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강의 3>        
정의로운 평화와 거짓 평화
마 5:1-12


포도원 주인의 비유
두 번의 강의에서 필자는 평화의 존재론적인 근거와 복의 구원론적 지평을 설명했다. 결국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명제는 하나님의 통치 및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과 의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는 평화 공동체라고 불러도 좋다. 교회는 평화의 뿌리인 샬롬, 즉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그것이 이미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믿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가 샬롬 공동체로서 확고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스도인 개개인들도 그렇고, 개체 교회의 차원과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평화 문제라는 관점에서 필자가 경험한 개체 교회는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첫째는 샬롬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교회이다. 문제의식도 없고 열정도 없다. 그들은 그저 관행처럼 신앙생활을 영위할 뿐이다. 둘째는 심각한 내분을 겪는 교회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개체 교회 안에서 심한 분열 증상을, 심지어는 예배마저 서로 방해하는 일들이 벌이지고 있는 풍경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셋째는 교회 이기주의로 똘똘 뭉쳐있는 교회이다. 이들은 자기 교회를 키우는 데만 모든 걸 걸어두기 때문에 내부적인 분열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다. 배타적인 차원에서 세계 선교의 열정을 갖고 있는 교회도 크게 보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넷째는 평화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신앙적 화두로 붙들고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그렇게 한국에서 숫자적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 볼 때 한국교회가 샬롬 공동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파주의, 교회 분열, 보수와 진보의 갈등, 교회의 부익부빈익빈 현상 등은 우리에게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한국교회는 한민족의 평화를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는다.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통일 이후에 북한에 교회를 개척할 궁리에 몰두하는 일이 많을 뿐이지 이 분단체제를 어떻게 평화체제로 바꾸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나 교회운동으로나 아무런 노력들을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샬롬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를 약간 간접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를 통해서 한번 검토해보자.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자주 들려주셨다. 자주 들려주신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 이 천국 비유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 중의 하나가 바로 “포도원 주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태복음의 독자 전승이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연극으로 비교한다면 제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은 노동시장이라 할 수 있는 장터이고, 2막은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포도원 현장, 또는 사무실이다. 그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가장 첨예한 문제로 대두된 노동과 경제정의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모르긴 해도 칼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의 소외와 해방 개념이 바로 이런 포도원 비유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1막 : 장터에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마 20:1) 이 주인이 직접 품꾼을 찾아 나섰다는 걸 보면 기업형 대지주가 아니든지, 매사를 꼼꼼하게 처리하는 성격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대략 아침 6시 정도로 추산될 수 있는 그 시간에 장터에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과 일당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하고 포도원 일을 맡겼다. 포도원 일거리가 생각보다 많았던 탓인지 포도원 주인은 제 삼시,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다시 장터에 나갔다. 주인은 그곳에서 만난 노동자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품꾼을 데리고 왔다. 저녁 5시가 되었다. 이제 천천히 하루의 일을 마쳐야 할 시간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포도원 주인은 그 시간에도 다시 장터로 나갔다. 그때까지 그곳에서 빈둥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포도원 주인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 대답을 들은 포도원 주인은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마 20:7b) 이상의 내용이 이 비유의 제1막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눈물 없으면 읽기 힘든, 가슴 뭉클한 이야기이다. 포도원 주인은 저녁 5시까지 놀고 있는 사람에게 왜 종일토록 놀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 노동자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직이다. 하루 공친 그날은 그에게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하루를 공쳤으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할 일이지 이 사람들은 무슨 일로 장터에서 저녁 5시까지 어슬렁거렸을까? 오늘도 일이 없다는 말이냐, 오늘 저녁 먹을 게 없다는 아내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까? 아니면 병든 아내와 노환의 부모님들이 누워있는 걸 보기가 민망했는가? 이 사람이 처한 삶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5시까지 아무도 자기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는 이 사람의 하소연에서 무기력한 인간 실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1시간 밖에 일할 수 없는 이 사람을 그는 포도원 품꾼으로 채용했다.
포도원 주인의 이 말,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구원론의 지평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 주인의 말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에게 마저 하나님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으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물론 성서는 이와 정반대의 사실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미 천국 문이 닫힌 다음에는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의 잣대로, 우리의 시간표대로 천국이 재단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으로만 본다면 오후 5시까지 놀던 사람에게도 주인은 포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했다. 만인구원과 선택구원은 신약성서 시대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논의되어야 할 질문이지 이미 완료된 대답은 아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심층적이고 절대적인 사건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열어놓고 있어야 할 질문이다.

2막 : 포도원에서
포도원의 하루가 끝났다.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서 오후 5시에 온 품꾼들부터 일당을 지급하라고 시켰다. 겨우 1시간 밖에 일한 게 없기 때문에 겨우 푼돈이나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 품꾼들은 놀랍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늘 이렇다. 사람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본문에서 이들의 기쁨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들은 하루의 생명을 연장 받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분이었을 것이다.
예상 밖으로 즐겁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이 순간부터 다른 분위기로 바뀐다. 그 단초는 오후 3시, 정오, 아침 9시, 아침 7시에 온 사람들이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들은 주인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 13-15)
포도원 주인을 향한 이 사람들의 불평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 시간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불평을 쏟아 붓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 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우리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나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 못 견뎌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그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대우하는 사회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사회과학이나 경제문제는 잘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신자유주의가 바로 우리의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노동자와 사업자 사이에, 기업과 기업 사이에 이제는 정부와 국가가 개입하지 말고 그들이 무한 경쟁할 수 있는 체제로 가자는 것이 FTA의 기본 취지 아닌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로 자본주의 일원 체제로 움직이는 오늘의 세계는 이런 경쟁력과 생산성만을 목표로 작동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파이를 키움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오늘 본문에서 불평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생각해보라. 만약 이 포도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소문이 난다면 앞으로 이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다른 포도원의 운영도 근본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오늘 우리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런 질서는 세속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대개 교회 신자들 사이의 문제들은 신학적이거나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데에 대한 불만에 기인한다. 그것이 어쩌면 교회의 평화를 깨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지 모른다. 간혹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교회나 나가지 않는다든지 파당을 만들어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상류층에 속한 사람인데도 그런 해괴한 일들을 저지른다. 필자는 이런 일들이 그 한 사람의 경우만은 아니라고 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교회에나 크고 작은 이런 일들은 많다. 왜 그런가?
모든 인간에게는 포도원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자기 기준에서 볼 때 합리적인 불평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런 인간의 숙명을 죄라고 말한다. 평화를 깨는 장본인은 죄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내적인 평화와 교회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를 깨는 장본인은 죄, 즉 인간의 자기 집중입니다. 그 죄는 인격이 파멸된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불평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오늘 필자는 불평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대신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말하는 결론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정의의 지평을 제시할까 한다. 이런 지평이 열릴 때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평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顚覆性)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내리는 결론은 마 20:16절이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이고,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던 품꾼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인 셈이다. 우리가 흔하게 거론하는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단지 교회에 누가 먼저 나왔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서 전복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교는 이 역사의 점진적인 발전이나 개량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믿지 않는다. 그 나라는 철저하게 오늘의 것과는 다른 방식의 나라이며, 철저하게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그래서 성서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설명하다. 그것은 이 역사 너머에서 이 역사를 뚫고 그분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아포리즘이 포도원 주인의 비유 바로 앞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마 19:30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두 아포리즘은 단지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차례가 다를 뿐이지 똑같은 내용인데, 그 배경은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한 어느 부자 청년의 이야기이다.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신감에 차 있던 이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받는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마태의 보도에 따르면 이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영생을 얻을 수 있으려니 기대하던 청년이 오히려 걱정을 끌어안고 말았다는 말이다. 이 사건이 있는 다음에 예수님은 부자와 약대 이야기를 하셨고, 아무도 구원받기 힘들겠다며 놀라워하는 제자들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26) 그 뒤로 제자들과의 대화 끝에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20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부자 청년은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 정도로 바르게살기도 힘들다. 이 청년이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에 실망하고 돌아갔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떼제의 로제 수사, 마더 테레사를 비롯한 그런 수도자들 이외에 누가 자신의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를 따른다는 말인가? 예수는 실제로 이 청년에게 소유의 포기를 요구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유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그가 소유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데에 있다. 예수는 그것의 무모성을 깨기 위해서 이 청년이 지키지 못할 요구를 하셨다. 앞서 읽은 26절 말씀처럼 구원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용건이라는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눈에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는 수고 있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포도원 비유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다. 불평을 쏟아낸 사람들의 주장이 나름으로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또한 정의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주인은 그들을 불의하게 대하지 않았다. 주인은 원래 그들과의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평은 주인이 자신들과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능력 없는 사람들을 자기들과 동일하게 대우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만 이런 불평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정의로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똑똑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의 불평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하나님의 은총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필자가 여기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자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오늘 샬롬 공동체인 교회가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성과 효율성이 독점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평화의 질서를 구현해낼 수 없다는 게 바로 이 논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것을 극복해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은총의 지평을 우리 삶에 심화하는 길밖에 없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들의 합리적 불평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제공하는 주인의 은총을 우리 신앙의 토대를 삼는 것이다. 이게 곧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행위에서 은총으로의 ‘패러다임 쉬프트’이다.

은총의 질서를 향해서
포도원 비유에서 보았듯이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훼손하는 불평의 뿌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불만이 곧 인간의 부패한 실존이다. 비록 이런 부패성이 우리 인간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실존을 숙명적으로 껴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의 죄론도 인간에게 그런 숙명주의에 머물라는 요청은 아니다. 죄보다 은총이 상위이다. 물론 죄의 깊이를 알아야만 하나님의 은총이 더 분명해지겠지만, 원칙적으로 본다면 은총론은 모든 죄론을 해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런 은총론에 근거하지 않는 죄론은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에 불만스러워 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이다. 몇 시간을 일했든지 주인은 우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는가? 노동했으며, 하루의 생명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모든 영혼을 집중시키는 삶 보다 더 풍요로운 게 어디 있겠는가? 이게 말로 들을 때는 그렇구나,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건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은총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데나리온은 눈에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한 데나리온이 더 크게 보인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최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곧 영성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영성이 화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대개는 이것이 일종의 방법론으로 떨어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몇몇 기도 방식, 성서묵상 방식, 심지어는 인간관계 같은 방법론의 훈련으로 영성에 접근하는 일이 흔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근원적인 것이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에 영성도 역시 이런 인간발달의 방식이 아니라 성령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이 곧 영성의 심화인 셈이다. 즉 성령의 활동을 이해하고 그 활동과 하나 되는 게 곧 우리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활동을 이미 잘 알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성이 풍성하다고 여길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영성이 빈곤하다고 여길 것이다. 앞의 사람들은 비교적 신앙생활에 푹 젖어 있는 이들이고, 뒤의 사람들은 그렇게 깊이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성령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이런 양극단을 유발하는지 모르겠다. 대개 교회에서 성령은 초월적 신비주의로 흐르거나 아니면 개인의 도덕주의로 흐른다. 전자는 방언, 신유, 입신 같은 현상을 곧 성령의 활동과 일치하는 것이며, 후자는 사회참여와 봉사, 휴머니즘 같은 삶의 태도를 성령의 활동과 일치시킨다. 물론 그런 현상과 일들이 그리스도교적 성령 이해와 나름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근본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성령 이해에서 핵심은 생명이다. 성서가 말하는 성령은 곧 생명의 영이시다. 히브리어 루아흐나 헬라어 프뉴마는 모두 이런 생명의 영을 가리킨다. 낱말 뜻으로는 숨, 영, 바람을 가리키는 이 루아흐는 성서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사용된다. 그 생명은 물론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에 의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루아흐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완성하신다. 오는 필자는 조직신학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하나님의 생명에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영성이며, 생명의 신비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돈오(頓悟)로 경험할 때,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성육신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으로 들어간다. 은총의 눈으로 이 세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길을 가다가 무슨 물건이 든 자루를 하나 주웠다. 자루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조약돌이 가득 들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조약돌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들고 가다가 바닷가에 앉아서 재미삼아 조약돌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조약돌을 던지려고 할 때 마침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에 든 조약돌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석이었다. 라즈니쉬의 책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매일의 삶이 곧 보석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필자는 그의 말이 옳다고 본다. 어느 때부터인가 필자에게 이 세상은 보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돌, 햇살, 비, 구름, 소리, 강이 모두 빛나는 보석이다. 물리학적으로도 지구는 이 우주 안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담고 있는 푸른 별이다. 그러나 외로운 별이다. 이 안의 모든 것들은 생명의 기초이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 심지어 똥도 아름답다.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를 읽어보셨는지.
어떤 점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영적인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연금술사> 이야기처럼 현재 이렇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세계를 보석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보석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값을 매겨놓은 보석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놓쳐버릴 때가 많다.
이런 영적인 연금술사라는 건 단지 세상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은총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기만 한다면, 생명의 신비와 은총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동지들도 우리에게 보석처럼 다가오지 않겠는가. 물론 이게 억지로 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병이 들면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든 것처럼, 실제로 신자들 끼리 상처 주는 일이 발생하면 그걸 치유하기 힘들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그런 상처는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이듯이, 우리에게 주님의 은총이 열리기 시작하면 믿음의 이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은총의 능력이 아닌 한 우리는 평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의 의지나 교양으로 억지로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그건 단지 무늬일 뿐이고, 지속되기도 힘들다.  

평화의 프락시스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먼저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인의 은총을 은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서 그들은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이 주인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은총의 자리에서 포도원 노동자들의 평화는 시작될 수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팔복에 나오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영어 성경은 이 사람을 ‘peacemaker’라고 번역했다. 평화는 인간이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영어의 ‘make’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신학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은총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라는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번역이다. 우리는 어떻게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어떻게”라는 말은 단순히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이 아니다. 방법은 그것 자체로 어떤 절대적인 게 아니라 존재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귀결이다. 따라서 피스메이커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에 참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샬롬의 능력에 휩싸이면서 동시에 그 샬롬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사람이 곧 피스메이커라는 말이다. 이것은 산상수훈 7:15-21에 “나무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듯이 동시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면 굳이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며, 우리가 좋은 나무인지를 알려면 열매를 보면 된다. 이 말은 곧 나무의 존재론과 열매의 행위가 나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피스메이커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복음으로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피스메이커에게 일단 중요한 일은 이 현실에서 평화의 리얼리티를, 즉 무엇이 평화인가, 무엇이 폭력이고 반(反)평화인가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사이비 평화를 구별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간 삶의 심층을 뚫어볼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심화해야할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통찰도 역시 필요하다. 예컨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어떻게 여성의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려면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 한민족의 역사에서 사회적 마이너리티가 어떻게 소외되었는지에 대한 역사과학적 안목도 역시 필요하다. 목사와 신학자들은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의 현실화를 위해서 평신도 전문가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미래는 충분한 신학적 소양을 갖춘 평신도 전문가 집단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대의 예언자들 중에서 거짓 평화를 가장 노골적으로 비난한 예레미야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자.  
악명 높은 므나쎄의 장기 집권 말기인 BC 64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예레미야는 남유다에서 마지막으로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요시아와 비슷한 연배이다. 그는 요시아 재위 13년인 BC 627년부터 젊은 나이에(21살) 예언을 시작했다. 그가 볼 때 요시아의 개혁도 조국의 멸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왕 므나쎄가 남긴 이방종교와 부도덕한 행위는 완전히 씻기지 않았다. 그는 앗시리아의 멸망을 경험했고, 신흥 제국 바벨론의 부상을 야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것을 목도했으며, 바벨론의 총독 치하에서 여전히 예언자로 활동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려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6:13-15)

사실 정의로운 평화와 거짓 평화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의 이런 경제 시스템은 평화인가, 아니면 거짓 평화인가? 오늘의 교육 제도는 평화인가, 거짓 평화인가? 오늘의 한미동맹은 평화인가, 거짓 평화인가? 오늘의 한국교회 체제는 평화인가 거짓 평화인가? 누가 예레미야 같은 영적 통찰력으로 오늘의 거짓 평화를 들추어낼 수 있을까?
거짓 평화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힘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소극적인 차원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화를 전쟁의 반대개념으로만 생각하는데, 이건 하나님의 샬롬과는 전혀 다르다. 가부장적 질서를 여성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거나, 아니면 북아메리카에서 노예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유지되는 평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안주”(status quo)라고 보아야 한다. 인디언 추장의 연설 모음집인 <왜 나는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서 백인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쫓겨 들어가는 인디언들의 운명이 잘 그려져 있는데, 그것도 역시 폭력에 의한 거짓 평화이다. 크게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으면 괜찮다는 이런 소극적인 의미의 평화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거짓 평화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헨리 나우엔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옳다.

그러므로 이 평화라는 단어의 타락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값진 단어를 감상주의, 이상주의, 급진주의, 낭만주의, 심지어는 무책임주의와 연관지어왔다. 이제 “당신들은 평화를 추구하는군요.”라는 말은 종종 “당신은 몽상가이군요.”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핵잠수함을 위한 항구를 건설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는다.(기상 2005년 8월호에서)

둘째,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으로(peacemaker) 살아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한다. 평화가 거대한 복음운동으로 자리 잡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평화 운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적인 문제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평화 운동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전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과 물질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한다.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경우에 비폭력과 평화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가지 않으려면 감옥에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분단체제 하에서 군대를 거부하는 게 과연 옳으냐 하는 논란은 접어두자. 지속가능한 지구를 지켜내기 위한 생태학적인 평화에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소비를 줄여야 하고, 육류 먹거리도 축소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크고 작은 평화운동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요구하는 건 분명하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피스메이커에게 종말론적인 복이 있으리라고 약속했겠는가?
모든 사람이 핵전쟁 반대를 위한 운동에, 지속가능한 생태운동에, 인간적인 노동운동에 무조건 참여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모두가 동일한 십자가를 질 수는 없다. 각자에게 맞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평화 영성이 프락시스의 차원에서 풍부해져야 한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 그것의 실제적인 내용과 방법론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샬롬이 우리의 삶에 침투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 사실만은 놓칠 수 없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끌어내신다.  

평화와 세례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스메이커로 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미션’이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 이외에는 아무 데서도 평화를 발견할 수도 없고, 성취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과제는 하나님과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했다고 본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의 상실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일치, 그와의 평화를 회복한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 길을 매우 소중한 예전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세례와 성만찬이다.
세례가 왜 참된 평화로 돌입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일까? 역설적인 표현이겠지만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완전한 평화를, 온전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평화도, 생명도 불가능하다. 이 역설적인 상황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다. “죽어야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 그리스교 신앙은 살았지만 죽은 것과 똑같은 사건이 바로 ‘세례’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곧 하나님과의 일치이며,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생명과의 일치이며 동시에 평화와의 일치이기도 하다. 이런 세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제로 삶으로 체화한 사람들은 구원과 생명을 선취한 사람들이다. 세례의 영성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며, 거기서 피스메이커로서의 영적 동력을 얻게 한다. 성만찬은 곧 과거에 받았던 세례의 현재화라는 점에서 세례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과연 세례와 성만찬이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과의 일치를 현실화할 수 있는가 하고 묻지는 말라.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믿음이다. 터무니없는 사실을 심리적인 확신으로 대체하라는 게 아니라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그 구원 사건에 우리의 운명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도 역시 신비이다. 현재 살아있으면서도 이미 죽은 것처럼 살아가며, 앞으로 확실하게 죽겠지만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를 아는 우리는 믿는 이들과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며(벧전 5:14, 롬 16:16), 더 나아가 이 세계에 정의로운 평화의 질서가 구체화하는 일에 서로 연대하고 참여할 것이다.(암 5:24, 시 85:10,11) 그런 삶에 예수의 지복선언인 ‘마카리오스 호이’가 선물로 주어지리라. 아멘.

<묵상주제>
1. 오늘 나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진지하게 전해지고 있나?
2. 거짓 평화의 속성은 무엇인가?
3. 피스메이커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몫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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