 보았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개역개정)
개역개정은 더 요령부득으로 번역이 되었더군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다, 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을 더 강하게 부각시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공동번역)
공동번역도 개역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에는 무언가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구하면 거기에 응답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으로 되어있고 또한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가 두드린 문을 열어주신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옛날 신학교에서 해석학 시간에 배웠던 ‘신적 수동태’의 한 예였습니다. 그때 신적 수동태라는 개념과 거기에 해당하는 약간의 예문을 공부한 기억이 나는데 이 구절은 아마 그 예문속에 들어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주실 것이요’ 라는 말은 수동태로서 그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맥에서 볼 때 이것은 신적 수동태로서 그 동사의 주체가 하나님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요.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말씀하실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혼자 소리를 하시는게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을 가운데 두고 듣는 우리가 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 상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말씀은 결코 하나님이 혼자 소리를 하신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그 ‘말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본인을 위하여 쓰신 것이라면 구태여 인간의 언어로 기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 인간을 위한 말씀이다,라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 명하실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좋기 위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에 은연중에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 당신의 계획, 의지를 포함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라 하시는데 실상 그 뒤에 숨어 있는 뜻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 말씀이 그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 인용한 구절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 말씀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고 분명히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면에는 우리가 구하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손수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한 말씀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하게 여기고 순종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단서가 하나 붙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단서 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러고 보니 이 말씀 역시 신적 수동태 형식이군요.
우리가 두드리는 문은 누가 열어주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7)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는 마 7: 7의 예수님 말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구하라 했고, 그래서 우리가 구할 때에 주신다고 하는데 대체 누가 주는가?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누가 문을 열어주는가? 이 말씀이 우리더러 열심히 찾고 구하라는, 노력을 강조하는 말씀인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은 개역성경입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고 했지 그것을 누가 주는가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하면 우리 노력의 결과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분석해 보기 위해 같은 본문을 다른 성경으로 찾아 보았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개역개정)
개역개정은 더 요령부득으로 번역이 되었더군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다, 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을 더 강하게 부각시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공동번역)
공동번역도 개역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에는 무언가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구하면 거기에 응답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으로 되어있고 또한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가 두드린 문을 열어주신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옛날 신학교에서 해석학 시간에 배웠던 ‘신적 수동태’의 한 예였습니다. 그때 신적 수동태라는 개념과 거기에 해당하는 약간의 예문을 공부한 기억이 나는데 이 구절은 아마 그 예문속에 들어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주실 것이요’ 라는 말은 수동태로서 그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맥에서 볼 때 이것은 신적 수동태로서 그 동사의 주체가 하나님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요.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말씀하실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혼자 소리를 하시는게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을 가운데 두고 듣는 우리가 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 상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말씀은 결코 하나님이 혼자 소리를 하신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그 ‘말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본인을 위하여 쓰신 것이라면 구태여 인간의 언어로 기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 인간을 위한 말씀이다,라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 명하실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좋기 위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에 은연중에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 당신의 계획, 의지를 포함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라 하시는데 실상 그 뒤에 숨어 있는 뜻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 말씀이 그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 인용한 구절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 말씀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고 분명히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면에는 우리가 구하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손수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한 말씀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하게 여기고 순종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단서가 하나 붙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단서 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러고 보니 이 말씀 역시 신적 수동태 형식이군요.
2007.02.14 11:13:39
반갑습니다. 지금 방금 댓글 보고 살짝 개인정보를 열어보았거든요.....정말 반갑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비슷하다는 것, 이것 무시할 수 없지않아요?
그만큼 겪어온 날들, 시대를 지나온 이해의 폭이 비슷하니 말입니다.
반갑고, 계속해서 교류했으면 합니다.
살아온 세월이 비슷하다는 것, 이것 무시할 수 없지않아요?
그만큼 겪어온 날들, 시대를 지나온 이해의 폭이 비슷하니 말입니다.
반갑고, 계속해서 교류했으면 합니다.
2007.02.18 22:17:05
오목사님의 글을 읽고 제가 생각한 것을 나누고 싶어서 리플을 답니다.
오목사님의 선택하신 본문은 마7:7절이신데 기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하의 절들을 함께 읽어보면 결론이 11절에 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에 대한 마태의 기록은 마6:5-15절에도 있습니다. 어쨌든
결국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즉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의 평행구가 누가복음 11장 9절에서 13절에 나오는데 누가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는 악한 사람조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누가는 좋지 않은 친구라고 할지라도 강청에 의해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아들에게 아버지가 나쁜 것을 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좋을 것(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은 왜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일까요?
롬 8:15의 말씀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 4:6의 말씀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눅11장 9절부터 13절을 기록하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다른 배열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언급한 누가의 입장에서
주님의 기도를 11절부터 시작되는 이 본문의 앞에 붙여서 기록한 것은 나름대로 지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여라고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지요...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열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의 우선 순위가 내용이 아닌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줏시옵쏘써"를 외치고 "절대 믿음"을 가지고 응답을 확신한다고 기도가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구축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고 성령의 은총으로 그 분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르는 시간!
그것이 기도의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닐까요?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리는 지.........
오목사님의 선택하신 본문은 마7:7절이신데 기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하의 절들을 함께 읽어보면 결론이 11절에 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에 대한 마태의 기록은 마6:5-15절에도 있습니다. 어쨌든
결국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즉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의 평행구가 누가복음 11장 9절에서 13절에 나오는데 누가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는 악한 사람조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누가는 좋지 않은 친구라고 할지라도 강청에 의해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아들에게 아버지가 나쁜 것을 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좋을 것(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은 왜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일까요?
롬 8:15의 말씀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 4:6의 말씀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눅11장 9절부터 13절을 기록하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다른 배열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언급한 누가의 입장에서
주님의 기도를 11절부터 시작되는 이 본문의 앞에 붙여서 기록한 것은 나름대로 지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여라고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지요...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열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의 우선 순위가 내용이 아닌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줏시옵쏘써"를 외치고 "절대 믿음"을 가지고 응답을 확신한다고 기도가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구축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고 성령의 은총으로 그 분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르는 시간!
그것이 기도의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닐까요?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리는 지.........
유익한 내용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사 드립니다. 꾸벅~ ^^*
목사님께서 올리신 '건의사항' 보고는
도둑이 제발 저려서..
그동안 '팥방구리 생쥐'처럼 드나들며
유익한 글들 몰래 읽고.. 달아나곤 했거든요.
이러한 저의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내지 탐구정신은,
이길용 박사님을 비롯해서
다른 칼럼니스트 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랍니다.
다만 지성수 목사님은 제가 좀 아는 분이시라
(아, 물론 그 분은 저를 모르시구요.)
웬지 친근감이 들기에 몇 차례 발자국 남겼었지요.
오세용 목사님!
다비아 필진으로 오셔서 이 곳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