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하나님 나라

정용섭 목사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처음 설교, 또는 복음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마 4:17)이다. 팔복의 첫 항목에서도 ‘천국’이 언급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경험하는가? 신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생각에서만 본다면 죽은 뒤에 가게 될 천당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묵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최후의 심판 뒤에 오는 새 예루살렘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우주론적인 대변혁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표상은 분명히 지금 여기서의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여기에 조금 더 실질적인 질문을 하자. 천당에 가면 지상에서의 삶이 기억나는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 자식들이 세상 나이로 부모보다 더 오래 살다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면 자식들이 더 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궁극적인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면 단지 죽어서 가는 천당만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는 죽음 뒤에, 그리고 마지막 심판 뒤에 오지만 그 나라가 오늘 여기 우리의 삶과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천국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 하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대답하셨다.(눅 17:21)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뜻인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 사람 관계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가시적인 게 아니라고 대답한 것이다. 가시적이지 않다고 해서 막연하다는 건 아니다. 우리 삶을 더 확실하게 끌어가는 힘은 불가시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인가? 교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전히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인 세계이지만 교회는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질문할 게 너무나 많다.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 세워지는가, 아니면 저 세상에 세워지는가? 하나님 나라는 역사 내재적인가, 역사 초월적인가?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아니면 종말론적으로 올 것인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여기서 찾을 수는 없다. 성서와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대안을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1) 예수님의 공생애를 비롯해서 전체 삶은 하나님 나라와 직결된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라.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는 변혁의 힘으로 임한다.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예컨대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하루종일 일한 사람이나 모두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다. 하루종일 일한 사람이 불평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주인은 자기의 돈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딴지를 걸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으로 당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공생애 중에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과 그토록 심각하게 갈등을 겪었는지도 이런 데서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에 심취했지만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에만 몰두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인정해주지 않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세리와 죄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종교적인 차원이나 세속적인 차원에서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던 자신들을 있 그대로 받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이 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자기의(義)로부터의 해방이다.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인의 윤리도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늘 어떤 규범을 찾기만 한다. 사람의 삶에 규범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규범, 즉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율법이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8,9) 율법은 이원적이다. 한편으로는 죄를 분별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죄를 짓게 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 말하는 것은 더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가 여기에 들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조금 더 도덕적이냐 아니냐의 차원의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거기서는 죄인도 여전히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2) 예수님의 축귀와 치유 사건도 하나님 나라와 직결된다. 축귀와 치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해방과 자유를 가리킨다. 인간을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서시대의 축귀와 치유에 해당된다. 이런 부분에서 가끔 오해가 발생한다. 축귀와 치유를 기계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복음서의 축귀와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지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것으로도 완전하게 규정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생명 능력이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라. 축귀와 치유는 우리의 정신과 몸이 해방되는 사건이다. 정신과 마음의 건강이다. 이런 건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진다. 그런 것을 하나님 나라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몰두했던 예수님이 당하신 처참한 운명이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무조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과만 연결해서 생각한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 처형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하나님을 잘 믿은 결과가 십자가라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신구약성서를 통 털어서 가장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는 신정론(神正論)이다. 하나님이 의롭고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이 세상에 무죄한 이들이 고난받고 불의한 이들이 득세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욥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아직 없지만 여러 시도가 있었다. 십자가 신학은 그 중의 하나이다. 무죄한 자의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하나님 개념이 현대신학에서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 개념은 이미 초기 기독교에서 캐노시스 그리스도론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11)

한국교회에는 승리주의 신앙이 압도한다. 믿는 자는 모든 것이 잘된다는, 잘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너무 강하다. 물론 신자들이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사는 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만 매달리는 게 문제이다. 더 원칙적으로 말하면 고난과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참된 길이다. 팔복에서 가난하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신앙적 수사가 아니라 신앙의 실질이다. 세상에 희망을 걸만한 것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간절히 기대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명실상부하게 일치하는 사건인 셈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판넨베르크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는 그 어떤 실패도 더 이상 완전한 실패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이다.

4)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삼일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승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바로 앞에서 십자가 사건을 말하면서 승리주의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승리주의와 부활의 승리는 전혀 다르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사건이다.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부활논쟁에 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부활 생명은 우리가 여기서 최고의 행복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형식의 삶과 전혀 다르다. 부활생명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 부활과 창조는 똑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라는 말이다. 창조는 무로부터 일어난 것(creatio ex nihili)이다. 없음과 있음 사이에는 절대적인 간격이 놓여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오직 창조주의 것이다. 부활은 재생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을 몸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승리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 통치라 할 수 있다.

위의 설명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문제가 무엇인가? 신앙의 가장 큰 병폐는 성서와 신앙의 도구화이다.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는 신앙 패턴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몰라도 된다. 신앙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에 길들여지면 성서와 신앙이 말하는 생명의 세계가 추상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는 동굴 안과 동굴 밖의 세계가 비교된다. 동굴 안에만 살던 사람은 밖의 생명 현상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헷세의 <데미안>에는 알을 깨고 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알의 세계와 새의 세계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전혀 다른 두 삶을 사는 갈매기들이 나온다. 비상의 훈련을 하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결국 황금빛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참된 연금술은 세상을 모두 보석으로 보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한 알의 모래가 세계라는 인식의 혁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고, 그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부활의 생명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이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교회는 도대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예수님이 교회를 직접 설립하셨다는 주장이다. 예수님은 교회라는 조직 같은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거기에 따라서 가르치고 행동하셨을 뿐이다. 물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교회를 설립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이런 구절을 해석하려면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구절은 이미 베드로의 권위가 확고하게 자리한 마태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그 외의 구절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교회 운운하신 적이 없다.

교회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운명 없이는 교회가 해명이 안 된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 공동체의 뿌리였다. 십자가에 처형당했지만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원초적 경험을 한 소수의 무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경건생활을 했는데, 그들이 바로 교회의 초창기 멤버들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 명의 성도들이다. 그들의 뒤를 이어서 순조롭게 오늘의 교회로 발전하지 못했다. 핵심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유대 기독교와 바울이 주동적으로 활동한 이방 기독교는 분리된다. 여기에는 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의 패전이 결정적이었다. 유대 기독교는 결국 유대교에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방 기독교가 역사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방 기독교의 태두라 할 바울은 토라와 할례를 거부하고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과 칭의를 주장했다. 오늘 우리는 이방 기독교의 후예들이다. 이방 기독교가 역사에 살아남았지만 유대 기독교의 모든 전통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구약이 기독교 정경에 포함된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교회의 역사적 과정이다. 초기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의 신학논쟁 뒤에도 3,4세기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신학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교리가 체계를 잡았다. 대표적으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다.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이라는 교리가 자리를 잡는데도 많은 이단 논쟁이 개입되어 있다.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이 대표적이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가능하면 이런 공부를 하는 게 좋다. 교리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책 2권을 소개한다.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이다. 교회의 역사적 과정은 지금도 계속된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논의가 말살되고 경직된 교리만이 지배하면 교회는 부패한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셈퍼 레포만다”(항상 개혁되는 교회)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교회론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담론이 살아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교회성장 일원론에 빠져 있다. 이는 중세기 로마가톨릭의 교회중심주의, 또는 교황중심주의와 동일한 현상이다.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다가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위기를 맞았듯이 오늘 우리도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다가는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 그 위기의 소용돌이 안으로 천천히, 아니 빠른 속도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의 신앙적 자기성찰은 신학적 담론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기도와 말씀과 경건생활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신학적인 담론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신자들도 있다. 신학자들은 정직하게 공부를 했다면 모두 영성가이다. 영적 현실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위대한 신학자들은 모두 위대한 영성가들이었다. 바울, 어거스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루터, 칼뱅, 바르트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학자들이 기독교를 건강하게 했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판넨베르크의 책 <신학과 하나님 나라>(이병섭 역,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몇 구절을 발췌하겠다. 그의 글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의 중심적인 관심사와 교회론에서 고려해야 할 핵심적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즉 교회가 예수의 메시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중심적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선교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세계의 미래, 즉 온 인류의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지는 분명히 신자들이 꾸리는 공동체의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또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말할만한 어떤 근거들이 있는가? 이런 질문에 정당한 대답을 제시하려면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기대하는 전 세계의 미래이다.(101 쪽)

2)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제한하거나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배제하는 것은 교회의 사회적 의미를 훼손하는 결과가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오직 일부 사람들의 종교적 요구, 즉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하나의 제도(institution)로 변질되고 만다. 오늘의 교회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 사명을 축소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오늘 생각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다.(104)

3)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라는 칭호의 의미를 바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보다 심층적이고 명백한 교회관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의 주된 관심은 불가분리로 결합되어 있다. 예수가 지상에서 행한 모든 활동은 그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도 칭호는 자신의 사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절대적이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세계의 미래인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대망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사물화(私物化)하는 종교적 관념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교회의 삶에 중심이라는 말은 교회가 인류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통찰을 가리킨다.(106)

(4)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계 안에 조직으로 자리하는 교회의 존립과 동일시될 수 없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신학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교직자들의 목적에 봉사해왔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진리의 궁극적 기준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와 불가분리로 연관되기에 모든 교회 조직이 잠정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최종적 미래를 끌어오기 위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 겸손히 서지 못한다. 교회가 자기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형태로 오해하기 때문에 하나님 통치는 흔히 교회 밖 세속적 세계 안에서, 그리고 종종 교회에 대항해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108)

(5) 교회는 사회 안에서 생동적이고 비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한다. 교회는 항상 모든 기존의 사회가 안고 있는 한계를 지적해야한다. 교회의 존립은 이런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비판적 증언을 상실한다면 교회는 무용지물이 된다. 단지 종교적 요구를 가진, 그리고 그 수가 급속하게 감소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런 종교적 요구를 조달해주는 기구로 남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116)

(6) 사회에 대한 교회의 기능은 두 가지이다. 첫째, 교회는 정치 기구나 그 대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궁극적이고 인간적인 중요성을 확보한다는 주장을 못하게 한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대해서 그 지배의 잠정적 성격을 좀더 현실적으로 승인하도록 압박한다. 교회는 정치적 신화들을 탈신화화 하는 과제와, 자기의 권력 소유에 도취해 있는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과제를 지닌다. 둘째, 교회는 제 2의 극적인 방법으로 그 기능을 수행한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인류의 미래적 성취를 증언함으로써 교회는 사회 실천에 대한 상상력을 환기시키고 사회 변혁에 대한 비전을 고취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류에게 미래가 있는지를 많은 지식인들이 의심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는 더욱 끈질기고 설득력 있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만 한다.(119)

(7) 복지시설, 보육원, 간호시설, 병원, 학교 등, 교회의 사회적인 활동은 부차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대리인으로서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의 정치적 기구에 속한 이런 책임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준비시키고, 또 인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를 시기하고 어떤 복지 활동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감을 기묘하게 곡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치 단체로 하여금 그 책임을 인수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사회적 공헌은 생명의 궁극적인 신비, 즉 영원한 하나님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인간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인간적 삶에 인격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127)

(8)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가 자기의 존재 자체를 자기의 목적으로 할 때, 그것은 존재할 권리를 상실한다. 세속 사회는 교회를 필요로 한다. 교회가 사회와 분리된 하나의 제도로만 자리한 채 현재 세계 질서로 하여금 그 잠정성을 깨닫게 하지 않는다면 세속 사회는 세상의 방식으로 그 잠정성을 깨닫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삶의 전체성을 지시함으로써 이 잠정성을 각성시켜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자기의 과업에 충실할 때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 과업을 상실하면 세속 사회는 제도를 절대화하고, 자신의 잠정성을 망각한 채 인류 위에 폭군으로 군림하게 된다.(130 )

한국교회 내일을 위하여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신학자나 목회자의 입장에서 많이 나왔다.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내용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간략하게 말하면, 한국교회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신앙적인 역동성이 크다. 반면에 교회의 분열과 기복주의 등은 부정적인 부분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경제 분야와 비슷한 점이 많다. 양쪽 모두 압축 성장을 했으며, 근대화의 모범을 보였다. 반면에 양쪽 모두에게 거품 현상이 자리한다. 철학이 없는 졸부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의 의무)를 찾아볼 수 없듯이 신학이 없는 급성장한 교회는 역사적 책임을 회피한다. 이제라도 교회가 본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회는 역사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상위 개념으로 자리해야 하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을 종속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자리를 상대화하면서 신학적인 본질에 천착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늘처럼 특강이 그런 훈련의 일환이다.

이제 필자는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내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하겠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과도 연결되는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만큼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나라의 신자들이 없다고 생각할 터이니 말이다. 한국교회의 성경에 대한 열정은 아무도 못 따라간다. 어느 정도 신앙의 경륜이 있는 신자들은 대개 매일 말씀을 읽거나 큐티집으로 묵상한다. 교회에서도 성경을 읽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성경을 필사하는 모임도 있다. 한국교회에는 설교도 많다. 목사들이 일주일에 감당해야 할 설교의 양은 자신의 경건훈련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이다. 참고적으로, 이에 반해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제도적으로 경건훈련이 보장되어있다. 이렇게 성경이 많이 읽히고 설교가 자주 행해진다고 해서 말씀이 살아있다는 보장은 되지 못한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말씀의 인플레이션으로 오히려 말씀이 죽었는지 모른다.

필자는 2004년부터 몇 년에 걸쳐서 <기독교사상>에 설교비평 글을 연재하고, 그걸 다시 3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1권은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2권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권은 <설교의 절망과 희망>이다. 설교비평에서 말하려는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서도구화’다. 이를 두 가지 현상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경 구절은 형식적으로 읽는 것으로 끝내고 목사가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간증과 예화가 한국교회 강단과 신앙생활에서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경이 없어도 그들은 얼마든지 설교를 할 수 있다. 입담만 좋으면 많은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성서해석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구절을 많이 나열하고 그것만을 말하지만 성경이 단지 정보로 떨어질 때가 많다. 해석이 없는 말씀은 마치 구구단을 외우면서 수학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여기 바둑 기보(棋譜)가 있다고 하자. 흑 127번과 백 128번은 하나의 번호로만 자리하고 있지만 그 번호에는 수많은 수가 숨어 있다. 바둑을 둔 기사는 그 번호에 돌을 놓기 전에 수많은 수를 생각했다. 기사의 머릿속에서 오간 그런 수는 기보에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바둑 해설자가 이런 숨어 있는 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127번의 수로 백을 잡았다는 결과만 지적하면서 이렇게 돌을 잡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설명에만 머문다면 그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서텍스트도 일종의 기보이다. 설교자는 그 안에 은폐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 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고, 다만 청중들을 종교적으로 위로하거나 재미를 주는 것에 만족한다. 성서텍스트가 철저하게 이용되고,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텍스트는 철저하게 침묵을 강요당한다. 독일의 저명한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은 이런 상황을 이미 40년 전에 지적했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설교에서 성서가 선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서 본문의 침묵과 그 강조점으로부터의 이탈, 성서를 너무 성급하게 접근한 채 그 가운데 언짢은 것들을 덮어버리거나, 문자의 차원에서 집착함으로써 본문과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는 설교행위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성서가 설교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책을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성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이 침묵을 깨려면 성서 자체가 말을 하게하고, 그 말씀이 청중들에게 들려야 한다.(박근원 역, 설교학 원론, 1979, 4쪽, 문맥을 조금 고쳐 적었음, 필자 주).

설교자가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과 삶의 일치를 가리킨다. 이것이 곧 영성(spiritual reality)이다. 이런 영적 경지를 아는 신자들은 공연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의 영성에 빠지면 마치 시인이나 예술가들처럼 오직 한 가지 사실에 마음을 쏟는다. 말씀의 영성에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이 각자 찾아보기 바란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부록으로 칼 바르트의 글 <Das Vaterunser> 62-71 쪽을 필자가 발췌 번역해서 싣는다. <Das Vaterunser>는 ‘주기도’라는 뜻이다. 바르트의 글은 관념적이어서 읽기가 까다롭지만 이해만 할 수 있으면 우리의 신앙적 안목이 크게 확장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묵상이자, 일종의 기도문이라고 보아도 좋다.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서 안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삶이며 목적이다. 그 삶과 목적이 바로 창조자의 의도와 부합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죄로 인해 발생하는 위협에 대항하는 방어물이며, 이 세상에 잠복해 있는 죽음의 위험과 파괴성에 대항하는 방어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협들은 피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죄를 극복하는 최종적 승리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세상의 사면이다.(고후 5:19). 이 사면의 결과들이 여기에 있다. 즉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Neue Äon),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평화 안에 돌입한 것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이며, 창조자의 정의이며, 의롭다 인정하시고 승리하시는 주님의 정의(Gerechtigkeit)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과 그 목적은 와의 나라(Königreich)가 오시는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Dein Reich komme! 분명한 것은 우리가 충만한 새로움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들은 우리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뛰어넘어가고 있다. 우리 자신인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장 좋은 조건들 밑에서, 그리고 그 자체의 위험 밑에서 위협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해방, 모든 승리, 모든 속죄, 그리고 중생이 필요하다. 왕의 나라가 오심은 우리의 능력과 무관하게 완성된다. 우리의 존재와 가능성의 공간인 창조에서와 같이 그의 오심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무능력하다는 말이다. 나라가 임함은 다만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완성할 수 있다. 모든 충만케 하는 행위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산 결정적인 칭의 안에서. 세상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세상의 정의와 평화가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의 활동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 사건의 시간이 시작되도록 종을 우리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것은 이렇게 기도한 사람이 이 나라를, 이 생명을, 이 정의를, 이 새로움을, 이 속죄를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이러한 것들에 낯설지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것에 왕의 나라가 벌써 임박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됨 안에서, 그리고 친구됨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이 아주 특별한 상태에 우리는 직면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나라는 벌써(schon) 임했다. 당신은 우리 사이에 그것을 세우셨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눅 17:21)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채우셨다. 당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더불어 이 세상을 속죄했다. 이처럼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사도바울은 이 속죄에 대해 하나의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용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발생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합법적으로 죄와 그 모든 결과들을 없이 하셨다. 그 안에서 당신은 모든 낯설은 그리고 원수와 같은 폭력을 없이 했다. “나는 벼락처럼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10:18)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위협의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당신은 극복했다. 당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죽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되셨다. 이 일은 발생했다. 그 안에서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현재적으로 되었다. 완전한 깊이에서, 그의 주권의 전체성 안에서, 어느 것에도 축소됨이 없이, 비밀 됨이 없이 그렇게 되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말과 목적에 도달했다. 즉 종말과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 이 모든 것이 벌써 그 분 안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앞에 일어났다. 그것은 역시 하나의 과거의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에게 선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교회가 이미 오신 주님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는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과 오순절을 기억한다. 이것들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정확한 것이며, 이미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을 전하며, 오신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슬프고 삭막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된 그 곳에, 그분이 오신 그곳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 말씀은 선포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 위에서 살아간다. 그 외의 다른 더 이상의 것은 없다. 성탄과 부활로 시작되는 그 시간을 더 이상 역행시킬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더 많은 이유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거기엔 다른 반대가 끼어들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성령강림절로 시작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이 다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과거로서만, 이미 되어버린 것으로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 앞을 내다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의 기억할 만한 것을 가져온다는 것,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미래가 된다는 것, 오신 우리의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모든 것을 덮고 있는 이 덮개를 치우도록 간구한다. 탁자를 덮은 덮개와 같은 그것을 치우도록 말이다. 탁자는 그 밑에 있다. 우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이 덮개를 치울 수는 있다. 우리는 왕권의 현실성을 아직 가리고 있는 이 덮개가 치워지도록 간구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변화된 모든 것에 이 현실성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나님의 완전한 깊이는 거기에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우리의 가족, 교회의 삶과 정치적 사건들, 이 모든 것은 덮개이다. 현실성은 그 뒤에 있다. 우리는 아직 얼굴과 얼굴로 맞대어 보지 못하고 거울에서처럼 불분명하게 영상만 본다. 신문을 보아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이 현실성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적으로 되어야 한다. 흡사 그가 부활절에 가시적으로 된 것처럼,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존재하게 된다. 그는 벌써 이 새로운 인간의 머리가 된다. 새로운 세계의 머리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지 보지 못한다. 우리는 보기를 기다린다. 즉 우리는 신앙의 방랑 가운데 놓여 있다. 아직 보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즉 그의 삶, 죽음,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명성은 우리 전체 위에, 우리의 삶과 모든 것 위에 펼쳐져 있음이여! 이 세상적 삶의 비밀은 벗겨졌음이여! 이 비밀은 벌써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거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소동, 이 격정, 과욕, 의혹으로 인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개혁자들의 해석을 채택하고자 한다. 최소한 이 새 시대의 첫 발자취, 이 승리의 첫 발자취를 보도록 우리에게 은총이 내려지기를 기도한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아침 햇살이 우리를 허락하여, 우리 스스로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역사의 사건들을, 바로 그 관점에서 무엇이 우리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지를 볼 수 있도록 기도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일반적 계시와 묵시(벧전1:3-12)가 주어졌다. 오신 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생동적이 되기를! 이 희망을 갖고 살도록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시대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위한 희망 없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최소한 과거의 모든 우리의 활동이 전체적으로 불충분했다는 것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투쟁하는 많은 싸움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의로워 지지 않은 우리의 개인적, 심리적 갈등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 오시는 왕권을 보아야 한다. 이 일에 심리학자들이 우리를 도울 수는 없다. 어느 날 태양이 뜨고, 인식의 선물이 임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부활절이 이 세상에서 일반적 사건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때에 우리는 심리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모든 슬픈 일이 사라지게 될 날을 볼 수 있도록 간구한다. 슬픔은 이방인에게나 어울리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시 좋은 모습과 재미있는 유머, 그리고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 아무도 그것을 억압하지 않고, 이 세상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간다.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주기도를 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이 확장시켜 해석한다.(Codex D)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 위에 넘쳐나고,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 마태와 누가의 고전적 본문이 원래적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변형이다. 개혁자들은 본문에 상응하도록 콤멘트를 계속한다.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간구할 때 이것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확장된 해석은 옳은 처사이다. 그러나 이 말 “당신의 나라”는 완성되어가는 교회와는 절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졌을 때만, 그리고 현재 있는 그 무엇의 종말로서, 또한 사물의 새로운 시작으로서 이해되어질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다행이 하나님의 왕권 안에서는 교회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시작한 것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더 간구해야 한다. 그 분이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제의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와 함께 갖고 있는 인내심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나라가 오심으로 부터 우리를 갈라 놓으려하는 이 세상의 불안한 시대에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한다는 것, 그가 그 종소리를 울리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렇다. 성취를 위해 하나님 나라는 도래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그것을 움켜 잡으려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당신의 나라가 온다는 것, 그리고 이미 도래한 이 나라가 온다는 것을 기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렇게 소박한, 그리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간구로 그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마산재건교회 특강, 2010년 7월20일, 저녁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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