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강단과 남북통일문제

정용섭 목사

남북통일 문제는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오래 전부터 매우 중요한 담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은 크게 볼 때 통일신학의 이론 수립과 통일 실천운동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이는 박순경 교수이며, 후자는 대표하는 이는 고 문익환 목사이다. 어디 이 두 분뿐이겠는가.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꾸준하게 통일문제에 천착해왔다. <기독교사상>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보면 이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군사독재 시절부터 조그련(조선그리스도교 연맹) 측과의 크고 작은 만남을 통해서 남북 기독교의 관계를 신장시켰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기독교교회협의회와 상당히 상충되는 대북관을 가진 한기총마저 조그련과 관계 모색을 시도하고 있는 마당이니, 오늘 한국교회는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서 전혀 새로운 상황을 맞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변화에는 여려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1990년대에 일어난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인해서 남한 기독교인들의 레드 콤플렉스가 일정 부분 희석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련의 연방 해체에 따른 북한의 고립과 경제적 몰락, 크고 작은 재해로 인한 북한주민의 극심한 고통은 남한 교회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자세한 통계를 조사하지 못했지만 지난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북한주민을 경제적으로 돕는 손길 중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회의 손길이 가장 컸을 것이다. 지난 20년 가까이 꾸준히 북한 주민을 도운 교회의 힘들이 남북교회의 관계 개선을 가져올 정도로 축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간접적으로는 지난 10년 동안 남한정권의 햇볕정책으로 인한 남북한의 상호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점도 중요하다.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여한 북한 응원단들의 인기가 그 당시 속된 말로 짱(?)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남북통일문제가 한국교회 안에서 전향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총체적인 동력을 얻고 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북핵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 지난 몇 년간 한국교회는 이런 부분에서 오히려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 중의 일부는 툭하면 반(反)핵, 반(反)김정일, 반북을 이슈로 서울시청 앞에서 정치 색깔이 짙은 대중 집회를 때로는 기독교 단독으로, 때로는 극우보수 단체와 어울려서 개최했다.
이런 대중 집회는 한국사회가 기독교의 실체를 인식하는 중요한 통로로 작용했다. 기독교는 반통일 집단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회자 세습, 교회 분열, 양심적 군복무 거부자들을 위한 법개정 반대, 사학법 재개정 등, 욕먹을 일이 많은데 남북통일 문제에서도 우리는 욕먹을 일만 골라서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지난날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벌어놓은 원금을 모조리 까먹고 있는 중인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진도나간다면 한민족이 기독교를 외면할 날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다가 외면 받는다면 그건 오히려 십자가의 길이라 생각하고 달게 받아야겠지만, 일종의 반역사적인 고집을 부리다가 외면 받는다면 그건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요즘 한국교회가 통일문제 앞에서 주춤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북한을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강하게 액션을 취하는 반면에 통일지향적인 분들은 목소리를 낮춘다는 데에 놓여 있다. 물론 그 중간에는 뚜렷한 관점이 없는 층도 두텁다. 어떤 집단이나 매파들의 목소리가 큰 법이다. 필자의 생각에,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전반적으로 반통일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어쨌든지 큰 틀에서 볼 때 이제 한국교회는 극단의 냉전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어두운 터널을 거의 빠져나오는 길목에 도달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이 깊어보이듯이 문제는 극단주의자들의 과격한 발언과 행동으로 인해서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인다는 것뿐이다. 특히 강단의 횡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설교자들의 무분별한 설교로 인해서 한국사회에서 한국기독교가 자칫 반통일집단으로 왕따 당할까 염려스럽다. 그런 설교가 우리 주변에 전방위적으로 횡행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몇 대목만 살펴보자.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설교 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형편이 월남이 망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미군이 철수하면 남한도 틀림없이 적화통일 되고 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대학살을 당하거나 보트피플이 되고 말 것입니다.”(2006년 10월22일) 이런 진술에서 우리는 북한을 향한 김 목사의 불신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불신은 남한 정권을 향해서도 똑같은 크기로 작동된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요직에 북한의 간첩과 친북 공산주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빨갱이들이 차고앉아서”(2006년 10월15일)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총신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대구동신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며, 평소에 기독교 영성에 깊이 천착하는 설교자로 이름이 난 권성수 목사도 북한 문제에서만은 설교자가 지녀야 할 평상심을 쉽게 잃는다. 그는 작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행한 설교에서 북한 정권을 깡패, 강도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김정일과의 평화 협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자신은 북한 정권을 도와주는 금강산 여행을 안 간다면서, 남한 주민의 안보불감증을 도덕적 해이와 연결시키고 있었다.(2006년 10월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중의 한 곳인 새문안교회 담임으로 활동하는 이수영 목사의 설교에서도 반통일적 발언들이 양산된다. 이 목사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반대자이고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의 이론 바탕 자체가 무신론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말살시켰습니다.”(2004년 3월21일) 북한을 향한 그의 적개심은 김홍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현 정권을 향해서 그대로 발산된다.

수백만 명의 동족을 희생시켰으면서도 쉬지 않고 대남투쟁을 선동해온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며 6.25북침설을 주장하는 내용의 게시물이 아무리 나돌아도 태연하게 내버려두는 정권입니다. 김정일과 그 도당들만 좋아하며 웃고 있을 일들을 골라서 해온 정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김정일의 뜻대로 통일되는 길을 착실히 닦아온 최근 두 정권이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이미 친김정일 사이트에서는 버젓이 떠들고 있고 현 정권은 모른 척 묵인하고 있는 구호인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을 대통령으로 하는 평화통일”안을 국민 앞에 내미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2004년 9월12일).

필자는 교회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발언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이런 험악한 사태가 야기되는 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전쟁을 비롯한 해방 이후의 한반도 역사에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상극으로 대립했다는 사실이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지던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전 지역에서 기독교가 초토화되었으며, 소위 인민재판의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분들이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북한을 향한 적대감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극단 대립으로 인해서 벌어진 살육사건을 <손님>이라는 작품에 담아낸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 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기독교나 맑스주의 모두 한민족 공동체 안에서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북한 체제가 매우 불량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국제역학적인 문제들과 반복적인 자연재해, 그리고 북한 정권의 비효율성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존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사비 지출은 여전하며, 남한과의 관계에서도 고분고분한 적이 별로 없다. 국제사회도 분명히 북한 체제를 고운 눈길로 보지 않는다.
필자는 북한을 향해 공격적으로 설교하는 분들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들의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민족적(주체적)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는 북한을 향해서 백기 들고 나서라고 윽박지른다거나,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분단체제를 평화체제로 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이념을 뛰어넘어 케리그마에 토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어야 할 주일공동예배 강단에서 현 정치인들보다 더 심한 정치 공학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와 반대로 또 하나의 극단적 목소리도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가장 진본적인 교회로 알려진 향린교회의 조헌정 목사는 한민족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평화통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평화통일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미국이라고, 더 정확하게는 주한미군이라고 여긴다. 졸고 “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에 대한 반론에서 조 목사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필자는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24년의 미국에서의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 민족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이 역사인식에서 오늘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분단사고의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이 극복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다. (기독교사상 2007년 6월호)

평화통일이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주장은 필자의 입장과 동일하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장애라는 주장을 지지하기는 어렵다. 주한미군의 문제는 국제정치에서 아마추어인 목사가 따라잡기에는 훨씬 복잡한 사연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의 논리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 목사 역시 북한과 공산주의를 무조건 악으로 봄으로써 평화통일의 물길을 더디게 만드는 보수 우익의 설교자들과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양극단으로 구별되는 분들의 설교만이 아니라 비교적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들에게서도 북한 문제는 경솔하게 다루어지는 일이 흔하다. 예컨대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친미 사대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의 설교는 북한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이들과 구별되기는 하지만 경향성에서는 오십보백보다. 그는 설교 시간에 이렇게 북한을 조롱한다.  

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꼭 저 북한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비비 꼬아가지고 도움을 얻어내려고 한단 말이죠. 이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윤리와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결론이에요. <중략> 첫째는 뭐냐 하면 I'm sorry가 없다는 것,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I'm sorry, 또 하나는 들어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Thank you,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 사람들 만나면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합니까?  I'm sorry, I'm sorry. 자기가 발을 밟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도 밟히는 사람이 I'm sorry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밟아놓고도 I'm sorry를 안 해요. 그러니까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기독교 문화가 준 그 영향입니다.(마리아 찬가 1, 2000. 12.17일자 설교).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입장도 역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유대교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1994년 7월4일부터 8일까지 삼일교회에서 제주 선교를 떠났다. 마지막 날 저녁 모든 선교 일정을 마치고, 한라산 기도원 정산에서 민족 통일과 복음화를 위한 철야 산기도가 있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김일성이 죽어야 한다면 죽여서라도 민족의 장벽이 열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놀랐다. 그 철야기도가 있은 날 김일성이 죽은 것이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라는 것을 확신하다.(낙타무릎, 182 쪽. 2006년 7월2일 설교)

앞에서도 말했지만 북한은 분명히 불량국가이다. 그뿐만 아니라 60년 가까이 분단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와 정서적으로 통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게 많다고 하더라도 통일 지향적으로 생각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통일문제와 연관해서 세 종류의 설교자들을 제시했다. 첫째는 북한을 향한 적대감으로 인해서 통일을 가로 막는 설교자들, 둘째는 평화통일의 장애 원인을 주한미군에 돌림으로써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설교자들, 셋째는 통일에 대한 진지한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반통일적인 발언을 행하는 설교자들이 그들이다. 남북문제와 연관된 설교를 모두 이 세 유형으로 담아낼 수는 없지만, 하나의 윤곽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기독교적 통일신학, 더 정확하게는 통일 영성은 가능하지 않다. 첫째 부류는 근본적으로 반통일적인 신념으로 묶여 있으며, 둘째 부류는 가장 통일 지향적이기는 하나 비현실적이며, 셋째 부류는 성서의 평화신학에 관한 뚜렷한 시각 없이 단지 신자유주의적 시류에 영합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안적으로 네 번째 부류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들은 통일 지향성이 분명하며, 동시에 현실적이어야 하고, 시류를 넘어서는 복음적 역동성을 확보한 이들이어야 할 것이다. <성서한국>이 바로 이런 대안이 될 수 있을는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성서한국>이 분단된 한민족의 이 답답한 현대역사를 복음의 역사 변혁적 차원에서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겨레 21>에 게재했던 졸고 “설교인가, 선동인가?”의 마지막 대목을 이 글의 결론으로 삼겠다.

북한정권에 대한 기독교의 체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하더라도 이제 전쟁이 끝난 지도 50 여년이(희년) 지났고, 공산주의 이념도 퇴색해버린 이 마당에 여전히 1960-70년대의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외면하고, 지나간 험악한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임상치료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교회에 절망하지 않는다. 적개심과 분노에 가득한 설교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한민족의 평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설교가 훨씬 많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목소리가 밤꾀꼬리 노래처럼 여리다하더라도 언젠가 천둥처럼 큰 함성으로 울려나지 않겠는가!

<2007년 7월25일, 성서한국 통일대회 발제, 강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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