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봉사와 선교
정용섭(샘터교회 목사, 목협회원)

필자가 좋은 느낌으로 알고 있는 의사들과 연관된 NGO는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MSF)와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Association of Physicians for Humanism)이다. 199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국경’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인의협’은 국내 단체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금년이 ‘인의협’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인의협의 활동은 주로 한국국민들의 의료민주화에 집중되는 것 같다. 사회의 전형적인 기득권층에 속하는 의사들께서 이런 운동에 기꺼이 참여한다는 게 필자에게는 뜻밖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목협’(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이 한국교회에서 마이너리티 운동인 것처럼 ‘인의협’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목협과 인의협은 이 세상의 인간다움, 혹은 박애주의(humanism)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셈이다.

목사와 의사

여기서 같은 배를 타고 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건 단지 동지적 연대성을 요청하는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다. 종교와 의술은 원래 뿌리가 같다. 성서의 구약시대에 종교를 담당하던 제사장은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종교와 의술의 일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축귀나 치유를 주로 감당하는 무당들의 무속에도 역시 종교와 의술이 비슷한 무게로 작용한다. 대략 3년에 걸친 예수의 공생애에도 이런 현상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수의 이런 행위를 오해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사탄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이런 능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했다.
그런 것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사회에나 해당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과학실증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종교는 영적인 분야에 속하고, 의술은 몸에 관여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의사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학 정보에 따라서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목사들은 사람의 몸에 관해 신경을 껐다. 종교가 의학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흡사 중세기의 마녀재판처럼 진리를 훼손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성속이원론, 영육이원론의 차원에서만 옳다. 아무리 과학적 사실을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몸이 기계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의학도들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로만 취급해도 좋은 사물은 아니리라.
지금 필자는 목사가 사람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다. 제사장들이 병 치료 역할까지 도맡았던 고대 시절도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경기도 포천의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유(神癒)집회를 필자는 기독교의 미숙성이라고 생각한다. 곳곳의 기도원에서 아픈 사람을 안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안찰을 시행하다가 인명을 다치는 일들도 없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거나 아예 의료의 도움을 거부하는 행위는 일종의 정신질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의 생명이 단지 의료행위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게 슈바이쩌의 ‘생명경외’ 사상과 얼마나 연결되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도구화될 수 없는, 즉 우리의 과학적 접근을 근원적으로 뛰어넘는 존재론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영 루아흐

성서는 이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이지만 그중에서도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생명 자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자기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개념으로 바꿔 말한다면 흙은 질료이며, 숨은 형상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 이 숨을 불어넣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그림에는 숨이 손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성서에서는 이 하나님의 숨이 생명의 중심이다. 몸은 이미 세상에 있던 흙에서 왔지만 숨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이 하나님의 숨은 히브리어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영, 또는 바람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영과 바람을 하나로 여겼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 생태계는 바람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사람도 숨을 쉬는가 멈추는가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니 바람이 바로 영이 아니겠는가. 성서에 의하면 사람만이 이 영을 받았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 인의협 회원들이 위의 성서 이야기에 동의하든 않든 큰 상관은 없다. 우리는 최소한 생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신비롭다는 사실, 더 나아가 거룩하다는 사실에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든지 아니면 순전히 기계적 진화론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지 오늘 우리가 그것을 계량화(計量化)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인간의 생명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닐는지.
다시 예수의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하고 넘어가자. 예수는 그 당시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라 할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법 때문에 자주 논쟁을 벌였다. 아무런 노동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던 안식일에 예수는 장애인들을 치료했다. (율)법 일원론에 빠져있던 바리새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을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온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 여기서 사람은 바로 생명을 가리킨다. 이 아포리즘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사람과 그 생명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까? 다른 이들의 일은 접어두고 목사들의 목회 행태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오늘의 목회는 신자들을 다루는 기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설교도 일종의 선동이 되고 말았다. 교회성장 만능론에서 자유로운 교회가 한국에 얼마나 될는지, 필자는 자신이 없다. 요즘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인해서 불거진 문제이지만, 소위 단기선교도 역시 이런 교회의 전략적 사고방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1990대 이후 신자들을 결집해 낼만한 신앙적 동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해외선교는 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 없이 단순히 목회 전략적 차원에서 수행된 단기선교는 이번과 사태와 같은 결과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과 민족을 둘러 싼 아주 복합적인 삶의 흔적들을 외면한 채 땅 끝까지 가야 한다는 신앙적 열망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필자는 이번 사태에 연루된 분들의 신앙적 진정성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선교행위들이 전략적인 착상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인격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 인식의 문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인간, 세계, 역사에 관해서 꾸준히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교회는 자기들도 모르는 순간에 기독교 본질로부터 벗어나게 마련이다. 앞서 예로 든 바리새인들이나 중세기 마녀재판장들이 그 전형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절대화하게 되었고, 중세기 교회는 교회 체제를 절대화하게 되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한국교회의 선교지향성도 이런 자기 절대화의 부산물이다.

구원론적 의료행위

앞에서 목사들이 목회행위를 기술로 접근한다고 지적했는데, 의사들은 어떨까? 인간과 생명을 수단화하는 의사들은 없을까? 거꾸로 인간과 생명의 거룩성을 의식하는 의사들은 있을까? 생명의 존재론적 세계를 경험한 의학도들은 얼마나 될까? 의료행위마저 철저하게 경제논리에 파묻혀 버린 이 시대에 말이다. 생명을 존재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은 억지로 가르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이 어떤 깨우침이든지 결국에는 자기만이 할 수 있다. 의과대학교 커리큘럼이 어떤지는 문외한인 필자는 전혀 모른다. 혹시 의료윤리라는 과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과목의 학점을 이수했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목회의 상업화와 의술의 상업화는 교육의 상업화와 더불어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이다. 목사도 먹고 살아야 하고, 의사도 먹어야 하고, 선생도 먹고 배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구별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에만 그들의 행위는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받을 수 있다. 자칫 필자의 언급이 설교 조로 흐를 염려가 있어서 이 대목은 그만 두려고 한다. 다만 종교와 의술은 행위자가 그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 그 근본이 허물어진다는 것만은 확실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발제의 제목은 “의료봉사와 선교”이다. 아마 의료 선교를 염두에 둔 제목으로 보이는데,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이 제목은 의료를 통한 봉사가 곧 선교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는 선교보다는 의료봉사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의 논의와 연결해서 필자의 생각에 의료는 근본적으로 봉사가 아니다. 의료 행위는 의술을 통해서 이웃을 섬긴다기보다는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컨대 어머니가 저녁식탁을 준비하면서 가족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형식적으로는 봉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삶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더 테레사가 자기의 행위를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에 참여했을 뿐이다.
어쩌면 오늘 필자의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또는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인의협의 사업인 노숙자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사업이 봉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봉사에 나서는 것만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 의사들 중에서 과반수가 인의협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면 세상은 확 바뀔지 모른다. 필자는 봉사의 차원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게 쉽지는 않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의 봉사는 일종의 개량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봉사한다는 말에는 이미 상대를 대상화한다는 뜻이 있으며, 이 대상화는 분별심을 그 뿌리로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분별심이 모든 잘못된 생각의 시작이다. 봉사, 상대화, 분별심을 뛰어넘어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의료행위가 참된 의미에서 의료봉사이며, 참된 의미에서 선교가 아닐는지.

하나님은 생명이다.

생명 사건에 온 영혼으로 참여하는 행위가 곧 종교이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영혼은 몸과 대비되는 정신적 생명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장 궁극적인 생명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진다. 티베트 불교도들 중에서는 수년의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오체투지로 그들의 성지인 라싸를 방문하는 이들이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가장 심층에 놓인 생명이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명시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명 앞에서 진지한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곧 생명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만약에 우리가 생명에 참여한다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지금 목사와 의사는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목사와 의사의 직무는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 그런 점에서 거룩하다. 생명이 거룩하다면 그 생명을 치료하는 의사도 거룩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거룩하다는 단어 “하기오스”는 어원적으로 볼 때 ‘구별되다.’는 뜻이다. 다른 직업에 비해서 의사와 목사의 직업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특히 생명을 거룩하게 접근함으로써 목사와 의사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목사와 의사가 거룩하게 접근해야 할 생명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각자 나름으로 생명의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 생명은 무엇인가? 생물학과 물리학, 심리학과 사회학이 생명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완료된 대답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명이라는 대양에 이제 겨우 배를 띄우고 항해를 시작한 것과 같다. 단적으로 노화의 비밀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생체 시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 생명의 비밀은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추적하는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그 생명 현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생명의 본질이 완전히 해명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날이 요원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앞서 잠간 짚은 대로 생명은 우리에게 여전히 비밀이며, 신비가 아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따라서 박애주의자(humanist)와 박애적 기독교인(humanistic christian)으로 갈라진다. 생명을 단지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유기적 현상이라고만 본다면 그는 박애주의자이며, 초월적 힘의 개입이라고 본다면 기독교인이다. 생명의 내재에 방점을 찍는가, 아니면 생명의 초월에 찍는가의 차이이다. 이런 구분이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옳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지금 필자는 박애적 기독교인이 박애주의자보다 도덕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 차이를 짚었을 뿐이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박애정신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풍부한 박애주의 정신으로 병든 생명을 치유하는 일은 우리자신까지 치유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선교이다. (2007년 9월18일, ‘인의협’ 대구지부 월례모임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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