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

 

    <성경과 목회>의 이번 호 주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이다. 이 주제는 롬 12:2절을 근거로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세상, 또는 사람들의 평판에 치우치지 말고 오롯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이 문장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한다. 이 문장에는 최소한 세 가지 핵심 단어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세대, 변화, 분별이 그것이다. 바울이 본받지 말라고 하는 이 세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교회 밖의 세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존재론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 변화도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낼 줄 아는 데서 시작하고 유지된다는 뜻이리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실제 목회 활동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것 없이 교회와 목회의 본질을 꾸준히 추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 여기서 분별이, 또는 분별의 능력이 오해될 때가 많다. 이는 한국교회에서 영성이 오해되고 있는 것과 똑같다. 목사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것만으로 분별력이 생기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훈련은 사이비 이단 교주들도 흔히 하는 것들이다. 분별의 능력은 신학적 통찰력에서 가능하다. 영성도 기본적으로는 신학적 통찰력과 직결되어 있다. 왜 그런가? 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과의 조우를 통한 영적 경험이다. 도대체 영적 경험이 무엇인가? 성서는 이것을 매우 다양한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면 신학적인 통찰력이 필수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영성이 마치 주술적인 능력이나 단순히 열광적 은사주의로 오해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신학적 통찰력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말이 옆으로 나갔다. 영성 문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신학적인 통찰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회자가 신학적으로 분별해야 할 하나님의 뜻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세대의 걸림돌(스캔들)이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가 여기서 가능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바울의 이 말을 단지 종교적 수사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목회자들도 이 말을 목회적 수사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수사로 끝나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변죽을 울리고 말 것이다. 목회자들이 말은 십자가를 진다고 하지만 영광을 받으려고만 할 것이다. 경건의 모양으로만 남을 뿐이지 경건의 능력으로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에게 이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바울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신앙과 삶의 현실이자, 세계의 현실이었다. 그의 운명은 바로 십자가에 놓였다.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우리가 분별할 수 있다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가 가능할 것이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이것은 목회의 십자가 신학, 거꾸로 십자가 신학의 목회이다.

 

    너무 초보적인 질문이지만 눈 딱 감고 질문하겠다. 예수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대답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그것이 정답이긴 하지만 정답 자체보다는 그 답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는 마치 수학공부에서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수학공식을 외우는 것보다 그 공식에 이르는 과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개념에 이르는 것이지 결과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과 신학도 비슷하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답에 이르는 과정을 아는 게 참된 신앙공부다.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자.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복음서를 선입관 없이 읽는다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가능한대로 그런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다. 비록 순간적인 유혹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도 인간이었기에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웠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국가와 이념을 위해서 죽어야 할 때 과감하게 나서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더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더욱 없다. 그런데도 성서는 예수가 십자가 죽음을 피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다른 이유는 십자가 처형이 과연 하나님이 선택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는가, 하는 그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가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그것을 피해보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그것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불위하신 분이다. 그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이고, 종말에 세상을 완성할 분이다. 그런 절대적인 분이 한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위의 주장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아니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사람들을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과 충돌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모든 설교와 메시아적 행위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죽음 자체이며, 실패이며, 좌절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하고 믿었던 예수에게 그것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그가 그런 상황을 피해보려고 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십자가 죽음의 절망과 저주는 당시 모든 이들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이렇게 말했겠는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런 맥락을 모르면 십자가 신학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가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피해보려고 했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일까? 아니다. 그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더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의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예수가 로마의 식민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십자가로 죽으신 것이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었을 것이다. 예수는 철저한 신뢰와 순종으로 그가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그것은 곧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더 솔직하게 묻자.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에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근거는 없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만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것을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는 이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한다. 부활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은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지금 필자는 부활에 대해서 앞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한 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 이미 십자가에 대한 설명으로 기독교 교리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부활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 사실만 짚겠다.

 

    예수의 부활 현현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난 게 아니다. 만약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나 가야바에게 나타났다면 기독교의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예루살렘 저자 거리에 나타났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즉시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부활 현현이 공개적인 방식으로 나타났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경험되었다. 주로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전하는 바울에 따르면 오백 여 형제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바울에게도 나타났다.(고전 15:5-8) 예수의 부활 현현이 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는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활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자. 예수의 부활은 종말에 드러날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 예수에게 선취(先取)의 방식으로 일어난 생명 사건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부활은 종말론적 생명사건이다. 그것의 역사화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바로 이 부활에서만 십자가 사건은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필자는 위에서 십자가 신학과 부활 신학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도대체 이런 해명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위의 해명을 알고 있던 분들이라고 한다면 이제 제시할 대답도 알고 있을 것이다. 승리주의 목회의 극복이 그 대답이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면 십자가 신학이 우리 운명과 목회에 그대로 일치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는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목회, 우리의 영성, 우리의 교회정치가 완전히 승리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승리만을, 그것도 세속적 승리만을 향해서 줄달음치고 있다. 교회 성장이라는 결과가 지상 목표가 되어 있다. 목사 모임에서도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사들에게 발언권이 독점되어 있다.

 

    이 글의 제목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이다. 바울이 말하는 ‘세대’의 특징은 영육 이원론에 근거해서 부도덕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행태였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요청했다.(롬 12:1)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대’의 특징은 경쟁력 제고가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삶의 행태이다. 지금 교회는 이 세대를 본받기에 정신이 없다. 순진한 건지 분별력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복음에 먹칠을 하고, <목적이 이끄는 삶>이 영적 삶의 수행적 과정을 해체하고 있다. 승리주의, 목적 지상주의가 결국 교회와 교회 사이의 영적 친교를 파괴하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으며, 교권 투쟁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교회가 절대적으로 순수하거나 본질에만 천착할 수 있느냐, 부분적으로 세속적인 가치에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고 말이다. 아무리 한국교회가 세속의 가치에 부화뇌동한다고 하더라도 올곧게 영적인 수행의 길을 가는 목회자들이 훨씬 많지 않느냐고 말이다. 당신은 어떤 대안이 있느냐, 하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모두 옳은 지적이다. 신학적인 통찰력을 갖추고 영적 시각이 예민하다고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불안한 목회 현장에서는 개인 목회자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목회를 펼치기 어렵다. 실패를 눈앞에 두고 그 길을 무조건 가라고 말할 수도 없다. 현실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정직한 목회를 하라도 다그치기도 힘들다. 교회 성장 여부에 바로 목사의 생존이 직결되는 이 척박한 현실에서 목회의 본질 운운은 속된 표현으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바로 이런 영적 위기에서 신학적 통찰은 더 밝은 빛을 발한다. 십자가 신학과 부활 신학은 다음의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한다. 예수의 십자가 이후로 이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의 처절한 실패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개입인 부활을 통해서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성공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적인 성취, 목회적인 성취도 결국 구원의 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솔직하게 묻자. 100명 목회의 자리에서 500명 목회의 자리로 옮기면 목회자의 영적 자유와 행복이 보장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500명 교인의 교회를 1000명의 교회로 성장시키면 목사의 영성이 그만큼 깊어질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30평 아파트에 사나, 50평 아파트에서 사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십자가 영성에서만 본다면 목회의 실패야말로,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 전제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가깝다. 그렇다. 명실상부하게 완전한 실패와 저주의 대상이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생명으로 살리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실제로 믿는다면 우리의 목회 패러다임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포퓰리즘의 목회에서 생명의 신비에 영혼이 공명되는 성령 지향적 목회로! (성경과 목회, 2010년 4월호,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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