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코미디
-성서텍스트에는 ‘세계’가 있다!-


<창작과 비평> 2006년 겨울 호에 전성태 소설가의 “목련식당”이 실렸다. 지난날 시인을 꿈꾸던 이 소설의 화자는 몽고에서 가이드 일을 하다가 아예 여행사를 차린 젊은이였다. 화자와 더불어 화자의 삼촌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중견 화가였던 삼촌은 수년 전 북한을 방문했다가 그를 초청한 북한 당국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금강산 가는 길에서 목격한 처녀를 화폭에 담았다. 삼촌의 말이다. “야아, 그 황톳길을 지프로 넘어가는데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처녀가 걸어가는 거야. 그 황톳길을 한 처녀가 넘고 있었다 이거야.” 그 그림이 문제가 되어 이와 연관된 북녘 사람 몇이 처벌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후 붓을 놓은 삼촌은 그 후로 화자인 조카와 함께 몽고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곳에 2년 전 북한의 목련식당이 체인점을 열었다. 소설은 바로 이 목련식당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종의 삽화 모음이다. 그 삽화 중의 대미가 바로 남한의 교회와 연관된다. 그 장면을 아래에 그대로 인용하겠다.

연이서 홀 쪽에 예약한 손님들도 들이닥쳤다. 목련 직원들이 모두 줄지어 서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남녀노소 이십여 명쯤 되는 단체손님은 무슨 선교회에서 온 여행객들 같았다.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노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그 노인이 목회자인 듯했다. 외투를 벗자 모두들 노란 조끼로 맞춰 입은 모습이 드러났다. 등에 흰 글자로 ‘구국을 위한 고난의 십자가’라고 씌어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식당을 둘러보고 엽차를 나르는 접대원 처녀들을 관찰했다. 표정들이 워낙 비장해서 식사하러 온 사람들 같지 않았다.
머잖아 냉면이 배달되고 여주인이 손님들 앞에 섰다.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우리 목란을 특별히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저 흔들림 없이 최상의 맛과 써비스로 조국의 요리를 선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시라요.”
좌중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중 크게 헛기침을 놓고 목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쉰 듯 가라앉아 있었다.
“환영해줘서 고맙소. 당신이 주인이오?”
“네, 그렇습니다.”
그는 물 잔을 들어 입을 축인 후 좌중을 죽 훑어보았다.
“식사를 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해둘 게 있소. 불쾌히 여기지 마오. 우리가 지불한 돈이 북으로 갑니까?”
“네?”
여사장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나도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삼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삼촌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을 머고 내는 달러가 당신네 장군님한테 가냐 이겁니다.”
잠시 여사장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접대원 처녀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초조한 눈길로 여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여사장이 침을 넘기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래 아직 수익이 발생하지 않아 이 식당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한 푼도 평양에 가지 않습니다.”
목사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언뜻 스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헷갈렸다.
“솔직한 얘기인지 모르겠소만 하여튼 답변 고맙소.”하고 말해놓고 목사는 좌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성도 여러분도 들으셨지요?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이 처한 난국을 위해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자 하나님은 사십일 뒤에 내리실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구국을 위한 금식기도회를 시작합니다. 자, 들었다시피 정갈한 음식입니다. 오늘은 조국의 안보를 생각하면서 만찬을 즐깁시다.”
목사가 말을 마치가 좌중이 기도 준비를 하느라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왠지 진지한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초원의 며칠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세상이 왠지 신들린 듯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죄 많은 민족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 북녘 감옥에는 이천삼백만이라는 기아에 허덕이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소서 .... ”

이 소설은 그 뒤로 작은 해프닝이 하나 더 일어난다. 목사의 기도가 끝나고 그 일행이 막 냉면을 먹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평소 습관적으로 모란식당에 와서 트집을 잡던 어떤 불량배가 무슨 건수가 생겼는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목련식당은 평양 옥류관의 공훈 냉면 요리가 온다는 현수막을 내걸었었는데 약속한 날짜에 요리서가 오지 않았다. 이 불량배는 그 사실을 트집 잡고 있었다. 여사장의 말에 의하면 약속한 시간에 국제열차로 마중을 나갔는데 무슨 속사정이 있었는지 요리사가 그 열차에서 내리지 않아서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소란을 목도한 목사는 냉면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오, 주여! 이게 저들의 방식입니다.” 하고 투덜거렸고, 그와 동시에 교인 일행이 일제히 일어났다. 보다 못한 삼촌이 나서서 자신이 먹어본 바로는 옥류관의 냉면이나 목련식당의 냉면이나 다를 게 없다고 대신 변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목사는 “사실을 호도하는 자나 거짓을 두둔하는 자나 다 민족 앞에 죄인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바로 저런 사악한 사탄의 마음 때문입니다.” 하고 외쳤다. 죄송하다는 여사장의 말을 들은 목사는 “아, 그 앵무새 같은 소리 좀 그만둬요!” 하고 면박을 주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냉면 한 그릇 먹기도 고되다는 삼촌을 말을 받은 화자의 마지막 독백은 이랬다. “글쎄 말이에요. 목련은 그냥 식당인데...”

기이한 곳, 교회

이 작가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반(反)핵, 반(反)김정일 기도회를 연 개신교 목사들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구상했는지 모르겠다. 그의 눈에 비친 목사와 그 일행의 행동은 ‘코미디’였다. 사람의 기분을 가볍게 풀어주는 코미디가 아니라 어처구니없어 허탈하게 만드는 코미디였다. 이 소설의 화자는 목련식당에서 그 어색한 장면을 만나기 바로 직전에 어느 기업의 단체 연수팀을 끌고 몽고의 초원을 다녀왔었다. 초원에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훈련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나 단지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것으로 충분한 목련식당에서 핵무기 운운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보이는 작태가 작가의 눈에는 코미디였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코미디를 양산하는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다. 툭하면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과 일치시키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백 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으며, 여성의 달거리를 조롱하고, 이라크를 침략한 부시를 위해서 기도하고, 성시화(聖市化) 운동을 일으키며, 가짜 박사학위를 받고 축하예배를 드리고, 사학법 재개정을 위해서 아무개 교파 총회장과 대형교회 담임 목사들이 순교의 각오로 삭발하는 등등, 최소한 사람과 역사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눈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드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위에서 거칠게 열거된 문제들은 차라리 순진한 것인지 모르겠다. 웬만큼 의식이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교 영성을 훼손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매우 경건한 무늬를 한 사이비 영성이다. 그런 것들은 웬만해서 눈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청중들이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 중의 한 가지만 예로 들면, 그것은 소위 “경배와 찬양”이라는 트랜드로 한국교회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열린예배이다.  
요즘 많은 교회가 복음찬송을 부를 때 사용하기 위해서 대형 프로젝터는 물론이고 타악기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들은 전자악기와 타악기를 동원하여 청중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찬송을 부른다. 박수는 물론이고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른다. 필자는 지금 우리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감정 표현 자체를 문제 삼는 게 결코 아니다.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박수도 치고, 춤도 추고, 얼싸 안을 수도 있다. 창을 할 때 옆에서 고수가 “얼쑤!”하고 흥을 돋우는 국악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감정을 표출한다. 종교도 역시 궁극적인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런 감정적인 표출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원래 종교경험과 감정의 관계는 그 뿌리가 깊다. 19세기 초에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를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신론적이고 합리주의적 종교를 주창하던 그 시대에 종교의 토대를 철저하게 감정에 두었다. 그의 제자인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도 역시 이런 감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두려움은 사람의 존재 전체가 완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건과 조우함으로써 표출되는 영적 경험이다. 절대의존의 감정이나 누미노제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 경험이라도 볼 수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한 해명이 불가능한 생명의 심층을 만났을 때 인간은 경악하고 충격을 받고 두려워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건도 역시 이런 경험의 일종이다. 모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유비가 불가능한 어떤 존재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존재는 야훼 하나님, 즉 자기 자신에게 존재의 근거가 있는 자존자(自存者)이다. 이처럼 인간의 합리주의적 인식과 논리로 재단하거나 규범화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험인 종교에서 감정을 제외한다는 것은 자체적으로 모순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 안에서 바람이 불고 있는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내면의 영적인 충격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감정 표출이라기보다는 단지 인간 감정의 표층을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집회에서는 찬송 인도자가 “주님께 영광을!”이라거나 “할렐루야!” 같은 상투적인 멘트를 날리고, 두 손을 들고 찬송하는 등, 우리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는 데 집중한다. 이런 행태들이 교회 현장에서 효율성을 얻고 있는 탓인지 요즘 신학생들 중에서는 전문적인 찬양인도 사역자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 딸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가끔 학교에서 아이들을 수련회에 데리고 간다. 이 수련회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날 저녁에 열리는 캠프파이어다. 그때는 대개 이벤트 회사의 전문적인 엠씨를 데리고 온다. 이들은 프로그램에 따라서 슬픈 음악을 틀어놓고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 신파조로 부모의 사랑을 주제로 대사를 읊는다. 십중팔구의 아이들을 모두 훌쩍거리고 흐느낀다. 잠시 그런 순간이 끝나면 또 다시 경쾌한 음악을 틀고 개그 콘서트 같은 행사를 진행한다. 학교 교사들은 아이들이 분위기에 휩싸여 우는 모습을 보고 교육적인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프로그램은 마취효과 그 이상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교회의 열린예배와 복음찬송이나 초등학생들의 캠프파이어나 모두 사람의 심리와 감정 메커니즘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하다.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 찬송을 부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혹시 세상 사람들에게 코미디처럼 보이는 건 아닐는지.
예배와 찬송이 늘 엄숙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두 손 들고 찬양하는 게 뭐 어떻다고 딴죽을 거는가, 하고 말이다. 이런 건 설명하기가 조금 복잡하기도 하고, 오늘 주제의 핵심도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인 예를 통해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시트콤이나 일일 드라마는 청중들을 재미있게 할지는 몰라도 삶을 심화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 프로그램은 대개 주제가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단지 시청자들의 즉흥적인 여흥만을 목표로 진행된다. 반면에 박경리 선생이나 박완서 선생의 소설은 인간 삶의 깊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독자들의 삶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앞의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전자를 동네 내기바둑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프로 기사의 바둑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찬송 중심의 열린예배는 표면적인 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선정적인 방식을 요구하게 되는 반면에, 예전적인 찬송의 예배는 생명의 영인 성령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인간적인 자극들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미만 있으면 됐지 예술성이나 삶의 심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묻지는 마시라. 우리의 예배와 설교는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상품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 존재가 철저하게 의존해야 할 궁극적인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예배와 설교에서 이런 궁극적인 생명과의 존재론적 소통을 포기하면 결국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래와 같은 마르바 던의 진단은 옳다.

슬프게도 많은 ‘현대적’ 예배 인도자들이 ‘참된 찬양’과 ‘기쁜 노래’를 혼동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을 말하는 대신 개인적인 재미나 위로나 행복을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더 오래 된 찬송가들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만(“저 장미꽃 위에 이슬”과 같은 찬송들), 더 공동체 지향적이고 신학적으로 내용이 더 깊었던 예전의 찬송에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찾아보기가 훨씬 힘들었다.(마르바 던, 고귀한 시간 ‘낭비’, 이레서원, 251 쪽)

교회의 행태가 코미디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찬송을 예로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복음찬송 폐기론자라는 말은 아니다. 옛날에는 자주, 요즘도 간혹 혼자서 기타를 치며 마음에 드는 복음찬송을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늘 진지하게만 사는 게 아니라 풀어놓아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복음찬송도 예배의 중심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부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처음에는 발만 들여놓는 걸 허락받았다가 시나브로 주인의 텐트를 몽땅 차지해버린 “나귀와 주인”이라는 주제의 이솝 우화처럼 복음찬송이 오늘 한국교회의 모든 예배와 예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이게 코미디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서, 어디 위에서 언급된 요소들만 코미디이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심지어 저주의 근거로까지 선포하는 설교는 분명히 코미디다. 성수주일의 절대화도 역시 코미디이다. 예화 위주의 설교도 많은 지성인들에게 코미디로 들릴 것이다. 특히 미국 중심의 예화는 신물이 난다. 지금도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는 설교 예화의 단골메뉴다. 하기야 하나님이 청교도들의 신앙 때문에 미국을 축복했다고 설교하고 있는 실정이니 더 긴말이 필요 없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김영민 교수의 아래와 같은 고언은 우리가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명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 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간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뜩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 김영민, 한겨레21, 1999.4.15.>

블랙 코미디, 설교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기독교 사상>에 설교비평 글을 게재하면서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대했는데,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설교가 제법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교자들의 잔소리, 협박, 아부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상투적이고 진부한 이야기, 설교의 표절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오늘 귀중한 시간을 아껴야겠기에 입을 다물겠다. 대신 졸저 <설교비평 1,2권>에 실린 28명의 설교자 중에 필자의 판단에 따라서 평가한 베스트(best) 화이브와 워스트(worst) 화이브를 소개하겠다. 베스트는 민영진, 임영수, 박종화, 김기석, 이재철 목사이고, 워스트는 윤석전, 정필도, 이수영, 장경동, 조용기 목사이다.(이단 시비가 있는 분과 외국 사람은 제외했다.) 여기서 필자는 가장 대표적인 코미디 한편을 소개하겠다.
<기독교사상> 2005년 1월 호에 실린 졸고 “기독교의 두 얼굴, 사랑과 미움”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의 정치설교가 그 대상이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원초적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과 똑같이 북한에 대해서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동족을 희생시켰으면서도 쉬지 않고 대남투쟁을 선동해온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며 6.25북침설을 주장하는 내용의 게시물이 아무리 나돌아도 태연하게 내버려두는 정권입니다. 김정일과 그 도당들만 좋아하며 웃고 있을 일들을 골라서 해온 정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김정일의 뜻대로 통일되는 길을 착실히 닦아온 최근 두 정권이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이미 친김정일 사이트에서는 버젓이 떠들고 있고 현 정권은 모른 척 묵인하고 있는 구호인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을 대통령으로 하는 평화통일”안을 국민 앞에 내미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2004년 9월12일 설교).

필자는 이 목사가 어디에 근거해서 설교 시간에 이런 발언을 쏟아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설교는 신문의 논설이 아니며 정당의 대변인 성명도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역사를 뚫어보는 예언자적 상상력이다. 하나님 통치의 종말론적 미래를 열어가는 예언이어야 할 설교가 이 목사에 의해서 정치평론으로, 그것도 수준 이하의 평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급기야 그는 현 정권이 그리스도교를 핍박한다면서 이 정권이 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 정권이 지속되는 한 우리 교회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어떠한 환난과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증표입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면 그 누구도 결코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해를 입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를 해하는 자들의 죄가 드러나기 위한 것이며 그런 자들이 망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들은 망할 것입니다. (교회, 세상의 소망, 9월19일).

2004년 11월1일 한기총 주최 ‘민족회개와 구원을 위한 한국교회 통곡기도회’에서 “살생의 정치를 하는 정부, 개혁을 명분으로 개악을 하는 자들, 참여정부라면서 오만한 정치를 행하는 정부, 계층 간의 미움을 증폭시키는 정부, 모든 책임을 야당과 언론, 건전한 시민에게 돌리는 후안무치한 자들”(한겨레 21, 12월2일자, 31쪽)이라고 기도하는 분이니까 현 정부를 반기독교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설교를 했다는 게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처럼 한국교회가 정권 앞에서 떵떵거리는 때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목사의 그런 주장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만한 엄살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혹세무민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지금 이 목사의 정치적 견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설교시간에, 그것도 전적으로 케리그마에 천착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시간에 일방적이고 선정적인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정치설교는 필자가 보기에 블랙코미디 그 자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치우친 예배와 과대한 피해의식(레드컴플렉스)에 근거한 정치설교가 한국교회 안에서 버젓이 주류로 행세하고 있는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쩌면 요즘 신세대들이 워낙 코미디를 좋아하니까 이런 방식으로라도 선교의 효율성을 높여보려는, 아주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예배와 설교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이런 설교에 길들여지면 한국교회 신자들은 탈역사주의, 종교적 열광주의, 개인주의, 소비주의, 종교제국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 앞에서 대안이 무엇인가?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은 없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하고 본질적인 대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해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행태가 코미디로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성서텍스트의 바른 해석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만한 내공이 없는 필자가 어쩔 수 없이 수행하고 있는 설교비평과 설교학 강좌의 핵심은 바로 이 사실, 즉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설교자들이 우선 “성서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성서 안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 텍스트 안에, 그 성서언어 안에 무엇이 존재한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면 설교자는 늘 성서의 변죽만 울리고, 값싼 은총론에 떨어지거나 도덕군자 연 하고, 결국 그런 과정이 되풀이 되어 영성이 고갈됨으로써 대중추수주의에 사로잡히고 만다. 필자는 여기서 신구약성서 중에서 자칫 해석의 잘못에 따라서 왜곡될 수 있는,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일 수 있는 본문 세 군데를 예로 들겠다. 그 본문을 간단히 검토함으로써 성서가 왜 (생명)‘세계’인지를 설명하겠다.

아브라함과 입다 이야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에서까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아브라함은 우리가 구약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명실상부하게 야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와 밀접히 연결되기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전승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그가 외아들인 이삭을 야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한 사건(창 22장)이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에서 두 가지 설교 주제를 얻는다. 첫째, 신자들은 자식까지 잡아 바칠 정도로 철저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찌르려고 한 그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숫양을 준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준비시켜주시는 분이다. 이 두 가지 주제는 결국 “믿음”에 집중된다. 이런 전승과 이에 대한 바울의 해석에 근거해서 대개의 설교자들은 믿음 일원론, 또는 믿음 만능론에 심취한다. 무조건적인 믿음이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으니까 접어두고, 텍스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자.  
창 22:2절 말씀은 이렇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야훼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매우 복잡한 성서역사비평을 거쳐야 하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대신 필자의 단상을 그대로 전하겠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이지 죽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창세기 기자가 이것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이게 바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설교자들이 직면해 있는 딜레마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의 본성과 어긋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인정하기도 어렵고, 부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바로 우리의 처지라는 말이다. 여기서 많은 설교자들이 양극단으로 빠진다. 성서텍스트를 문자적으로 강요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열광적인 종교문학으로 평가 절하한다. 이 양자 모두 바른 태도는 아니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질문하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내리신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착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고대사회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근동만이 아니라 동양과 잉카문명의 아메리카, 또는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글로벌하게 인간을 신에게 바치는 종교의식을 추구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본다면 이런 행위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인정된다. 고대인들은 늘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나 공동체 일부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민족 전체의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입다 전승(사사기 11장)도 이에 관한 전형적인 예이다. 승전한 장군이 자기를 맞으러 나올 노예 중의 하나를 번제로 바치겠다는 발상은 그 당시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는지 모른다. 필자의 생각에 성서 기자는 인신제물의 유혹을 거부하기 위해서 이 본문을 기록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은 아들까지 잡아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책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관점은 거기에 등장하는 위인들이 아니라 그에 관해서 보도하고 있는 화자, 즉 성서기자의 편집의도이다.  
필자가 설교비평에서 다룬 설교자들 중에서 모리아 산의 번제 전승을 가장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한 이는 민영진 박사이시다. 입다 이야기와 더불어 아브라함 전승을 해석하고 있는 민 박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 때문에 아들과 딸을 희생시키려는 그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비판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런 인간의 행동 너머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게 시선을 돌린다. 많은 목사들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민 박사는 오히려 그 하나님을 향해 “왜?”라고 시비를 건다. 그는 청중들을 성서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대결이라는 그 절박한 상황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말이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늘 대결해 온 흔적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과의 대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 대 한 하느님의 대결이기도 하고, 한 개인 대 한 하느님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바로 이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과의 대결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했느냐 하는 과정에서 결정되었습니다.(민영진, 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 154 쪽)

설교자들은 아브라함 전승과 입다 전승에서 오늘의 시대도 정치, 종교, 문화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수많은 약자들이 번제로 바쳐지고 있는 실정이라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 파괴를 목표로 하는 군대에서, 입시지옥으로 일컬어지는 청소년들의 교육현장에서, 경제정의를 근본적으로 허무는 부동산투기에서, 삶을 수단화하고 상품화하는 노동현장에서 국가와 자본과 출세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오늘도 부단히 인신번제가 바쳐진다. 아브라함과 입다 전승은 믿음 실증주의 가아니라 바로 그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오해는 마시라. 필자의 해석이 정답이라는 게 아니라 성서텍스트 안에 어떤 (생명)세계가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담겨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여호수아의 전쟁 이야기

우리는 또 하나의 매우 곤혹스러운 진술을 구약성서에서 만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그 전쟁 장면이 너무 끔찍하여 그 전쟁을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성서기자는 여리고 성의 함락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여 6:21) 여호수아 군대는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즉 비전투요원인 여자들과 노인들과 아이들까지 죽였다. 이게 야훼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아이 성에 사는 사람들과의 전쟁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며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여 8:24-26) 끔찍한 전쟁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주민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인데, 그들을 진멸하면서 하나님의 명령 운운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언어도단을 당연한 것으로 설교하는 행위는 코미디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야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주민들을 진멸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 만약 그런 명령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왜?” 그렇게 하셨을까? 본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야훼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단서가 없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야훼 하나님은 단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겠다는 약속만 하셨을 뿐이다.(여 6:2) 구체적인 전쟁 방법은 뛰어난 전략가인 여호수아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당대의 명장인 여호수아는 잔인한 방식을 택했다. 그것이 여호수아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는 지금 우리가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주민들과 대화하고 관계개선을 모색했다면 이런 잔인한 전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추정이 옳다면 여호수아는 야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말이 된다.  
어처구니없게도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의 잔인한 전쟁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침략은 동일한 사건일지 모른다. 양쪽 모두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똑같이 ‘더러운 전쟁’이었다. 필자의 생각에 여호수아는 여리고 주민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지만 정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일 수 있으며,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게 분명하다. 여호수아의 전쟁 이야기를 본문으로 이 세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설교를 한다면, 그야말로 그런 설교는 실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필자가 성서텍스트를 해체하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하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필자는 지금 성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 내면에 어떤 사건과 세계를 담고 있는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성격을, 따라서 설교에는 정밀한 해석학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중이다. 그런 것을 놓칠 경우에 설교는 어느 순간에 선동으로 변하고, 또한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코미디가 되고 만다.  
  
바울의 동성애 비난  

마지막으로 신약성서 중에서 한 구절만 더 확인하자.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버리고 남자까지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롬 1:26,27, 공동번역). 이 구절을 근거로 많은 설교자들이 동성애자들을 비난한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지만 설교자가 성서텍스트의 표면에 머물지 말고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본문에 대한 이동원 목사와 하용조 목사의 강해설교에서 한 부분씩 인용하겠다.

이 성적인 타락에 대한 가공할 타락의 극악한 현상이 바로 동성연애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요? 로마 시대를 처벌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 시대의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AIDS입니다. (이동원, 로마가 들어야 했던 복음 35,36).

여자와 여자가 살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가정이 없어집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마귀의 방법입니다. 미국 사회는 동성연애를 합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세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숫자의 힘으로 바꾸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주받은 사회입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략> 여자와 남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다 바꾸고는 그것을 평등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용조, 로마서의 축복, 77).

이들은 매우 과감하게 동성애자들을 조롱하고 단죄한다. 에이즈가 바로 동성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며, 동성애자들은 교회에 나올 수 없다고 강변한다. 필자는 그들의 설교를 듣고 흡사 14-17세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마녀사냥이 연상되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목사가 어떻게 성적 소수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지 필자의 머리를 아무리 돌려도 이해할 수 없다. 보기에 따라서 그들은 성서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설교자들이 감당해야 무한 책임의 하나이다. 알면서 행하는 잘못도 문제지만, 모르면서 행하는 잘못에서도 설교자는 면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설교에 의해서 벌어지는 결과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지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준엄한 아포리즘이 빈말이 아니다. 조금 진지한 태도로 바울이 이 본문에서 실제로 동성애를 단죄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 검토해보자.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동성애 현상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은 이 동성애를 죄(Sin)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6절).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이런 망측한 짓을 한다는 진술만 보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을 논증하기 위한 하나의 자료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근원적인 것은 죄, 곧 인간의 타락이다. 그 타락의 결과는 동성애 이외에도 부정, 부패, 탐욕, 악독, 시기, 살의, 분쟁 등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인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2-24).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의 우상숭배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까지 문제 삼는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한결같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그런 요소들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사실 바로 바울의 논점이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로마 성윤리에 근거해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즉 바울은 이 동성애 문제를 신앙의 근본 문제로 삼았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건전한 윤리관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동성애 문제는 로마시대 이전에 이미 헬라시대에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한다. 헬라인들은 출산을 목적으로만 아내와 성관계를 나누었고, 대신 소년이나 젊은이들과 여러 방식의 연인 관계를 맺었다. 플라톤도 성인 남자와 소년과의 그런 관계를 가장 완전한 사랑의 상태로 묘사했는데, 그것이 곧 “플라토닉 러브”다. 그런데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동성애 현상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세네카는 정욕에서 나온 동성애의 관습이 사치와 도덕적 방탕에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플르타크도 역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보았다. 이런 로마 도덕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성애는 사치와 방탕에 연관되며, 또한 가학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야만 했다. 바울은 지금 헬라의 플라토닉 러브의 동성애가 아니라 로마의 부도덕한 동성애현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우상 숭배의 결과라고 진단한 것이다. 로마 도덕가들과 바울이 비난하는 동성애와 오늘의 동성애는 다르다. 그들이 규정하고 있는 동성애는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동성애자들의 행태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오늘의 동성애는 오히려 헬라시대의 플라토닉 러브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도 역시 필자의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필자는 지금 동성애 자체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설교자가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강단에서 동성애자들을 몹쓸 인간으로 재단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파괴한 몇몇 설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표면적인 문자에 얽매이는 경우에 설교는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코미디야, 코미디!

위에서 예로 든 세 본문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 정확무오하다는 말은 아니다. 텍스트는 포괄적으로 해석되어야할 어떤 세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뿐이었다. 신(新)해석학을 대표하는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ling)과 에른스트 푹스(E. Fuchs)의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면 성서텍스트는 고정된 규범이나 정보가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사건(Wortgeschehen)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훨씬 심층적인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강단현실에서 볼 때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은 성서언어의 세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성서를 단지 종교 상품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포장하는 일에만 몰두함으로서 성서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고 있는 (생명)세계를 맛보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 청중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히면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코미디를 연출할 수밖에 없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 답변하러 왔다가 그들의 행태를 보고 “코미디야, 코미디!” 하고 웃었다고 한다. 오늘 우리의 설교도 그렇지 않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 딴에는 종교적 진정성을 확보한 것처럼 진지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설픈, 또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활한 코미디로 보인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지금 필자는 설교자들이 세상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설교행위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바르게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구도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한 최선의 길은 성서텍스트에 천착하는 것이다.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고 구원의 현실성을 오늘에 담기 위해서 역사와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예언자적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 이런 준비와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텍스트의 세계에 시나브로 빠져들어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신 성령의 활동방식이기도 하다. 필자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흡사 시(詩)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언어와 세계가 새로워지듯이 성서텍스트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성서가 전혀 새롭게, 그래서 결국 이 세계가 전혀 새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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