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28일, 목, 단양에 소재한 ‘새고을 기독서원’에서 열린 목회교육연구원 송년 세미나, 목회교육연구원 발행, 김종렬 엮음,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권두논문 이종록 박사의 “삶이 있는 성서읽기” 논찬)

성서텍스트에서 삶을 읽어내는 감수성
정용섭 목사

1. 풀어쓰기의 묘

이종록 박사는(이하 ‘이 박사’) 성서텍스트를 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했던 은혜, 구원, 천당, 성령충만, 선교 같은 개념이 아니라 전혀 차원을 달리는 ‘삶’(생명) 개념 안에서 새롭게 읽으려고 한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거기서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읽어내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것이다.”(14쪽) 논찬자는 이 박사의 이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서텍스트에서 삶을 읽지 못하고 종교규범만을 찾아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강요하는 우리의 강단 현실에서 이 박사의 “삶이 있는 성서읽기”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지평을 심화시켜 줄 것이다.
이 박사는 이러한 성서읽기에서 필요한 관점들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성서읽기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감성과 상상력이다. 감성은 교리에 묶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며, 상상력은 텍스트의 표면에 머물지 말고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성서텍스트는 악보나 기보(棋譜)처럼 어떤 세계를 은폐의 방식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심층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성서의 현실로 들어갈 수 없다.
둘째, 감성과 상상력이라는 성서읽기의 원칙을 제시한 이 박사는 성서읽기 방법을 다섯 가지로 구체화하고 있다. 1)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이 박사는 설교자들이 성서텍스트를 대충 읽는 습관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잘 아는 본문일수록 더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고(25) 주장한다. 정확한 진단이다. 설교자는 성서텍스트를 모든 선입관을 제거하고 “처음처럼”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영적인 세계가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문학적인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문학적이라는 말은 “본문이 (성서기자의)의도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35, 괄호 안은 논찬자 주) 즉 저자의 편집의도가 문학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논찬자의 생각에 따르면 이 부분도 사실은 본문을 꼼꼼하게 읽는 것과 무관한 게 아닐 것이다.
3) 참고도서를 활용해서 지식을 보충해야 한다. 이런 대목은 굳이 “삶이 있는 성서읽기”만의 독특성이라기보다는 설교준비에서 일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풀어쓰기를 하라. 이 박사가 이 대목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다음의 진술에 담겨 있다. “성서읽기는 표면에 드러난 것을 읽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표면에 드러난 것을 읽어내는 것보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것을 풀어내는 작업이 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40) 이 풀어쓰기는 앞에서 제시된 세 가지 원칙이 모두 원활하게 작동할 때 자연스럽게 실행될 수 있다. 이 박사에 의하면 “꼼꼼하게 읽는 것도 풀어쓰기를 위한 것이고, 문학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것도 풀어쓰기를 위한 것이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풀어쓰기를 위한 것이다.”(44) 결국 설교는 성서텍스트에 은폐된 삶의 리얼리티를 저자와 독자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충분하게 풀어냄으로써 오늘의 청중들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여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하는 작업인 셈이다.
5) 통합적인 작업: 이 박사가 다섯 번째로 제시한 ‘통합적 작업'은 앞의 것들과 구별되는 작업이 아니라 풀어쓰기를 실제로 본인의 설교에서 예를 찾아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에스겔 예언자의 신탁과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결심을 예로 들어서 풀어쓰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박사의 “삶이 살아있는 설교”가 말하려는 핵심은 어떻게 풀어쓰기의 묘(妙)를 살릴 것인가에 집중된다. 삶이 몇 가지 규범이나 범주로 해명될 수 없듯이 성서텍스트도 역시 그와 같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견한 삶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가, 그 묘를 찾는 게 바로 이 박사가 이 글에서 제시하는 논점이라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감수성과 상상력이 필요하고, 꼼꼼하게 읽어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는 성서텍스트에 숨겨진 ‘압축파일’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삶과 인문학

위에서 논찬자는 이 박사의 논지를 단순하게 요약했는데, 이제 그의 아티클이 담고 있는 내용을 논찬자의 시각으로 다시 정리하고 평가하겠다.
첫째, 이 박사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이 박사가 “삶이 있는 성서읽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오히려 설교 인해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48) 성서텍스트가 담고 있는 삶과 독자의 삶이 빠져버린 설교는 “말씀의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단지 재미만을 양산하고 있다. “진지한 말씀 연구와 선포 없이 어떻게 교회가 바로 서겠는가?”(49) 하는 이 박사의 호소는 옳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삶이 살아있는 설교”는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안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야 할 설교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관점이다.  
둘째, 이 박사가 제시하고 있는 방안은 매우 실천적이다. 감성, 상상력, 꼼꼼한 읽기, 문학구조 밝히기, 풀어쓰기는 설교행위에서 구체적인 방안들이다. 그 이유는 이미 이 박사가 자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논찬자가 반복할 필요가 없다.
셋째, 이 박사는 성서해석과 적용의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구체화했다. 예컨대 본문 꼼꼼히 읽기 항목에서 셜록홈즈의 탐정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예로 들면서 설교자가 성서텍스트에서 그런 정도의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 뒷부분에서도 각 항목마다 자신의 설교를 예로 들어서 친절하게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넷째, 위에서 제시한 관점들은 이 박사의 글이 견지하고 있는 형식이라고 한다면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관점은 글의 내용인데, 그것은 곧 이 글의 제목인 “삶이 있는 성서읽기”가 가리키고 있듯이 성서텍스트 심층에, 또는 행간에 은폐되어 있는 삶(생명)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이 박사가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성서 안의 삶과 독자의 삶은 그냥 드러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은폐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노출과 은폐의 변증법에 놓여 있듯이 삶도 역시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것을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설교자는 감성, 상상력, 문학적 독법이 필요하다.
논찬자는 이 박사의 “삶이 있는 성서읽기”를 인문학적 성서읽기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바로 삶의 흔적에 대한 반성이며 성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삶의 흔적이 성서텍스트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인문학적 관점이 설교자들에게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을 때 이 박사의 말대로 성서는 “오해와 오용”될 수밖에 없다. 이런 오해와 오용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 박사가 ‘나가면서’ 항목에서 충분하게 지적했지만, 논찬자도 한 마디만 거들겠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전쟁 이야기이다.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곤혹스러운 진술을 만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그 전쟁 장면이 너무 끔찍하여 그 전쟁을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성서기자는 여리고 성의 함락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여 6:21) 여호수아 군대는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즉 비전투요원인 여자들과 노인들과 아이들까지 죽였다. 이게 야훼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이 진술에 대한 충분한 인문학적, 신학적 성찰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얼마든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요즘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대로 미국의 이라크 침략도 합리화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인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현장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지난 해 서남아시아에 불어 닥친 쓰나미 재해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퇴폐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향해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일들도 벌어진다. 타종교를 무조건 적대적인 세력으로 몰아붙이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이 박사와 논찬자는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는 셈이다. 아래와 같은 그의 진술은 바로 논찬자가 하고 싶은 내용이다.

거짓 예언자는 누구인가?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겔 13:2) 자이다. 무엇보다도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자이다. 그들은 신앙을 주술로 바꿔버리는 자이다. 하나님 뜻 대신 제 뜻을 앞세우고, 지독히 현실주의적이지만 비현실적이고 몰역사적이다. 요즘 설교자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그렇기에 ‘삶이 있는 성서읽기’를 제안하는 것이다.(52)

3. 질문  

바둑에서도 수가 낮은 사람은 고수의 바둑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할게 별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박사의 글에서 논찬자가 토를 달 부분은 별로 없다. 다만 한두 가지 궁금한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으로 논찬을 정리하겠다.
첫째, 이 박사는 성서읽기의 원칙에서 감성과 상상력을 제시했는데, 서로 비슷한 두 요소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고정관념과 교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서읽기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것을 곧 감성적 접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조금 궁금하다. 그가 예로 들은 그림 우화는 감성적인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논리적으로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이 박사는 도종환 시인의 그림과 글을 중심으로 ‘못 박힌 도마뱀’에 얽힌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냈다. 3년 동안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주었다는 이야기는 진한 휴먼 드라마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야기의 사실성은 조금 더 합리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인부들이 그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며, 그것에 근거해서 단순히 시인의 감수성으로 확대해석했다면 이것은 진실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지나친 감수성과 상상력은 우리가 부흥회 유의 설교에 자주 보듯이 지나치게 감상적인 신앙으로 빠져들 염려가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박사의 주장이 감상주의라는 말은 아니다.
둘째, 꼼꼼한 성서읽기 항목에서 이 박사는 솔로몬 전승을 예로 들었다. 논찬자는 여기서 딴죽 건다는 말을 들을 각오로 그가 과연 본문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는지 한번 짚어야겠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역대하 1:7절에서 13절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일천번제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분을 읽으면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간절했다는 것은, 우선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올라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간절한 마음이 없었다면, 기브온 산당에까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솔로몬의 기도가 간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9,30)

이 박사는 본문을 설명하면서 다시 13절의 “이에”라는 접속사를 강조한다.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절박성이 이 단어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이 박사가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설교자들은 솔로몬이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지혜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에 머물지 말고 그의 간절함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옳은 지적이기는 하지만 논찬자가 보기에 그런 시각은 여전히 부분적인 데 묶여 있는 것 같다. 우선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올라갔다는 사실에 대한 성서기자의 지적은 우호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게 아닐는지. 기브온의 산당은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 우상을 섬기던 자리가 아닌가. 더구나 일천번제를 솔로몬의 간절한 심정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천 마리의 소나 양을 바쳐서 드리는 제사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그것은 오히려 근동의 우상숭배에서 나온 전통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 이런 일천번제를 흉내 내는 행태들은 물량적인 욕망에 근거한 종교와 연관되는 것들이다. 이 박사는 앞에서 고정관념을 떨쳐내기 위해서 감성과 상상력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 대목에서는 여전히 고정관념에 빠진 게 아닐는지. 즉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신앙적인 행위이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었다는 고정관념 말이다. 어쩌면 성서기자는 본문의 행간에서 솔로몬의 우상숭배적 기질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의 지혜는 결국 억압정치, 사치, 축첩 등의 결과를 빚었고, 그 결과로 그의 아들 대에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물론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이 반드시 솔로몬만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수하 장군이었던 여로보암의 반란과 민심이반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 성서텍스트에서 삶을 찾아내야 한다는 이 박사의 주장이 실제로 설교행위에서 현실화하려면 그가 제시한 몇 가지 방법론에 머물지 말고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것이 훨씬 근원적으로 중요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성, 상상력, 꼼꼼히 읽기, 풀어쓰기 등, 성서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설교자가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준비되지 않거나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실제로 삶이 있는 성서읽기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질문은 논찬자의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이 박사의 논증이 훼손되는 건 결코 아니다. 논찬자는 그가 말하려는 것의 전체적인 흐름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작은 부분에서의 차이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논찬자는 그의 글이 설교자들에게 “성서텍스트에서 삶을 읽어내는 감수성”을 제고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관점을 제시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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