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즐거움


즐거운 대화

한국 사람들은 대화를 별로 즐기지 않는 민족이라고들 말한다. 이게 어느 정도 정확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노래방과 찜질방이 유독 많은 이유가 대화 부족과 연관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자주 모이거나 오랜 만에 모이거나 상관없이 한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대개 저녁밥 먹고, 술 마시고, 그리고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 부르고 헤어진다. 친구들의 모임에서 서로의 정치적 이해가 걸린 주제 이외에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 모임의 목적을 스트레스 해소에 두거나, 또는 그렇게 떠들고 노는 것이 참된 사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성들 분들은 동창회에 나갔다가 공연히 스트레스만 받고 돌아오는 일이 많다고 한다. 남편과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친구들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는 말이다. 여자들의 모임만 그런 건 아니다. 남자들의 동창회의 대화도 어떤 주제가 또렷하게 제시되는 게 아니라 중구난방이 이야기들이 졸속으로 진행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하고, 기회를 놓칠세라 자기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어쩔 수 없이 남의 이야기를 들어야할 시간은 자기가 말할 걸 준비하는 시간에 불과하다.
대화가 없기로는 부부 사이가 가장 심각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우스갯말로 경상도 남자는 집에 들어와서 세 마디 말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는?”, “밥 묵자.”, “자자.” 이런 상황이 어디 경상도 남자들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부부들은 일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서 대화하는 경우가 드물다. 함께 본 드라마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는 정도만 된다고 하더라도 대화가 괜찮은 부부에 속할 것이다. 죽음, 전쟁, 사랑, 종말 같은 문제들을 주제로 서로 대화하는 부부들은 흔하지 않다. 목회자 부부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 구원을 진지하게 대화하는 목회자 부부들은 많지 않다. 왜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부부들이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 못하는 것일까?
대화를 구성요소로 삼는 티브이 시사토론도 역시 대화가 없거나 서툴기는 매한가지이다. 패널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그들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패널들이 주제를 정확하게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 패널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지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시사토론에서는 내용이 있든지 없던지 상관없이 단지 입담이 있는 패널의 주장만 두드러질 뿐이지 그런 토론을 통해서 어떤 의견들이 종합되거나 정리되는 경우는, 그래서 거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대화의 희열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목사들의 동기 모임도 역시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교회건축, 말썽 많은 장로, 월급, 각종 교회 이벤트, 심지어는 고스톱 이외에 신학과 영성의 주제에 심각하게 빠져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대화는 늘 교회의 일상에 떨어질 뿐이지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지 못한다. 당회, 직원회, 교사모임 등등에서 하나님 나라, 종말, 구원, 칭의와 성화같은 신앙의 중심 주제를 대화의 중심 주제로 삼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화를 즐겁게 끌어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대화의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전해야 할 이야기의 요점을 정확하게 정리해낼 수 있는 기술이 거론된다. 이런 방식으로 어느 정도 대화의 격을 높일 수는 있다. 삶의 기술이 우리를 교양인으로 만들어주듯이 대화의 기술은 대화의 교양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교양 있는 대화의 기술만으로 즐거운 대화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대화의 기술은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정신을 끌어올리는 것보다는 그들을 심리적으로 자극하며, 또한 비교적 원만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교양으로 포장한 채 실제로는 여전히 대화의 상대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정치인들이나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자주 발견한다. 그들은 매끄럽게 말하는 기술은 가졌지만 청중들의 영성을 심화하지는 못한다.  
인간이 개발하는 대화의 기술보다는 언어와 사유가 그 대화 전체를 끌어갈 때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경험한다. 이 말은 곧 말하는 인간이 전적으로 축소되고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고전작품을 읽을 때 작가와 독자가 사라지고 오직 작품의 세계가 드러나며, 또한 피아노 콘서트에서 피아니스트의 역할은 작아지고 오직 음악만 존재론적으로 드러남으로써 거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운 음악경험이 주어지는 것과 같다. 정확한 예인지 모르겠지만 선승의 큰 스승들은 제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화두를 줄 뿐이다. 그리고 몇 마디 정확한 말을 전달할 뿐이다. 비록 많은 말이 오가기는 않았지만 그들은 대화의 기쁨을 느낀다. 대화의 핵심은 바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

우리가 어떻게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참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는데, 우리의 삶에 일상이 범람한다는 게 일차적인 이유이다. 자녀교육, 아파트, 자가용, 취미생활, 노후대책 등등, 이런 일상이 우리의 모든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너머의 세계인 죽음, 자유, 해방, 존재, 역사, 시간 등등에 대한 관심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밀려난다. 물론 일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생명의 리얼리티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런 리얼리티를 상실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만을 꿈꾸듯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하나님의 통치와 연결되지 않고 단지 호기심의 대상으로 떨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에는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이 개입되기 힘들 것이다.  
현대인들이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휩싸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객도식’이 우리를 강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세상, 언어, 존재를 일종의 객체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이미 우리가 세상 안에 던져진 존재들이고, 우리가 언어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하고, 우리가 존재에 휩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것들을 대상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이런 착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언어와 세상을 도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도구화한 언어와 세상은 색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색맹처럼 우리에게 존재론적 능력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우선되어야겠다. 특히 성서 언어를 통해서 설교의 길을 가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언어가 담고 있는 존재론적 세계를 이해하는 건 필연적인 요소이며, 그런 이해가 선행되어야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신학 언어가 어떻게 교회 공동체 안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혹은 ‘로고스’라는 헬라어가 신약성서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위대한 신학자가 그리스도교를 변증하기 위해서 그런 용어를 만들어 내거나 차용한 게 아니라 그 용어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사유를 안고 있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신학자들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그 언어를 창안한 게 아니라 이미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열어가는 그 세계에 참여한 것뿐이다. 이런 신학 용어나 개념들이 몇몇 신학자들의 신학적 착상으로 종료되는 게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훨씬 심화된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에 대한 증거다. 마치 바람이 대금을 통과함으로써 음악이 되듯이 언어는 신학자들을 통해서 신학의 길을 간다. 바람, 또는 소리와 언어는 모두 존재론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참여한다는 것은 마술적인 사건이며, 신비이다. 그런 능력은 모든 사물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사건이기도 하다.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는 목동 ‘산티아고’가 자기신화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난 다음에 겪게 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부근에서 큰 보물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예언자의 신탁을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인 양을 팔아 바다를 건너 거상들과 함께 이집트로 간다. 긴 여행 끝에 그는 오아시스에서 연금술사를 만난다.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말한다. 모든 물질은 자기의 시간이 있다. 금의 시간도 있고, 납의 시간도 있다. 모든 물질은 자기 시간을 채운 다음 다른 물질로 진화한다. 납이 금이 되기도 하고, 금이 납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연금술사는 모든 사물을 거룩하게 본다. “한 알의 모래가 곧 우주다!” 그런데 산티아고가 연금술가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납으로 금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보편언어였다. 그는 사막과 대화할 수 있으며, 바람과도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의 작은 사물도 존재론적으로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안타깝지만 아무도 성령과의 일치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없듯이 아무도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이건 배움이 아니라 느낌이며, 경험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글에도 나오는 거지만, 수레의 바퀴를 만드는 능력은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득음이 필요한 창의 세계도 그렇고, 심지어는 테니스의 세계도 그렇다. 어떤 것의 결정적인 순간과 세계는 학습이 아니라 그 진리에 자기가 휩싸임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진리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경험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그 언어의 길목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시인들은 바로 그런 기다림을 아는 사람들이다. 오인태 시인의 “시가 내게 왔다”를 감상해보자.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 왔다.
(시집 <아버지의 집>에서, 한겨레신문 2006년 8월14일자에서 재인용. 오인태는 1962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91년 <녹두꽃> 3집을 통해 등단, 민족문학작가회 경남지회장)

일종의 신탁사건인 “시가 내게 왔다”는 경험처럼 언어와 주제들이 사람들에게 올 때만 대화는 즐거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거꾸로 우리에게 대화의 즐거움이 부족한 이유는 언어와 사유가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거나 그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말은 많으나 진정한 대화는 없고, 관계는 많으나 참된 사귐은 불가능하다.

설교 도구주의  

즐거운 대화를 경험하기 힘든 것처럼 오늘 교회 현장에서 즐거운 설교를 경험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신앙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가 우리에게 빈곤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은 대중 설교자들이 제공하고 있는 즐거움과 다르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은 종교 엔터테이너에 불과하다.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역동성을 발견하고 나름으로 이 세상을 즐겁게 살면 충분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도 매일 저녁마다 시트콤이나 ‘개콘’ 같은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때우면 결국 삶이 건조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종교 엔터테인먼트로만 신앙생활을 지속하면 영성이 메말라버린다.
위의 언급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1) 한국교회의 일반적 신앙 형태가 종교 여흥이라는 말이 옳은가? 2) 그것으로 인해 영성이 고갈된다는 말이 옳은가? 이 질문은 또 하나의 다른 강의로 다루어야 할 정도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는 오늘 논의에 필요한 만큼의 작은 단서만 제시하겠다.
첫째, 한국교회의 신앙형태가 종교 여흥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은 신앙생활이 주로 이벤트 중심으로 작동된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신년맞이 부흥성회나 ‘특새’가 유행을 타고 있으며, 알파코스나 뜨레스디아스 등, 다양한 종류의 행사가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소위 ‘열린예배’도 역시 신자들에게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여흥으로 만드는 한 형태이다. 교회 규모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신자들을 거의 ‘뺑뺑이’ 돌리듯 하는 이런 일련의 행사들은 양적으로도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어떤 영적인 깊이보다는 단순히 종교적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둘째, 종교적 여흥에 기초한 한국교회의 영성은 외면적으로 풍요로운 것같이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궁핍하다. 한국교회의 분열현상은 바로 그 사실의 반증이다. 레드 콤플렉스와 친미 사대주의를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규모 집회가 그리스도교 이름으로 열리는 반면에, 지속 가능한 생태 운동이나 미래 지향적 평화운동에는 아주 소극적이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의 외형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그 내면에 영성이 살아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이런 문제는 설교 도구주의라는 기형적인, 오직 실용성만 강조하는 설교형태를 생산했다. 설교가 종교적 여흥을 위한 수단으로, 교회부흥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어떤 본문과 어떤 주제가 선택되었든지 대개의 설교는 신자들의 영적 각성을 통한 교회 부흥이라는 결론으로 나간다. 영적 각성과 교회 부흥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구체적인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물먹는 하마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설교의 근본을 훼손하고 있는 이 현실이 위험하다는 말이다. 도구주의적 설교의 한 전형은 릭 워렌 목사에게 나타난다. 건전한 목회자의 인격과 무난한 메시지를 통해서 소위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독특한 신앙 트렌드를 유행시킨 릭의 설교가 왜 도구적인지, 그리고 그것의 문제점들은 무엇인지를 짚기 위해서 졸고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의 마지막 두 단락을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겠다.

목적이 이끄는 삶
목회자로서 꽤 괜찮은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워렌 목사가 기독교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컨대 그는 준법시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설교한 적이 있다(05/7). 그거 맞는 말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준법시민이라는 말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는 게 잘못이다. 워렌이 미국 중산층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일종의 시민종교를 지향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유대교의 율법과 로마의 실정법을 위반한 결과였다는 기초적 사실관계마저 모른다는 건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할 설교자로서 함량미달이다. 하기야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라이즈 업 코리아’라는 행사를 개최하는 마당에 워렌만을 탓할 수는 없다. 복음과 국가 이념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기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피장파장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목사와 장로를 비롯해서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기독교의 기초를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또는 잊고 싶어 하는 분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제안 드리고 싶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가능한대로 우리 모두는 기독교의 초석으로 돌아가는 재교육을 정기적으로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워렌 목사의 설교에서 기독교와 성서의 기초가 부실하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다윗에 관한 바울의 설교를 아래와 같이 인용한 적이 있다.

30여 년 전에 나는 사도행전 13장 36절의 짧은 구절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구절은 내 삶의 방향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일곱 단어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절이지만 물건에 찍는 뜨거운 철 도장처럼 나의 삶에 이 단어들이 새겨졌다. “다윗은 그의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겼다.”(NASB). 이제 나는 왜 하나님이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행 13:22)이라고 부르셨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기 때문이다(목적 415).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워렌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다윗 왕조 중심의 역사 기록을 금과옥조로 여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왕이면 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사람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성전건축의 자격까지 상실한 다윗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을 중심으로 일어난 왕자의 난도 결국 다윗의 책임이다. 내가 보기에 사울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하나님의 목적보다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보여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그렇게 해석된 그 신뢰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게 한 단 하나의 이유이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은 분명히 다윗에 대해서 워렌이 인용한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옳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유효한 건 결코 아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다윗을 예로 든 것뿐이다.  
사도 바울에 대한 워렌의 또 하나의 다른 해석을 보자. 그는 바울이 “나는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목적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고전 9:26)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울은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것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나 죽는 것도 모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워렌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목적 416). 매우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리시는가? 이게 성서 해석의 기초를 모르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아전인수이다. 바울은 살아있는 동안에 사도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철저하게 왕따 당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 활동에서도 전반적으로는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게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도 실패한 분이시다. 성서가 말하는 승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역설과 반전이라는 구도로만 그것을 우리는 조금 따라갈 수 있을 뿐이지 워렌이 부심하고 있는 그런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볼 때 워렌은 성서 텍스트의 실질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채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도구적 실용주의
어떻게 보면 내가 지금 지적 오만에 빠진 채 워렌의 설교에 있는 ‘옥에 티’를 부풀려서 트집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워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 코가 석자인 마당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들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형식이나 내용에서 도구적 실용주의라 할 워렌의 설교를 흉내 내고 있는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자들이 내 관심이다. 비록 그런 방식이 일시적으로, 또는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왜냐하면 그런 설교에서는 성서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또는 인간 삶에 필요한 일종의 도구와 소품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의 설교가 왜 미국과 한국교회 안에서 그렇게 힘을 얻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글쎄, 그게 나도 궁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독교의 중심에 바로 서기 위해서 끊임없이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성찰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 설교자에게 불요불급한 일들은 뒤로 접어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차제에 나는 동료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요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상담은 정신 분석 전문가들에게 맡겨두라.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윤리 선생들이, 건전한 인관관계는 대학교 교양과목 선생들이, 그리고 사회복지는 정부나 시민단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교회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그들을 돕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다. 물리학은 그들 전문가들이 맡아서 할 일이지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목사는 모든 일에 나서서 감 놔라 대추 뇌라 할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일 조차 버거운 과업이며,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치열하게 투쟁하고 참여해 온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과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오늘의 교회 안에 살려내는 일만 해도 숨 가쁘다. 이 말이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분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여기서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워렌 목사와 새들백 교회는 우리의 자화상인지 모르겠다. 전통예배의 리터지를 파기하고 현대 음악의 찬송가로(새들백 317) 청중들의 정서에 어필하거나, 양복과 넥타이가 아닌 평상복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신자들에게 설교 개요 노트를 제공하거나, ‘밑줄 쫘악’(97/8, 98/5, 05/9)이라는 순발력 있는 멘트 등,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로 교회의 활력을 제고했다 하더라도 복음이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도구적으로 소비될 뿐이라면 결국 초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전승된 종말론적 생명의 신비는 형해화하고 말 것이다. 독자들도 이런 조짐을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서 눈치 채고 있으리라. <기독교사상, 2005년10월>

즐거운(?) 설교를 향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종교 상품처럼 소비되고, 설교가 도구적으로 이용되는 한국교회에서 신앙과 설교는 위기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이 현상을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중들의 종교적 욕망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설교자들이다. 이런 설교는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의 예언자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3,14) 바벨론의 위협 아래 놓였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서 대다수의 예언자들은 아무런 염려가 없다고 예언한 반면에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갈 운명이라는 점을 예언했다. 대중들이 어느 예언자의 말에 환호를 보냈을는지는 불문가지이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목회 현장에서 활동하는 대중설교자들도 이런 점에서 매우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야만 한다.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곧 설교의 정당성까지 담보하는 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대중성과 정당성은 반비례한다. 대중*들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버리는 진리를 직면하기보다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의 충족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소위 ‘민중신학’의 이중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민중은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기를 간절히 염원한다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설 수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이기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방해하는 주체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든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담임인 조 아무개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는 이들이 곧 민중들이 아닌가? 그들이 한국교회 개혁의 견인차가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오히려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다. 필자가 보기에 민중이 역사를 변혁해가는 주체라는 생각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로 일종의 환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화해야 할 이 역사의 변혁과 개혁이라는 당위 앞에서 무엇이 대안인가?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 그것은 사회학자들이 찾아야 할 몫이고, 우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성서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로 돌아가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진보하지 않는다. 개량될지 몰라도 근본적인 변혁은 불가능하다. 예수의 재림 표상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역사 안에 이질적인 힘이 개입됨으로써만 이 세계, 역사,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생각이 곧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도 괜찮다는 건 결코 아니다.

설교 도구주의, 그것에 근거한 대중추수주의를 위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좌고우면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대중들의 눈치만 살폈지만 예레미야 같은 참된 예언자들은 그들의 요구에 전혀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신탁에만 마음을 두었던 것처럼 오늘의 설교자들에게도 이런 영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런 영성을 확보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에는 ‘어떻게’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게 관건이다. 무엇을 어떻게 설교하는가보다는 설교자 자체의 존재론적인 변화가 우선한다는 말이다. 약간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에크하르트의 진술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보다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선하게 되도록 하라. 그러면 그들의 길과 행위는 밝게 빛날 것이다. 그대들이 외롭다면 그대들의 행위도 의로울 것이다. 성스러움이 직업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일의 종류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소명이 아무리 “성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이 소명인 한 성스럽게 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스러운 한, 그리고 내면에 신적 존재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곧 먹고 자고 밤을 새는 일과 그 외의 모든 일들을 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이 하는 일은 헛되다.(레이몬드 블레크니 엮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교훈담화” 중에서)

지금까지의 논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성서와 신학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살리는, 그래서 즐겁게 들리는 설교의 구체적인 형태를 약간이라도 설명해야겠다. 사실 이런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하는 건 서로에게 별로 유익한 일이 아니다. 성서 언어는 근원과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과 비슷한 성격의 성령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형태로 주조해낼 수 없다. 성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경험한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약간 소극적인 방식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더불어서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기보다는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겠다.
  
첫째, 계몽적인 설교를 피해야 한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설교 시간만이 아니라 목사는 언제나 그렇게 가르치고 싶어 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건 큰 착각이다. 설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이다.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오직 성령의 일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들을 계몽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청중들과 함께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설교자는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열어가는 그 신비의 세계를 미리 맛본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그 통치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에 제한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성령은 고유한 방식으로 청중들을 만나실 것이다.
둘째, 진부한 내용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변형은 무궁무진하다. 마치 바둑의 정석을 충분하게 알고 있는 기사는 매번 창조적이고 새로운 바둑을 구사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자는 청중들과 함께 새로운 수를 발견해나가는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개의 청중들은 주일 설교에 별로 기대감을 갖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청중들에게 목사의 설교가 이미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설교를 하든지 결국은 교회에 충성해라, 기도해라, 전도해라, 이웃에게 봉사해라, 회개해라, 심지어는 십일조 해라, 주일성수해라, 하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신자들은 목사의 설교를 ‘잔소리’로 들을 것이다. 인격적인 목사는 인격적으로 잔소리를 하고, 권위적인 목사는 권위적으로 잔소리를 할 뿐이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떻게 진부한 내용을 벗어나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왕도는 없다. 설교자가 일정한 영적인 경지에 올라서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걸 위해서 설교자는 평생 구도자의 길을 가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다가 운이 좋아 목회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설교의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본인이 그걸 느낀다고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가짜에 가깝다. 가짜 시인이 쓴 시집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자기 자신은 안다. 자신이 진짜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셋째, 전달 방식의 산만성을 피해야 한다. 설교가 청중들에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어렵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설교자가 청중들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런 방식의 설교는 아무리 쉬워도 산만한 설교다. 여기서 영적인 대화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곧 설교자가 청중들과 함께 신학적인 사유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영적인 것이 곧 신학적인 것이며, 신학적인 것이 곧 영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 방식을 추천하고 싶다. 그는 철저하게 조직신학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청중들을 종교적인 권위로 닦달하지도 않고, 선정적인 예로 자극하지도 않은 채 오직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인 교리만을 파고든다. 그래도 그가 나름으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중들을 신학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제시된 설교자가 피해야 할 세 가지 요소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것들이다. 계몽적인 설교는 그 내용이 진부할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진부한 내용의 설교는 청중들을 계몽시키려는 포즈를 취한다. 흡사 삶의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권위적으로 대한다거나,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과 같다. 진부한 내용으로 계몽에 치우친 설교는 결국 산만성을 피할 수 없다. 신학적인 깊이가 없다면 아무리 입담으로 그것을 보충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중언부언하기 마련이다. 물론 일반 청중들은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 작은 예화 하나만 듣고도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실정이니까 청중들의 반응만으로 설교자와 설교를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 글의 제목인 “설교의 즐거움”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나온다. 설교자는 가능한 대로 자신의 목회적인 의도를 줄이고 말씀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길을 내야한다. 예수의 길을 낸 세례 요한처럼 말이다. 이런 길을 내는 작업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구도자처럼 꾸준한 자기 성찰과 공부를 필요로 한다. 세 가지 공부가 필수적이다. 1) 역사비평을 통한 성서 텍스트의 진리론적 지평을 확보해야 한다. 2) 지난 2천년 동안 성서 텍스트를 해석한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에 정통해야 한다. 3) 설교자와 청중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훈련을 철저하게 수행해야 한다. 이런 길을 꾸준히 가는 설교자들은 그 설교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그 자유가 바로 설교의 즐거움을 가능하게 하지 않겠는가. (2006년 8월21일, 예장 건목협 여름 수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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