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조직신학

 

조직신학이 설교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봐서 두 가지다. 하나는 조직신학 공부가 다른 분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까다롭다는 것이다. 성서신학이나 역사신학, 또는 실천신학이 쉽다는 말이 아니라 조직신학의 특성이 색다르다는 뜻이다. 그 특성은 관념성이다. 성서신학은 신구약성서 텍스트를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분과이며, 역사신학은 교회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검토하고 해석하는 분과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은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이 제시한 자료에 근거해서 기독교 교리를, 즉 종합적인 체계를 세우는 분과이다. 그게 좀 애매하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은 창조론부터 종말론에 이르는 각각의 기독교 교리를 배운다. 칭의, 죄, 인간, 성령, 교회, 성만찬 등등, 많은 항목들이 있다. 또는 바울,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뱅, 바르트, 그리고 몰트만과 판넨베르크 등에 이르는 신학자들의 신학 체계를 따라가려고 애를 쓴다. 이런 공부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최소한의 책읽기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면 몇 권의 책으로 이런 공부의 얼개를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교리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조직신학 공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이미 주어진 기독교 교리나 신학자들의 주장을 정보의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적인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조직신학은 신학적 사유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아직 열리지 않은 신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유 능력이다. 예컨대 창조와 종말을 각각 아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 항목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창조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자들 중에서 종말이 창조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이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동성애는 창조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죄라고 말하는 것은 곧 창조가 아직 끝난 문제가 아니라는 기초적인 사실을, 또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생명 현상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해석할 줄 모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직신학이 설교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조직신학이 설교 현장에서 별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더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은혜를 받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은혜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개는 주관적인 실존과 감정에 속한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청중들에게 기독교는 그저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 종교 상품일 뿐이다. 한국교회 강단에 기복적인 요소가 많고, 간증 유의 예화가 많은 반면에 신학적 성찰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청중들의 이런 영적인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에게 조직신학은 무용지물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그 신학적 긴장감을 청중들에게 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황금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는 천당을 온갖 수사를 동원해서 선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조직신학적 체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설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기독교 교리보다는 생생한 성경말씀이 청중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지난날 설교가 너무 지나치게 교리설교, 제목설교로 치우쳐서 청중들이 설교를 외면하게 되었다고 보고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것이 바로 ‘강해설교’이다. 많은 대중설교자들이 강해설교를, 그것도 시리즈 형식의 설교를 한다. 그런 설교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강해설교가 성서 텍스트에 집중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는 앞의 글 “성서주석과 성서해석”에서 강해설교를 성서주석에 충실한 설교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석이 곧 설교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성경공부는 되겠지만 설교는 아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전적 구원 통치 사건에 천착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는 아니다. 왜 그런가?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각각의 전승들은 기독교의 전체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부분’이다. 그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주장하면 기독교 진리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겠다. 여기 수만 개의 조각으로 된 퍼즐이 있다고 하자. 한 조각을 전체 퍼즐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각 없이 전체도 없지만, 전체 없이 조각은 무의미하다. 성서의 각각 전승은 모두 퍼즐의 한 조각과 같다. 그것 자체로는 하나님이라는 전체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각각의 조각들은 서로 모순될 때가 많다. 하나님이 진노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인자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전능의 하나님으로, 또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기도에 대해서만 보자. 한국교회에는 소위 ‘강청기도’라는 말이 흔하다. 눅 18:1-8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장에게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강청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설교자들은 이런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기도를 가르친다. 기도 끝에 원하는 걸 얻었다는 예화를 곁들인다. 그러나 거꾸로 마 6:9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니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자기의 지병이 낫기를 위해서 세 번 기도하고, (고후 12:8) 병을 오히려 은혜로 받아들였다. 각각의 본문은 기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부분만을 말한다. 그 부분을 청중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청중들의 영성을 호도하는 설교가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기도가 무엇이냐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통찰이 필수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도 만능론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도를 주술적인 능력으로 가르치는 설교자들과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청중들이 기도를 도구화한다. 기도 자체의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목회의 효율성과 교회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교회에 온갖 종류의 기도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다는 현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의 영성이 풍요로워지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긴 하다. 마인드 컨트롤의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유사 종교 행위로 떨어진다고 해도 신자들의 호응만 끌어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주장은 용납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무의식을 개발한다거나 심리를 기계적으로 계발하는 유사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성령이 자리한다. 그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성령의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 삶을 지배한다. 이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를 방법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존재의 차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기도가 우리를 통과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해서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다. 그 언어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집’이고, 구약의 ‘다바르’이고 신약의 ‘로고스’이다. 창조의 능력이며, 이성의 힘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기도에 대해서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자. 오늘 참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기도의 응답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구원 신비를 역사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인간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는 호소이다. 솔직하게 사태를 직면해보라.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잘 모른다. 마치 소아 당뇨에 걸린 아이가 사탕을 달라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당에 강청 기도라니, 말이 되는가? 열광적인 기도 행위를 통해서 심리적인 엑스타시를 경험하게 하려고 하다니, 신성모독이다. 이런 기도의 열정은 갈멜 산에서 자해하면서 자기들의 신을 부르짖던 바알 선지자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오해는 말라. 기도 냉소주의가 옳다는 말이 아니다. 기도는 인간 욕망을 실현하려는, 또는 인간 심리를 자극하려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만 기도에 대한 성서의 부분적인 가르침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 가르침을 바르게 전할 수 있다. 이것이 해석학에서 말하는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다. 이런 작업에서 조직신학은 필수다.

조직신학 공부는 각 항목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짚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나름으로 조직신학 공부를 한 사람인에게도 그게 쉽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칼 바르트의 책을 이해하는 설교자들도 많지 않다. 바르트의 글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신학적인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의 능력은 철학으로부터 주어진다. 조직신학 없이 성서텍스트를 해석할 수 없듯이, 철학 없이 조직신학적 사유는 불가능하다.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조직신학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철학적 토대가 부실하다는 데에 놓여 있다. 2천년 기독교 신학의 역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유럽 철학과의 동행에서 나온 열매이다.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결정된 3,4세기의 교부들은 헬라 철학을 인식론적 토대로 삼았다. 삼위일체는 플라톤 사상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중세기의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도 역시 기독교의 하나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학적 사유가 조직신학과 성서해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한 구절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출 3: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구약성서의 하나님 이해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이 한 구절을 A4 용지 10매 정도의 길이로 해석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게 가능할 때 설교자로 설 수 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있다.’는 말을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도대체 ‘있다’니, 무슨 뜻인가? 단순히 사물처럼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있다는 말은 오히려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궁극적인 존재는 무(無)의 세계까지 포함한다. 이에 관한 논리적 사유가 철학이다. 이것에 대한 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유하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되었다. 불교의 인식론에서는 ‘색즉공 공즉색’이라는 말이 있고, 노자와 장자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도’ 개념이 있다. 이런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고, 또한 지금 존재의 심층도 경험하지 못한 설교자라고 한다면 위 성서구절을 해석할 수 없다. 낱말 뜻만 약장사처럼 반복해서 외칠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나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바로 그 존재이다.)

바울은 골 1: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헬라어 ‘에이콘 투 데우’의 번역이다. 에이콘은 likeness, image, form, appearance, statue라는 의미로, 요즘 흔하게 쓰는 아이콘의 어원이다. 도대체 형상이 무엇인가? 형상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을 일단 알고 있어야 한다. 그걸 전제하고 골 1:15-17절을 읽는다면 전혀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이다. 그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이런 철학적 사유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의 중심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 어찌 철학과 조직신학 공부 없이 설교할 수 있단 말인가. 고단하더라도 설교자는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

끝으로 조직신학과 설교의 관계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인용하겠다. “조직신학적인 반성 없이 주석에서 직접 설교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적 질문들은 단지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만 견인될 것이다. 결국 설교자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유하게 판단해야 할 난제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다가 시대정신의 여러 유행에 휩쓸리게 된다. 오늘날 선포되는 설교가 조직신학적 과업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현상이다.”(졸역, 신학과 철학, 14 쪽)  (목회와 강단, 9,10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