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능한가?
-설교행위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부활이란 무엇인가?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지난 주일을 부활절로 지켰을 것이다. 부활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는지. 부활은 지금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이런 몸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방식의 생명으로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영적인 생명으로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우리는 정확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영적인 삶, 영적인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해야 한다. 모르는 게 어디 이것만이겠는가? 하나님의 나라, 종말, 죽음, 구원, 삼위일체 등등, 거의 모든 기독교 교리를 모르면서도 우리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니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구호만 외칠 뿐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지난 부활절에도 대개의 설교자들은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합니다. 믿습니까? 아멘! 부활의 내용은 접어두고 부활했다는 명제만 나팔수처럼 외치거나 그것의 실존적인 의미만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과연 이게 설교일까? 이런 방식으로 신자들의 부활영성이 깊어질까?  
필자도 부활절 설교를 했다. 필자가 선택한 성서본문은 고넬료에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행 10:34-43)이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가 변증하고 있는 케리그마의 핵심은 39-41절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위의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부활한 예수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설명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신문기자가 보도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대체 예수 부활의 실체는 무엇인가? 베드로는 왜 예수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명시적으로 설명하는가?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는 예수 부활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좀더 솔직하게 질문하자. 부활한 예수는 왜 총독 빌라도와 제사장 가야바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 나타나지 못한 것인지,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가? 만약 부활한 예수가 유대 민중들 앞에 나타났다면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을까? 왜 예수는 작은 공동체에 속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나타나셨나?
오늘 필자는 부활에 관해서 강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길게 끌고 가지 않겠다. 성서텍스트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해명해야 할 설교자들이 성서텍스트를 피상적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그 사실을 짚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부활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다. 그래도 이왕에 부활 문제를 꺼냈으니까 요점만 정확히 하고 넘어가야겠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산다거나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깊이’(depth of life)에 연루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사건이다. 혹시 생명에도 깊이가 있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 세상도 깊고, 사물도 깊다. 그리고 역사도 깊다. 개인의 삶도 깊다. 예수의 부활은 신문보도로 다루어질 수 없으며, 실험실에서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생명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주 전체 역사를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밝혀져야 할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다.

설교의 불가능성

오늘 강의의 제목은 “설교, 가능한가?”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설교는 불가능하다. 부활 설교를 할 사람이 부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형국이며, 하나님을 설교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형국이다. 구원을 선포해야 할 사람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아마 이런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얼 그렇게 까다롭게 생각하냐, 성서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그게 설교 아니냐, 하는 반문이 가능하다. 옳은 지적이지만, 이 말은 두 가지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첫째는 오늘 설교자들이 성서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박하게 전달하기만 한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자들은 그렇게 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사명이, 또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성서를 자신의 오만가지 생각으로 덧칠한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서가 얼마나 심각하게 오용, 남용, 왜곡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사태를 ‘성서도구주의’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오늘 우리의 강단에서는 성서말씀이 도구화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큐티’공부이다. 그들은 성서구절을 인용해서 삶에 적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여기 모인 분들 중에는 큐티가 무슨 문제가 그렇게 트집을 잡는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조용한 시간에 성서를 묵상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마음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하게 되는 경우에 성서의 존재론적 계시능력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요셉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요셉의 ‘꿈’에 대해서 관심을 쏟는다. 우리도 요셉처럼 큰 꿈을 꾸자는 식으로 성서를 읽는다. 그러나 사실 성서는 요셉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가 꿈을 꾸었던 그렇지 않던 상관없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어떻게 통치하시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얼마나 불순하게 성서를 읽고 있는지 여기서 무슨 설명을 더 보탤 필요가 있으랴.  
참고적으로, 예전적 예배에서 성무일과가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가 다 이유가 있다. 최소한 세 가지 성서본문이 예배에서 읽힌다. 구약,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이런 예전적 미사를 보면서 강론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묶여 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성서말씀은 그것이 그대로 읽힐 때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를 드러낸다. 오늘 우리 강단의 문제는 자신의 천박한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덧칠을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성서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게 설교라는 주장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또 하나의 관점은 성서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에서 보듯이 다른 사람에게는 예수가 나타나지 않고 몇몇 소수에게만 나타났다는 진술이 어떤 신앙적 깊이를 담고 있는지 우리가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서텍스트와 오늘 그것을 읽어야 할 독자, 즉 콘텍스트 사이에 놓여 있는 단절을 극복해야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무슨 단절이야, 그런 건 모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그냥 말씀을 순수하게 믿으면 모든 게 해결돼,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믿음 만능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독선이나 광신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사이비 이단들의 가장 큰 특징도 바로 이 믿음이 아닌가. 우리는 아무리 고된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 다리를 놓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 다리를 놓은 작업이 곧 해석인데, 여기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서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앞에서 말머리로 삼은 주제와 연결해서 본다면, 초기 기독교의 부활이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도대체 성서기자들은, 그리고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경험을 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경험했는가?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모든 주민들을 싹쓸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을까? 설교자인 필자는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앙경험을 알고 싶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한가? 아브라함의 경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경험이 가능한가? 안타깝지만, 아니 당연하게도 필자는 그 근처에서만 어슬렁거릴 뿐이지 그 실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는 마치 오늘의 연주자들이 모차르트 음악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성서기자들의 하나님 경험을 우리가 정확하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는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이 기본적으로 언어로는 묘사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하게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성서기자들은 그걸 문자로 기록했을 뿐이다. 따라서 성서에는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모순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셨다거나 하나님이 사람처럼 말하셨다는 내용들도 나온다. 그런 것들은 모두 암호이며 기호이다. 성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 어두운 두려움으로 경험한 성서기자들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어쩔 수 없는 기호이며 암호이다. 이제 우리는 그 문자인 성서를 뚫고 들어가서, 그 문자 너머에서 그들의 거룩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포착해야만 그들의 경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세의 호렙산 경험이나 초기 기독교의 부활경험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과연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우리가 성서의 세계에 대해서 도대체 아는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아는 게 없으면서도 왜 설교자들은 아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친단 말인가?  

이게 뭐꼬?

필자는 성서의 세계는 둘째 치고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지구에서 왜 물이라는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나름으로 설명하겠지만 그런 설명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다. 그냥 오성(悟性)의 차원에서 생각해 봐도 그건 신기한 현상이다. H2O분자로 구성된 물은 분명히 실체이긴 하지만 모양은 없는, 참으로 신기한 물리현상이다. 이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만약 지구에 물이 없었다면 생명 현상은 불가능하다. 최근 우주물리학자들이 150광년 떨어진 어느 별의 행성에서 물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빛의 반사 굴절을 통해서 그걸 발견했다고 하는데, 사람이 많이 똑똑해 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게 실제로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150광년 거리의 행성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우주 어느 곳엔가는 생명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능성이라는 것도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낮지만 말이다.
이런 물리적 현상만이 아니라 필자는 설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청중들을 알지 못한다. 내 아내를 나는 모른다. 그의 가치관, 식성, 성격, 잠버릇 같은 것은 알지만 정작 중요한 그의 영혼은 모른다. 모르면서도 나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내 딸들도 나는 모른다. 그네들의 영혼에서 지금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을 모르는 판에 어떻게 내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들의 영혼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르면서도 우리는 쉽게 ‘영혼구원’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모른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깊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약장사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신자들이 교회에 잘 나오고 조금 경건한 모습을 찾아가면 그것으로 영혼 구원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사람은 얼마든지 남을 속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인다. 표면적으로는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영혼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상태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지금 필자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셈이다. 성서기자들의 영적 경험을 따라가기도 힘들고, 성서말씀을 전달해야 할 청중들의 영혼도 모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도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아니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것은 거의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것뿐이다. 내 인식에 성서와 인간을 포함한 이 모든 세계는 어두움이다. 동양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나는 이 세상의 ‘현묘’ 앞에서 어지럼을 느끼고 있다. 초등학생이 휄덜린의 시 앞에서 선 심정이랄까, 유치원 어린이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앞에 선 심정, 또는 500만개 조각으로 만들어진 퍼즐을 풀어야 할 중학생과 같은 심정이다. 그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이렇게 무식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내 영적인 상태를 잘 표현한 시를 얼만 전에 읽었다. 고은 선생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선술집

가원전 2천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쉬’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에서)

신탁

고은의 마지막 탄식 ‘어쩌냐’ 이게 바로 필자의 심정이다. 이건 단지 막막하다는 사실 앞에서 나오는 탄식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큰 긍정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큰 긍정을 설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긍정은 무조건 나오는 게 아니다. 그건 맹신도 아니고 광신도 아니며, 자기도취도 아니다. 이런 큰 긍정은 큰 부정을 통해서만 나온다. 우주와 일상의 관계가 우리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할 때만 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긍정이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허약하다면, 설교를 하지 말라는 건가? 가능하면 설교하지 않는 게 좋다. 여기 설교로 밥 먹는 분들이 있다면 그걸 특권이나 사명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프로메테우스가 져야 했던 신의 저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필자가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는 중이다. 그러나 기본 방향만은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니, 말이 되는가? 피아노 학원에 1년 다니면서 겨우 바이엘 연습을 한 사람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연주하는 꼴이라니 얼마나 우스운가? 이런 점에서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소극적인 설교’를 주장했다. 자기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 말라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고, 베드로도 예루살렘 저자 거리에서 그렇게 전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수많은 설교자들이 등장해서 말씀을 전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이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성서시대에도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출몰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설교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설교해야하는가? 누군가는 설교의 짐을 져야하지 않을까? 지금 원칙적인 것만 말하겠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신탁(神託, oracle)사건이다. 설교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거다. 언어존재론의 차원에서, 설교는 바로 ‘로고스’의 행위이다. 그 로고스는 곧 성령의 힘이기 때문에 설교는 성령이 하는 일이다. 인간은 단지 통로일 뿐이다. 마치 피리 자체가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바람이 소리를 내듯이 성령이 설교하는 거지 설교자가 설교하는 게 아니다.
당신의 말은 단지 이론일 뿐이지 실제로는 사람이 설교하는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람이 설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설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에 불과하다. 그런 설교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아직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그 영적인 사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이런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가 시를 쓴다는 말을 사이비 시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듯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이 설교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바로 신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접(神接)한 무당처럼 성령에 접한 사람들이다. 그럴 때만 설교는 가능하다. 다시 묻는다. 설교, 가능한가? 우리가 모두 무당이 될 때만 그것은 가능하다.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바람이 자기를 소통하게 만드는 피리처럼, 그리고 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힘으로 자아를 땅바닥에 놓아버리는 무당처럼 우리가 생명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설교는 가능할 것이다. 태초에 말씀(다바르)으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말씀으로 그 창조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그 말씀(로고스)에, 그 말씀의 영에 사로잡히는가 아닌가 하는 게 설교행위에서 관건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제목은 다시 성령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을 화두로 삼고 오늘의 강의를 마치자. (2007년4월12일, <설교와 선동사이에서> 출판기념회 특강, 대구 와이엠씨에이)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