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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2) – 씨 뿌리는 비유를 읽으며
눅 8:4-15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는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기에 해석에 있어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떨어지는데, 이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하셨습니다.
1. 농부가 좋지 못한 땅에도 씨를 뿌렸기에…..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본문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지 않습니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좋은 땅만 골라서 뿌리는 게 아니라 다른 데에도 뿌립니다. 길가 밭에도 뿌리고 바위에도 뿌리고 가시나무 많은 밭에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씨를 아무데에나 뿌릴까요?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면 될 것인데 왜 좋지 않은 땅에도 씨를 뿌리고 있는가? 보통의 농부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농사꾼이라면 씨를 뿌려서 씨가 잘 자라주기를 바랄 것이고 그러므로 씨가 잘 자랄 곳만 골라서 뿌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의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에도 뿌립니다. 이 사람이 눈이 잘 안보이니 그냥 아무데에나 뿌린 것일까요? 아니면 얼른 씨를 뿌리고 집에 가기 위해서일까요?
저는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씨 뿌리는 농부가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린다면 저 같이 자갈 밭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평생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위같이 단단한 마음을 가진 저는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농부가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린다면 세상 온갖 걱정에 헤매던 저의 가시덤불 많던 마음 밭에 한 톨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밭이 어떤 밭인가를 따지지 않고 말씀뿌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기에 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농부가 그 비유를 듣는다면….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당시 현장에서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자들, 혹은 그 비유를 예수님으로부터 듣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직업으로 보자면 어부도 있었을 것이고 농부도, 상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들어도 자기의 직업이라던가 입장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물건 파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는 그 밭을 물건 파는 곳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있어 물건이 많이 팔리더라. 어디에 가면 사람들 마음들이 아주 차 돌멩이처럼 단단해서 어지간해서 물건을 팔기 어렵더라, 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말씀을 들은 사람이 어부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을 고기 잡는 어장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어디엘 가니 물고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더라.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고기들이 그냥 넝쿨에 달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따라 올라오더라. 또 어디에 가면 하루 종일 그물을 던져도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보겠더라, 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말을 들었다면 그 농부는 어부나 상인들과는 생각이 약간 다를 것입니다.
농부는 농사지을 때에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물론 화전민 같으면 그렇게 하겠지요. 불을 놓아서 그 불탄 자리에 곡식을 심고 거두는 화전민 같으면 올해에는 여기에 씨를 뿌리고 다음 해에는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보통의 농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는 논과 밭에다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농사꾼들은 길가에 씨를 뿌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 저런, 저걸 어째! 하면서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바위 위에 씨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가시 덤불 많은 땅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같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이, 우리 땅은 왜 이리 가시덤불이 많은지 모르겠어, 왜 이리 자갈이 많은지 모르겠어. 어디 농사짓겠어” 하면서 땅을 버려두고 다른 데로 옮겨가는 농사꾼을 아직까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만석꾼, 천석꾼이라면 몰라도, 아니 만석꾼이라 할지라도 진짜 농사꾼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농부는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밭으로 나가 괭이를 가지고, 호미를 가지고 단단한 땅을 갈아 엎을 것입니다.
밭에 널려 있는 자갈들은 지게에 담아 무너지기 쉬운 언덕에 가져다 부어 밭이 무너지지 않게 쌓을 것입니다.
밭에 바위 덩어리가 있다면 그것을 망치로 쪼개어 내어 집으로 가져가 담장을 쌓는데 쓸 것입니다.
또 가시덤불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낫으로 베어내어 집으로 가져가 밥짓는데 땔감으로 쓸 것입니다.
자기 밭에 바위가 있더라도, 자갈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농사짓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재의 밭이 나쁜 밭이라 하더라도 그 밭을 좋은 밭이 되도록 땀 흘려 애를 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도, 농부라면 당연히 못쓰는 땅도 좋은 밭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마음 밭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마음 밭이 있다면 좋은 밭으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길가 밭이라면, 바위라면 또 가시덤불이 많은 밭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길가 밭과 돌밭에 떨어진 씨의 경우는 밭 자체가 문제입니다. 밭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길가 밭이라면 그 단단해진 땅을 통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적당이 손 본다거나 비료를 주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땅을 통채로 갈아 엎어서 단단한 조각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산산이 부셔야 합니다.
그처럼 단단해진 우리 마음을 갈아 엎어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드러운 마음을 타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단단한 바위를 다른 데로 옮기던지 아니면 모래가 될 때까지 부수어야 합니다.
힘이 아무리 들더라도 그 바위를 그 자리에서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밑에 감춰져 있던 밭이 드러납니다.
그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도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온갖 나쁜 마음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 다음 가시 덤불 밭은 앞의 두 가지 경우와는 약간 다릅니다.
가시밭은 밭 자체는 괜찮은데 밭을 둘러싸고 있는 가시 떨기가 문제입니다. 가시덤불 많은 밭은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을 막고 있는 것들이 많은 게 문제입니다. 외부로부터 받는 시험, 어려운 일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가시덤불이 있는 밭이면 땅을 갈아 엎어서는 소용이 없으니 가시덤불을 치워버려야 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미리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 말씀이 뿌리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들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뽑아 내버려야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이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제서야 우리 마음은 좋은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좋게 밭이 되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 쑥쑥 자라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씨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자라고 있어야만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되고 죄를 멀리 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좋은 밭이 된 우리 마음을 계속하여 가꾸는 일입니다.
농사짓는 밭도 그렇습니다. 바람이 불어 잡초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밭 한쪽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또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매일 수시로 살펴보아야만 좋은 땅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있는 꽃밭을 망쳐버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꽃밭에 불을 지르고 물을 많이 부어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러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꽃은 시들고 꽃밭은 어느 사이에 잡초 밭으로 변해버립니다.
우리의 마음 밭도 한번 좋은 밭이 되었다고 내버려 두면 쓸모 없는 마음 밭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쓸고 닦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우리의 마음을 닦고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읽으며, 내 마음 밭은 어떤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 밭이 ‘좋은 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농부 즉 하나님은 좋지 못한 땅에도 씨를 부리지만, 그렇게 애써 뿌린 씨앗이 아무렇게나 썩어 버리기를 바라시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길가의 밭일지라도 좋은 밭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씨를 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바꿀 필요가 더욱 있는 것입니다.
눅 8:4-15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는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기에 해석에 있어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떨어지는데, 이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하셨습니다.
1. 농부가 좋지 못한 땅에도 씨를 뿌렸기에…..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본문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지 않습니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좋은 땅만 골라서 뿌리는 게 아니라 다른 데에도 뿌립니다. 길가 밭에도 뿌리고 바위에도 뿌리고 가시나무 많은 밭에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씨를 아무데에나 뿌릴까요?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면 될 것인데 왜 좋지 않은 땅에도 씨를 뿌리고 있는가? 보통의 농부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농사꾼이라면 씨를 뿌려서 씨가 잘 자라주기를 바랄 것이고 그러므로 씨가 잘 자랄 곳만 골라서 뿌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의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에도 뿌립니다. 이 사람이 눈이 잘 안보이니 그냥 아무데에나 뿌린 것일까요? 아니면 얼른 씨를 뿌리고 집에 가기 위해서일까요?
저는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씨 뿌리는 농부가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린다면 저 같이 자갈 밭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평생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위같이 단단한 마음을 가진 저는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농부가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린다면 세상 온갖 걱정에 헤매던 저의 가시덤불 많던 마음 밭에 한 톨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밭이 어떤 밭인가를 따지지 않고 말씀뿌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기에 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농부가 그 비유를 듣는다면….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당시 현장에서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자들, 혹은 그 비유를 예수님으로부터 듣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직업으로 보자면 어부도 있었을 것이고 농부도, 상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들어도 자기의 직업이라던가 입장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물건 파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는 그 밭을 물건 파는 곳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있어 물건이 많이 팔리더라. 어디에 가면 사람들 마음들이 아주 차 돌멩이처럼 단단해서 어지간해서 물건을 팔기 어렵더라, 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말씀을 들은 사람이 어부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을 고기 잡는 어장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어디엘 가니 물고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더라.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고기들이 그냥 넝쿨에 달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따라 올라오더라. 또 어디에 가면 하루 종일 그물을 던져도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보겠더라, 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말을 들었다면 그 농부는 어부나 상인들과는 생각이 약간 다를 것입니다.
농부는 농사지을 때에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물론 화전민 같으면 그렇게 하겠지요. 불을 놓아서 그 불탄 자리에 곡식을 심고 거두는 화전민 같으면 올해에는 여기에 씨를 뿌리고 다음 해에는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보통의 농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는 논과 밭에다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농사꾼들은 길가에 씨를 뿌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 저런, 저걸 어째! 하면서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바위 위에 씨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가시 덤불 많은 땅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같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이, 우리 땅은 왜 이리 가시덤불이 많은지 모르겠어, 왜 이리 자갈이 많은지 모르겠어. 어디 농사짓겠어” 하면서 땅을 버려두고 다른 데로 옮겨가는 농사꾼을 아직까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만석꾼, 천석꾼이라면 몰라도, 아니 만석꾼이라 할지라도 진짜 농사꾼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농부는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밭으로 나가 괭이를 가지고, 호미를 가지고 단단한 땅을 갈아 엎을 것입니다.
밭에 널려 있는 자갈들은 지게에 담아 무너지기 쉬운 언덕에 가져다 부어 밭이 무너지지 않게 쌓을 것입니다.
밭에 바위 덩어리가 있다면 그것을 망치로 쪼개어 내어 집으로 가져가 담장을 쌓는데 쓸 것입니다.
또 가시덤불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낫으로 베어내어 집으로 가져가 밥짓는데 땔감으로 쓸 것입니다.
자기 밭에 바위가 있더라도, 자갈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농사짓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재의 밭이 나쁜 밭이라 하더라도 그 밭을 좋은 밭이 되도록 땀 흘려 애를 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도, 농부라면 당연히 못쓰는 땅도 좋은 밭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마음 밭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마음 밭이 있다면 좋은 밭으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길가 밭이라면, 바위라면 또 가시덤불이 많은 밭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길가 밭과 돌밭에 떨어진 씨의 경우는 밭 자체가 문제입니다. 밭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길가 밭이라면 그 단단해진 땅을 통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적당이 손 본다거나 비료를 주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땅을 통채로 갈아 엎어서 단단한 조각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산산이 부셔야 합니다.
그처럼 단단해진 우리 마음을 갈아 엎어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드러운 마음을 타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단단한 바위를 다른 데로 옮기던지 아니면 모래가 될 때까지 부수어야 합니다.
힘이 아무리 들더라도 그 바위를 그 자리에서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밑에 감춰져 있던 밭이 드러납니다.
그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도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온갖 나쁜 마음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 다음 가시 덤불 밭은 앞의 두 가지 경우와는 약간 다릅니다.
가시밭은 밭 자체는 괜찮은데 밭을 둘러싸고 있는 가시 떨기가 문제입니다. 가시덤불 많은 밭은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을 막고 있는 것들이 많은 게 문제입니다. 외부로부터 받는 시험, 어려운 일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가시덤불이 있는 밭이면 땅을 갈아 엎어서는 소용이 없으니 가시덤불을 치워버려야 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미리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 말씀이 뿌리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들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뽑아 내버려야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이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제서야 우리 마음은 좋은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좋게 밭이 되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 쑥쑥 자라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씨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자라고 있어야만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되고 죄를 멀리 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좋은 밭이 된 우리 마음을 계속하여 가꾸는 일입니다.
농사짓는 밭도 그렇습니다. 바람이 불어 잡초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밭 한쪽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또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매일 수시로 살펴보아야만 좋은 땅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있는 꽃밭을 망쳐버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꽃밭에 불을 지르고 물을 많이 부어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러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꽃은 시들고 꽃밭은 어느 사이에 잡초 밭으로 변해버립니다.
우리의 마음 밭도 한번 좋은 밭이 되었다고 내버려 두면 쓸모 없는 마음 밭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쓸고 닦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우리의 마음을 닦고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읽으며, 내 마음 밭은 어떤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 밭이 ‘좋은 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농부 즉 하나님은 좋지 못한 땅에도 씨를 부리지만, 그렇게 애써 뿌린 씨앗이 아무렇게나 썩어 버리기를 바라시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길가의 밭일지라도 좋은 밭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씨를 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바꿀 필요가 더욱 있는 것입니다.
2007.07.29 22:51:06
오세용 목사님!
요즈음 많이 바쁘시지요?
병원사역은 힘들지 않으신지요?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셔서....다비아에선 뵙기 힘들다 했더니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밭' 상태로 마음을 가꿀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요즈음 많이 바쁘시지요?
병원사역은 힘들지 않으신지요?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셔서....다비아에선 뵙기 힘들다 했더니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밭' 상태로 마음을 가꿀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2007.07.30 21:18:31
求道者 님, 댓글 감사합니다.
하나도 유명하지 않은 저더러 그렇게 말씀하시니 공연히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이제 구도자님이 유명인사가 되셔서
저의 글 댓글은 고사하고 읽어보실 시간이나 있을지요?
도서출판 다비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지런히 글을 쓸터이니 원고 잘 봐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하나도 유명하지 않은 저더러 그렇게 말씀하시니 공연히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이제 구도자님이 유명인사가 되셔서
저의 글 댓글은 고사하고 읽어보실 시간이나 있을지요?
도서출판 다비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지런히 글을 쓸터이니 원고 잘 봐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2007.08.04 13:01:53
늘 목사님의 글 잘 읽고 도움을 받습니다.
바위밭이라고 할대 바위위에 흙이 덮어 있는 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뿌릴때 바위밭인지 옥토인지 표면적인 것으로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양 자체는 별 차이가 없는데 토양 아래 바위가 있어 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일반적인 상태까지는 자랄 수 있으나 더 깊은 수분과 양분을 받아들일 수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다고 봅니다. 단지 가시 씨앗이 날려 밭에 말씀의 씨와 함께 착근을 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가시가 더 빨리 자라 참된 씨앗을 방해하고 있는 걸로 볼수 있지 않는지요? 더러는 그렇다고 하니 이는 일부 소수의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토양 자체가 아닌 토양에 무엇이 섞여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옥토냐 아니냐가 아니라 씨앗이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저의 마음의 토양에 좋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묵 하여 봅니다.
바위밭이라고 할대 바위위에 흙이 덮어 있는 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뿌릴때 바위밭인지 옥토인지 표면적인 것으로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양 자체는 별 차이가 없는데 토양 아래 바위가 있어 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일반적인 상태까지는 자랄 수 있으나 더 깊은 수분과 양분을 받아들일 수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다고 봅니다. 단지 가시 씨앗이 날려 밭에 말씀의 씨와 함께 착근을 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가시가 더 빨리 자라 참된 씨앗을 방해하고 있는 걸로 볼수 있지 않는지요? 더러는 그렇다고 하니 이는 일부 소수의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토양 자체가 아닌 토양에 무엇이 섞여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옥토냐 아니냐가 아니라 씨앗이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저의 마음의 토양에 좋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묵 하여 봅니다.
2007.08.04 15:28:23
sinsa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밭에 대한 말씀 고맙습니다.
위의 본문과 관련해서, 네 종류 땅에 대하여 여러 설명이 있는 줄 압니다.
예를 들어, '바위'에 대한 설명도 무지무지 하게 많지요.
어떤 분은 그냥 맨 바위다, 어떤 분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위이기는 하지만 바위 위에 흙이 조금 덮여있는 바위다...아마 이런 것만 해도 몇페이지는 족히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구분에 대하여는 다른 분들이 많이 하셨으니, 그분들에게 맡기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바꿀" 생각을 위의 본문을 읽으면서 해보았는데
실상 엄격하게 말하자면 본문의 범위를 벗어난 생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요......
그러나 각주없이 한번 읽어보자는 취지에는 어느 정도 부합한다, 생각합니다.
그저 그런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밭에 대한 말씀 고맙습니다.
위의 본문과 관련해서, 네 종류 땅에 대하여 여러 설명이 있는 줄 압니다.
예를 들어, '바위'에 대한 설명도 무지무지 하게 많지요.
어떤 분은 그냥 맨 바위다, 어떤 분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위이기는 하지만 바위 위에 흙이 조금 덮여있는 바위다...아마 이런 것만 해도 몇페이지는 족히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구분에 대하여는 다른 분들이 많이 하셨으니, 그분들에게 맡기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바꿀" 생각을 위의 본문을 읽으면서 해보았는데
실상 엄격하게 말하자면 본문의 범위를 벗어난 생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요......
그러나 각주없이 한번 읽어보자는 취지에는 어느 정도 부합한다, 생각합니다.
그저 그런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7.10.14 22:40:43
농부가 씨를 막 뿌리는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당시 농사를 짓는 법은 오늘 날과 같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이 비유에 나오는 네가지 밭은 실상 네가지 밭이 아니라 하나의 밭에 존재하는 네가지 토양의 유형입니다. 밭의 어느 곳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다 보니 길처럼 되어 버린 곳도 있고 어느 곳은 가시덤불이 자란 것도 있고 어느 곳은 사람들이 돌들을 한곳으로 모아놓아서 돌짝 밭이 된 곳도 있고요 머지 않아 씨를 뿌리고 그리고나면 갈아 엎겠지요. 정말 두려운 것은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즉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황입니다. 저는 항상 이 비유를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편의주의적인 복음으로 가리워진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파악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자신의 형편을 들여가 본다는 것입니다.
2007.10.19 22:13:37
규발이님,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위의 글을 쓰기 위해 당시의 농업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님이 <당시 농사를 짓는 법은 오늘 날과 같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셨는데, 어떤 자료를 통해서 그와 같은 정보를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위의 글을 쓰기 위해 당시의 농업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님이 <당시 농사를 짓는 법은 오늘 날과 같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셨는데, 어떤 자료를 통해서 그와 같은 정보를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07.10.20 23:06:40
독일 학자인 요아힘 예레미아스가 지은 예수의 비유라는 책에 보면 비유해석의 서론을 설명을 하면서 맨처음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레미아스는 현재까지도 비유해석에 있어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분입니다. 다만 그의 책이 워낙 학문적이라 널리 알려주지 않은 부분이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요. 분도출판사에서 출판이 된 책인데 일반 기독교 서점에서는 구하기가 쉽지가 안더군요...
2007.10.20 23:10:41
아주 오래 전 제가 했던 같은 설교가 제 섹션에 있습니다.
http://dabia.net/bbs/zboard.php?id=mediapia&page=1&sn1=&divpage=1&category=3&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6
저 역시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레미아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http://dabia.net/bbs/zboard.php?id=mediapia&page=1&sn1=&divpage=1&category=3&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6
저 역시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레미아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집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