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계시론

정용섭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특히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와 세상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가장 확고한 준거였다. 그 강조점과 적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학적 경향, 예컨대 근본주의신학이나 개혁주의신학은 물론이고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 등 보수적 신학으로 부터 진보적 신학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신학은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 있다. 특히 개신교 신학은 카톨릭 교회의 교회권위 중심적 사고로 부터 말씀 중심적 사고로 신학적 축을 옳긴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적 전통 가운데서 유별날 정도로 말씀을 모든 신학과 신앙의 초석으로 삼아왔다. 말하자면 기독교 교리가 진리인 것은 말씀이 그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말씀 실증주의적 전통은 칼 바르트에게서 완벽한 체계를 갖추게 되어 소위 <말씀신학>이란 용어로 규정되었다.
비록 말씀신학이 개신교 신학의 전통이며, 또한 나름대로의 해석학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의 세계경험은 말씀의 자체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새로운 물리학의 전개, 비서구적 세계관, 비기독교적 종교의 현실은 기독교가 더 이상 말씀 중심적으로 자신을 변증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기독교 신학의 말씀 중심적 사고로 부터 전환코자 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의도가 말씀의 중요성을 축소시키자는 게 아니라 말씀을 말씀 자체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보편적 사실성의 지평으로 부터 회복하자는 말이다. 이 논문은 판넨베르크가 계시와 역사의 개념화를 통해서 말씀신학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을 밝히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작업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말씀신학으로 부터 역사신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다원중심적 시대정신 앞에서 기독교 신학이 귀기울여 볼만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주로 그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는데, 만약 기독교적 진리가 세계로 부터 단절된게 아니며, 또한 온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론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세상의 사실적 언어를 통해 기독교적 가르침의 보편적 지평을 찾아보고자 하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은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기독교적 답변을 폭넓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Ⅰ. 현대신학에 있어서 계시문제

1. 계시문제의 발생과 위기

교리사적으로 볼 때 <계시개념>은 오랫 동안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기 위해서 성서론적 신학의 틀(Sola Scriptura)을 강조하였지만 계시문제 자체를 신학적 현안으로 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도 여전히 수직적이고 권위적 영감론에 의해 말씀계시를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이라는 새로운 주관주의적 인식론이 제기되므로써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교회의 절대적 교리와 전통들 까지도 심각하게 비판받기 시작했다. 왜 교회의 가르침이 진리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이에 대한 답변을 교회는 계시론적으로 찾았다. 말하자면 교회가 선포하는 가르침의 진리론적 근거를 계시론에 찾게 되므로써 기독교 신학의 계시론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회의적 사상은 기독교로 하여금 중세기의 권위주의적 사유로 부터 합리적 사유로 전환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Cogito>는 계몽주의를 통과하면서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데카르트가 <코기토> 명제를 통해 주관주의적 인식방법론의 길을 터 놓았다면, 칸트는 인간의 인식을 순수이성비판의 구도 속에서 구성하므로써 선험적, 혹은 형이상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신증명을 거부하고,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로서 도덕과 윤리의 보편적 지평에서 신존재의 당위를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칸트의 사유에 의해 계시론의 근거가 아주 위험스럽게 되었다. 기독교의 권위적 계시근거가 불분명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헤겔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나 칸트의 이성비판에서 강조되는 주관주의적 세계이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 절대정신인 하나님은 항상 모든 세계에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헤겔의 이러한 세계와 신이해의 특징은 기독교적 하나님 이해를 지나치게 역사철학적으로 전개했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계시론적 근거를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단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쉴라이에르마허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충실한 대변자이며 동시에 이 두 인식방법론을 종합하려한 인물이다. 헤겔이 절대정신과 세계정신의 개념으로 진리파악의 주관성을 지양하고 보편적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했다면, 반대로 쉴라이에르마허는 더욱 철저하게 주관성으로 치우친 학자다. 종교의 본질을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이며 감정(Anschauung und Gefühl)”이라고 주장한 그에 의하면 계시론이 또 다시 주관주의적 한계 안에 머무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쉴라이에르마허로 부터 리츨, 그리고 하르낙과 헤어만(W. Herrmann)과 트릴취에 이르기 까지 독일어권의 개신교 신학은 신학의 황금기로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당시 정신사적이고 문화사적인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근거를 인간과 그 인간의 종교경험으로 부터 시작해서 그 인간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초월적 성격으로 이해되고 있던 계시론은 신학적 관심으로 부터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2. 계시논쟁의 확장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키 위해 <중간시대>(Zwischen den Zeiten)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신학적 소신을 피력한 변증법 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계시하는 하나님의 <주되심>(Herrlichkeit)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그들에 의해서 계시론은 신학의 프로레고메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들 중에 세 사람을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자.
바르트와 신학적 노선을 구별지을 수 있는 대표적 신학자는 브룬너와 불트만이라 할 수 있다. 브룬너는 자연신학 논쟁을 통하여 바르트와의 간격을 좁힐 없게 되었다. 부룬너는1934년에 <은총과 자연>(Gnade und Natur) 출판을 계기로 바르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계시신학을 배척한다. 부룬너는 자연과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송두리채 거부하므로써 결과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상응하는 창조와 보존은총의 관점을 놓쳐 버리는 바르트의 극단적 그리스도 일원론을 반대한다.
한편 불트만은 초기에 분명히 칼 바르트와 같은 입장에서, 신앙은 계시를 통해 선포된 말씀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브룬너와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계시실증주의적, 성서객관주의적 신학에 끝까지 동의할 수는 없었다.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한 개인의 실존적 관점에서 케리그마적인 예수가 되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이 불트만의 신학적 과업이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면이었든지, 아니면 부정적인 면이었든지 칼 바르트 만큼 <말씀의 신학>을 줄곧 자신의 신학적 구도에 맞도록 이끌어간 신학자도 없다. 그는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계시와 하나님 말씀을 모든 신학적 사고와 판단의 준거로 삼았다. 여기에 바로 20세기 전반부 신학 논의를 주도한,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 까지 현대의 신학적 대부로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적 특성이 놓여 있다. 그의 신학적 기본 골격은 계시와 말씀의 이중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그의 신학적 사고의 전제이며 뿌리이다. 발타자르가 바르트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말씀과 신앙의 관계> 라고 일컫고 있는 것 처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교적 대답을 찾고자 한다. 바르트 신학의 모든 구조가 하나님 말씀에 집중되고 있듯이, 계시도 역시 하나님 말씀 안에 놓여 있다. 즉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알리신다. 그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바르트의 이러한 말씀 중심적 계시이해가 전체 개신교 신학을 주도했으며, 사실은 지금도 그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3. 계시이해의 새로운 지평

사실상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루돌프 불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 등은 세계 양차대전 사이와 직후 까지도 개신교 신학 전반에 걸쳐 거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혹은 이들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의 신학계에서는 헬무트 골비쩌(H. Golwitzer)나 허버트 브라운(H. Braun), 에른스트 푹스(E. Fuchs),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ling), 하인리히 오트(H. Ott) 등이 많은 신학적 논의를 연장시켰다. 그러나 가장 강력하고 새로운 신학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60년 대 부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독일어권에서는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이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그리고 북미에서는 <세속신학>과 <사신신학>이, 또한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사회와 역사의 새로운 정황 가운데서 싹트게 되었다.
이처럼 1960년대는 그리스도 교회와 신학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자연과학의 비약적 발전과 민족주의의 팽창, 그리고 세속화의 가속화로 인하여 밀려드는 새로운 역사의식과 세계이해에 적응하기 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몸부림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것은 개신교나 로마 카톨릭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문제였다. 그 당시 여러 신학운동이나 교회운동이 서로 다른 해석학적 바탕을 갖고 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일치되는 점은 전후시대에 전혀 새로운 세계질서와 세계경험을 나름대로 신학함의 동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신학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의미에 대한 집중적인 사유만으로 그 진리됨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쉬비츠와 같은 극한의 경험 이후에 교회가 하나님을 초월과 내재로서, 주객도식으로서, 혹은 실존적 개념이나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절대타자의 하나님이나, 혹은 실존으로 내재화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으로 현대인들에게 답변을 줄 수 없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직면한 기독교 신학은 <역사>를 신학의 핵심적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역사와 그 미래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신학화 한 대표적인 신학자는 독일어권에서 볼 때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잘 알려진대로 1964년 <희망의 신학>이란 저서를 통해 사신신학의 에피소드를 제거하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종말론적 희망을 다시 신학의 무대로 올려 놓았다.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절망 가운데 빠져있던 이들에게 <희망의 원리>로 각성시킨 것에서 신학적 통찰을 얻어 <희망의 신학>을 통하여 변증법 신학 이후로 표류하던 신학의 흐름을 형이상학적 지평으로 부터 역사적 지평으로 변경시키므로써, 종말론을 대우주 파괴의 끝으로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으로 해석한다.
한편 판넨베르크는 몰트만과 같이 역사문제를 신학적 주제로 삼고 있지만, 역사를 약속개념에 의존시키는 몰트만과 달리 오히려 성서적 계시표상을 역사개념에 의존시킨다. 그는 관념주의적 독일 철학과 신학의 전통에 그 바탕을 두고 세계와 우주를 종말론적인 각도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므로써 계시를 말씀론으로 부터 해방시키며 보편사 개념 안에서 찾고자 시도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교의인 계시를 현대적 역사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라는 명제에서 보여 주듯이 계시와 역사를 등위시키는 작업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역사를 통한 간접적 하나님의 자기계시” 에 대한 생각이 기본사고의 틀로서, 판넨베르크는 1959년에 이미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라고 자신의 신학적 성격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논의는 역사를 신학이 보편적 지평에 참여하기 위한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시키므로써 역사와 계시관계를 첨예하게 만들었다. 신학의 말씀구조를 역사구조로 변경하므로써 신학의 틀을 본질적으로 새롭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거의 숙명적으로 묶여 있다고 보여지는 기독교와 말씀 관계를 기독교와 역사 관계로 재구성하려는 판넨베르크의 시도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 시도에 대한 평가가 바로 이 논문의 핵심이다.

Ⅱ. 보편사적 해석학

여기서 다룰 문제는 판넨베르크의 신학 안에 어떤 해석학적 내용이 특징적으로 놓여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모든 신학이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각기의 해석학적 구도를 갖고 있긴 하지만, 판넨베르크의 경우에는 신학을 근본적으로 해석학적 학문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의 해석학적 작업의 검토는 필수적이다. 그는 쉴라이에르마허, 딜타이, 하이덱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푹스나 에벨링에 이르는 해석학적 전통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있지만 <보편사적 해석학>이라는 신학적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시(開示)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보편사적 해석학에는 이 논문이 관심을 갖고 있는 보편사적 계시론의 단초가 놓여 있다.

1. 실존론적, 언어사건적 해석학의 지양
판넨베르크는 소위 <실존론적 해석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실존론적 해석학은 역사를 현재적 실존으로 용해시켜 버림으로써 참된 현실성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을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 같은 이들과 동일 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실존신학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불트만은 인간현존의 질문성(die Fraglichkeit)을 <전승된 본문>에 대해 질문하는 전제로서 생각하여 그것을 인간존재와 자기 자명성의 가능성으로 고양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쉴라이에르마허의 뒤를 잇고 있는 딜타이의 <정신적 해석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정신적 해석학에서 처럼,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은 과거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찾음에 있어서 전승된 본문에 표현된 인간에 대한 질문 안으로 축소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정신적이고 실존적인 해석학은 사실의 역사로 부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만을 고려하므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세계와 역사에 대한 진술을 <인간 실존이해> 안에서만 파악될 수 밖에 없었다.
판넨베르크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불트만, 그리고 푹스와 에벨링에 이르는 일련의 신학적 해석학의 기도를 정신적, 실존적,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해석학적 전통에 의하면 본문과 사건의 당시적인 특수성이 현재적 실존성으로 상실되고 만다고 비판한다. 그는 참된 이해는 과거의 사건과 본문이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실존으로 녹아드는 과정이 아니라, 당시적인 것(Damals)이 그대로 보존되어 해석자가 경험하는 지평과 선입견 없이 만나게 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판넨베르크가 실존적 해석학을 인간학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본문과 당시의 사건이 현재적 실존으로 용해되어 버리지 않아야만 참된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개개 실존으로서의 인간이 과연 과거의 사건을 얼마나 있는 사실로서 만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실존성으로 떨어지게 만든 실존적 해석학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최소한 말씀 객관주의에 서 있지도 못하고, 주로 실존적 해석학에 근거하고 있다. 신앙을 개인의 경험에 의존시킨다는 말이다. 이른바 간증이란 게 개인의 경험을 신앙의 기준으로 규정하는 것인데, 그 경험이란 것도 매우 특수한 사건으로서의 경험을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위험스럽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기준으로 한다고 하면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실존적이고 인간적 협착에 떨어져 버리곤 한다. 이런 점에서 객관적 사실성을 해석학적 촛점으로 높히려는 판넨베르크의 생각은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보편사적 해석학으로의 정향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해석학은 보편사적(Universalgeschichte) 특징을 갖고 있는데, 판넨베르크가 제기하고 있는 보편사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의 계시론적 구성이 갖고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체 신학에 대한 전망도 분명해 질 수 있다. 그는 실존적, 혹은 언어 사건으로서의 해석학을 극복하고 해석학의 보편사적 지형을 열어보이기 위하여 가다머(H-G. Gadamer)가 해석학적 사건을 새롭게 구성한 <지평융해>(Horizontverschmelzung) 개념을 채용하고 있다. 가다머는 과거 지평과 현재 지평이 온전히 보존될 때 지평적 거리가 융해되며, 따라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이 열린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판넨베르크는 일단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여 과거지평을 현재적 실존지평으로 용해시켜 버리는 실존주의적 해석학의 지양코자 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된 해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통시적으로 연결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게 보편사적 지평이다. “본문은 당시적인 것을 현재와 묶는 전체역사의 연관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더구나 오늘 손 안에 있는 것과의 연관만이 아니라 현재적 가능성이 갖고 있는 미래 지평과의 연관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현재의 의미는 미래의 불빛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라는 판넨베르크의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보편사적 사고에서 실재의 진리는 현재적 실재지평<Sachhorizont>에서 만이 아니라 현재가 지향하는 미래지평으로 끌고 가는 것이 해석학적 요청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여기에 판넨베르크이 전체 역사를 기독교의 종말론적 전망으로 구성하려는 특성이 놓여 있다. 물론 전승된 본문의 현재에 대한 요청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동시에 오늘의 의미를 획득하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가다머가 강조한 대로 전승된 것이 현재적 관점에서 언어적으로 적용되며 그 현실성이 획득되려면 미래지평을 포괄하는 보편사에서 전망되어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은 쉴라이에르마허로 부터 이해의 기술로서 취급된 해석학적 신학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말씀의 해석학과 실존적 해석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본문과 해석자의 지평이 현재적 실존으로 해소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격이 고유하게 보존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전승사 개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단일성 안에서 보고자 하는 이 전승사 개념은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전체역사 사고인 보편사에서 확장되어 그의 역사신학설계를 구성하는데 기여한다. 이 보편사 개념은 본문과 현재의 지평이 미래의 지평과 더불어 전체 역사적 전망을 통해서 참된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계몽주의 이후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현대신학이 보편사적 지평을 소홀히 하고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전통의 소리만 스테레오타입으로 확산시키려 한다면 그것의 진리성은 큰 위기에 봉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보편사적 지평은 구원사만을 하나님의 역사로 말하지 않고 전체 역사를 말한다. 이 전체 역사는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거나 현재적 실존성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간다. 따라서 오늘의 신학은 개방된 미래를 지향하며 현실을 직시하고, 성서가 증거하고 표상하고 있는 종말론적 지평에서 이 세계를 해석하고 주변의 모든 학문과 보편적 대화를 엮어가야 한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 가운데서 그의 계시론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교회의 권위나 말씀의 권위가 아니라 위에서 짧게 언급된 바 있는 보편사적 지평에서 그 진리성이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 고찰을 전제하고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계시론이 어떠한 조직신학적 구조와 내용을 갖고 있는지 고찰해 보도록 하자.

Ⅲ. 역사신학적 계시설계의 내적 구조

1. 자연신학적 신(神)이해와 역사계시

판넨베르크는 초대교회가 철학적 신개념을 수용했다는 사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기독교적 신이해를 보편적이고 자연신학적 관점에서 시도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신사고(神思考)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이미 1959년에 <초대교회의 교의학적 문제로서 철학적 신개념 수용>이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형이상학적이며 철학적 신사고를 분명히 했을 뿐만 아니라, 1988년 그의 <조직신학> 1권에서도 이러한 철학적 신사고를 유지하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할 이유와 근거를 갖지 못한 채 단순히 종교경험의 영역에서만, 혹은 인간의 실존이나 성서나 언어성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시도를 거부하고, 초대교회가 이미 선택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신이해 가운데서, 이는 곧 자연신학적 하나님 이해인데,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 세상의 현실성 안에서 전달하고자 한다.
칼 바르트의 영향 때문이기도 한데, 일반적으로 개신교 신학은 자연신학(혹은 자연계시)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단죄해 왔다. 자연신학의 왜곡된 이해를 바로 잡기 위하여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이해>를 자연신학의 현상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초기 개신교 교의학은 theologia naturalis 라는 개념 밑에서, 피조물인 인간의 고유한 하나님 이해(cognitio insita)와 철학적 신인식이라 할 수 있는 습득된 하나님 이해(cognitio acquisita)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인식에 대한 가능성, 즉 철학자들이 논의하고 발전시킨 인간론적 신론을 바로 자연신학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당연히 자연신학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신학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적 하나님 이해란 하나님이 본질상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지 인간이 존재유비 등을 통해 습득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cognitio insita와 cognitio acquisita를 구분해야만 정당한 자연신학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자연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고유한 이해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신학으로서, 이러한 관점은 결국 인간의 신인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상 자기알림이라는 계시론에 관련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판넨베르크의 자연신학적 신이해를 자유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은 큰 오해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다는 계시론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한다.


2. 자기계시 개념과 계시의 간접성 문제

앞서 본대로 자연적 하나님 이해는 기본적으로 계시론적 구도이다. 인간의 신인식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자연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의 양식을 갖는다. 이 사실을 판넨베르크는 초기부터 강조한 바 있다. 이 자기계시개념이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개념을 구성하는 핵심적 개념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성서 안에 상이한 계시이해가 서로 다른 계시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컨대 표명(Manifestation)과 영감(Inspiration), 행위계시(Tatoffenbarung)와 말씀계시(Wortoffenbarung), 원계시(Uroffenbarung)와 구원계시(Heilsoffenbarung) 등이 그것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나 자연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이한 계시표상에서 일치되고 있는 것은 “계시는 본질상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행위가 일치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구분하였다. 하나님의 존재가 어딘가에 있고 그에 의해서 그의 뜻이 드러나는 걸 계시라고 본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계시를 보다 엄격하게 이해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은 계시에 근거하며, 계시는 하나님의 본질이 노출되는 것이다. 본질의 드러남이 아닌 그 어떤 매개물을 계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 엄격한 의미에서 계시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개념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계시개념은 계시의 <간접성>이다. 성서의 계시표상이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표명이라 했는데, 이러한 계시표상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간접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서나 이 세계,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 없다는 판넨베르크의 기본적인 통찰로 부터 하나님의 자기증명인 세상과 역사에 드러나는 자기계시의 간접성이 논증되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 계시의 간접성을 포괄할 수 있는 범주가 바로 역사이다. 계시의 간접성이 뜻하는 바는 그것의 <종말론적 성격>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직접적으로 역사 안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자기를 알리고 있다는 성서적 계시표상을 전제할 때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알림은 결국 종말론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종말에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현재로서는 간접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계시의 표식은 미래로 열려 있는 시간의 종국성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역사가 하나님을 직접 계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3. 역사계시의 삼위일체론적 근거

역사로서의 계시이해에 그 사유의 바탕을 두고 있는 판넨베르크는 그의 독특한 삼위일체론 해석을 통해 역사계시의 신학적 근거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밝혀 보려는 것은 그의 전체 신학구도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역사 사이의 연관문제이다. 이것은 성서적 전통의 하나님 이해와 역사의 현실성이 어떻게 조직신학적 구도로 묶여질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신이해 만이 아니라 전체 신학적 구도와 내용을 결정짓는 주제이기 때문에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 해석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역사신학적 계시설계의 가장 핵심적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된다.
판넨베르크의 역사이해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해석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그의 기본적 통찰인 삼위일체론적 신표상(Gottesvorstellung)이 어떤 특징으로 세상, 역사와 관련을 갖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무엇 보다도 판넨베르크는 몰트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를 하나의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유신론적 사고를 지양하므로써 참된 현실성에 근거한 하나님 이해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바탕에서 삼위일체론적 신이해가 시작할 뿐만 아니라 고유한 기독교적 신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계시 설계를 위한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적 해석은 세 가지 구조 가운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첫째,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 논의를 예수의 선포와 행위에서 시작한다. 둘째, 그의 삼위일체론 안에 자기구별(Selbstdifferenzierung) 개념이 특징적으로 등장한다. 셋째, 그는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e Trinitätslehre)과 경륜적 삼위일체론(ökonomische Trinitätslehre)을 상호적 관계 속에서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중에 두번 째와 세번 째 문제를 보충해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판넨베르크가 역사신학 설계의 삼위일체론적 근거를 어떻게 제공하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자기구별> 개념에 대한 각별한 유념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독일의 관념주의로 부터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헤겔과의 관련 속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헤겔 이전의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자존적인 생명이 이 세상과 역사 가운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관계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헤겔의 도움으로 이러한 전통적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구별>이다.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주장되었듯이 영원한 하나님이 아들과 성령에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영원한 신성이 그 자체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의 역할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을 <상호 자기-구별>(mutual self- differentiation)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본질적 삼위일체 표상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이 너무도 완벽하게 보장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해 자존적으로 영원히 존재할 뿐이었다. 이에 반해 판넨베르크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 상호의존적으로 그 단일성과 신성을 획득하게 되는 삼위일체론적 자기 구별화를 통해 역사의 하나님이 증거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증거하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로 부터 신성이 확보된다. 아들은 증거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이로써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들어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판넨베르크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개념을 통하여 세계를 하나님의 역사로서 증언코자 하는 그의 신학적 구도를 이해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세상의 경륜과 관계 없는 내재적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는 분일 수 없다. 그의 전체 신학적 구도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도 역시 하나님과 세상(역사)과의 연결이 중심적 과제이다.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내재적인 이해와 경륜적 이해를 분리하지 않고 상호적으로 본다. 아버지, 아들,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영원한 신성의 본질에서만 자신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역사에서 삼위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참된 내재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된다. 동시에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그 내재적 성격을 상실하지 않고 상호적으로 기능한다. 결국 그의 삼위일체론 이해는 영원한 하나님과 역사적 하나님의 상호적 관계성 가운데서 증거되는 신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을 확인하므로써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역사와의 관계가 아니고서는 예수 안에 계시하는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참된 하나님이 아니며, 세계의 창조자도 아니고, 그 구원의 미래도 아닐지 모른다(wäre).”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역사계시 설계 안에서 정당한 표현일 것이다.

4. 계시의 선취구조 - 예수의 부활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이 기독교 신학으로서 검증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직 한 가지 남아 있는데, 이는 곧 계시의 기독론적 기초이다. 말하자면 그의 보편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계시이해가 어떻게 예수의 구원사건과 관련을 맺느냐에 관한 문제이며, 동시에 미래적 계시가 현재의 하나님 나라 경험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판넨베르크는 전체역사를 하나님의 참된 계시로 설계하려는 자신의 구상이 예수계시를 통해만 온전히 해결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는 그의 관념주의적 역사이해의 동기가 어떻게 유대적 전통과 결합될 수 있는가의 관련성 속에서 해결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선취> 개념이다.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내는 보편적 계시는 모든 종말이 그의 운명 안에서 예기적(vorweg)으로 발생하는 한 그 계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나사렛 예수의 운명에서 비로써 실현되었다.”는 그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선취개념의 철저한 적용이야말로 앞으로 그의 계시사고를 고유한 것으로 구별지을 수 있는 핵심적 요소이다.
판넨베르크가 이미 여러 번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역사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며,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예수사건 안에 미리 앞당겨져서 발생했다고 그는 계시의 선취적 성격을 이해한다. 나사렛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는 이 사건이 앞당겨내는(vorwegnehmend), 그리고 선취적인(proleptisch) 성격을 담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미래적인 성격의 계시가 예수사건 안에 현재적으로 앞당겨진 것이기 때문에 계시에 대한 언급은 <보편적 마지막 사건의 선취>에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즉 미래에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자기노출인 이 계시는 미래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사건으로 현재화 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사건은 그의 출현과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 까지 전체 예수의 운명인 바, 마지막에 이루어질 역사적 진리인 계시가 예수를 통해 앞당겨진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예수 사건을 종말론적 선취로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의 부활에 있다. 부활이 계시의 결정적 선취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증거”이다. 어떤 면에서 보편사와 예수부활은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순환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계시의 선취적 성격인 예수의 부활이 단순하게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적인 지평을 실존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역사 지평의 문제이며 <사실>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예수의 부활이 계시로서 불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예수의 부활도 전체로서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예수의 부활이 <미리 당겨내는>(vorwegnahmendes), <선취적>(proleptisch), 또는 <예기적>(antizipatorisch) 성격을 갖는다는 것, 따라서 근본적으로 미래를 향한다는 판넨베르크의 사고는 묵시문학으로 부터 동기화 되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종말적 사건의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그는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역사계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라 할 수 있다. 결국 묵시문학적 전통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은 발생했으며, 이 종말론적 선취인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여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사적 지평을 회복하므로써 세계구원의 종교로 자신을 규정한 셈이다.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라는 묵시문학적 세계이해와 예수의 부활이 상호적으로 하나님 계시의 종말론적 성격과 선취적 성격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때만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설계에, 특히 그가 말하는 예수부활의 사실성에 접근할 수 있다.

Ⅳ. 역사신학적 계시설계의 논점

이제 판넨베르크가 제기한 역사계시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적으로 검토해야 할 차례라고 본다. 앞 장의 끝부분에서 언급했지만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론은 역사를 실증적으로 기독교 신학의 계시론에 적용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계시는 실증적으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이 계시의 개념화가 곧 판넨베르크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이다. 계시개념과 역사개념의 상호 결합 속에서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이 갖고 있는 특성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 Ⅳ장에서 계시개념과 역사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 역사계시의 계시개념

판넨베르크의 계시개념에 대해 말씀신학이 제기한 문제들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 관점으로 집중된다. 이는 성서론과 인식론인데, 계시개념에 있어서 성서의 자리를 어디에 설정하느냐 하는 것과 그 계시의 인식에 있어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더 나아가 성령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이다.
기존의 <말씀-계시> 도식을 <역사-계시> 도식으로 재정립한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 기획은 일단의 말씀신학자들로 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예컨데 쉬타이거(L. Steiger), 클라인(G. Klein), 헤쎄(F. Hesse), 바아(J. Barr), 알트하우스(P. Althaus)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쉬타이거는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에 있어서 문제가 “계시의 말씀성격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바로 앞서 언급한대로 역사계시의 성서론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계시 설계가 말씀의 계시성격을 지나치게 축소 내지 간과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말씀계시의 입장에서 제기한 역사계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비판이며, 또한 양자간에 놓여 있는 가장 첨예한 대립이라고 여겨진다.
말씀신학으로 부터 제기된 논쟁 중의 다른 하나는 판넨베르크의 계시인식에 관한 문제로서 계시를 인식함에 있어서 “신앙이냐, 아니면 이성이냐?”라는 질문이다. “신성의 특별한 나타남과는 달리 역사계시는 볼 눈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 그것은 보편적 성격이다.”라는 판넨베르크의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계시인식에 있어서 전통적 입장과 대립되어 있다. 그에게 계시는 신앙을 가진, 특별히 준비된 이들에게만 열려진 것이 아니라, 볼 눈을 가진 자, 즉 이성의 눈을 가진 모든 자에게 열려지는 보편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판넨베르크는 자신에게 던져진 비판, 즉 신앙을 지성화 했다거나 성령의 역할을 축소했다는 주장에 대해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계시의 인식을 <볼 눈을 가진 자>라는 명제 속에서 설명하는 이유는 성령이 복음에 대한 그 어떤 보충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성령론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일반적인 성령이해를 비판하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성령의 일반적 이해가 경건성의 주관화와 개인화의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잘못된 성령의 이해 때문에 정작 중요한 진리성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게 되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초대교회가 알고 있던 성령이해를 극단적으로 축소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책임을 간과하게 되며, 또한 건강하고 책임성 있는 교회 생활을 간단히 성령에게 일임하게 되므로써 신앙인의 책임이 불분명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오늘의 신앙인들이 이미 성령으로 발생한 계시사건을 이성의 눈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또 다시 성령의 역할에만 의존하게 되는 경향으로 치우치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 판넨베르크가 강조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말씀에 대한 성령의 종속성이다. 말씀을 이해하는 데 다시 성령에 의지한다는 건 말씀계시의 입장에서 볼 때도 모순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성서해석에서 성령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 애초에 성서 형성에서 성령의 역할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신학과 교회가 이렇게 계시이해를 성령에 의존하게 된 이유는 성령을 경건주의와 주관주의 전통 가운에서 해석하므로써 구약성서와 초대교회의 성령이해로 부터 벗어난 데 있다고 그는 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창조 안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역할과 자연신학에 대한 성령론적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써 계실인식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축도했다는 말씀신학으로 부터의 비판을 비껴 가고 있다.
또 다른 비판인, 말씀계시의 축소는 이미 앞서 <자기계시> 개념과 계시의 <간접성> 논의에서 어느 정도 답변이 주어졌다고 보인다. 판넨베르크는 성서 안의 계시표상이 다양하다는 분석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를 간접적으로 노출시키시는데, 그게 바로 역사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직접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말씀신학 계열의 신학자들이 역사신학을 말씀의 결여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판넨베르크가 말씀을 단순히 역사로 대체하려는 건 아니다. 다양한 표상의 성서계시를 규정하려면 말씀 스스로의 권위적 정당성이 아니라 그것의 진리성을 담보할만한 조직적 정밀성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계시개념이며, 이는 곧 역사로서의 계시 명제로 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를 계시라 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신학적 동기를 감안한다면 그의 신학설계가 결국 기독교를 변증하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 기독교 신학이 말씀범주에 안주하거나 머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범주로 자신을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2. 역사계시의 역사개념

앞서 검토한 계시개념은 역사계시기획 안에 말씀계시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이었으며, 이제 다루게 될 역사개념 문제는 판넨베르크의 역사이해가 과연 헬라적 역사개념이나 헤겔의 역사철학으로 부터 구별된 기독교 신학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비판에 대한 대답이다. 판넨베르크의 역사개념에 대한 비판을 두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는 판넨베르크의 역사개념이 헤겔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판넨베르크가 역사계시를 처음으로 세계 신학계에 내보이던 그 초창기에 이미 쉬타이거는 그가 헤겔의 사유를 아무런 반성 없이 수용했다고 비판하였다. 판넨베르크도 자신이 헤겔의 신학적-철학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로 부터 헤겔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이해하고 있는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개념이 역사를 하나님의 절대역사로 생각하는 헤겔의 사고로 부터 완전히 자유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헤겔의 경우 처럼 절대의 논리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로 인하여 가장 확실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버린 프로그람의 진행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요청되는 <개방된> 시간이다. 판넨베르크가 신과 계시이해에 있어서 보편사적 설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헤겔과 연결되고 있지만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보편사는 종말론적으로 열려져 있기 때문에 헤겔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이해하고 보아야 한다.
두번 째로 제기되는 비판은 판넨베르크의 역사개념이 과연 성서적 역사이해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그가 말하는 전승사와 보편사는 결국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역사를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역사를 변혁하고 하나님 나라의 지평으로 지향해야할 선교적 사명을 가져오지 못하고 마는 형이상학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이런 비판은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 등 사회변혁 실천 프로그람을 중요한 신학적 테마로 간주하는 진영으로 부터 불가피하게 저항받을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특히 판넨베르크와 함께 현대신학에 있어서 역사문제를 주제화 하고 있는 몰트만에게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몰트만은 “이것은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삶의 형태가 늙게 되면, 그리고 완성되면 날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올배미의 눈을 가진 하나님 인식이 될지도 모른다.”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의 끝에 가서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고, 열려져 있으며 약속의 행위에 놓여 있는 역사 한 가운데서” 인식된다고 주장한다.
판넨베르크는 몰트만의 약속개념에 대해 그것의 신학적 논리성을 수긍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말씀신학의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몰트만의 비판에 대한 답변은 결국 앞서 논의되었던 계시개념의 정밀성 요청이라는, 바로 역사계시설계의 경쟁될 수 없는 그 타당성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몰트만은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을 한낱 신존신학의 보충으로 보는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말씀신학의 범주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지금 까지 살펴본대로 역사계시의 계시개념에 있어서 말씀성격이 결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역사개념의 보편사적 사고가 기독교적 근거를 충분하게 담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는데, 이 두 질문은 보다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의 핵심적 내용을 갖고 있다. 즉 이는 역사계시설계와 말씀계시와의 치열한 논쟁에 속하는 문제로서 계시가 말씀인지 아니면 역사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원칙적으로 말씀과 역사의 대결구조를 원하지 않는다. 역사계시설계는 말씀을 역사로 대체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말씀을 계시의 진리성에 묶이게 하므로써 기독교 신학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의식의 보편적 지평을 확보하려는 학문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3. 역사계시개념의 자리매김

여기서 제기되는 비평적 대안은 앞서 언급되었던 바아, 클라인, 쉬타이거, 우드, 그리고 몰트만 등이 제기한 판넨베르크 비판을 참고하여 필자가 나름대로 종합한 진술임을 밝혀둔다.

첫째,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계시이해에 따르면 -이는 미래적 존재론인데- 결국 현재로서는 아무런 계시내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비록 예수의 부활을 통한 선취개념으로 종말 계시를 미리 당겨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예수의 부활도 여전히 역사적으로 밖에 진술될 수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계시의 현실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물이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미래를 향해 열려져 있다. 분명히 우리의 경험은 어떤 사물의 완전성과 그 미래의 궁극성을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잠정적일 수 밖에 없긴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므로서 기독교적 계시론이 현재적으로 언급할 아무런 내용도 갖지 못하고 다만 개념을 명백히 하는 작업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둘째, 역사계시가 갖고 있는 미래적 존재론이 극복되기 위하여 말씀계시의 성격이 반드시 요청되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계시가 말씀계시를 극복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계시가 그 역사계시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점을 소홀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구도가 참된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 세계와 역사만이 아니라 여전히 말씀계시 성격을 배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과 인간과 역사는 불변의 역사원리에 의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말씀에 가장 잘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 선교신학적 의미에서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적 설계의 미래를 위하여 구체적인 인간 삶의 질을 구원론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프락시스의 신학적 적용이 요청된다 하겠다. 역사신학이 세계를 해석하는 논리로서 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와 역사의 현실들을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부응케 하기 위한 실용적 근거로서 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제 삼세계의 민중들이 겪는 고난은 그것의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해석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가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전망되어야 한다.
넷째, 역사계시설계는 신앙의 실존적 지평을 지나치게 축소시킨다. 비록 역사계시의 논리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인 근거와 내용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실존적 결단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트만이 신학의 역사적 지평을 실존성으로 해체시킨 것에 대해 판넨베르크가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불트만의 실존적 이해가 근본적으로 신학의 틀을 인간의 주관적인 진리경험이라는 면에서 왜곡시킨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역시 실존적 의미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

판넨베르크의 독특한 계시론과 신학 전반을 견인하고 있는 신학적 특성은 진리성과 현실성과 보편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각기의 특색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의 긴밀한 관련 가운데서 그의 신학을 성격짓고 있다. 여기서 논의될 세 관점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한 포괄적 규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은 <진리>(Wahrheit)와의 치열한 논쟁 가운데서 그 독특성을 드러낸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신학의 과업은 권위적으로 소유한 도그마를 성서실증적으로 선포하는 게 아니라 그 도그마의 진리성에 대한 논의 가운데 놓여있다. 판넨베르크의 견해에 따라 계시론을 진리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될 때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교회는 적지 않은 당혹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기독교 계시론을 비롯한 모든 교의가 절대적인 진리로 전제되지 않고 그 진리성의 지평에서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동안 교회가 수행해 오던 일방적인 설교와 선교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진리론적 주장이 기독교를 진리가 아니라거나, 혹은 기독교를 역사상대주의 구도 속에서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학작업은 권위주의적 진리의 형식 안에 숨어들지 말고 그 진리의 내용을 담지할 수 있도록 해석학적 노력을 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판넨베르크의 전체 신학구도의 기초적인 동기는 앞서 언급한 진리성의 문제와 더불어 <현실성>(Wirklichkeit)에 관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모든 삶의 현실성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그 현실성 전체와의 관련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진리론적 관점에서 증언되어야 할 하나님은 교회의 권위적 선포에서가 아니라 인간, 세계, 그리고 역사의 현실성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해되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성은 고전적 형이상학적인 의미로서의 유신론적 구도에 의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 역사의 종말 까지 설계가 끝났으며, 매우 분명한 질서와 체계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에 대한 책임으로 부터 면제되어 있는 셈이다. 반면에 물리학은 그러한 하나님의 영역을 조금도 남겨 놓지 않을 정도로 이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설계는 매우 철저한 신학작업을 통해 이 양측을 중재하고 있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인간, 세계, 그리고 역사의 현실성은 하나님의 현실성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언급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현실성은 세계 현실성 안에서 그 진리성이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양자의 변증법적 상호연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역사계시설계의 확고한 자리라 할 수 있다.
셋째,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사유의 기초는 진리성, 현실성과 더불어 <보편성>(Universalität)에 착상되어 있다. 이는 세계를 전체로 보고자 하는 관점이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보편성 개념이 단순히 특수성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신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전체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석학적 틀이다. 이 전체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부분적인 사건과 역사는 참된 진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가 세계 현실성 가운데서 언급되어져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런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신학의 보편적 사고는 기독교 신학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인류의 미래, 그리고 그 구원을 지향하는 기독교의 필연적인 정향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시도는 최소한 그리스도 교회의 내부와 외부의 두 방향에서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 보다도 기독교 신학 안에서 볼 때 역사계시기획은 신학이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부터 하나님의 초월적 주관성이나 인간의 초월적 주관성의 자리로 도피하는 위기를 극복케 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신학 밖의 차원으로서 모든 학문으로 하여금 하나의 절대적 방향으로 집중케 하는 논리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을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으로 진술하고 있는 판넨베르크가 시도하는 역사신학은 결국 전체 인간, 세계, 그리고 역사의 현실성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는 학문적 작업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에 대한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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