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영성


교회력의 큰 그림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요즘은 성령강림절 중반 이후를 창조절로 지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삼위일체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런 움직임은 바람직하다. 교회력의 중심은 부활절이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교회력이 형성되었다. 부활한 분의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순절, 주현절, 성탄절, 대림절이 자리를 잡았고, 부활한 분의 승천 이후에 성령강림절이 자리를 잡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통치를 경험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런 교회력의 형성은 당연하다.

사순절은 부활절 바로 앞에 자리한 절기이다. 부활절 전날로부터 거꾸로 계산해서 주일을 뺀 40일 기간이 바로 사순절(四旬節, Lent)이다. Lent는 고대 앵글로색슨어인 Lang과 고대 독일어 Lenz에서 온 단어로 ‘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순절의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다는 사실에서 유래된 것 같다. 우리나라 교회가 사용하는 사순절은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헬라어 ‘테사라코스테’에서 왔다. 초기 기독교는 부활절 전 한 주간만을 고난주간으로 지키다가 니케아 공의회(325년)부터 40일로 확대했다고 한다. 40이라는 숫자는 신구약성서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이후 겪은 광야생활 40년과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에 행하신 40일 동안의 금식과 시험받으신 사건 등등이 이런 사순절 확장과 연관된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을 ‘성회(聖灰)수요일’, 즉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데, 금년은 2월17일이다.


수난절의 세 가지 전통

고난주간의 확장인 사순절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제자로 나선 이들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신자들은 당연히 그런 고난에 동참해야만 한다는 뜻이리라. 이 절기에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신앙 습관이 행해졌다. 첫째, 신자들은 성회수요일에 교회에 가서 재를 이마에 발랐다. 재는 인간이 가장 처절한 상태로 내려간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죄와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죽어 재로 변한다는 사실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엄중한 실존이다. 사람들은 그걸 간단히 잊는다. 아니 그걸 잊도록 강요받고 있다. 오늘의 문명은 우리를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뻔뻔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지 모른다는 망상을 가져도 좋은 것처럼 유혹한다. 중세기에는 ‘메멘토 모리’라는 명제가,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제가 중요한 화두로 작동한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기억할 때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리라. 오늘 사순절을 맞는 기독교인들도 순식간에 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 신자들은 사순절에 금식했다. 금식 습관은 인간의 가장 강렬한 본능인 식욕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시대에 따라서 약간씩 강도의 차이가 있었다. 사순절 초창기에는 저녁 전에 한 끼의 식사만 허락되었다. 육류는 물론이고 달걀과 우유제품도 먹을 수 없었다. 오늘 수도원이 아니라 세속 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사순절을 지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식욕을 절제하다는 기본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의 문명은 먹는 것을 탐하게 만든다. 식욕을 자극하는 것으로 삶을 확인시킨다. 그게 어느 정도로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전형적인 예만 짚겠다.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크게 논란이 된 광우병 현상은 사람들의 육식 편향성에 의해서 벌어진 문제이다. 질 좋은 소고기를 충분히 제공하기 위해서 많은 곡물을 사용한다. 유전자 변형 옥수수와 콩이 재배되고, 곡물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기도 한다. 제삼세계 어린이들의 굶주림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런 세태에서 기독교인만이라도 먹는 것을 절제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절제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사순절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무절제한 성적 욕망도 포함된다.    

셋째, 사순절 기간에 신자들은 구제와 선행에 힘을 썼다. 바로 위에서 두 번째로 언급한 금식이 식욕이라는 인간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구제와 선행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 생존 본능을 제어하는 신앙 태도다. 말하자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차원으로 영적인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이를 성만찬 영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형제애로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더불어 살아가려면 결국 ‘너’와 공동체를 배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소유를 나눠야 한다.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오직 개인의 경쟁력만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기심만이 사회의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시대정신에서 ‘너’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마틴 부버가 지적했듯이 이제 ‘너’는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라는 사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웃을 향해 개방적인지, 사회적인 소수자와의 연대에 진지한지 질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자신의 소유를 얼마나 포기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 없이 사순절 영성은 공허하다. 수백억 원, 수천억 원짜리 교회당 건축이 큰 고민 없이 시도되는 한국교회가 사순절 영성을 말한다는 것은 속과 겉이 이중적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사순절에 대한 세 가지 전통은 기본적으로 자기부정을 가리킨다. 고난의 영성이라 해도 좋으리라. 재를 이마에 바르는 것이나 금식과 구제는 모두 다소간 자기를 부정하며, 이로 인한 고난을 담보한다. 고난의 영성! 말은 좋다. 솔직하게 묻자.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여전히 유효한가, 가능한가, 적실한가? 오늘과 같은 소유와 소비와 풍요를 신처럼 떠받드는 시대에 이런 부정의 영성, 고난의 영성이 신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인가?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 신자만이 아니라 소명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목사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순절 영성은 말 그대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말인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말장난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능력이다. 사순절 영성도 삶의 능력이다. 이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자.     


고난의 영성

앞에서 필자는 교회력의 시작이 부활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사순절은 바로 부활절의 씨앗이며, 부활절은 사순절의 꽃인 셈이다. 사순절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이며, 그것의 육화(肉化)다. 즉 사순절의 영성은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 없이 사순절 영성은 불가능하다.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성회 수요일에 재를 이마에 바르거나 매일 한 끼씩 금식을 한다거나 구제에 나서는 일도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습관을 실천하기 이전에 그런 실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십자가 신학을, 즉 십자가 영성을 모른 채 그런 경건한 습관에만 치중한다면 결국 종교적 교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예배와 기도는 많지만 거기에 걸맞은 삶이 따라주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근본적인 신학적 영성의 부재에 놓여 있는 게 아닐는지.

필자는 위에서 영성과 신학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영성은 경건의 능력이고, 신학은 단순히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언어사용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영성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다. 이런 오해는 오직 교회 행사에만 매달리는 대중적인 교회는 물론이고, 소위 영성을 추구한다는 교회에서도 일어난다. 필자의 생각에 영성은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다. 아니 신학이 바로 영성이다. 신학자라고 한다면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영적인 사람은 신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신학자들은 이론을 세우기 전에 이미 영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그 영적인 현실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 신학이다. 예를 들어, 바둑의 정석을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프로 기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정석이 신학이며, 프로 기사 활동이 바로 영성이다. 이런 점에서 사순절의 핵심인 고난의 영성은 바로 십자가 신학과 다를 게 없으며,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사순절 영성에 들어간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사순절은 고난주간의 확대였다는 앞의 지적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순절 영성은 다음의 질문을 기초로 한다. 십자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예수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대답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의 차원에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실제 십자가 신학, 십자가 영성의 차원에서는 부족하다. 부족하면 결국 삶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 구원의 길로 경험하고, 해석하고, 인식하고, 믿게 된 데에는 아주 긴 사연이 놓여 있다. 그것이 성서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논쟁적 신앙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신약성서에 부분적으로 그런 논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들이 논쟁적이었다는 말은 예수에 대한 경험을 진리의 차원에서 해석했다는 뜻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대답도 그런 과정에서 주어졌다. 그런 과정을 무시한 채 겉으로 드러난 대답만 구구단을 외우듯이 외운다면 결코 십자가 영성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런 과정을 일일이 추적할 필요는 없다. 사순절 영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복음서를 선입관 없이 읽는다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가능한대로 그런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다. 비록 순간적인 유혹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도 인간이었기에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웠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국가와 이념을 위해서 죽어야 할 때 과감하게 나서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더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더욱 없다. 그런데도 성서는 예수가 십자가 죽음을 피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다른 이유는 십자가 처형이 과연 하나님이 선택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는가, 하는 그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가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그것을 피해보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그것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불위하신 분이다. 그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이고, 종말에 세상을 완성할 분이다. 그런 절대적인 분이 한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상식적인 논리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아니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과 충돌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모든 설교와 메시아적 행위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죽음 자체이며, 실패이며, 좌절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하고 믿었던 예수에게 그것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그가 그런 상황을 피해보려고 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십자가 죽음의 절망과 저주는 당시 모든 이들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이렇게 말했겠는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런 맥락을 모르면 십자가 신학의 깊이를, 즉 사순절 영성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가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피해보려고 했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더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의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예수가 로마의 식민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십자가로 죽으신 것이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었을 것이다. 예수는 철저한 신뢰와 순종으로 그가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그것은 곧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다.

이 대목에 예수의 부활이 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열광적으로 사로잡힌 한 유대인 남자의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창조의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 사건이었다. 실패라고 생각한 그 십자가에서 궁극적인 생명이 발현된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진수는 바로 이것이다. 죽음을 넘어선 생명!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행하신 분이시다. 아니 창조자인 그분만이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다. 사순절의 영성도 이 구도 안에 들어 있다. 죽음에 이미 부활의 생명이 약동한다. 고난에 이미 기쁨이 싹트고 있다. 어둠에 이미 빛이 비추기 시작한다. 선취의 방식으로, 은폐의 방식으로!


성공주의를 넘어

위에서 설명한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영성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사순절 영성에서 우리가 귀를 기울어야 할 마지막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독자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든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일반론적이다. 그것의 현실성(reality)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현실성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우리의 영성이 허공에 떠돌지 않고 실제적인 역동성을 얻을 수 있다. 두 가지로 정리하겠다.

첫째, 사순절이 가리키는 고난의 영성은 고행이나 자학과 다르다. 이 문제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 정서와 긴밀히 결탁되어 있다. 신앙을 죄책감이나 자책감과 혼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목사는 설교 때마다 당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모든 행위를 도덕적인 죄와 연결시킨다. 술, 담배마저 죄의 항목에 넣는다. 강단에서 실제로 대성통곡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자학적인 설교에 반복해서 노출되면 신자들은 마조키즘 상태에 빠져든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씀의 깊이보다는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위로에 매달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런 신앙의 모태는 유럽의 청교도 신앙과 미국의 부흥운동이다. 신자들을 단순히 회심과 도덕적인 기준으로만 재단하는 방식의 영성이다. 18, 19세기의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런 기준들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인간 이해와 기독교 신앙에서, 즉 생명 중심의 영성에서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청교도 영성과 부흥운동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것은 청년이 된 자녀들에게 초등학교 때 입던 작고 낡은 옷을 입히려는 형국과 비슷하다.

이런 일들이 한국 교회에 목회적인 방편으로 버젓이 행해진다. 자책감에 빠진 신자들을 다루기는 쉽다.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물질적인 고난을 신앙이라고 강변한다. 자녀들의 등록금을 교회당 건축 헌금으로 바치는 걸 좋은 신앙으로 부추긴다. 이런 일들이 어디 한 둘인가. 먼 곳에 출타했다가도 주일이면 본(本)교회에 반드시 돌아와서 예배를 드려야 온전한 성수주일인 것처럼 주장한다. 신자들이 당하는 불편과 고통을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호도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극한의 고통이었지만 예수는 그걸 의도하지 않았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가능하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이 결과적으로 십자가 처형에 이른 것뿐이다. 여기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예수는 고난과 고통의 운명을 살았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신자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이라고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 고통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통 자체를 신앙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영성에 대한 오해이며, 더 나아가 왜곡일 수도 있다.

거꾸로 요즘 기독교인들 중에는 영악하고, 출세 지향적이고, 세속적인 출세에 도취된 신자들도 많다. 한국교회에 속칭 고지(高地)론이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팽배한 적도 있었다. 고지론은 복음 사역을 위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에 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세속적인 기복주의를 지성적인 용어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기독교 신앙이 건전한 중산층 시민을 길러내는 시민종교로 변질되었다는 뜻이다. 자기 부정적인 신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이라도 있지만 긍정의 힘에 매료된 오늘의 신자들에게는 그것마저 없어서 기독교인의 특징을 찾으려고 해봐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세상과 삶을 무조건 비관하면서 자책감에 빠지는 신앙이나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식으로 성취감에 사로잡히는 신앙이나 모두 고난의 영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전자는 고난을 심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며, 후자는 고난을 세속의 가치로 전락시킨다. 전자는 고난을 즐기며, 후자는 고난을 두려워한다. 전자는 고난의 무게에 눌려 있으며, 후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피한다. 전자의 신앙은 너무 엄숙한 반면에, 후자는 너무 가볍다 못해 천박하기까지 하다. 전자는 신앙의 색깔이 너무 어둡고, 후자는 너무 밝다. 조금 도식적으로 분류하면 전자는 부활 신앙이 턱없이 부족하고, 후자는 십자가 신앙이 턱없이 부족하다. 양쪽 모두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고난의 영성을 제대로 확보하고 있지 못한 탓이다. 십자가 영성은 부정의 영성도 아니요, 긍정의 영성도 아닌, 그야말로 순종의 영성이다. 생명의 주인 앞에, 그 신비 앞에, 그 약속과 미래 앞에 순종하는 삶을 가리킨다.

둘째, 예수의 십자가 이후로 이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의 처절한 실패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개입인 부활을 통해서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성공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아무도 실패의 길인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성취, 목회적인 성취도 결국 구원의 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십자가 영성에서만 본다면 목회의 실패야말로,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 전제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가깝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목회에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기독교 영성과 거리가 먼 사람이리라. 

결론적으로, 사순절 영성은 승리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게 쉽지는 않다. 우리의 영성이 승리주의에 완벽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승리만을, 그것도 세속적 승리만을 향해서 줄달음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 모임에서도 교회를 크게 키운 목사들에게 발언권이 독점되어 있다. ‘예수성공, 불신실패’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이런 행태가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정신(spirit of churches)이 되어버렸다. 십자가의 영(spirit of cross)을 전해야 할 교회의 타락이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어찌 사순절 영성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가문의 명예에 먹칠한 자식을 호적에 파내듯이 교회의 절기에서 파버리는 게 차라리 정직한 게 아닐는지. (기독교사상,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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