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성서읽기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한국교회에서 낯설다. 인문학은 세상에 속한 인간적 학문이고 성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가 인문학 작품들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괴테의 <파우스트>와 구약성서의 <욥기>를 똑같은 차원에서 읽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성서를 인문학 작품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없이 무조건 교회의 권위에 기대서 강요하는 건 진리의 영인 성령에 의존해야 할 교회 공동체가 취할 바른 태도는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성서는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런 질문이 너무 기초적이고 당연하다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질문의 깊이로 바르게 들어갈 줄 아는 사람만이 성서의 영적 현실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어떤 이들은 그 대답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성서의 진술 자체에서 찾는다. 성서에는 그런 진술이 많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직접 들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예언자들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선포한다. 하나님과 인간이 친구처럼 대화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요즘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오해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목소리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사람처럼 입과 성대 있을까? 그는 히브리어로 말씀하시는가, 헬라어로 말씀하시는가, 아람어인가? 우리말인가? 아무리 성서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람처럼 소리로 말씀하신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소리를 내서 말씀하신 것처럼 묘사한 것일까? 그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성서기자들은 시인과 같다. 그들은 어떤 절대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 절대적인 경험을 시적 언어로 표현했다. 시적인 언어를 사실적인 언어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예컨대 어느 시인의 시에 “바람이 슬프다 말하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자. 시인은 바람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다. 그가 전해들은 바람의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시적인 영감의 차원에서만 통할 수 있는 시적 언어이다. 이 시의 독자가 실제로 바람이 말을 했다고 믿거나, 반대로 시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 경험이다. 성서 기자들의 그 경험을 따라가는 것이 성서를 읽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이 경험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다. 하나님 경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은 역사적이다. 그 역사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 행위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역사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역사로 계시하신다. 이런 명제는 성서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다. 구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예를 들어 출애굽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며,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행위이며, 계시이며, 말씀이라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며, 부활 자체가 계시이며,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토대에서만 우리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역사적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당연한 논리이다. 그것이 성서학에서 말하는 ‘삶의 자리’이다. 그런 삶의 자리가 없는 이야기는 성서에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를 말하는 모세오경과 그 역사적 맥락에서 선포된 예언서, 그리고 역사적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성문서가 모두 그렇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비역사적인 문서로 보이는 요한계시록도 역시 로마의 황제숭배 아래서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던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한다.

성서와 역사의 관련성은 성서에서 무슨 설교를 해야 하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니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겠다. 여호수와서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다룬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공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멸절시키라는 명령이었다. 끔찍한 이야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이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었을까? 그건 말이 안 된다. 자비와 창조의 하나님께서 어찌 어린아이까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안 되는 명령을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내렸다고 성서는 말한다. 이게 바로 성서를 붙들고 설교해야 할 설교자들이 처한 딜레마이다. 그 명령을 옳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설교자들은 전문적인 해석학 훈련을 받는 것이다. 간단하게 방향만 짚자. 이런 표현들은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의 관점으로는 그 말씀이 옳았지만, 오늘의 관점에서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판단해야 한다. 더 궁극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이해했던 하나님 경험이 무엇인지를 오늘의 삶에서 밝혀야 한다. 그런 해석학적 노력이 없다면 십자군 전쟁과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성서가 종교제국주의의 도구로 오용될 개연성이 높다. 

구약성서는 돼지고기를 하나님이 금했다고 전한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지금도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돼지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개고기를 즐기는 목사들도 많다. 신자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강요하면서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의 율법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 폐기되었고 믿는다는 것이 그 대답일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모든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말라기에 근거해서 십일조를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으로 선포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말씀은 간단히 무시하면서, 십일조를 하라는 말씀은 금과옥조로 지킨다는 것은 이율배반이요 이현령비현령이다. 진리를 선포해야 할 교회 강단에서 이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이유는 설교자들이 비양심적이라거나 비인격적이라기보다는 성서를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런 것만 놓고 본다면 구약말씀까지 문자적으로 고수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보다 더 순수한지 모른다.

성서를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앞에서 예로 든 여호수아의 진멸 명령을 보자. 고대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놓고 원주민들과 일종의 ‘제로섬’ 게임을 벌였다. 그 땅에 그들과 더불어 사는 대안은 없었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어야 할 상황에서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은 적을 섬멸하는 것뿐이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뀐다기보다는 종말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열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뀐다고 보아야 한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바로 설교자의 해석학적 능력이 요구된다. 이 문제는 돼지고기 이야기를 통해서 더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다.

고대 유대인들의 율법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했다. 동물의 피를 마시지 말라는 명령도 이런 데 포함된다. 그런 율법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골라준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그런 먹을거리마저 지정해준 것이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은 고대 유대인들의 생존 조건과 연관된다. 지방질이 높은 돼지고기는 열악한 위생환경에서 살아가는 유대민족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 율법은 바로 그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그런 규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오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똑같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만 돼지고기를 금하는 규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핵심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바로 금지 품목으로 지정되어야 하는 건 아닐는지.

여리고 성 주민을 멸절시키라는 명령이나 돼지고기를 금하는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 규정은 생존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인식이며 신앙고백이다. 그 하나님의 경험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경험의 틀 안에서 진술했다. 구약성서를 읽는 우리는 그들의 역사경험 너머에 있는 하나님 경험을 배워야 한다. 역사경험과 하나님 경험은 일치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구별되기도 한다. 여리고 성 주민들을 멸절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 경험이었으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것은 하나님 경험이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역사 경험이었다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지켜주신다는 믿음은 하나님 경험이다. 역사 경험은 손가락이며, 하나님 경험은 달이다. 손가락을 통해서 우리가 봐야 할 대상은 달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시각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훈련은 인문학적 사유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이기에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설교자들에게 필수적이라는 말인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문학은 문학, 역사, 철학을 가리킨다. 이 세 분과가 완전히 구별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헬라의 철학은 역사이며 동시에 문학이다. 장자와 노자의 철학은 문학이며 철학이다. 세 분과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이 바로 오늘의 과학자와 똑같은 역할을 한 것처럼 철학과 자연과학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서가 바로 문학이며 역사이며 철학이라는 것이다. 서양 문학은 성서를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기본은 신명기 역사관이다. 역사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구약성서를 정확히 읽어낼 수가 없다. 신학이 기본적으로 유럽 철학과의 직간접적인 대화를 통해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헬라의 다신론적 철학과 대별되는 고유한 세계관이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긴밀히 연결되는 이유는 그것이 동일하게 인간 삶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곧 인간 삶의 흔적이며 무늬이다. 그런 흔적과 무늬가 성서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인문학적 훈련 없이 성서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이름을 물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이 말은 하나님에게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개념과 범주를 뛰어넘는 하나님에게 어찌 이름을 붙이겠는가. 개념과 범주를 초월한다는 뜻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소위 존재론이다. 고대 헬라 철학은 주로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했다. 오늘날 존재는 단순히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없다’는 차원까지 포함한다. 하이덱거는 존재를 ‘무(無)에 걸쳐 있음’이라고 말했다. 없음을 통해서 오히려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힘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이런 말이 나온다. “색즉공 공즉색”(色卽空 空卽色) 실체는 비어있음이요, 비어있음은 곧 실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색(세상의 실체)은 단순히 무언가 있다는 뜻이 아니며, 공은 단순히 없다는 뜻이 아니다. 색과 공, 즉 차 있음과 비어 있음은 변증법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는 우리가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차원을 초월해 있는 신비라는 뜻이다. ‘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루터의 번역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루터는 그 구절을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앞으로 존재하게 될 바로 그라는 뜻이다. 미래형의 문장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료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아직 그 실체가 다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궁극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왜곡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무엇이 부활인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런 일이 없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환생일 뿐이다. 예수의 부활 현현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은 역사에서 실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그래서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유일회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경험이다. 부활의 주님이 대제사장이나 빌라도에게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라. 부활의 주님은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확인해서 보도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부활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경험한 이들에게만 가능한, 즉 종말에 온전하게 드러날 궁극적 생명의 선취(先取)였다. 오늘 설교자는 이 부활을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성서가 말하는 부활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걸음은 인문학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따라가는 것이다.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포괄적인 이해가 없다면 부활 설교는 죽은 설교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생명의 문제는 성령과도 연결된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크게 오해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 성령론이다. 성령이 초자연적 사건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나 그것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인식의 근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툭 하면 성령의 조명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운다. 은사주의 신앙에도 이 성령은 강조된다. 성령을 받으면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각종 은사를 받게 되고, 성서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성령이 열광주의와 경건주의의 독점물인양 오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서가 말하는 성령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다. 구약성경의 루아흐와 신약성경의 프뉴마는 바람이나 숨처럼 생명을 야기하는 능력이다. 생명을 야기하는 능력이 어디서 작용하는지 우선 상식적으로 살펴보라. 인문학적인 사유는 상식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구 곳곳에 그런 힘들이 작용한다. 바닷물 속의 플랑크톤의 번식에서,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에서 생명의 힘들이 작용한다. 물리학이 말하는 양자역학과 장(場)역학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서 생명의 영이 작용한다. 그런 생명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풍성해져야만 우리는 부활생명의 실체에도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설교자에게 주어진 과업은 이런 보편적인 생명 경험과 예수의 부활에 토대한 기독교의 생명 경험을 해석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런 과업에서 생명에 대한 인문학적 공부는 필수다.

설교와 인문학의 관계에 대한 이런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현실성(reality)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에 대해서도 책임 있게 말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공부가 없다면 기독교의 종말론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교회에서 종말론이 시한부 종말론이나 역사 허무주의적 종말론으로 자주 빠져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에 대한 공부가 없으면 부활론과 대립되는 영혼불멸설이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 자리 잡게 된 피치 못할 사정을 따라갈 수 없다. 인간과 성(性)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없는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동성애자들을 단죄하고, 생물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설교자들은 진화론을 부정하느라 공연히 영적 에너지를 소진한다.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설교자는 반공주의를 기독교의 복음인양 전한다. 인간 삶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는 설교를 도그마에 빠지게 하거나 포퓰리즘에 휩쓸리게 한다. 이건 세상을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까지 하신 하나님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의 도리가 아니다.


인문학과 신학


인문학이 성서읽기와 설교행위에서 만능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문학적 인식이 깊은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설교를 능수능란하게 못할 수도 있고, 그런 훈련이 없어도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인문학의 속성 자체에 놓여 있다. 인문학은 세계와 인간 삶에 대한 통찰력을 깊게 해 줄 뿐이지 청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층적인 인간 삶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바로 인문학의 본류다. 김영민은 인문 정신을 이렇게 피력한 적이 있다.  


이 글의 중심에 자리잡은 개념, ‘인문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세상’을 만들려는 정신이며, 삶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가는 사람의 무늬(人文), 그리고 묘(妙)의 지극함을 존중하려는 태도다.(김영민, 진리.일리.무리, 31.)


김영민이 말하는 묘의 지극함이 무엇인가? 이 세상은 묘가 극에 달했다는 뜻이다. 세상 자체가 묘이다. 여기 필자의 책상 위에 연필 한 자루가 있다. 이것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것의 근원이 어딘지를 상상해보라. 묘의 지극함, 또는 아득함에 빠져들 것이다. 연필은 두 가지 물질의 결합이다. 하나는 나무이며, 다른 하나는 흑연이다. 나무만 보자. 연필의 재료가 된 나무는 오랜 세월 빛과 탄소와 물의 탄소동화 작용에 의해서 그 생명을 이어왔다. 그 나무가 많은 단계를 거쳐서 결국 연필이라는 실체로 필자의 눈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필은 태양이기도하고, 물이기도하고, 탄소이기도하다. 연필은 우주가 펼치는 마술쇼다. 간단해 보이는 연필 한 자루도 따지고 보면 묘의 극치이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우리 주변에 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구에는 물이 있다. 일정한 형체가 없이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서 달라지는 액체다.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런 물리적 성질도 신비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지구에는 왜 물이 있을까? 또 지구에는 왜 물과 돌의 중간 쯤 되는 물질은 없을까? 신기하다. 소리는 또 어떤가. 소리는 공기의 진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물리현상이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는 소리도 없다. 색깔은 또 어떤가? 모든 것들이 신묘막측하다.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자기 나름의 시간이 있다. 물질은 자기 시간을 채우면 다른 물질이 된다. 금은 금의 시간이 채워지면 해체되어 납이 되기도 하고, 돌이 되기도 한다. 납도 납의 시간을 채우면 해체되어 금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지구의 물질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띤 것뿐이다. 모든 것은 서로 소통된다. 연금술사는 연금술을 배우고싶어 하는 목동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티아고, 사막의 모래 한 알이 우주다!” 옳은 이야기다. 빗방울이 보석이고, 해바라기 씨가 다이아몬드다. 

사람의 만남도 그렇다.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만나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사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묘하다. 그 누구도 연출해내기 힘든 만남들이다. 그런 인간의 만남으로 일어나는 역사를 보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유럽의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는 결정되지 않았다.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언제 무슨 일로 어떻게 역사가 변할지 모른다. 2천 년 전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유대인 젊은이의 죽음으로 인해서 세계의 역사가 지금처럼 진행될 줄은 그를 고발한 산헤드린 의원들이나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로마 총독 빌라도 역시 꿈도 꾸지 못했다. 에피소드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역사의 흐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을 일으킨다. 이것이 역사의 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묘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과 신학은 같은 길을 간다. 인문학이 인간과 세상과 역사의 묘에 취하는 것이라면 신학은 하나님의 신비에 취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바로 인간과 세상과 역사의 묘에서 자신의 존재 신비를 계시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는 ‘비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에버하르트 윙엘의 저서 제목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이다.(Gott als Geheimnis der Welt) 이 비밀은 신학자들의 말장난이 아니라 성서기자들의 신앙 고백적 진술이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니, 무슨 말인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유대교 신학자 한 사람이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근거가 무엇인가? 유대인 학자의 눈에 예수에게는 그런 근거가 없다. 예수 이후에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무죄한 이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하고 사악한 이들이 평안하게 잘 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인간은 여전히 싸우고, 죽어야 한다. 선천적인 장애인들도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태어난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진 게 있어야 했다는 그의 문제 제기는 옳다. 이게 바로 오늘 기독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 대답은 실증적으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실증적인 것이 늘 옳은 것만도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개념에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지금 비밀이다. 예수는 은폐의 방식으로 메시아 사건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주로 불가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 비밀이라는 말은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라고 말이다. 묘의 지극함과 하나님 존재의 신비도 확실한 게 아니니 말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그것은 잘못이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대리석 덩어리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대리석 덩어리에 들어 있는 피에타 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상은 대리석 덩어리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건 비밀이요, 신비이며, 묘이다.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못 보는 사람이 있다. 못 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숨어 있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유이며, 상상력이며, 직관이다.

신학과 인문학은 결국 같은 것인가? 신학은 말 그대로 신에 대한 언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인간 삶의 무늬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한쪽은 중심이 신이고, 다른 한쪽은 인간이다. 서로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양쪽이 모두 신비와 묘의 관점에서 비슷한 길을 간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굳이 구별한다면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묘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둔다면, 인문학은 인간의 삶 자체에 묘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과 세계 전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신학이 굳이 인문학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아니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마음에 두는 신학이나 인간 삶의 묘를 존중하는 인문학이나 신비와 묘에 사로잡힌다는 점에서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교회와 설교자들에게 인문학 공부가 외면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실용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용(用)이 아니라 묘(妙)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교회와 설교자의 문제만인가. 이미 한국사회는 오래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를 겪고 있다. 가장 보편적이고 인문학적인 공부에 매진해야 할 대학교에서도 철학개론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고, 심지어 철학과가 폐과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대신 실용영어와 컴퓨터 관련 과목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철학 선생들은 철학으로 밥벌이를 할 수 없어 사설학원의 논술 강사로 팔리고 있다. 신학교에서도 이론과목은 인기를 잃고 당장 교회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실용과목이 득세한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선포되어야 할 교회에서도 교회 성장주의와 교양강좌 류의 설교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재미있는 설교, 들리는 설교, 심지어 웃기는 설교가, 그리고 당장 세상살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설교가 압도하는 실정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삶의 지극한 묘까지 계량화되는 시대에, 하나님의 존재 신비까지 처세술의 비법으로 도구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어쩔 것인가?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각각 자신의 영적 경지에 따라서 살아갈 뿐이다. 설교자들도 자신의 영적인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 관한 궁금증


마지막으로 필자는 개인적인 경험을 전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지난 30년 가까이 설교자로 살아오면서 반복되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성서의 세계에 관한 궁금증이다. 이런 궁금증이야말로 인문학적 사유와 신학적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본질적인 영적 경험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학비평>에 실었던 졸고 “당신 설교는 어떤데?”에서 이와 연관된 내용 중의 일부를 조금 고쳐 적는다.

필자는 설교의 원(原)자료라 할 성서텍스트 앞에 설 때 궁금증이 강렬해지면서, 때로는 현묘(玄妙)의 어지럼증을 느낀다. 창세기 1장1절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선 이 문장의 속내가 나를 두렵게 만든다. “태초”라! 도대체 태초가 언제라는 것인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나이라고 말하는 120억 년 전(前)이 곧 구약성서의 첫 마디와 일치한다는 것인가? 그 태초 이전은 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뒤로 등장하는 하느님, 하늘, 땅, 지어 내셨다는 단어도 역시 내 사유의 세계를 어지럽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신약성서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2장20,21절은 이렇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도대체 예수가 다시 오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예측했다는데, 그의 재림이 이렇게 연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대답들이 이런 사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해결해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타당하기나 한 것일까? 성서 첫 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그것이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한발걸음만 더 들어가도 나는 어지럽고 막막하고, 그래서 두렵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나 궁금증은 성서텍스트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그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으로 연결된다.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태초’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삶에 어떤 원한이 사무쳤기에 가나안 종족들을 진멸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으며, 원수를 갚아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 또 얼마나 심각한 삶의 절망감과 무의미 가운데서 나름으로 성서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했는지 나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곧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는데, 하물며 수백, 수천,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 성서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꽃과 아침 안개와 요정들 사이의 대화에 전혀 끼어들지 못하는 내가 느끼는 그 소외감이 성서 텍스트와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앞에서도 똑같이 작동되고 있다. 이게 곧 설교자로서 내가 처한 엄정한 실존이다.

세상과 인간과 성서와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 내가 무얼 설교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목사가 설교 행위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곧 신의 노여움으로 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산 위로 끌고 올라가는 징벌을 받은 시지푸스처럼 설교자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짊어진 숙명이다. 이런 설교자의 처지가 답답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희망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서 기자들의 영적 경험을 조금씩 따라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사상, 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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