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와 신학무용론

 

한국교회에 근본주의자들이 있을까? 실제로는 근본주의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그걸 표면에 내세우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근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편협하고 독단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대개는 그들은 보수주의자나 복음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한다. 어떤 용어로 불리더라도 근본주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임스 바((James Barr)는 근본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은 성서 무오성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둘째,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을 극단적으로 배격한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만을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다.(근본주의 신학, 7쪽)

근본주의자들의 이런 특성은 그들의 역사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 배경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감정, 교육, 윤리 등에 강조점을 두고 기독교를 변증한 신학운동이다. 그 이전 중세기까지 교회는 유럽 사회에서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학문, 정치, 예술 부분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권위를 확보한 기구로 인정받고 있었다. 18세기 어간의 근대주의를 거치면서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교회는 근대주의 정신인 합리성과 계몽, 인문정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자유주의신학의 시작이다. 한국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마귀 자식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유주의 덕분으로 교회가 근대주의라는 태풍을 견뎌낼 수 있었다. 자유주의신학은 1차 세계 대전 전후로 힘을 잃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학운동이 변증법 신학, 또는 위기의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를 대표하는 학자는 칼 바르트다. 바르트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Deus dixit”(하나님이 말씀하신다.)가 신학 모토였다. 개신교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또 하나의 반작용 운동이 나왔는데, 이게 바로 근본주의다. 신학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신정통주의가 중도라고 한다면 근본주의는 보수 우익이라 할만하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세상의 문화와 현대정신을 부정했다.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떨어뜨린 학자로 불리던 칼 바르트마저 자유주의자로 매도했으니, 그들의 신학적 경향이 얼마나 경직되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가. 한국의 대다수 대중 설교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근본주의를 복음주의와 구별한다.(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27-92 참조) “근본주의적 설교는 종종 천박한 주석에 기초해 있고, 근본주의는 어떤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성경적인 위치에 올려놓으며,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창의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비복음주의자들의 연구를 조금씩 유용하는 경향이 있다.”(칼 헨리)는 사실을 인정한다. 복음주의야말로 기독교의 근본을 놓친 현대주의와 편협성에 빠져버린 근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맥그라스는 제임스 바가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를 놓쳤다고 비판하면서, 복음주의의 신학적 특징을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성경의 최고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성령의 주권,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 전도의 우선권,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이 그것이다. 맥그라스가 열거한 복음주의의 특징은 매력적으로 비친다. 한국의 대중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이런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관에서 고리타분하지 않으면서도 케리그마를 바르게 전하는 설교자로 자리를 잡고 싶어 한다. 명분을 어디에 걸든지 중요한 것은 목회와 설교 행태이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처럼 근본주의적인 목회와 설교 행태를 보이면 비록 복음주의자라는 옷을 걸치고 있다 하더라도 근본주의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학적 문제를 놓고 맥그라스 정도나마 치열하게 고민하는 설교자가 한국교회에 있기나 할까 하는 염려가 앞선다. 근본주의자라고 해도 좋고, 보수주의자나 복음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그들이 과연 기독교의 근본을 보수하려는 생각을 할까? 필자는 회의적이다. 근본을 지키겠다면 3-4세기의 교부 신학과 16-17세기의 루터와 칼뱅신학에 철저해야 한다. 교부신학의 집대성이라 할 삼위일체론을 깊이 있게 공부한 설교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히 삼위일체라는 용어만을 구구단을 암송하듯이 외칠 뿐이지 그 신학의 세계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칼뱅이 말하는 ‘전가된 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장로교 설교자들을 찾기 힘들다. 자신들이 수호해야 할 기독교 진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수호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열정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열정이 지금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동력이라는 해괴한 사태를 아는 사람들은 알리라.

자칭 보수적인, 또는 복음적인 목사라고 한다면 신학적 접근은 둘째 치고 최소한 기독교의 근본적인 전통을 따르려는 노력이라도 기울여야하지 않겠는가. 예배만 해도 그렇다. 세계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력과 예전을 지켜왔다. 한국교회는 이 귀한 전통을 쓰레기 취급하고 있다. 건전한 복음주의 계열의 목사들이 시무하는 교회에서도 예배의 예전과 성서일과와 교회력은 실종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 눈높이를 맞추는 열린예배와 강해설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연속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교회력 대신 온갖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이 자행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근본주의자들이 지키려는 근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19세기 자유주의보다 훨씬 강도 높게 인간 중심으로 치우쳤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전도라는 이름을 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중들을 끌어 모아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상업주의 정신뿐이다. 교회성장 일원론적 목회 패러다임이 오늘날 모든 신학적 담론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교회 현장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도 없고, 보수도 없고, 복음도 없이,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신학도 없고 근본주의적인 목회 실천도 없이 오직 성장론만 절대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의 영혼은 마비되고, 부패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 실례를 드는 게 좋겠다.

천안함 사태 앞에서

지난 3월26일 밤에 대한민국 해군 소속 초계함 천안함이 백령도 앞 바다에서 침몰했다. 천안함 합동조사단은 5월20일에 침몰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북한군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는 것이다. 사고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어뢰 추진체가 증거로 제시되었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그 추진체가 북한의 것이며, 또 천안함을 침몰시킨 바로 그 어뢰의 것이라고 했다. 청색 유성 매직펜으로 ‘1번’이라고 쓴 글씨도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46명의 소중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천안함 침몰이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해보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며칠 후 24일에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핵심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에게 있다는 사실을 단정하고, 그 책임을 물은 것이다.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모든 관계를 끊겠다는 것이다. 이제 북한 배는 제주도 해역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다. 북한을 향한 모든 민간 구호물자 공급도 영유아용만 제외하고 중단된다. 국방부는 휴전선에서 대북 심리적 방송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을 규탄하는 안보리 결의를 끌어내기 위해서 외교 총력전을 펼쳤다.

합조단의 발표가 있기 훨씬 전인 4월26일에 ‘한기총’은 침몰한 천안함을 재 건조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아니 엽기적이라고 해야겠다. 한기총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미 4:3)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외면한 것이다. 그들이 특히 호전적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좋게 봐서 전력을 강화해야만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앞장서서 군함을 건조할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퇴행적인 행태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니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 기독교인 명사들이 비행기 헌납 기성회를 조직한 일이 그것이다. 그들과 한기총의 이번 행동에 심리적인 일치점이 보인다. 친일 기독교인 명사들은 일제보다는 미제(美帝)가 하나님의 뜻을 더 거스른다고 생각했으며, 한기총은 북한이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전자에는 미제가 주적이었으며, 후자에게는 북한이 주적이었다. 주적을 대적하기 위해서 그들은 평화 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마저 망각한 것이다.

필자는 합조단의 발표에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걸 이 자리에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7월15일)까지 이와 연관해서 두 가지 사실이 밝혀지거나 결정되었다. 하나는 천안함 사건을 조사한 러시아가 어뢰에 의한 침몰 가능성을 부인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외교 관례상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고, 이해 당사국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렸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유엔 안보리가 남한과 북한의 입장을 모두 담은 내용의 의장 성명으로 이 문제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북한을 꼭 찍어서 범인이라고 주장한 남한 정부의 입장은 닭 쫓던 개의 형국이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서 아무개 목사는 7월3일 “기독교애국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나라사랑운동에 앞장 설 5만 명의 기독교인 회원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와 천안함 사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면서 “조직화된 좌파세력이 이메일, 트위터 등을 적극 활용해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전쟁이 난다고 하며 선거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켰다. 게다가 30, 40대의 40%가 천안함 폭파가 북한의 소행임을 믿지 않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지금은 큰 위기다. 이대로 가면 다시 친북좌파들이 설치는 세상이 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당당히 외쳤다고 한다. 이런 유의 선동적인 설교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최소한 상식적인 식견이 있다면 의심이 가지 알 수 없었던 합조단의 발표를 목사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에, 즉 레드컴플렉스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것이 심리적 기재로 작용해서 결국 세상과 역사를 바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이미 지난 정권 아래서 흔하게 일어났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2003년 2일, 세문안 교회 이수영 목사는 “전쟁을 없이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대북문제에 관한 국민의 혼란과 우려는 새로 대통령이 되신 분의 발언 때문에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은 범죄국가가 아니라 협상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비극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켰고, 북한 땅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압살했으며, 두 번씩이나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124군 부대 특수요원들을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시키기도 하고 아웅산 테러를 자행했으며, KAL기를 납치 폭파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이는가 하면 수백만의 백성을 굶어죽게 만들면서 대량학살무기를 개발 혹은 비축하기에 혈안이 된 나라가 범죄국가 아니면 어떤 나라가 범죄국가란 말입니까? 이 발언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지해주고 도와준 우방 국가들을 배신하며 분노하게 하고 우리나라를 국제적으로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신 나간 발언을 하는 철없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을 5년간이 너무나 불안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북한은 범죄국가로 불리기에 충분한 집단입니다.(졸저 ‘속빈설교 꽉찬설교, 228 쪽에서 재인용)

필자가 위에서 천안함 사태를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문제가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남북한의 전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천안함 문제로 북한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얻은 게 거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원상으로 회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잃은 것이 많다. 다른 하나는 이번 사태가 이념에 치우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할 설교자들이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복음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왜곡된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중심으로 지난 6월22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25 전쟁 60년 평화기도회’에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간증자로 초대되었다.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략하여 21세기 벽두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부시를 평화 기도회에 초청했다니, 얼마나 파렴치하며 몰역사적이며, 부끄러운 일인가. 한국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만천하에 까발린 사건이다. 이제야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의 속성이 정확하게 손에 잡혔다. 레드컴플렉스와 친미 사대주의의 심리적 착종이 그것이다.

이들이 이런 속성을 보이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과 대립한 북한 기독교 인사들은 남으로 내려와서 교회를 세웠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악의 화신이었다. 6.25를 전후로 인민재판식으로 처형당한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았다. 반면에 미국의 군사, 경제 원조에 기댄 남한 정권 아래서 이들은 반공주의를 기독교 신앙의 목표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대개 미국으로 신학공부를 다녀온 이들이다. 그들은 미국 문명을 기독교의 본질처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설교에서 사용하는 예화도 미국의 것이 대다수다. 심지어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계 일류 국가가 되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목사를 백악관에 초청해서 기도회를 가졌다는 사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실정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모든 이들이 레드컴플렉스와 친미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순수하게 인도주의 정신으로 북한 주민들을 돕는 이들도 많다. 그들은 민간의 북한 지원까지 막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신(新)냉전적 대(對)북한 정책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들을 근본주의자라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상식적으로 보수적이며 건전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하면 좋겠다. 이들은 성서 문자주의에 떨어져 있지만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은 열려 있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염두에 둔 근본주의는 북한을 무조건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식량 및 의료 지원을 ‘퍼주기’로 단정하고 북한이 무릎을 꿇지 않으면 모든 지원을 끊겠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한기총의 행태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입장이다.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는 단순히 남북분단 체제와 친미적 틀에서 모든 게 해석될 수 없다. 그것보다 더 뿌리 깊은 문제가 놓여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근본주의자들의 무의식에까지 침투하고 있는 강박적 피해의식이다. 근본주의가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되었다. 근본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자유주의로 인해서 기독교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되었다는 신념이 과도하게 그들의 정신을 지배했다. 자유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을 태세이다. 피해의식은 동시에 자기 절대화로 빠져든다.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피해의식을 견뎌낼 수 없다. 지금 이스라엘이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 사람들의 원망을 사면서도 팔레스틴 사람들을 군사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피해의식과 선민의식의 결합에서 나온 결과인 것처럼, 한국의 근본주의자들도 자유주의 신학과 북한에 대한 피해의식, 그리고 자기들이 가장 믿음이 좋다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채 공격적인 행태를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에게 욕먹을 일만 골라서 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신학의 거부다

근본주의자들의 피해의식은 자연과학에 대한 저들의 태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중의 대표적인 분야가 진화론이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어떤 교회를 들를 기회가 있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신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설교자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 교회는 ‘창조과학회’ 강사를 초청해서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진화론과의 투쟁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똑같은 자연과학인데도, 지동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지동설까지 부정하는 극단적인 기독교 섹트가 미국 어딘가에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국의 근본주의자들은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왜 진화론은 부정하고 지동설은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필자에게는 불가사의다. 지동설은 실증적인 진리로 확인이 되었지만 진화론은 아직 그렇지 못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동설은 신앙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지만 진화론은 창조론에 완전히 대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은 진화론을 거부해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지동설이나 진화론이나 모두 똑같은 과학적 사실이다. 전자는 물리학적 사실이고 후자는 생물학적 사실이다. 둘 다 기독교의 창조론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물리적 차원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게 만드셨고, 모든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와 사람을 직접 창조했다는 성경구절을 제시할지 모르겠다. 진화론에 따르면 결국 성경의 진술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즉 성서신학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구술한 것을 성경기자가 받아쓰기를 한 게 아니라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역사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그 역사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고, 과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창조의 순서나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창조신학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그것이 진화론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오늘날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창조 신앙에 훨씬 가깝다. 최소한 학문적인 바탕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 중에서는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지동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근본주의자들 외에는 없다.

진화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진화론에도 여러 갈래가 있으니 그것을 뭉뚱그려서 말할 수도 없다. 또한 이 세상의 그 어떤 학문적 체계도 일종의 가설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없다. 종말론적인 진리 앞에서는 교회의 가르침도 가설에 불과하다. 종말이 아닌 역사에서는 그 시대의 합리적 패러다임의 지배를 존중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종말론적인 진리와도 연결된다. 생명이 진화된다는 사실은 근현대 생물학이 동의하는 생물학의 패러다임이다. 지동설을 전제하지 않고 우주물리학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론을 전제하지 않고 생물학과 유전공학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게 좋을 것이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성서적이지도 않으며, 신학적이지는 더더욱 아닌 ‘창조과학회’ 유의 세계관을 계속 고집한다면 결국 한국의 기독교는 보편적 진리 담론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세계교회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서는 다수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무리 믿음이 좋은 교회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미몽이 주류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답으로 글을 마치겠다. 근본주의는 앞에서 짚었듯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무조건 거부하는 신앙운동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고유한 자리를 확보한 신정통주의자들과 달리 자유주의 신학을 신학적으로 비판할 토대가 부실했다. 자유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문서로 폄훼한다거나 기도의 능력을 부정한다고 비판할 뿐이지 그들과 신학적인 논쟁을 이어갈 능력이 없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렸다는 말처럼 그들은 자유주의와의 극단적인 대결로 결국 신학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결과는 신학무용론이다.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바로 그것이다. 신학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득세는 한국교회를 신학의 불모지도 만들고 말았다. 신자들은 신학적으로 성찰할 줄도 모르고, 더 나가서 그것을 불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세뇌 당했다. 이런 상태에서 창조적인 영성은 불가능하다. 자폐와 퇴행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근본주의와 신학무용론의 악순환을 어떻게 깰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독교사상, 2010년 8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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