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빛이다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예배학 교수들과 설교학 교수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설교자들이 교회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나 지켜야 할 형식주의의 산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것은 큰 오해다.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총체다. 이를 따른다는 것은 역사의 한 순간에 머물고 있는 오늘의 교회가 지난 2천년 역사와, 더 나아가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체 그리스도교 역사와 영적으로 소통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구나 교회의 본질인 교회 일치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 현장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협의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단순하다 못해 유치하다. 예수 믿고 축복 받아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다가 주님 부르실 때 천국 가는 것에만 매달리는 방식의 설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런 설교에 세뇌되고 있다. 일종의 영적인 편식이다. 단순한 편식이 아니라 패스트푸드만 먹는 편식이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신앙 열정은 뜨거운 것 같지만 지속성이 떨어진다. 종교적 감수성은 트로트 가수 품새 못지않게 멋들어지지만 영성의 천박성은 면치 못한다. 자기연민에 매달릴 뿐이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없다. 교회력에 대한 이해 부족과 신앙의 협량으로 인해서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와 강단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교회력에 따른 설교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이어진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무엇인지는 교회력만 보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교회력은 세계교회가 거의 비슷하지만, 거기에 따른 성서일과는 교파마다 다르다. 필자는 Vanderbilt Divinity Library에서 제공되는 성서일과를 따르겠다.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에서 나온 것이다.(http://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 반더빌트 디비니티 라이브러리는 해당 주일에 제1 독서, 시편, 제2 독서, 복음서 본문을 제공한다. 제1 독서는 구약이고, 제2 독서는 서신이다. 시편은 예배의 성시교독으로 사용되고, 나머지 세 본문 중의 하나가 설교의 성경본문이 된다. 필자는 앞으로 이 본문에 따른 설교의 방향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이 작업은 성서학자의 성서주석도 아니고, 설교학자의 설교 작성법 안내도 아니다.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신학적 영성으로 뚫고 들어가는 작업이다.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성령의 도움에 기댈 뿐이다.

2011년 1월은 성탄절 후 둘째 주일(1월2일)로부터 시작해서 주현절 후 넷째 주일(1월30일)까지 다섯 주일이 기다리고 있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초점이 있다. 십자가와 부활도 오심에서 시작된다. 그의 오심은 바로 하나님의 오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오심은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예수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제를 놓고 너무 뻔한 설교를 하거나 너무 먼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걸 조심하면서 1월 한 달 동안 예수가 빛이라는 사실에 집중해보자.

 

2010년 1월2일/ 성탄절후 둘째 주일

엡 1:3-14/ 그리스도 찬양

엡 1:3-14절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찬송, 즉 송영(doxology)이다. 신약에 들어 있는 시편이라고 보면 된다.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다. 설교자는 일단 찬송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찬송은 예배와 연관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과 그의 행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상대화된다. 찬송과 예배는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인정하는 영적 태도이다. 이런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일단 설교자가 이런 창조와 찬송의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구원 문제와 직결된다. 피조물은 구원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인식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본문은 찬송의 이유를 하나님이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복은 세상에서의 출세나 재산증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적인 복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복신앙에 떨어질 수 없다. 설교자는 이 사실을 일단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영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영은 구약의 루아흐나 신약의 프뉴마라는 용어가 가리키듯이 사람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삶이 우리가 규정하는 프로그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사람은 만족하지 못한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복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을 가리킨다. 신령한 복과 안식은 동일한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신령한 복인가?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찬송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수와 우리는 물론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예수는 존재론적으로, 선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곧 죄다. 하나님과의 결합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7절이 말한다. 이런 내용은 가장 초보적인 교리이다. 교리는 뼈대이다. 이 뼈대에 살을 입혀야 한다. 교리의 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 작업을 수행하려면 인간, 문명, 타락, 구원, 칭의, 종말 등의 개념을 두루두루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핵심적으로는 예수의 피가, 즉 그의 죽음이 왜 죄 사함의 근원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통한 속죄를 ‘비밀’이라고 말한다.(9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밀에 눈을 뜨는 것은 기본적으로 은총이다.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어떤 세계에 눈을 뜨는 것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시인이 되거나 예술가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모두가 자동적으로 예수 사건의 비밀을 아는 게 아니다. 은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걸 인정할 수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은총 덕분이다.

죄와 사죄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실존적인 차원으로만 보면 안 된다. 우주론적인 차원이기도 하다. 천지만물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사실이(10절)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놀라운 진술이다. 예수의 피, 속죄, 만물통일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설교자는 이런 질문의 세계 속으로 청중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무조건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또는 축복받는다는 명제를 반복하는 것에 머물면 어린아이 신앙으로 떨어진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세계는 크고 넓다. 개인의 영적 실존을 다루면서도 우주 전체를 포괄하기도 한다. 보라. 만물은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모두 죽는다. 파괴되고 사라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의 길이 열렸다면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길도 열렸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의 내용이 따분하다고 생각되는가? 그래서 이런 내용만으로는 설교하기 힘들고 신자들의 종교적 감성을 자극하는 멘트나 선정적인 예화를 끌고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계를 실질적으로 알면 그런 것들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이제 설교를 실제로 구성하는 것은 설교자 각자의 몫이다. 핵심은 예수를 통해서 일어난 개인과 인류와 우주의 구원을 실감 있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1년 1월9일/ 주현절후 첫째 주일

마 3:13-17/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위 본문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사건을 보도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짤막하게 보도하고 말지만 마태복음은 요한과 예수의 대화를 곁들인다. 마태복음이 요한과 예수의 대화를 끌어들인 이유는 예수 세례 사건이 교회에서 논란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1) 죄 없는 예수가 왜 죄 씻음을 의미하는 세례를 받았는가? 2) 예수는 세례요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신 분인데 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가? 타당한 질문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영적 권위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태복음은 그 대답을 ‘모든 의를 이루는 것’(15절)에서 찾았다. 의는 구원과 똑같은 의미이다. 하나님 나라, 또는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의 세례가 왜 의를 이루는 일인지를 설교자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의 세례는 그의 성육신에 대한 징표다. 하나님의 낮추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핵심 사상이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다. ‘vere Deus, vere homer’ 반신반인이 아니라 온전한 신이며 온전한 인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온전한 인간이라는 부분을 약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교부들은 그런 시도를 이단으로 배격했다. 세례는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의식이듯이 당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세례를 받았다. 세례 사건에 대한 보도는 예수의 인간적 요소를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성육신 신앙에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예수의 세례사건이 정작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세례 장면에 대한 묘사는 신화적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하늘이 열렸다는 게 무슨 뜻인가? 설교자는 이런 성서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무조건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고 외치면 곤란하다. 그런 외침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청중들은 신화적 세계관에 머물게 되고, 결국 성서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오늘의 세계관과 충돌한다. 소모적인 논란에 휩싸인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세계가 비현실적이며,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은가.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백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도 이 점에서는 마태와 일치한다. 예수의 승천, 하나님 우편 자리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설교자는 이 명제가 가리키는 실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가?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인간처럼 자식을 둘 수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에게 하나님이 임재 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리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예수의 부활에서 확신했다.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근본 행위인 구원이 아닌가.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 행위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공생애의 출발 시점에 일어난 세례도 역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위의 내용으로 어떻게 설교를 구성할 것인가? 설교자의 영적 깊이에서 포착할 수 있는 부분을 전하면 된다. 은혜를 끼쳐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게 좋다. 그렇게 되면 결국 힘이 들어가게 되고, 힘이 들어가면 진리의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즉 예수가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전하면 된다. 그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도 하다.

 

2011년 1월16일/ 주현절후 둘째 주일

사 49:1-7/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구약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모세를 선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 선택이라는 말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택이 무의미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위 본문에서 선택을, 또는 부르심을 반복한다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팽배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벨론 포로이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중요한 선지자들은 거의 이 사건을 전후해서 활동했다. 그런 맥락에서 선민사상은 더 확고해졌다.

위 본문의 표현은 적나라하다. 하나님이 태에서, 복중에서 부르셨다고 한다. 태와 복중이라는 포현은 하나님의 선택이 존재론적이라는 뜻이다. 나의 의지와도 무관하다. 설교자는 일단 이 사태를 정확하게 붙들어야 한다. 칼뱅의 이중예정도 이런 존재론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주장이 극단으로 나가면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선택이 존재론적인 사건이라면 결국 결과에 대한 책임이 사람에게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우리 의지를 넘어서지만 우리의 응답을 배제하지 않는다. 태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부르심에 응할 것이며,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곧 태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소명에 부응했지만 책임을 다 감당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선지자의 영적 갈등이었다. 4절에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헛되이 수고했고, 무익하게 힘을 썼다고 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피력한 것이다. 여기서 소명은 두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이사야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소명을 받아서 활동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생전에 성공한 선지자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얼마나 될까?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어야했지만 그런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회의적으로 보게 할 만한 상황이다.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택을 포기하고 대신 심판을 말해야 하는가? 이사야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멸시당하는 자, 미움을 받는 자, 종이 된 자들을 여호와께서 붙들어주신다는 것이다.(7a) 이 사실을 보고 왕들이 일어서고, 고관들이 경배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사야의 신탁은 참으로 끈질기다. 패배의식과 냉소가 가득할만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선택을 줄기차게 선포했다. 이것이 옳은 선포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의 선포가 실증으로 나타났나? 그렇지 못했다. 설교자는 이 맥락에서 분명한 방향을 찾아야 한다. 이사야의 선포는 옳다는 사실과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뚫고 들어가서 말씀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 중심을 우리는 이사야의 신탁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을 설교 본문으로 할 때는 신약의 관점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결국 케리그마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회복이 가능하다. 3)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여호와의 선택이다. 그의 선재적 은총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다.

 

2011년 1월23일/ 주현절후 셋째 주일

마 4:12-22/ 예수는 빛이다

위 본문은 두 가지 전승을 전한다. 하나는(12-17) 세례 요한의 구금 이후 시작된 예수 활동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연결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18-22)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다. 아주 간단한 두 이야기를 설교자는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며, 어떤 주제를 전해야 하나?

마태가 세례 요한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설명을 설교에서 자세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는 나름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다. 선지자 전통이 끝나고 이제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선지자와 메시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지자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요한의 선배라 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여기서 인용된 건 당연하다. 사 9:1,2절에는 흑암, 큰 빛, 사망의 땅, 그늘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나온다. 독자들은 마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 챌 수 있다. 이사야가 전한 빛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여기서 빛과 메시아니즘의 관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빛은 생명, 구원에 대한 메타포다. 창세기의 창조보도에 나오는 첫 창조는 빛이었다. 예수가 빛이라는 성서의 주장을 전하려면 세상이 흑암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왜 세상이 어둠인가? 왜 메시아가 와야만 하나? 여기서 설교자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1) 인간의 실존은 흑암이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오늘처럼 풍요의 세계에서도 흑암이 여전하다. 2) 흑암의 존재론적 근거는 죄다. 교만, 자기사랑, 자기연민, 자기집중이라 할 죄는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은 율법으로, 이방인은 율법 없이 죄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가 왜 빛인가? 선지자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런 질문들을 깊이 있게, 설득력 있게 전하려면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총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선지자는 죄를 나열하고 비판하는 반면에, 메시아는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 메시아인 예수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했다. 그에게만 그런 영적 권위가 있었다. 사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된다. 이것이 바로 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예수라고 한다면 그가 빛이라는 말이 옳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를 통해서 일어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이런 대답은 자칫 상투적인 것으로 보인다. 설교자는 이런 기초적인 교리를 상투적이지 않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해 보이는 교리의 속살 안으로 들어갈 때 그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바로 설교의 깊이가 달라진다.

마태는 예수를 빛으로 말한 뒤에 제자의 소명을 전한다. “나를 따라오라.” 빛을 본 자는 당연히 그 빛을 따르게 되어 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말 그대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가끔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라 빛을 반사할 뿐이다. 다른 하나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던진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 운명을 포함한 모든 삶을 예수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대목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모든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무조건 교회생활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삶에서 예수와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대목에서는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도움을 줄 것이다.

결론에서는 주현절의 의미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도 좋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믿는 우리가 이제는 그 사실을 말과 삶으로 전해야 한다고 권면할 수도 있다. 이런 설명이 진부한 듯 보이지만 설교자가 주현절의 영성을 확보하고 있으면 청중들에게 분명히 전달될 것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바르게 알고 정확하게 전하기만 하면 말씀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청중들의 영혼을 고유한 방식으로 자극할 것이다.

 

2011년 1월30일/ 주현절후 넷째 주일

고전 2:1-12/ 지혜의 분별 기준

위 본문의 키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혜, 그리고 성령이다. 구도는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이 참된 지혜인데, 그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구도에서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일단 각각의 일반적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형벌이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이미 고전 1:23절에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것을 무조건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 당신 자신도 십자가 처형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그것을 물리쳐달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전하고 있다. 이런 십자가가 어떻게 인류 구원의 길이 되는가?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할 자신이 있는가?

고린도는 헬라철학과 문명이 번성하던 곳이다. 철학(philosophy)은 지(소피아)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다. 궤변론자(소피스트)들도 많았다. 바울이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든 것처럼 말한 것은(4절) 이상한 게 아니다. 이데아, 질료와 형상, 에이도스,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 개념과 경구에 매료되어 있는 이들에게 한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전한다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한다. 이런 구분이 그리스도교 인식론의 핵심이다. 사람의 지혜는 물론 철학적 인식론이다. 이것을 무조건 인간적인 것이라고 무시하면 곤란하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밀의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인식이라고 우겨도 안 된다. 무엇이 사람의 지혜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지혜인가? 그것이 실제로 구분이 되는가? 여기서 핵심은 ‘은폐성’이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7절) 설교자는 예수의 십자가가 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 안으로 청중들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에 관해서 아는 게 있어야 이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통치자들은 모른다.(8절) 그 결과가 십자가 처형이다. 이 진술이 모순처럼 들린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지혜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 자체가 핵심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를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했다. 왜 몰랐을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아 비밀’이 복음서가 말하는 메시아니즘의 특징이다. 오늘도 이 사실은 여전하다.

비밀을 누가 알아볼 수 있는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대답은 성령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는 능력이라고 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세계를 모른다. 도대체 하나님의 영, 성령이 무엇이며, 누구인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성령을 받으면 다 해결된다고 고집을 피우는 설교자들도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교 인식의 토대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곤란하다.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누가 참된 선지자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일단 다음과 같은 원칙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런 원칙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곤란하다. 예수 사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여기서 필요하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설교자들은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월1회 열리는 '설교공부'의 강의안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2시간 동안 강의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텍스트의 중심 주제를 설명합니다. 이를 기초로 설교자들은 갖자 자신의 영적 특성에 따라서 설교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데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 설교 안내 원고와 실제 설교를 비교해보십시오. 이 강의안은 <기독교사상> 2011년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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