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텍스트 톺아보기
-창조적 설교를 향한 작은 발걸음-

영화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 2006)은 서양 음악의 대부라 할 베토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목에 나오는 ‘카핑’은 작곡자의 알아보기 힘든 원 악보를 출판사 쪽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필사하는 작업을 가리킨다고 하다. 이 영화는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마지막 교향곡 9번, 일명 합창 교향곡을 작곡한 후 필사자인 안나 홀츠라는 젊은 여성의 도움으로 직접 지휘를 맡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베토벤의 많은 대사 중에서 다음이 기억에 남는다.

모두들 내가 침묵 속에 사는 줄 알아. 그렇지 않아. 내 머릿속엔 소리로 가득 차있어. 절대 멈추지 않아. 나의 유일한 위안은 그걸 쓰는 거야. 신이 내 마음을 음악으로 감염시켰어. 그리곤 어떻게 했지? 귀머거리로 만들었어. 내게서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어, 내 곡을 듣는 즐거움을. 그게 신의 사랑인가? 친구가 할 짓이냐고?

위의 대사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머리에서 나왔겠지만 예술가와 예술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었다는 점에서 베토벤의 고백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들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그것을 보기까지 한다. 시인들도 역시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듣고, 그걸 언어로 형상화한다. 우리가 그들의 예술성을 쉽사리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예술경험이 근본적으로 배타적이라는 데에 놓여 있다. 아무도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베르디의 ‘레퀴엠’을 흉내 낼 수는 없다. 이 배타성이 곧 창조성의 핵심이다. 그들은 들은풍월을 억지로 읊는 게 아니라 소리와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와 나눈 영적 소통을 밖으로 드러낼 뿐이다. 이런 행위는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점에서 창조적인 사건이다.
필자가 보기에 하늘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의 신탁(神託)은 작곡이나 시작(詩作) 행위와 같다. 예언자들의 신탁도 배타적이며, 따라서 창조적이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모두 이런 신탁 사건에 포함된다. 그들은 예수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바로 그 세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오늘의 설교가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이 성서텍스트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목회를 위해서 성서와 기독교 신앙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만 전한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강단에 예화와 간증이 남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인식도 없고 경험도 없으며, 따라서 그것에 관해 말할 내용도 없고 흥미도 없으며, 대신 목회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목회열정은 물론 높이 평가될 수 있긴 하지만 성서의 세계에 관한 참된 경험이 없을 경우에는 사이비에 떨어질 계기로 작동될 수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귀신을 주장하는 김 아무개 목사, 구원파로 알려진 박 아무개 목사에게 보이는 목회적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아닌가. 성서와 신학의 깊이를 전혀 모르면서 목회 열정만 앞설 때 일어나는 이런 사이비적 현상은 안타깝게도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도 흔히 나타난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을 경험한 참된 설교자이고, 누가 사이비 설교자인가?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한 신학적 논쟁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 사이에도 참과 거짓의 논쟁이 심각했으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참 설교자와 거짓 설교자의 논쟁이 적지 않았다. 거짓 설교자들도 스스로는 참된 설교자라도 생각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사이비 시인의 시가 아무리 현란한 시어로 장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교언영색에 불과하며, 아마추어 작곡가의 곡이 아무리 화려한 장식음으로 치장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소리이듯이 사이비 설교자의 설교도 아무리 신앙적인 용어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숨기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작품은 문학평론가가 가려내듯이 설교도 역시 나름으로 기독교 신앙의 전문가라 할 신학자가 가려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사이비 설교자라는 말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필자는 이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을 무조건 나쁘게 사용한 게 아니다. 참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은 걸 사이비라고 한다면, 사이비라고 해서 총체적으로 잘못된 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완전한 정통과 완전한 사이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설교자에게 걸쳐 있다. 어느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대개의 설교자는 이 두 요소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거나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가능한대로 우리의 설교행위에서 사이비적인 요소를 줄어나가려고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노력은 지난 2천년 교회 역사를 바르게 배우는 것이다. 그 역사는 곧 신학이다. 신학적으로 아마추어에 머물지 말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이비성을 덜어내는 게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신학무용론이 지배하고 있다. 이 말은 곧 한국교회가 사이비성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신학(또는 신앙)의 전문성과 아마추어리즘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성서텍스트를 전문적으로 해석해야 할 설교자들에게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성서 텍스트의 해석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바둑을 예로 드는 걸 이해 바란다.

성서와 기보

오래 전에 필자는 바둑 티브에서 “프로에게 도전한다”는 프로그램을 몇 번 시청한 적이 있다. 이것은 아마추어 바둑 기사가 석 점 내지 다섯 점을 깔고 프로기사와 접바둑을 두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바둑인데, 깔아놓는 바둑 숫자에 따라서 아마추어의 단수가 달라진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다섯 점을 깔면 아마추어 3단, 네 점을 깔면 4단, 세 점을 깔면 5단 정도의 실력이다. 이런 바둑의 초반 형세는 대개 도전자인 아마추어들의 절대적인 우세로 진행되다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오히려 프로 기사들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아마추어기사들이 좋은 전세를 망치는 이유는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발전해나가는 중반과 종반에 이르러 정확한 수읽기를 놓치고 거듭해서 완착이나 패착을 두기 때문이다. 설교자들도 이런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처럼 세계, 인간, 하나님의 깊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의 고수인 성서 기자들과의 영적인 대화(게임)라 할 수 있는 한편의 설교에서 완착이나 심지어는 패착을 두는 일이 흔하게 벌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형식의 대국에는 당사자 두 사람만이 아니라 옆에서 해설하는 사람이 큰 역할을 한다. 프로기사와 아마추어기사의 대국이 갖는 특수한 상황을 시청자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는 이 해설자는 그 자리에서 대국하는 프로기사와는 대등한 수준이고, 그에게 도전하는 아마추어 기사보다는 훨씬 윗길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은 이 해설자가 프로기사의 착점은 거의 정확하게 미리 맞추는데 반해서 아마추어의 착점은 놓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아마추어기사가 최선의 길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 장면에서 해설자는 프로기사가 어떻게 아마추어를 요리하는지, 또는 아마추어기사의 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설명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바둑의 묘미를 제공한다. 만약 이 해설자가 프로 기사가 아니라 아마추어기사라고 하다면 이 대국을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프로에게 도전하는 아마추어의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설교자의 역할도 영적인 세계의 최고수인 성서와 거기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청중들 사이에서 정확한 수를 읽고 해설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성서의 바른 길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청중들의 완착과 패착을 교정하는 일이 곧 설교자의 작업이라는 말이다. 이런 일을 무리 없이 감당하려면 설교자는 바둑의 프로기사들처럼 성서와 신학의 고수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바둑의 프로기사와 아마추어기사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일까? 간혹 동네바둑에서 힘 꽤나 쓰는 아마추어기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특히 하수를 농락하는 요령과 재주가 탁월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프로기사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올린다. 그들이 하수들에게 자주 사용하는 수를 꼼수라 한다. 꼼수는 정석과 달리 상대방이 실수 할 경우에만 통하는 수이기 때문에 프로기사에게는 결코 통할 수 없지만 동네바둑에는 제법 통한다. 바둑의 전문기사들은 돌을 던지면 던졌지 이런 꼼수는 절대 두지 않는다. 그만큼 바둑의 도(道)에 투철하다는 뜻이리라.
동네 바둑에서 꼼수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경우이다. 하나는 당사자가 바둑의 길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거나, 다른 하나는 바둑의 길을 가기보다는 승부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경우는 겹치는 게 일반적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바둑의 깊은 수를 읽을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아는 수 안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속아주기를 기대하는 수는 두지 않는다.
목회와 설교에서 꼼수가 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순진한 탓인지 꼼수에 잘 걸려든다. 그 내용은 필자가 여기서 열거하지 않겠다. 설교자가 자기도 모르게 꼼수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나쁜 경우는 설교자가 성서, 인간, 역사,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태부족인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청중들을 기만하려는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지만 정통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성서텍스트는 기보(棋譜)와 같다. 영성의 고수들이 대국으로 남긴 영적 현실에 관한 기보이다. 설교자들은 그 기보를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기보 해설자와 같다. 프로 기사가 아니면 이 기보를 충분하게 해명해낼 수는 없는 것처럼 성서해석의 전문가가 아니면 우리는 설교자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해석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밟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프로 신학자요, 프로 성서해석자가 되었다는 보장은 없다.
이제 필자는 나름의 시각으로 성서텍스트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길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이 말은 곧 설교자가 성서텍스트와 실질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길을 찾아보겠다는 뜻이다. 과문한 탓인지 필자는 이런 작업이 한국 신학계와 목회 현장에서 시도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물론 개인 신학자나 교단 차원에서 설교자를 위한 핸드북 유의 책자가 발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며, 필자 자신도 권두 논문으로 몇 해에 걸쳐서 참여하고 있는 <예배와 강단>의 성서일과를 참고해서 설교한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설교를 위한 정보 제공에 불과하지 성서텍스트를 심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이고 신학적인 사유를 열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자료들이 기독교 신앙의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해는 마시라. 성서텍스트를 바라보는 필자의 관점에 최선이라거나 무조건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목회의 실용적 차원에서는 별로 효능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영적인 깊이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다만 필자는 이 작업을 통해서 성서텍스트가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과 그래서 그것은 창조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뿐이다. 아래의 예는 필자가 시무하는 샘터교회의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중에서 몇 편을 뽑은 것이다.

1.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박국2:1-4)
-믿음 만능론의 극복-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께서 어떻게 대답하실 지를 기다려 보겠다. 주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박국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1:1-4절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외면하는 게 아닌가, 하고 예언을 시작한다. 이제 2:1절에서 그는 자신의 호소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망대 위에서 지켜보겠다고 말한다.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이 본문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설교하는가? 이 본문의 중심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 중심 메시지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마지막 절에 나온 의인, 믿음, 삶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특히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 만능론이나 믿음 절대론에 기울어진다면 그는 본문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되게 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했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 경험이라 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고 외치셨다. 믿음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위의 본문에서 이 믿음은 독립적으로가 아니라 ‘삶’과 연관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설교 후반부에서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이 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첫째, 이것은 세상의 것으로 온전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삶의 조건은 늘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의인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생명(삶)의 능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종합적으로 해명해야만 한다. 아래는 필자의 결론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 같은 삶의 조건에서도 우리는 완전히 절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안일한 삶에만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리의 모든 삶을 걸어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유기를 경험한 예수님을,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시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는 다른 게 아니라 이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아멘.(2007년 10월14일)

2. 불의한 정치기의 비유에 관해서 (눅 16:1-13)
-종말론적 시각-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는 청지기를 하나 두었다. 이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고발이 들어와서, 주인이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 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중략>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 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중략>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많은 설교자들과 성서학자들이 이 본문을 설교 텍스트로 삼을 때 주로 재물 사용에 집중하는 것 같다. 필자가 참고하는 핸드북의 신학자와 설교자도 이 세상의 재물로 이웃을 도우면 우리 자신과 이웃이 모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필자는 이 본문이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사문서를 위조한 이 청지기의 행동에서 기독교적인 경제윤리의 기준을 찾을 수 없다. 이 텍스트의 초점은 이 청지기가 그런 일을, 보기에 따라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동기가 무엇인가에 놓여있다. 그는 자기가 처한 형편에서 최선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기독교인에게 그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처세술이나 윤리적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절박성을 말하는 중이다. 그것을 조금 더 구체화하면 오늘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영혼을 지켜줄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그 순간의 주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맡기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놓아야 할 오늘 본문의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걸 잃을 때 맞아줄 친구에게 온 영혼을 기울였습니다. 그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2007.9.30)

3. 믿음의 완성 (히 11:29-12:2)
-믿음 상대주의, 기독론적 해석-

믿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그렇게 해 보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이레 동안 여리고 성을 도니,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호의로 영접해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중략>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 유명한 믿음장이다. 필자가 참고하는 <예배와 강단>에 샘물교회 박 아무개 목사는 이 본문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교자적인 시련을 서론적으로 잠시 언급한 다음에, 세상을 이기는 그들의 믿음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었다. 둘째,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믿었다. 셋째, 그들은 미래를 실상으로 보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설교자의 관점에 따라서 이 세 가지 항목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런 방식으로 설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서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나열식 설교의 문제점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각 항목의 내용들이 해석학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단지 지시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이다.
필자의 생각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설교자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아니다. 본문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역사적 사실들이 거론되는 동시에 실패한 역사도 똑같이 거론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국의 대중 설교자들이 선전하듯이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주장의 실증적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알아가는 과정의 다양한 흔적들이다. 한국교회 강단이 승리주의에, 그것도 아주 세속적인 승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서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상식적이지도 않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39절에서 분명하게 지적한다. 구약의 영웅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믿음 절대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주의를 지적하는 것인지 모른다. 믿음으로는 그가 말하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한다. 약속된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사건,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 사건이며, 생명 완성이다. 만약 히브리서 11장을 근거로 믿음 절대주의를 설교한다면 그는 성서텍스트를 왜곡한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과대망상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완성된다는 인식이며, 신뢰이며, 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며, 구원받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빌려 여러분에게 다시 권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2007.8.26)

4. 우리는 하나다! (겔 37:15-28)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중략>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우상과 역겨운 것과 온갖 범죄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내가 살 집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한가운데 있을 그 때에야 비로소 세계 만민이,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 것이다.”  

위의 텍스트가 설교본문으로 채택된 주일은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이었다. 동래중앙교회 정 아무개 목사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분단과 대립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신앙의 힘이며, 둘째는 말씀의 힘이고, 셋째는 기도의 힘이다. 앞의 예에서 밝혔듯이 이렇게 단순히 나열하는 설교방식은 성서텍스트의 수박겉핥기에 불과하다. 설교자가 각 항목에 해당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는 했지만 성서본문이 살아난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항목, 즉 신앙과 말씀과 기도는 모든 설교에 해당되는 기독교 신앙의 일반이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처한 삶의 깊이에서 신앙이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한편으로 설교로도 감당하기 힘든 실정인데, 어떻게 세 가지 주제를 한 설교에 담아낸다는 말인지. 그는 남북통일이 절대신앙, 말씀의지, 합심기도로 이루어진다고 설교의 결론을 내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설교는 아니다.
이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보자. 에스겔이 나무 막대를 통한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전하려는 메시지의 중심을 찾으려면 텍스트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한 임금을 세워 다시는 두 민족으로 갈리지 않겠다는 예언을 전한다. 필자는 이 설교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남북이 통일되며, 다시는 갈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 야훼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야훼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텍스트와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에스겔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귀환 이후에도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으며, 결국 히브리어를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모든 삶이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미래가 탄탄하게 되리라는 에스겔의 예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는 예언자들의 관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세상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에스겔은 남북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통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증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에스겔이 예언할 당시에는 아무도 북 이스라엘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150년 전에 멸망했고, 지금은 남 유다의 바벨론 포로 귀환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을 생각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극단적인 반북인사들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통일되어야 우리만 손해라는 반(反)통일세력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듯이 말이다. 또한 북보다는 남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듯이 말이다. 에스겔은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남북의 실질적인 일치를 강조했다. 필자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오늘 제가 남북통일에 관해서 몇 말씀을 드렸지만 그게 설교의 중심은 아닙니다. 본문 28b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야훼 하나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된다는 사실이 설교의 중심입니다. 남북통일은 그것을 위한 수단입니다. 60년 이상 남북으로 갈라진 한민족이 통일을 이루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당장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에스겔처럼 그런 영적인 통찰력을 놓치지 않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쏟아지는 햇빛처럼, 마른땅을 적시는 비처럼 생명 충만하게 될 날을 향해서 나갑시다. 이미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셨다는 믿음으로 나갑시다. 남과 북은 하나입니다.(2007.8.12)

5.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갈 6:7-16)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중략>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중략>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연세대 노태성 교수는 이 텍스트를 주석하면서 “믿는 자의 행함은 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필수조건이다. 행함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주일에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그만이라는 태도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 7절을 패러디해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네 스스로 잘 알지 않는가! 네가 일주일 생활 내내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는 말로 설교 방향을 제시했다. 여기에 근거해서 경동제일교회 이 아무개 목사는 하나님이 율법과 은혜라는 두 가지 원칙으로 세상을 섭리한다고 설교의 문을 연 뒤, 오늘 본문인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에서 세 가지 원리를 전해준다고 설명했다. 첫째,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는 자연계에도 적용된다. 둘째, 그것은 인간계에도 적용된다. 셋째, 그 원리는 믿음의 세계, 영계에도 적용된다. 필자가 보기에 신학자나 설교자 모두 본문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원칙적으로 교회 안의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이며, 갈라디아 지역 공동체를 향한 강력한 책망이다. 갈라디아서 5장이 보도하고 있는 육체적인 삶과 성령에 속한 삶에 근거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율법과 복음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주장하는 것은 본문의 오해다. 그런 행함은 이미 그 당시의 로마, 헬라철학이 말하는 삶의 가치들과 중복되는 것이지 반드시 복음 공동체의 독특한 삶의 특징들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거부하고 복음에 집중하는 교회 공동체에도 보편적인 삶의 가치들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편지를 참고한다고 하더라도, 루터는 그것을 쓰레기 같은 문서라고 했지만,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야 할 설교자는 갈라디아서가 놓여 있는 매우 위태로운 삶의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공동체에 개입해서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이들과 적절하게 타협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철저하게 율법을 밀어내는 바울의 신학적 투쟁으로 인해서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질 위기로부터 벗어나 참된 복음의 교회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을 촘촘히 살피지 않은 채 본문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신앙적 교훈만을 제시하게 되면 그 설교는 청중들의 영혼을 살리지 못한다. 죽인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잠들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필자는 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교의 물꼬를 텄다.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넘어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그들이 왜 이단으로 빠졌나, 하는 질문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주의자는 유대교인들이 아니라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열두 사도와 예수의 동생들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들이 바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주류였다. 이들은 바울이 설립한 교회에 방문해서 오직 예수‘만’이 아니라 율법도 ‘함께’를 외쳤다. 이들의 외침에 바울이 설립한 갈라디아 지역의 공동체가 넘어간 이유는 교회 안에 일어난 부도덕한 행위들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런 약점을 공격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부도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들의 공격에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었던 갈라디아 교우들 중에서 율법과 할례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율법적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율법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율법, 또는 율법주의에 의해서 희생당했는데, 이제 어찌 해서 다시 율법과 타협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바울의 생각이 그 당시에는 비주류이며 소수였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 소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와 헬라 지역으로 밀려났다. 드로아에서 본 환상이 바로 그것을 말한다.(행 16:6절 이하) 필자는 여기서 율법과 복음의 교리사적이고 신학적인 논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종교적인 율법과 도덕적인 율법이 복음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율법주의, 기복주의, 도덕주의로 인해서 복음이 질식하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지금 본문에서 이런 율법주의와 투쟁하는 중이다. 종교적인, 세속적인 모든 업적주의와 단절하고, 고유한 복음 공동체를 지향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주 과격한 태도를 취했던 바울 덕분으로 오늘 우리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라는 전통이 온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경험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세상의 업적의(義)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자유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주어지는 그 자유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런 성령의 자유를 맛본 사람은 결코 낙심하는 법 없이 꾸준히 선을 행합니다.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의미가 있으며,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사람을 파괴하지 않고 살립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만이 나의 자랑입니다. 아멘.(2007.7.15)  

6. 수근대는 사람들 (눅 19:1-9)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서, 그 곳을 지나가고 계셨다. 그런데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중략>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하였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유명한 삭개오 이야기이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에서 삭개오를 설교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었지만 용기를 내서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용기를 내고, 예수님을 집에 모셔야 한다는 설교도 없지 않다. 더 많은 설교자들은 삭개오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수를 영접하면 자기의 재산을 내놓게 된다고 말이다. 필자는 그것이 이 본문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기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예수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역할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예수와의 관계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 전승에서 삭개오가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지만 성서기자가 정작 말하고 싶은 대상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걸 보고 수군거린 사람들이다. 삭개오의 자선 행위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수군거린 사람들의 태도와 대비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서기자는 예수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필자는 이 설교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핵심은 “구원이 임했다”와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두 진술입니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예상에 완전히 빗나가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원래 유대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구원은 세리 같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같은 의인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인자는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만을 구원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구원을 규정하던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은 늘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을 깹니다. 우리는 높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낮은 자가 높아집니다.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정말 이상한 현상들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자기 마음을 연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즉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 앞에서, 즉 삭개오 같은 죄인들에게 내린 은총 앞에서 수군대지 않습니다.(2003년 6월)  

7. 잃은 어린양의 비유(눅 15:1-7)

이 대목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설교를 대상으로 삼았다. 2007년 10월7일 누가복음 연속설교의 한 대목인 “하늘의 큰 기쁨을 회복합시다.”라는 설교에서 오 목사는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하다는 본문 7절 말씀을 잘 따라잡았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편견을 지적했으며,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찾아내는 목자의 마음을 강조했고, 오늘 신자들도 이런 하늘의 기쁨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설교였으며, 또한 아주 일반적인 설교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설교에서도 여전히 성서읽기의 한계가 드러난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에 관한 본문이 사랑의교회가 펼치는 새생명전도집회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잃은 양이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일반적으로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문의 관점에서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설교자는 일단 성서본문을 해석하기 이전에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본문에서 잃은 양을 찾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의 일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잃은 양이 누군지도 모르며, 따라서 그들을 찾을 능력도 없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바로 잃은 양이다. 복음서 기자는 지금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중이지 전도하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왕 잃은 양을 언급하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이 사회에서 소외된 마이너리티가 누구인지,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종교적 전제나 세계관과 대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에 관한 비유를 오늘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에 필요한 하나의 수단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성서읽기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위에서 필자는 일곱 편의 설교에 해당되는 본문을 예로 들어서 성서 텍스트 톺아보기를 시도했다. 성서와 깊은 대화를 나누자는 말이다. 모든 성서텍스트는 우리에게 영적으로 새로운 말을 걸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 성서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포착해야 한다. 2) 독자들의 입장을 고려한다. 3) 텍스트로부터 듣기만 하지 말고 질문해야 한다. 질문이 정확하게 주어져야만 대답을 찾을 수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다. 4) 텍스트의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텍스트의 은폐성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성서텍스트는 저자가 미처 알지 못한 세계까지 은폐의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후대의 해석자가 그걸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모든 작업이 결국은 성서텍스트의 심층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해석능력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게 마지막 질문이다. 필자의 생각에 설교자들에게 세 가지 공부가 필요하다. 성서텍스트의 역사비평, 인문학 공부, 조직신학적 통찰이 그것이다. 해석은 본문과 독자 사이의 지평이 융해되는 사건이라는 가다머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비평은 본문 지평으로 들어가는 작업이고, 인문학 공부는 오늘 독자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며, 조직신학은 그 사이를 이어주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이 한 설교자의 신학적 사유(영성)에서 건강하게 수행된다면 그는 다른 설교자들이 못 보는 성서텍스트의 영적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텍스트와의 만남에서 큰 기쁨과 자유를 누릴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아포리즘은 설교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007년 10월30일, 기장 광주노회 교육대회, 완도 제일교회당
(2007년 12월6일, 합동 대구중노회, 교육세미나, 신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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