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시대를 위한 설교


오래 전 사정이 있어서 몇 달 동안 목회를 쉬고 있을 때다. 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순방하며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를 하던 자리에서 설교를 듣는 자리로 옮겨간 것이다.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허전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온전히 예배에만 집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리에서도 물론 예배에 집중할 수 있다. 감격스러운 경험도 종종 주어진다. 그러나 예배 분위기에 신경을 쓰고, 설교를 잘 전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집중력이 흔들릴 때가 많다. 심지어는 신자들 중에 빠진 사람은 없는지,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 중에 표정이 나쁜 것까지도 신경이 쓰일 때도 있다. 그러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예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대가 되겠는가.

몇 달 동안의 경험은 실망으로 끝났다. 대다수의 예배가 산만하게 진행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기보다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종교적 여흥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는 예배였다. 어떤 교회는 주일공동예배를 드리기 전에 열정적으로 준비 찬송을 불렀다.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다. 헌금자 명단을 호명하는 교회도 있었다. 필자가 가보지 못한 모든 교회의 예배가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없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평생 목사로 살아온 사람이 마치 이교도의 종교 집회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설교는 말할 것도 없다. 설교의 상투성이라니!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본문으로 설교를 하든지 결국은 똑같은 이야기다.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에 최선을 기울이고, 전도 잘 해서 축복받자는 말만 되풀이 되고 있었다. 설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어 보였다. 하나님의 통치와 존재의 신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나님, 성령, 구원, 믿음이라는 단어는 남발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설교의 초점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거나, 십일조를 드려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되었다. 이건 하나님을 설교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의 종교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들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예화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말도 되지 않는 예화의 남발이다. 자신의 설교에 자신이 없으니 “믿습니까?”라든지 어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는 멘트로 설교 분위기를 억지로 만들어간다. 안타깝지만 몇 달 동안의 경험에서 필자는 가장 거룩한 행위인 예배와 설교에서 아무런 영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예배와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있는 신자들이 신기해보였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만 본다면 한국교회는 은혜의 도가니이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평생 예배와 설교를 중심으로 해서 목회에 전념한 필자는 아무런 영적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예배와 설교에서 그들은 어찌 그렇게 큰 감동을 받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가? 두 가지 중의 하나가 그 원인이다. 필자에게 근본적으로 영적 깊이가 전혀 없든지, 아니면 그들이 거짓 영성에 사로잡혀 있든지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영성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필자의 입장에서만 말하는 걸 이해 바란다. 뽕짝 노래에 예술적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고, 클래식에서 받는 사람이 있듯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영성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모르겠다. 이는 곧 무엇이 영적 요구인가,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이 글의 주제인 ‘목마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목마름의 정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자. 오늘은 목마름의 시대인가? 도대체 무엇을 목마름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젊은 시절에 애인이 없는 이들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는 것이 목마름이고, 직장이 없는 사람은 좋은 일터가 그것이다. 지병을 안고 사는 사람은 건강이 목마름이다. 지금보다 넓은 아파트를 그 목마름의 근원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혁명가들은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서 ‘타는 목마름’으로 살아간다. 이런 목마름에 나름의 진정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근본적인 목마름이 아니다. 필자가 볼 때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첫째, 위에서 거론한 목마름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상대적인 것이다. 30평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은 5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겠지만 20평에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을 것이다. 둘째, 위에서 거론한 목마름은 이 세상의 질서가 대답하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보다 잘 사는 목표는 세상이 제시한다. 의사들은 건강을 약속하고, 변호사들은 온갖 법정 다툼을 해결해준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우리는 티브이 채널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셋째, 더 근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목마름의 대상이나 조건들이 성취했다고 해도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설교 조로 말한 것 같고, 또 상식적으로 모두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런 기초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교회의 예배와 설교가 참된 영성을 추구할 수 없다. 다음의 사실이 핵심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아니 보편 인간의 삶에서 근원적인 목마름은 영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말은 하지만 삶이 담기지 않았기에 그것은 죽은 말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삶(생명)에 대한 피상성과 삶의 심층적 차원인 영에 대한 몰이해가 결합되어 있다.

삶에 대한 피상성은 소유 지향적인 삶에 기원한다. 사람들은 소유를 오히려 구체적인 것으로 여긴다. 세상에서의 삶은 늘 그런 식이니 접어두고 그것을 초월하는 종교적 삶만 짚어보자. 종교적 삶에서도 소유 지향성은 강하다. 복음서가 지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삶이 전형적인 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금식, 십일조, 기도 같은 모든 종교적 업적이 자랑거리였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 업적과 거리가 멀었던 세리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이뤘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삶에서 피상적인 것이며, 무엇이 구체적인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 피상성 문제는 영에 대한 인식이나 경험과 직결된다. 영적인 것만이, 즉 영적인 차원만이 생명의 현실성(reality of life)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상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성서는 바람과 영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 ‘루아흐’를(신약에서는 ‘프뉴마’) 생명의 영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바로 이 영이 자리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영을 제외하고 어찌 생명을 말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것에 대한 몰이해가 흔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영을 종교적 열광주의로, 다른 한편에서는 일종의 냉소주의로 대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열광주의와 냉소주의는 인간 중심주의라는 관점에서 일치한다. 오직 성령이 지배해야 할 예배와 설교 현장을 보라. 사람과 사람의 업적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한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사람들의 가능성, 사명감을 고취시킨다. 필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신비가 선포되는 설교 현장을 경험한 적이 많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카봇) 앞에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거룩한 두려움인 ‘누미노제’를 주제로 삼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많지 않다. 모두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성령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삶의 피상성과 영의 몰이해가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킨 탓에 오늘 설교자를 비롯해서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목마름의 정체를 바르게 알지도 못하며, 그 목마름을 넘어서는 영적인 길을 찾는데 혼란을 느낀다.

당신의 주장은 단지 신학적인 교언영색이어서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역동성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예배의 열기와 설교의 격정만 본다면 한국교회는 성령에 충만한 공동체처럼 보인다. 아마 대개의 설교자들이 영적인 설교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혼구원이라는 말이 일종의 주문처럼 선포되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필자가 볼 때 그들이 말하는 영, 영성, 영적인 것, 또는 영혼과 구원은 자폐적이고 독단적이다. 이원론적이고 자의적이다. “예수구원, 불신지옥”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단죄한다. 심지어 사후보상론까지 거론한다. 이런 생각은 인간적 욕망의 산물이지 창조와 종말과 부활과 진리의 영인 성령의 능력이 아니다. 여기서 더 이상 필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쏟아낼 생각은 없다. 이건 단순히 논쟁을 벌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영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깊이에 따라서 서로 다른 답을 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면서 거기서 만나는 영적인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로!

다행히 우리에게는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설교를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성서가 기준이다. 성서기자들은 모두 영성의 대가들이다.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모든 성서기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언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했으며, 그것을 다시 언어로 진술했다. 그 진술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을 경험하는 가장 바른 길이다. 이것은 거꾸로 영적이지 못한 설교를 구분해내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갈하는 유일무이한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말을 들어보시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목마름의 근원이라는 아모스의 진술을 허투루 듣지 마시라. 예배를 자주 열정적으로 드리고, 매일 큐티를 빠뜨리지 말고 성경공부 모임에 부지런히 쫓아다니라는 말로 들으면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에는 하나님 말씀이 넘쳐난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씀이 죽는다. 무슨 말인가? 성서의 놀라운 세계가 선포되지 않는다. 앞에서 한번 짚은 대로 늘 그렇고 그런 말만 되풀이 될 뿐이다. 청중들이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들어도 영적인 공명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자들이 성서의 그 ‘놀라운 세계’를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에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설교자도 흔하지 않다. 그걸 모를 경우에 표면적으로는 성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전한다. 대중적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보시라. 처세술과 교양이 주종을 이룬다. 나쁜 경우에는 웃으면서 시간을 때우는 설교자들도 많다. 아무리 좋게 봐도 신앙적인 잔소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겠다.

여기 삭개오 이야기(눅 19:1-10)를 설교 본문으로 삼았다고 하자. 대개의 설교자들은 세리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갔듯이 우리를 찾아온다거나, 예수님을 모신 삭개오가 새롭게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거기서 삭개오는 분명히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의 것을 속인 경우에는 네 배를 갚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삭개오의 변화는 중심 주제가 아니다. 그런 변화는 다른 종교나 단체에서도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렇게 놀라운 사건이 아니다. 굳이 삭개오에게 초점을 두겠다면 개인의 도덕적인 회심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에 의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근본적으로 해체되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수군거린 사람들이 바로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던 이들이었다. 설교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즉 해체되고 전복된 세상에 대해서 고유한 영적 시각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사실의 영적 깊이로 들어가야 한다.

지금 필자는 삭개오 이야기에 대한 성서 주석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려는 게 아니었다. 성서텍스트에는 고유한 영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세계와 만날 때 설교자를 비롯해서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으로 공명한다. 기존의 선입관이 허물어지고 고착된 세계관이 붕괴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이 열린다.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지평과 오늘의 고유한 지평이 융해되어 새롭고 창조적인 지평이 열린다는 뜻이다. 이것이 영적 사유의 변증법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이런 해체, 융해, 세움의 변증법이 한번이나 두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까지 계속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적 설교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설교자를 만나면 성서텍스트는 종말론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설교 행위는 선포된 말씀, 선포된 계시가 된다.   

 

설교자의 자기 구원

글머리에서 필자는 다른 교회에 순방하면서 설교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졌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곧 창조적인 설교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창조적인 설교라고 해서 경천동지할 정도로 새로운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설교자 고유의 영성이 작동되면 모든 설교는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설교가 진부하다는 말은, 그래서 영적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설교자에게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 내공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리라. 이는 마치 바둑 8급 수준의 사람이 이창호나 이세돌과 맞상대하겠다고 나선 모습이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지 못함으로 설교의 상투성에 떨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설교자들이 그 세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비극적인 사태는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세계를 매주일 전해야 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영혼을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에 도취하게 만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가 일종의 이벤트 경연장이 되었고 말았다. 일 년 열두 달 쉬지 않고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모든 것들이 교회 성장을 위한 방법론들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이런 방법론들이 정상적인 기독교 교육을 몰아내고 있다. 필자는 평신도 교육의 현장에서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 입문>이나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또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을 교재로 삼는 교회를 본 일이 없다. 루터와 칼뱅의 글도 읽지 않는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나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 류가 기독교 독서계를 독점한다. 워렌의 책으로 40일 ‘특새’를 인도하는 실정이니 더 말할 게 무엇이랴. 만약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워렌의 그 책이 과연 기독교 영성을 심화하는지, 아니면 신앙을 도구화하는지를 곰곰이 살펴보시라.

오늘 교회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임박성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것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 오늘의 대학(大學, university)이 ‘큰 배움’이나 ‘보편적 진리’에 대한 근본을 마치 늦바람 난 사람처럼 팽개치고 오직 돈 버는 기술 보급에만 목을 매듯이 오늘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적 목마름이 무엇인지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실제로 영적 목마름을 해결할 수도 없다. 그렇다.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의 담지자도, 구원 선포자도 아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신지도 모른다. 그분이 자리를 비웠다. 하나님의 죽음을 외친 니체의 절규를 들어보라.


너희는 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그는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시장으로 달려가서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그때 그곳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돌았나, 하고 한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애들처럼 길을 잃었나, 하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 숨으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를 무서워하는가? 고향을 등지고 배를 탔었나? 사고무친한가? 이렇게 말하면서 제각기 소리치고 웃고 떠들었다. 그 미친 사람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뚫어지게 보면 소리쳤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나와 너희들, 우리가 모두 그를 죽인 거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도살한 자들이야. <중략> 하나님을 장례 지내는 요란한 소리밖에 아직 들려오는 것이 없지 않는가? 냄새는 하나님의 썩는 냄새밖에 아직 없지 않은가? 신들도 썩는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세상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 중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세력적인 것을 우리가 칼로 쓰러뜨린 것이다. 누가 이 피를 우리에게서 씻을 것인가? 우리를 깨끗이 씻을 물은 어떤 것인가? <중략> 그 후에 소문이 떠돌았다. 그 미친 사람은 같은 날 여러 교회에 들어가서 죽은 하나님을 위해 진혼곡을 불렀다고. 그리고 그를 끌어내어 말을 시켰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물었다고. “교회가 하나님의 묘지석과 묘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125)

‘목마른 시대를 위한 설교’라는 글을 쓰면서 필자는 더 목마르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생수인지를(요 4:14, 7:38) 설명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을 생각이었다. 그것을 결론으로 삼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 이제 결론은 없다. 아니 결론을 바꿔야겠다. 목마름의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설교자 자신에 있다. 설교자는 청중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일단 자기 구원에 천착하는 설교로 돌아서야 한다. 성서텍스트의 원천에서 울려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강단에서 눈 뜬 사람의 목마름이 해결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감리교 월간지 <기독교 세계> 2010년 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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