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생명의 신비

어려운 설교, 쉬운 설교
현재 남의 설교를 비평하는 글을 <기독교사상>에 연재하고 있는 필자는 고급스러운 명설교자도 아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낼 줄 아는 대중설교자는 더더욱 아니다. 설교 내용도 내세울만하지 못하고, 말에서는 달변이 아니라 눌변에 속한다. 이건 겸양도 아니고 엄살도 아니며, 실제 상황이다. 지금도 강단에 설 때마다 두려움이 크다. 그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간혹 식은땀이 날 때가 있을 정도니까 설교에 대한 부담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런 일들이 꿈에 나타날 때도 있다. 강단에 올라섰는데 마땅히 내 앞에 있어야 할 설교 원고가 보이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꿈을 꾼다. 그 꿈의 진행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단에서 쩔쩔매다가 꿈을 깨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두려움을 감춘 채 대충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경우이다. 꿈에 나타날 정도로 설교행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닐는지.
어쨌든지 필자가 보기에 내 설교를 듣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은 것 같다. 그 말이 그 말인지는 모르겠다. 내 설교를 듣고 있으면 졸립다는 내 딸들의 평가도 역시 내 설교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설교, 청중을 졸리게 하는 설교, 어려운 설교, 이런 것이 내 설교의 특징이다. 내심으로는 내 설교가 왜 어렵다는 건지 잘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런 평가를 나 몰라라 팽개칠 수도 없다. 본인 스스로는 복음의 본질에 천착하는 설교, 메시지가 아주 분명한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일부?)청중들은 왜 반대로 받아들일까? 이게 바로 설교자인 필자가 처한 딜레마이다.
아무래도 내 설교에 한 마디 변명을 하고 지나가야겠다. 나는 성서텍스트와 청중 사이에 가교를 놓아야 할 설교자의 역할에서 성서텍스트 쪽으로 기울어 있다. 청중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채워주거나 그들을 종교적으로 계몽하는 것보다는 성서텍스트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내 설교에서 청중들을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청중 중심의 설교를 주창하는 오늘의 설교학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청중들이 내 설교를 어렵다고, 정확하게는 따분하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청중들은 일반적으로 어렵거나 따분한 설교를 싫어한다. 그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경쟁과 그것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포위당하고 있는 청중들이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인 의미와 영성의 깊이에 귀를 기울이기는 힘들다. 노동, 자식교육, 아파트, 주식, 병원, 의식주 문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미움과 배신, 분노 등등, 이런 현실들은 매우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며, 매우 치열하다.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 중에는 간밤에 부부싸움을 했거나 자식들이 말썽을 피워 걱정하고, 또는 기업이 부도 직전에 몰렸거나 실연당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유부남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여자들, 또는 그 반대의 남자들, 경쟁 기업체와의 싸움에 지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골치 아픈 일로 시달리다가 교회에 나와서도 또 심각해져야 한다는 건 청중의 입장에서 고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단순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쉬운 설교를, 자신들에게 익숙한 설교나 세상의 모든 염려와 걱정을 간단히 잊을 수 있는 “쉬운 설교”를, 또는 “재미있는 설교”를 듣고 싶어 한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설교 말이다.
한국의 대중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청중들의 요구에 딱 떨어지는 설교를 할 줄 안다. 내용적으로도 그렇고, 전달 방식에서도 역시 그렇다. 삼박자 축복이라거나 청부론 같은 용어로 포장된 복음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잘 팔린다. 이런 설교는 불치병이 기도로 치료될 수 있다거나, 부도 일보 직전의 기업이라 하더라도 기도하면 기적으로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고지를 선점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원활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는 사명감을 고취시킨다. 민중들의 가장 큰 관심인 재산과 건강 문제에 적합하고 시의적절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 설교는 그들에게 재미와 관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믿거나 말거나) 75만 명의 교인수를 헤아리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담임 목사가 외치는 복음이 바로 그들의 영적인 눈높이에 딱 맞는 셈이다.
필자처럼 청중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고집불통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태도는 바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중들의 눈높이에만 맞추어 쉬운 설교에 치우치는 것도 늘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청중들의 구체적인 삶을 간과한 채 자신의 영적 경지만을 독백처럼 내세운 설교를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청중들의 영적인 성장과 별로 상관없이 당장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전하는 설교를 괜찮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건 아닐는지. 이런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교회 성장론에 종속된 쉬운 설교, 들리는 설교, 재미있는 설교에만 치우치는 건 아닐는지.
노파심으로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밝히겠다. 필자는 민중들의 세속적, 또는 이기적인 관심을 무조건 불온시하는 건 아니며,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현장을 간과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세속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작동되는 삶이 바로 몸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욕구가 이 땅의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열정(에로스)이기는 하지만, 그런 요소들이 늘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훨씬 많은 경우에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사실도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의 설교자는 단순히 대중추수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과 세계를 살리는 설교에 몰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구원론적 설교>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 자신이 그런 구원론적 지평을 분명하게 확보해야 하며, 나아가 청중들로 하여금 구원의 현실에 직면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오늘의 설교자들이 어디에 설교의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는 이미 답이 나온 것이다. 그 답은 곧 하나님의 행위, 그의 계시, 그의 말씀, 즉 하나님이다. 구원론적 설교는 하나님의 사건에 중심을 놓은 설교라 할 수 있다.

생명의 영
구원론적인 설교라는 말은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늘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개인, 사회, 국가, 지구, 우주를 구원한다고, 즉 “건져내고, 살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지만 오히려 죽이는 경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한 사람, 또는 공동체를 폐쇄적인 독단성에 갇히게 하고,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하며, 세상을 향한 적개심에 불타게 한다면 그건 분명히 죽이는 설교 아니겠는가. 이런 현상에 대해서 필자는 일일이 예를 들지 않겠다. 구원론적인 설교가 무엇인지 우리는 한 두 마디로 끊어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설교는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살린다는 게 무엇인가, 또는 “산다, 살아있다.”는 게 무엇인가? 삶, 또는 생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구원론적인 설교라는 말과 연관되는 것들인데, 결국 구원론적인 설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직결된다. 그런데 성서와 신학에서 생명은 영의 문제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현상은 영의 활동이며, 그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런 점에서 생명 지향적 설교는 곧 영적인 설교이며, 거꾸로 영적인 설교는 곧 생명 지향적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설명에서 우리는 구원, 생명, 영의 관계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을 선포하는 설교는 생명을 지향하는 설교이고, 생명 지향적 설교는 곧 영적인 설교이다. 이것은 다시 거꾸로도 그대로 통하는 논의이다. 따라서 영, 또는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설명된다면 당연히 생명이 무엇인지 밝혀질 것이며, 거기서 다시 구원이 무엇인지 해명될 수 있다. 영, 생명, 구원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서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또는 생기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 문으로 들어가든지 결국 서로 소통될 수밖에 없다. 천천히 영이라는 문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필자는 이렇게 질문해야겠다. 설교자인 우리는 영에 대해서 실제로 관심이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열광적인 부흥사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영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적 주제 자체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 종말, 칭의, 성만찬, 하나님 나라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인지 모른다. 영이라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성찰하지 못할 경우에 우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첫째는 영의 활동을 무시하거나 침묵하고 대신 사람들의 업적과 윤리, 실천문제에만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현실적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영성에 심취하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설교는 이런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자의 설교에서 영은 형해화하고, 후자의 설교에서 영은 주술화한다. 전자는 영을 끊임없이 축소하고 후자는 과잉생산한다. 서로 다른 현상처럼 보이지만 양자는 모두 그리스도교 영성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과연 영, 영적인 것은 무엇인가?
영, 또는 영적인 것은 구약성서의 루아흐나 신약성서의 프뉴마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성서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한 루아흐, 또는 퓨뉴마는 “영”, 또는 “바람”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고대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봄에 부는 따뜻한 바람은 죽었던 대지를 살리고,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살았던 대지를 죽인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을 쉬고, 죽은 사람은 숨을 그친다. 이런 현상 앞에서 성서시대의 사람들은 바람과 숨이 곧 생명을 살리는 영이며, 영이 곧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서가 말하는 영은 바로 “생명의 영”이다. 영적인 것은 곧 생명에 속한 것이다. 이 영에 인격적인 성격을 부여하면 그는 곧 성령이다. 특히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성령은 바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이시다.

생명의 신비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과 영을 가리키는 루아흐는 사람이 생산해내거나 추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봄에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겨울에 불어오는 찬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 3:8) 새로운 생명이 어머니 몸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시작되는 숨이 어디서 오는지, 사람이 죽을 때 끊어지는 숨이 어디로 가는지 고대인들은 몰랐다. 모르는 것은 비밀이며, 곧 신비이다. 그들에게 바람은 비밀이고 신비였다. 그것에 따라서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까, 그것에 의해서 만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까 신비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영(바람)에 의해서 시작되거나 끝장나는 생명도 역시 비밀이며, 신비이다. 그래서 신구약성서 기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라고 보았다. 그들이 세상을 그분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고 해명될 수 없는 신비한 사건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이 세상, 그 안의 모든 것, 하늘, 땅, 나무, 동물 등등,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창조를 유지하는 분이시며, 종말론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실 분이시다. 하나님은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바람, 숨, 영, 창조, 하나님, 생명이라는 성서 언어는 생명의 비밀과 신비를 가리키는 동일한 어군이다.
이 세상과 생명을 신비한 사건으로 보았던 성서기자들을 어리석다고 보면 큰 잘못이다. 오늘 우리가 생명현상에 관해서 고대인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해서 생명의 비밀과 그 신비를 그들보다 더 잘 아는 게 결코 아니다. 오늘의 과학자들이 첨단 유전공학을 아무리 발전시킨다고 해도 생명의 실체를 벗겨낼 수 없을 것이며,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될 우리의 후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철학적으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신학적으로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자이다.”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쉽게 생각해보자. 오늘의 과학자들이 무기물만 사용해서 모기 한 마리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조금 쉬운 문제를 내보자. 코스모스 씨앗으로 꽃을 피워보시라. 흙과 물과 태양을 사용하지 말고 순전히 실험실의 도구만으로 꽃을 피워보시라. 코스모스 씨앗에 그 어떤 물리적, 화학적 힘을 강제해도 꽃은 발현되지 않는다. 온 우주가 힘을 합해야만 씨앗은 꽃을 피울 수 있다. 오늘 개인들이 온 우주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게 곧 생명의 본질이며, 그런 차원에서 그것은 곧 신비이다.
위의 설명이 조금 안이했는지, 또는 설교조로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여기서 전하려고 한 내용의 핵심은 다음이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활동하는 신비로운 영이시며, 그가 일으키는 생명도 역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사건이다. 그 성령은 우리가 생명을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없듯이 우리에 의해서 이용되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생명의 영인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는 청중들을 도구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생명의 풍요로움과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청중들의 귀에 쏙쏙 들어가는 아무리 쉬운 설교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신비를 담지 못하면 죽은 설교이고, 거꾸로 아무리 어려운 설교라고 하더라도 거기서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면 살아있는 설교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신비라는 용어를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주술이나 마술이나 인도의 힌두교적 신비주의, 또는 인간 무의식에 자리하는 신비주의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이들이 말하고 있는 창조 영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신비는 매우 분명하고 본질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에 속한다. 참고적으로 매튜 폭스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문명은 참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대신 사이비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열 개의 사이비 신비주의를 지적한다. 국가주의(nationalism), 군사주의(militarism), 파시즘(fascism), 기술(technology), 소비주의(consumerism), 근본주의(fundamentalism), 뉴에이지 사상(New Ageism), 금욕주의(ascetism), 신비숭배(mystique), 심리학 지상주의가 그것이다.(우주 그리스도의 도래, 분도출판사, 74-79 참조) 필자가 보기에 이런 요소들이 알게 모르게 한국교회 안에도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

생명 지향적 설교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생명의 영인 성령에 의존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더구나 매우 수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성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매우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입장에서 설교하는 사람일수록 성령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떤 설교자는 “성령을 받아라.”하고 외치기도 한다. 성령은 카리스마가 강한 어떤 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 좌우되는 영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자유의 영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움직이시는 길을 따라갈 뿐이지 우리의 뜻대로 그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성령이 아무리 자유의 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그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옳다. 우리의 기도로 성령의 뜻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우리가 성령의 뜻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필자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령을 인간의 심리작용 쯤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심리작용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미워하던 마음이 없어졌다거나 십일조 헌금을 아까워하다고 기쁨으로 드리게 된 것을 성령의 활동과 일치시킨다. 어떤 설교자들은 기도하는 중에서 교회당을 건축하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것을 계시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본다면 그런 경험은 생명의 영인 성령을 개인의 주관적인 깨달음과 일치시키는 억측에 가깝다.
과연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는 무엇인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까지, 더 나아가서 글로벌 차원과 우주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설교야말로 성령에 의존하는 영적인 설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청중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는 게 아니라 해방시키는 설교,* 남북분단의 분노와 대립이 아니라 남북평화와 화해와 상생으로 나가는 설교,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왕따 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설교, 인간의 생산과 소비를 자극함으로써 생태를 허물어버리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태살림으로 나가는 설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극단적인 경쟁력 제고가 아니라 오히려 양극화를 극복하고 경제정의에 근거한 정의로운 사회를 제시하는 설교 말이다. 이런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숙고하기 원하는 분들은 몰트만의 <생명의 영>, 엘리스터 맥스레스의 <기독교 영성 베이직> 같은 저서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적으로, 판넨베르크는 죄와 회심을 강조하는 영성과 복음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다. 한국교회의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판넨베르크의 진술은 아래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자유로워진다는 종교 개혁의 중심 사상은 참회적 신앙심을 벗어남으로써만 보장될 수 있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믿는 자는 종교 개혁적 교리강습이라는 전제가 소멸됨으로써 믿는 자로 하여금 기독교인다운 인격적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공격의 경험을 피할 수 있다. 만약 소외되었던 생활방식이 구원받았다는 기쁨과 해방하는 영의 새로운 표명이 우리에게 요청된다면, 니체는 자기가 만났던 기독교인 중에서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조롱한 바 있는데, 전통적 참회 신앙심과의 결별이 불가피하듯 기독교적 신앙심과 생활태도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찾아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 (W. Pannenberg, christliche Spiritualität).

물론 이런 주제가 곧 생명을 살리는 설교의 모든 것이라거나 그것 자체라는 말은 아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일로 그의 활동을 대체할 수 없다. 다만 필자는 위에서 개인과 사회와 생태계 전체에서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활동을 예로 든 것뿐이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설교는 생명(삶)의 신비와 연관되는 것이지 삶의 요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필자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당신이 말하는 생명의 신비는 지나치게 자연신학적이며, 신비주의적이고, 그래서 모호하다. 둘째, 당신의 주장에는 전통적 신학이 말하는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이 약하다. 물론 이 반론은 옳다. 생명의 신비는 단지 자연적 생명현상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선취(先取)된 생명의 신비를 가리킨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종말에 일어나게 될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역사 안으로 선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키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영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참된 영성과 참된 생명의 토대이다. 이 예수의 부활을 일으킨 그 영과 하나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파괴시키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신비한 생명의 리얼리티와 접목되는지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을 보충한다는 차원에서 필자는 마지막으로 생명의 신비가 곧 하나님의 신비라는 사실을 설명해야겠다.  
  
하나님의 신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현재 유지하시고, 결국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이다. 내재적(immanent) 삼위일체일 뿐만 아니라 경륜적(ökumenisch)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이 땅과 역사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을 지금도 구체적으로 통치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분이 아니라 세상 전체와 연관된 분이라는 말이다.
우리 중에는 위의 진술을 모르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없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몇몇 신학적인 용어나 개념으로, 또는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의 본질이 모두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계시하시는 분(Deus revelatus)인데, 동시에 은폐하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동시에 모른다. 이런 이중성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 이런 건 필자의 개인적인 독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성서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가 지켜온 하나님 존재의 신비이다. 영과 생명이 신비이듯이 하나님도 역시 신비이시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통치하신 말이다. 따라서 그는 세계의 비밀이며, 신비이다. 오늘 우리는 심층의 생명을 만날 때 하나님의 신비를 만나게 되며, 거꾸로 하나님의 신비를 만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생명의 비밀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 필자는 바로 그런 설교를 듣고 싶다. 생명의 신비와 하나님의 신비를 담아내는 설교, 그 신비 앞에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는 그런 설교 말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이런 설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브레넌 매닝의 아래와 같은 진술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예수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3:18)에 관한 강론이나 설교를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현대 설교자들이 이 주제의 설교에 인색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카봇과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우리가 개념을 설명할 엄두가 안날 수도 있다. 그것을 언급하면 우리 자신과 회중들을 절대적 신비 속으로 몰아넣는 기분이 든다. 신비는 현대인들의 지성을 당혹케 한다. 모든 난해하고 알쏭달쏭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은 결국 우리의 지식적 연구에 붙여지고 그리하여 결론적 분류작업으로 끝난다. 아무튼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신비를 피하는 것은 곧 경배와 영광을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을 구도자들과 신자들 양쪽 모두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들은 일요일 아침 우리의 잡담거리나 되는 점잖고 사무적인 로터리클럽 풍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경외와 말없는 공경과 전폭적 헌신과 전심의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다. (브레넌 매닝, 윤종석 역, 신뢰, 복있는 사람, 83 쪽)

매닝의 설명에 따르면 히브리어로 영광을 뜻하는 카봇(Kabod)은 구약성서에서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빛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야훼 하나님은 “내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출 33:18-23)*

*김이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말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이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모든 사이비 종교는 무의미하다. 즉 비종교적이고 탈종교적이며 탈제의적이어야만 참된 하나님을 말날 수 있다는 뜻(암 5:4,5)이다. 둘째, 구약성서가 보도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표현들은 대체로 경험적 사건에 관한 신화시적(神話詩的, mythopoeic) 표현들로 구성된 것이지 객관적 보도가 아니다. 즉 각고의 해석학적 탐구를 통해서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설교자들은 몇몇 종교경험을 바로 하나님 자체에 대한 경험인 것처럼 말하는 실수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김이곤, 정년 기념강연 “신의 얼굴과 신의 등 은유에 관한 신학적 명상”, 기독교사상 2006년 6월, 참조)

아무도 태양을 맨눈으로 쳐다볼 수 없듯이 아무도 하나님을 직면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맨눈으로 태양을 직접 쳐다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태양이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루돌프 오토가 거룩한 두려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누미노제” 경험을 한다.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범주화하거나 도구화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느끼는 그 누미노제는 곧 모든 성서기자들의 경험이기도 했다. 그 하나님은 홍수를 내는 분이며, 이집트 파라오의 군대를 홍해에 빠뜨리는 분이며, 광야에서 물을 내시고,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분이며, 토기장이이자, 악어를 장난감처럼 다루시는 분이시다. 오늘 그 야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오는가? 이런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하나님의 신비 이외에 우리가 들어야 할 설교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매닝의 말을 한 번 더 들어보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앞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경험한 신비가가 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하고 역설했다. 기독교가 단순히 윤리, 도덕규범, 인생철학이라면 고난의 습격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카봇에 대한 영광스런 체험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위해 구별된 비전(秘傳)이 아니다. 이 선물을 받을 자들이 누구냐는 물음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렇게 대답했다. “답은 뻔하다. 모든 사람이다.”(같은 책, 90)

그렇다. 필자는 단순한 윤리, 도덕규범, 인생철학에 관한 설교를 듣고 싶지 않고, 대신 나의 전체 존재를 화염으로 불사를, 인간의 모든 프로그램과 설계도를 뛰어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인간 언어까지 뛰어넘는 하나님의 카봇에 관한 설교를 듣고 싶다. 그런 설교 앞에서 내 영혼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그분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영광의 찬양을 올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은, 더 나아가 예배와 설교는 근본적으로 “송영”(doxology)이다.
생명의 신비와 하나님의 신비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우리가 성서본문에서 그런 주제를 어떻게 현실적인 삶에 접목시킬 수 있는지 난감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문제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도 하고, 필자에게 어떤 묘책이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행위인 생명의 신비가 오늘의 구체적인 노동현장과 가정생활, 그리고 정치 경제의 현실 및 국제 정세를 비롯해서 청중들이 살아가는 모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훨씬 많은 과정을 통해서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을 공부해야 하며, 오늘의 삶을 해석하는 인문학공부에서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은밀한 중에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기도는 이 모든 행위의 토대이다. (통합측 충남노회 목회자회 특강, 2006년 12월12일)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