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강의 2>                  
평화와 복
마 5:1-12


신약과 구약
우리는 앞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비롯한 팔복과 산상수훈 전체가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선포된 말씀의 편집이라는 사실을 대략적으로 검토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그 아람어가 아니라 그 당시 비교적 고급 언어에 속했던 헬라어로 읽는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 결격 사유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염려는 그야말로 노파심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설령 신약성서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예수님의 완전한 말씀을 그대로 복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약성서는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한 정보를 사실대로 보도한 문서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전승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기본적으로는 부활공동체라는 신앙 고백적 토대와, 또한 각자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해석한 텍스트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사도성을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간접성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제자들의 눈으로 통해서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뿐이지 직접적으로 아는 게 아니다. 따라서 잘났든 못났든 예수님의 사도들은 우리의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일공동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드리는 이유도 바로 사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잘못 보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잘못 볼 수 있다. 잘못 보았다기보다는 그들 앞에 발생한 예수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들이 예상한 메시아상과 실제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과는 크게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들과 속사도, 교부들에 의해서 그들의 신앙경험이 진지하게 반성되었고 진리론적 논의를 통해서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매우 심각한 이단논쟁이 벌어졌다. 가현설, 에비온주의, 펠라기우스 논쟁을 비롯해서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단과의 투쟁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걸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논쟁이다. 종교개혁도 역시 진리논쟁이었다. 역사적으로 진리가 아닌 것은 일시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교회도 역시 이런 역사 과정에 놓여 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해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와 교리는 모두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아마 예수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진리논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번에 주제로 삼고 있는 이 팔복의 ‘평화’도 역시 이런 역사적 산물이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역사 안에서 선포된 것이며, 또한 마태 공동체에 의해서 팔복의 형태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 역사는 구체적으로 구약을 말한다. 히브리인들의 평화 이해가 곧 예수님의 이 평화 선포의 기초라는 말이다. 우리가 신약성서의 에이레네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구약의 평화개념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참고적으로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아무래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건 단지 ‘평화’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에 연관된다. 심지어 그리스도론까지도 역시 구약적인 배경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에 바로 유대교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사도행전의 보도를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었고,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을 그대로 지켰으며, 바울도 안식일을 그대로 지켰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가 기원호 70년 얌니야 회의에서 결정된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예증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뿌리는 유대교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은 유대교의 경전을 통해서 이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구약성서를 경전에서 제외하다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런 요구를 모두 배척하고 유대교의 경전을 지금도 그대로 우리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대화는 매우 중요하며, 모세오경을 함께 사용하는 이슬람교와도 일정한 부분에서 대화의 문을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샬롬과 구원
유대인들은 “샬롬!”이라는 인사를, 아랍인들은 “살렘 알레이쿰”이라는 인사를 나누는데, 그 의미는 “만사형통!”이다. 그들이 그런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에서 샬롬이 가장 아쉬웠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옛날에는 어른들께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든가 “진지 잡수셨어요?”라는 인사를 드렸는데, 그 이유도 역시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부족했다는 뜻이다. 사실 유대인들만큼 샬롬이 부족했던 민족도 찾아보기 힘들다.
유대인들의 원조를 역사적으로 찾는다면 아브라함 설화보다는 이집트에서 소수인종의 하나로 살던 역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하나의 혈통으로 구성된 민족인지 아니면 그대 근동에서 히브루라는 단어가 뜻하듯이 민족과는 상관없이 외국인 노동자, 노예, 소작인들로 구성된 소위 민중 집합체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어쨌든지 그들의 삶에 안녕이, 즉 샬롬이 보장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입성하지만 가나안 원주민들과 투쟁은 그들을 역시 샬롬과는 거리가 멀게 만들었다. 그런 영토분쟁의 역사는 지금도 여전하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강한 왕조를 이룰 수 있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솔로몬 아들 대에 이르러 분열왕국의 역사로 빠져든다. 그들이 주변의 제국에 의해여 얼마나 모진 시련을 당했는지는 이미 열왕기서와 예언서들이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결국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남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고,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잠시 부흥의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결국 그리스, 로마 제국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식민의 역사를 살고, 나라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 후의 역사는 결국 나치에 의한 6백만 유대인 살해라는 끔찍한 사태로 폭발하게 되었다. 그들의 인사에 “샬롬”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역사를 그들은 살았다. 이 샬롬은 단지 인사로만 남아있는 게 아니라 훨씬 깊은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게 무언가?
Brockhaus 출판사에서 나온 <성서사전>에서 이 대목을 간추려보겠다. 낱말 뜻으로 볼 때 샬롬이라는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구원과 평화를 가리킨다. 이것은 조화, 행복, 행운, 확실성, 평화가 아주 분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시편 122:6-9절은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평화는 결코 영혼의 기분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구원의 현실성(Wirklichkeit)을 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된다고 말이다. 이런 샬롬의 의미는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수라는 이름이 파생된 ‘예수아’도 역시 도움, 구원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시다.(마 1:21) 땅의 평화도 역시 하나님이 구원과 평화라는 차원에 속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사 2:4) 하나님은 결국 모든 악과 전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엡 2:14)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에게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포괄적인 구원과 연관된다. 결국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이를 이루시며(롬 5:8-10), 우리는 이런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이상의 논의에서 평화는 단순히 우리의 몇 가지 그럴듯한 생각과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팔복의 일곱 번째 항목에서 언급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평화는 곧 구원의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은 평화로 나타날 것이며, 우리의 삶이 평화로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일지 모른다.
샬롬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것만큼 평화를 안다고 말해야 한다. 구원을 오해하면 평화도 오해하는 것이다.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평화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것에 직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대신 하나의 방향만이라도 찾기 위해서 “구원, 소유인가, 존재인가?”라는 제목으로 구원의 성격을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구원, 소유인가, 존재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소유로 생각한다. 흡사 조수미 독창회 티켓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콘서트에 들어갈 자격을 갖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지만 구원은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혹은 나만 사랑할 줄 알고 남은 사랑할 줄 모르나? 그렇지 않다.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사랑을 소유하거나 독점할 수 없듯이, 구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원은 우리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 세계를 향해서 마음을 돌릴 뿐이지 소유하는 게 아니다.
구원을 소유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경쟁구도이다. 백화점에서 한정된 숫자의 물건을 특별 할인 판매하는 경우에 고객들은 체면이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남보다 앞줄에 서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기독교의 구원도 자칫하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그 본질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지불되어야 할 인간 업적에 대한 강조이다. 상품을 획득하려면 돈을 지불해야하듯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소유 지향적 구원론*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종교적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는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셋째는 구원 사건의 수행(修行) 성격이 약화된다. 일단 돈을 주고 고급 승용차를 구매한 다음에는 이미 자기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진리)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자기정진은 불필요하고, 단지 종교형식에만 매달릴 가능성이 있다. 본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고 비본질에만 정성을 쏟는다는 말이다. 흡사 사이비 음악가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은 버려두고, 단지 자기 음악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에만 마음을 두듯이 말이다.

*한국교회의 소유 지향적 구원론은 이 땅에서 행하는 신앙의 태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최후의 심판’까지 규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한 결과에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급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황금면류관을 받는 사람도 있고 개털 모자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소유의 차원에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구원은 단지 구원일 뿐이지 넉넉한 구원과 부끄러운 구원이 나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세계는 단지 구원받는가, 아니면 배제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구원 내부에서 또 다른 차등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나라에 가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상을 받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는 이미 구원이나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구원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이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 있다. 교회 공동체도 역시 서로 간에 공연한 경쟁심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가장 좋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것은 기꺼이 포기하고 그것 자체에만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마13:44-46) 구원으로 표상되는 샬롬의 존재 지향적 성격을 알고 거기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은 그 이외의 것에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완전히 의존해야 할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스-리차드 로이터의 아래와 같은 말은 옳다.

샬롬은 감상적으로 선언될 수 없고, 더욱이 전술적인 길들을 통해서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샬롬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살고 있다.(평화윤리, 48 쪽)

우리는 지금까지 신약성서의 에이레네가 연원하고 있는 구약의 샬롬 개념을 통해서 평화는 곧 구원의 지평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성격을 갖고 있듯이 평화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론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 평화는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이런 것을 전제하고, 팔복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이 말씀이 속해있는 팔복선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복’을 이해하는 게 곧 이 평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도대체 ‘복’이 무엇이기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일까?

평화와 복
팔복의 문장은 모두 시적인 운율로 되어 있다. 그 시작은 “마카리오이 호이”이다. 어느 한 항목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개역성서는 이런 운율을 완전히 무시했다. 루터 번역과 영어성경은 헬라어 성경의 그런 운율을 그대로 살렸다. 공동번역은 반쪽만 살렸다. 어쨌든지 팔복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마카리오이’인데, 그 단어의 원형은 ‘마카리오스’인데, 그 의미는 blessed, fortunate, happy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건 무얼 말하는가? 몇 년 전 씨에프의 카피로 등장했던 “부자 되세요!”와 같은 차원의 복을 말하는가?
개념으로만 본다면 마카리오스는 샬롬과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샬롬도 구원이고, 성서가 말하는 ‘마카리오스’도 역시 구원이기 때문이다. 성서적 신앙에서 구원보다 더 큰 복은 없다. 복 받았다는, 복이 임한다는 성서의 모든 진술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성서 전체가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복은 곧 구원이며, 그런 의미에서 복은 샬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문장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로, 또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평화에 이른다.”고 바꿀 수 있다. 평화, 복, 구원은 성서에서 볼 때 하나님의 동일한 구원 행위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이며 동시에 서로 다른 언어적 표상이다.
팔복에서 말하는 복과 구원이 무엇인지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핵심적으로 두 가지 관점을 짚으려고 한다. 첫째는 복을 받을 사람들, 즉 구원받을 사람의 조건이며, 둘째는 그 복의 종말론적 성격이다.
첫째, 예수님이 복을 선언하신 여덟 종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그리스도론적인 믿음과는 다르다. 마음의 가난으로부터 시작해서 의를 위한 핍박까지 그 어느 것도 믿음과 직결되지 않는다. 팔복 가운데 한 항목만이라도 믿음이 좋은 사람이 거론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예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들이 당하는 삶의 상황, 또는 그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를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는 믿음 일원론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믿음, 믿음 절대주의, 믿음 지상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치하지 않는다. 믿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종교현상이다. 심지어 사이비 이단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은 있다. 아니 진리와 거리가 먼 집단에 속한 사람들일 수록 믿음의 강도가 훨씬 높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2절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앙을 규정하고 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바울에 의하면 믿음도 역시 은사, 카리스마다. 그것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나오듯이 우리가 노력해서 많이 남겨야 할 선물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사랑과 비교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여기서 필자가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믿음은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중이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게 중요하지 믿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열광주의가 아니라 깨어있는 영성으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바로 보고, 현재의 역사를 정확하게 읽는 바탕에 근거한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실제의 삶에서 팔복에 해당되는 삶의 태도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 여덟 가지의 태도를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 중에 하나만이라도 자신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충분하다.
둘째, 본문의 복은 종말론적이다. 선입견 없이 팔복의 말씀을 읽는다면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대개 이 세상의 것에서 별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천국(두 번 사용됨), 위로, 땅, 배부름, 긍휼,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이런 것들은 그들에게 현실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인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짐”도 역시 종말론적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 현실이 아니라 종말의 지평이라고 한다면 현재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우리는 지금 점점 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는 중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종말론적 구원과 복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곧 이것이다.  
우선 필자는 구원과 복을 현실적인 풍요에서 찾아보려는 신자유주의적 신앙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설교되지 않듯이 종말론도 역시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 적지 않은 교회가 이 현실에서 어떤 분명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용하고 있다. 목적이 있는 삶, 청부론과 고지론, I can do it 신앙, 야베스의 기도 등등, 많은 구호들이 이 세상에서의 풍요를 전제하고 있다. 어느 정도 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지만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 하는 신앙으로 기울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종의 종교적 소비재로 떨어진 셈이다. 목사는 홈쇼핑의 호스트처럼 소비자의 구매욕을 강렬하게 충동하는 그런 설교에 열을 올린다. 소비 지향적 신앙형태에 관한 유진 피터슨의 아래와 같은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을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래를 시작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한다.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56쪽)

이런 문제를 필자가 여기서 질질 끌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불러내신 하나님의 부활 사건을 우리의 신앙적 초석으로 삼는다면 현실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무게를 둘 수 없다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복지와 보험처럼 세상이 제공하는 안전망에 목숨을 거는 데 아니라 팔복이 말하듯이 오히려 가난과 눈물과 고난이라는 역사적 삶의 무게를 감당하게 한다. 물론 필자가 여기서 가난, 금욕주의나, 자학적 신앙을 예찬하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말론적 지평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제 위에서 제기한 그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종말론적 신앙은, 종말론적 복(마카리오스) 개념은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평화와 하나님의 나라
필자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적인 복의 종말론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팔복의 신학적 배경인 하나님의 나라를 검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팔복과 신약성서 전체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팔복의 첫 항목인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즉 ‘하늘의 나라’이며, 마지막 항목인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도 역시 똑같다. 여섯 번째 항목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테우”, 즉 하나님을 볼 것이며, 일곱 번째 항목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은 “휘오이 테우”,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 나라,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아님”의 긴장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에 개입했으나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완성되어야 할, 그래서 아직은 아닌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개념정리를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기에 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그리스도 영성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의 일상이 아주 건조한 삶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학적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적 깨우침이다. 이 두 가지 길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논리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신학이고, 직관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곧 신비주의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이 두 가지 관점을 같이 묶어서 따라가 보자.
우선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미’는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은 지금 이 자리에 은폐의 방식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인식으로 꿰뚫어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필자는 지금 어떤 마술이나 주술이나 밀의(密儀)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말하는 중이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지만 동시에 은폐되어 있는 분이다. 성경을 구구절절이 꿰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물리학, 철학에 관한 학문에 능통하더라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성서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하게 밝히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증언되며, 이 거룩한 분을 직접 본 자는 죽는다고 까지 했다. 즉 못 볼 것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건이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앞에 이렇듯 명백한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생명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은폐되어 있다. 여기 민들레꽃이 있다고 하자. 그 꽃은 햇빛과 물과 탄소를 결합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분을 생산한다. 우리의 모든 먹거리가 그런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기초 단위는 햇빛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탄소, 또는 물인가? 그 모든 것인가? 그 중에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생명공학자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은 현상에 대한 추상적 접근에 불과하지 근본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못된다. 오늘의 첨단 과학이 생명의 기원에 상당히 접근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명현상에 대한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무식한 셈이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가 생명을 말하려면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해명해야만 한다. 하이덱거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질문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각 범주 안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무엇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존재(Sein)이다.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우리의 감각범주에 들어와 있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절대적인 것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나 명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여전히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힘이다.
신비주의적 영성의 차원에서 ‘이미’는 유한과 무한의 일치를 가리킨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일상은 모든 게 유한하지만 이미 여기에 무한의 힘들이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했다. 여기 나락 한 알이 있다고 하자. 만약 신비주의적 영성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나락 한 알에서 우주론적 생명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태양 에너지와 탄소와 물리 화학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이런 나락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비롭나? 우리가 밥을 먹는다는 건 태양 에너지를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락 한 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이어가는 모든 과정이 이처럼 신비롭다. 종말에 일어나게 될 생명이 이미 우리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화와 대림절 신앙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가 받을 복은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과 일치할 것이며, 하나님과 온전한 친교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런 신앙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이미 그 종말에 들어간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 신앙은 꽝이다. 이게 곧 부활신앙이기도 하다. 그런 종말론적 복은 단지 미래로 유보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해 있다. 그 종말론적 희망이 그의 현재의 삶을 붙들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그 희망을 교회력으로 설명한다면, 대림절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력하게 기다리는 신앙이다. 그런 사람은 오늘 교회 공동체와 이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필자는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대림절 신앙에 투철했으면 한다. 이런 신앙은 당연히 종말론적이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역사 변혁적이다. 오늘의 역사가 종말론적 지평으로 변혁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런 삶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의 복은 이미 현재 대림절 신앙 안에서 충분하게 주어졌다. 신랑이 올 것을 기다리는 신부의 기쁨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 종말론적 기쁨과 환희가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는가?

<묵상주제>
1. 샬롬(구원)이 소유가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
2. ‘마카리오스’의 종말론적 성격은 무엇인가?
3. 우리 교회에 종말론적 샬롬이 동력을 얻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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