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숨어있는 소망, ‘그러나’ 2 題 / 사사기 16:15- 22, 행 12:1-5

삼손 이야기, 긴 이야기 할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삼손, 하면 그때나 자금이나 힘이 센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고, ‘삼소나이트’란 상표로 비행기 여행을 할 때에 쓰이는 튼튼한 가방으로 유명하지요.
그러나 삼손은 민족의 영웅이 되자 오히려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들릴라 때문입니다. 
‘삼손과 들릴라’로 유명한, 영화와 예술작품의 주인공인 그 ‘들릴라’입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가수 조영남이 부른 ‘딜라일라’라는 노래로 유명하지요.

문제의 여인, 들릴라의 꼬임에 빠져서 삼손은 결국 머리카락이 잘리게 되어, 놋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삼손의 비참한 처지를 기록한 다음, 뜬금없이 22절에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23절에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라는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왜, 사사기의 저자는 이렇게 전혀 앞뒤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바로 거기에 저자의 뜻이 숨겨져 있는데, 그 숨어있는 의도를 파악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 그렇다면 잘린 머리카락은 어떻게 될까요?
22절 <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
당연한 말입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다시 자라나게 되어 있으니 삼손의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라는 기록은 정확한 것이거니와 또한 당연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다시 자란다는 서술이 개역성경에는 그저 아무런 의미도 나타내지 않는 것처럼 중립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하등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

그러나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들이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공동번역을 살펴봅시다.
 
<불레셋 사람들은 그를 잡아 눈을 뽑은 다음 가자로 끌고 내려가 놋사슬 두 줄을 메워 옥에서 연자매를 돌리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잘렸던 그의 머리가 점점 자랐다.>

공동번역에 따르면, 22절은 <그러는 동안>이라고 서술하여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당연하지요,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머리카락은 자라납니다.
그러니 이 공동번역 역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연자매를 돌리는 고초를 당하는 동안, 그 동안에 시간이 흘러갔다.

공동번역 한글 성경은 그렇게 <그러는 동안>이라고 번역하여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는 한데, 그 머리카락이 자랐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은 약간 다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사로잡아, 그의 두 눈을 뽑고, 가사로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삼손을 놋사슬로 묶어, 감옥에서 연자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 >

표준새번역은 개역개정본이나 공동번역과는 다르게, ‘그러나’라고 문장을 시작합니다. 영어성경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But the hair on his head began to grow again after it has been shaved.>(NIV)
<However, the hair of his head began to grow again after it had been shaven.>(NKJV)
<However, the hair of his head began to grow again after it was shaved off.>(NASB)

모두들, ‘그러나’라고 문장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성격번역본들은 왜 ‘그러나’라는 말로 문장을 시작했을까요?
‘그러나’ 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사사기 저자는 그러나, 라는 말 속에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까요?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니까, 그것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는 없다. 대신 그 머리카락이 자라난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5절에서 비슷한 예가 등장합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사도행전 12장 5절은 아주 평범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이 문장을 읽으면 앞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투옥과 뒤에 등장하는 기도, 앞의 사건과 뒤의 일이 그냥 당연히 그래, 그렇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며, 읽혀집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으니, 아주 당연한 듯이, 교회는 기도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그럼 그래야지,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연히 기도를 해야지,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른 번역본을 읽어보면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NIV)
<Peter was therefore kept in prison, but constant prayer was offered to God for him by the church.>(NKJV)
<So Peter was therefore kept in the prison, but prayer for him was being made fervently by the church to God.>(NASB)

“베드로는 옥에 갇혔다. 그러나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기도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예상과는 다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사용법을 한번 검토해 볼까요?
‘철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는 문장을 가정해 봅시다.
그럼 그 다음에 어떤 문장이 와야 할까요?
‘철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철수 엄마는 눈물바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앞뒤가 맞는 말이 되지요, ‘그래서 철수엄마는 눈물바람이다. 걱정이 태산이다.’
이렇게 순접 접속사인 ‘그래서’가 들어가면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그러한 일이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역접 접속사를 집어 넣어 봅시다.
“철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철수 아빠는 ……”
뭐라고 문장을 마무리해야 합니까?
‘그러나’가 들어간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에는 앞의 문장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 나와야 합니다.
‘철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철수 아빠는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앞의 문장에 사람들은 어떤 정형화된 반응을 기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역접접속사가 오는 순간 그 기대가 깨지고 다른 일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문장이 이어지면 사람들은 철수 아빠가 걱정을 하지 않았다니, 왜 그럴까? 하고 그 다음 말을 기대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라는 말이 나왔으니 순접접속사인 ‘그래서’가 사용되었다면 <그래서 교회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러니 교회가 기도한 것은 우리 사람이 보통으로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기도한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보통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난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 기도는 특별한 일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했더니, 어떻게 되었지? 라고 무언가 기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그런 식으로 해석이 된다면 사사기 16장 22절의 말씀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도 그런 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아니, 무슨 말? 머리카락이야 자라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난다는 사실, 그것이 사람에게는 보통 일반적인 일이지만
삼손의 경우에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저자는 그 앞에 ‘그러나’라는 말을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 말은 머리카락이 자라나게 되었으니,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삼손이 지금 연자맷돌을 돌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 일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느냐?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일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 본문의 경우는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 다음 어떤 색다른 일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대란 곧 소망입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그러나’는 무언가 기대를 하게 만들며,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기도했다니?’ 그러면 무엇이 일어난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니’, 그러면 그런 삼손의 처치에서도 무엇이 일어난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소망!  우리 성경에서 숨겨진 ‘그러나’를 찾아내 그 의미를 찾아 읽을 때에 소망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족입니다만, 사도행전 12장 5절의 번역에서,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드는 ‘but’, ‘그러나’가 왜 우리말 번역에는 빠졌을까요, 우리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더 믿음이 좋아서,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굳이 ‘그러나’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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