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 인간구원

(1996. 충청지방 교회대회, 정용섭목사, 현풍제일교회 담임)

독일에서는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교회가 격년제로 ‘교회의 날’(Kirchentag)을 개최하는데,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은 독일교회만이 아니라 유럽전역, 나아가서 세계 전체 교회의 주요 현안들로 부각된다. 1996년도 대회는 6월에 함부르크에서 열렸는데, <교회와 세계> 11월호가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서 신자의 감소문제가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로 다루어졌다고 한다. 거기서 소개된 두개의 그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하나는 검은 독일식 목사가운을 입은 사람이 교회당 모형으로 만들어진 잠자리채를 들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그림이었으며, 두번 째는 버스 안에서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람의 모습인데 그의 외투 속에 독일식 흰색 리본의 목사 후드가 그려져있었다. 말하자면 두 그림이 시사하는 바는 독일목사들이 사생결단으로 신자들을 교회에 끌어오려고 발버둥칠 정도로 독일 교회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교회 예배인원 25명이 채워지지 않으면 교회를 폐쇄해야하며 그러다 보면 목사도 명예퇴직 비슷한 경우를 당할 테니 강압적으로라도 사람들을 교회에 끌어오고 싶어 하는 안타까움을 만화식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 교회가 벌써 파장 분위기라거나 아니면 멀지 않아 망하게 될 것이라고 보면 잘못이다. 이는 여전히 WCC(세계교회협의회) 부담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내는 교회로서 이런 행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자리를 반성해 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려는 저들의 진지한 자세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교인수가 준다는 문제가 그들에게도 대단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는 훨씬 일천하기 때문에 거품경제처럼 순식간에 파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이제라도 무언가를 준비해야할 시기가 됐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나?
요즘 기독교 신문에서도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교회 도덕성을 회복해야한다, 목사의 권위주의가 사라져야한다, 기복주의를 떨쳐버려야 한다, 혹은 적극적으로 교회 프로그람을 다양하게 해야 한다, -예컨대 노년 목회나 청년목회와 같은 특화목회-, 교회개척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교회일치를 이루어야한다, 등등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런 문제들도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하기도 하고 절박하기도 한 부분은 역시 교육에 있다. 교회교육이다. 교회행정이나 예배순서, 사회봉사활동의 갱신은 필요하긴 하지만 교회교육에 비해 순위가 처지는 문제다. 왜냐하면 교육은 본질의 문제이고 다른 것은 그 본질에 의해 드러나는 결과나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1. 교의학적 질문들
21세기에 직면해 있는 교회, 특히 교회성장 둔화 내지 정체라는 전혀 다른 상황 안에 빠져들어 가는 한국교회가 교육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는지 우리는 <교회교육, 인간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생각을 나누려고 한다. 이 제목에는 네 가지 단어가 겹쳐서 나오고 있다. 교회, 교육, 인간, 구원이 그것들이다. 사실 이런 단어들은 수천 년, 아니면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인류정신사에서 가장 핵심적 주제로 다루어진 것으로서, 실로 어마어마한 무게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이 각각의 주제들을 독립적으로 다룬 다음, 강연의 발전에 따라 점차적으로 연관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1) 교회
오늘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또한 더 결정적인 문제로 예수님이 과연 오늘과 같은 교회 공동체를 원하셨는지도 알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신앙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역사 속에 교회의 등장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당연한 결과지만 객관적인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매우 우연한 과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예수님이 생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지만 어떤 구체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바울 시대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제 모습을 갖게 된다. 바울의 많은 편지에서 우리는 그의 기독론과 아울러 교회론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울이 예수님의 생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사도들을 제치고 교회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것이다.
만약 교회를 기독론적인 방향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정당하고 유일한 길이라면 교회론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의 기초인 <하나님 나라>에 기초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바로 교회의 기초다. 엄격하게 본다면 예수님은 교회를 직접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오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엄청난 사건이라 해도 그런 예수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는 항상 하나님 나라를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 까지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일단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모든 욕망과 설계를 뛰어넘는 하나님만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지배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인 그 나라를 예수님은 비유로서 설명하셨는데, 이런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 속에서만 교회의 존재근거가 정당하게 된다.
2) 교육
인간문명이 있는 곳에는 고도의 교육이 실행됐다. 문명은 곧 교육을 통해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가장 옳은 길이라는 사실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스승들이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대목은 과연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변화되는가 하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가능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요즘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과 동양의 노장 같은 분들이 언급한 교육의 본질은 이제 사라지고 거의 실용적 기술전달만이 교육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남보다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걸 가리킨다 하겠다. 이렇듯 남보다 뛰어난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교육의 본질이며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 되도 한참이나 잘못된 말이다. 실용적 인간을 만들어가는 학문과 기술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자체의 변화를 목표로 할 때만 교육의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이건 곧 인간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교육은 인간구원을 지향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질문하자. 오늘의 교육이 인간구원을 지향하고 있는가? 오늘의 교회교육이 인간구원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오늘 강연의 주제이기도 한데, 우선 인간과 구원문제를 잠시 나누어 짚어보도록 하자.
3) 인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칼 세이건과 그 부인이 함께 쓴 책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에 보면 오늘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오늘 우리는 아무런 출생 자료도 없이 남의 집 대문간에 버려진 신생아와 같다고 말이다. 생물학적인 면에서도 우리의 근거가 확실하지 않고 실존적인 우리의 경험에서도 역시 우리 존재의 불확실성을 말해준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리적인 인간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하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리적 대답만 갖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우리 기독교의 전통인 이러한 교리들은 상당히 많은 사상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됐기 때문에 그런 주변 사상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수반되어야만 우리의 교리가 그들에게 접근될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의 형상, 죄, 구원이라는 말들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점만이라도 분명히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인간은 매우 다양한 삶을 경험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수십억의 인간 중에서 똑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존재들인 개체로서의 인간은 7,8십년 동안 이 땅위에서 살면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다양한 삶들을 전제하지 않는 한 기독교 복음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귓전에서만 맴돌고 말 것이다. 특히 복음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이런 <인간론 이해>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접근하고 해석해 버리고 만다.
4) 구원
교회가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구원론은 종교적 차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삶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구원론적이다.> 정치행위, 예술과 문학행위, 경제행위, 학문, 노동, 정치에 이르는 모든 인간행위는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그 구원의 내용과 현실성들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대개는 망설이게 된다. 교리문답식으로 정형화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명제를 통해서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구원의 모습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간다는 것이다. 조금 합리적인 신자들은 죽음 이후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현재 살아있는 순간에도 구원받은 자처럼 기쁨과 자유와 사랑을 소유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결교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이들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성결의 체험에 이르는 전 과정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설명해도 여전히 소위 <리얼리티>의 빈곤을 지울 길이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구원에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다시 인간과 세계와 역사로 돌아가게 된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매우 다양한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듯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구원도 역시 인간과 세계와 역사가 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무언가, 하나님 나라가 무언가, 시간과 존재가 무언가, 미래가 무언가, 이런 주제들과의 연관성 안에서만 구원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교육은 교리문답을 매끄럽게 가르치는 데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오히려 피교육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 그 시대정신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통해서만 자기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2. 오늘의 시대정신
오늘 교회의 피교육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교육을 원활히 수행하고자 하는 교양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면 교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원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차원의 문제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시대정신을 일컫는 말들은 매우 다양하다. 세속화, 포스트모더니즘, 컴퓨터, 정보화, 가상현실, 세계화, 개방화, 경쟁력, 탈냉전, 경제제일주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일단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해 가도록 하자.
‘후기 근대주의’라고 일컬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이해하려면 우선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더니즘은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 근거한 사상, 예술, 문학, 과학, 종교 등 인간문명 전반에서 새롭게 제기된 일종의 세계해석의 패라다임(사고틀)이다. 그 이전에는 정치와 종교의 권위주의가 인간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계몽주의 이후로는 인간 스스로가 주인이 됨으로써 자율적인 인간상이 부각됐다. 근대주의는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합목적적인 역사관을 그 기초로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집대성된 유럽의 근대주의 정신은 인간이 이성적인 활동을 통해서 역사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모아진다. 이런 생각 가운데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각종 과학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증가하게 됨으로써 유럽은 지상낙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도 결국은 이런 모더니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을 한 마디로 줄이자면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다.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역사에 대한 낙관론은 그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적 활동도 의심받게 됐다. 학자들은 모더니즘이 이성을 도구적으로 간주함으로써 결국 인간이 도구화되고 소외되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비판을 한 그룹이 프랑크푸르트학파다. 허버트 마르쿠제, 에릭 프롬, 하버마스 등이 그 학파에 속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모더니즘을 극복해 보고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모더니즘이 기초하고 있는 합리주의와 이성주의, 주객도식의 해체다.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해석이나 막스의 유물론적 세계이해만으로 오늘의 실종된 인간성과 파괴된 생태문제를 해결해 낼 수 없으며, 뉴턴의 물리학으로 모든 현대물리학 문제를 풀어낼 수 없고, 또한 데카르트나 칸트식으로 주관과 객관의 대립구조 속에서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보고, 그런 모더니즘식의 구조를 탈피해서 새로운 사고틀을 생산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풀수 있는 확실한 대안을 갖고 있는 걸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성적 합리주의를 대신할만한 새로운 세계전망을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오늘 이 시대는 동양적 사상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동양적 직관,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보는 유기론적 세계관이 이성적 합리주의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대안일 수도 있다 하겠다.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혼돈이, 바꿔 말해서 이성과 반이성주의의 혼재가 바로 오늘 교회의 피교육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라는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는 점만을 지적해 두겠다.

3. 오늘의 교육 바로보기
이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시대정신 안에서 실행되고 있는 교육이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잠시 검토해 보도록 하자. 물론 예외는 어디나 있기 때문에 그걸 전제하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의 가정과 학교는 교육적인 면에서 거의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다. 첫째는 부모들 스스로 가정교육의 필요성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다. 가정이란 그저 단순히 아이들에게 의식주 문제만 해결해 주는 장소쯤으로 생각되는 게 우리 한국가정의 일반적 행태다. 둘째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무지 내지는 곡해에 문제가 있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은 거의 사회전통이나 자신의 경험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확고한 교육목표를 갖지 못한 실정이다. 일찍 일어나라, 공부 좀 해라, 싸우지 말라, 나쁜 아이들과 사귀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이런 건 교육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에 불과한대도 불구하고 대충 이런 주제들에 한정된 게 한국 가정교육의 전부다. 가정교육도 역시 교육일반에 속한다는 점에서 인간변화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불의한 사회구조 가운데서 어떻게 정의로운 삶에 참여할 수 있는가, 파괴되는 생태계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야 하는가, 실존적 무의미에서 어떤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런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살게 하는 게 가정교육의 핵심이어야 한다. 한국의 가정교육이 가능하지 않는 이유는 지나친 혈연중심주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가지만 정작 삶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 그런 진지한 대화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가정교육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학교교육의 중요성은 더 절실한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학교교육은 아예 없느니만도 못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 뿌리가 깊고 구조적이고 전사회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한 마디로 학교교육은 목적 지향적으로 짜여 있어서 인간변화라는 교육의 본질과 아예 상관없이 실행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 대학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구조 가운데서는 도저히 인간구원을 위한 교육이, 인간변화를 위한 교육이 발을 붙일 수 없다. 가정교육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학교교육도 역시 없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교사들이 맡고 있는 교회교육은 어떤가? 그래도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 보다 인간본질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무언가 바른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회교육도 역시 지나치게 목적론적이기 때문에 인간구원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미숙하다. 초등학생이나 중고등, 혹은 대학생만이 아니라 장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교회교육 프로그람은 거의 교리적인 차원과 교회성장이라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런 부분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중심부의 역할을 할 수는 없는데도 말이다. 예컨대 기도, 헌금, 전도, 믿음, 성경읽기, 큐티, 족장들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사중복음, 등등의 교육을 시킬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일종의 방법론이기 때문에 그것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성경공부도 좋고 교회성장도 좋지만 더 우선적인 문제, 더 상위의 문제는 인간구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교회교육은 인간구원에 기초해야 하고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4. 인간구원으로서의 교회교육
교회교육이 다른 교육 분야와 구별될 수 있는 점은 구원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교육은 교육자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경우라도 여전히 구원이라는 범주 안에서 행해진다. 따라서 구원문제는 교회교육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존재론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인간구원에 기초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혹은 “교회는 구원공동체다.”는 말을 교회 안에서 익숙하게 들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구원은 교회의 존재론>이란 말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말하는 바를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무조건 믿으면 됐지 그 이상 더 말할 게 뭐가 있느냐고 주장하고 싶은 이들이 있겠지만 성서 자체도 구원에 대한 표상을 매우 다양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고 있는 대로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사건은 출애굽이다.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이 다른 여인들과 함께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며 부른 노래에 있듯이 그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영화로우심을 보았다. 애굽의 노예로 부터 해방된 사건이 구원이며, 그런 구원을 일으키신 분이야말로 참 능력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게 구약이 전하고자 하는 구원론의 핵심이다. 출애굽의 구원은 분명히 정치적, 사회적 해방의 사건이었다. 한편 복음서에는 병자들이 치료받은 사건(예수님은 병자나 그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고 고쳐주기도 했지만 믿음이 없었어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기도 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사회 윤리적 회심사건 등이 구원이었으며, 사도바울에 의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 즉 칭의가 구원이며, 야고보서에 따르면 행위가 있는 믿음이야말로 구원이었다. 교리사적으로 보자면 <죄로 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다. 구약이나 신약, 그리고 교회사에 이르는 전체 교회 전승에 나타난 구원론이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상이하지만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그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관점에서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구원은 그가 처한 삶의 정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매우 다양하게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오늘 논하고자 하는 주제의 초점이 놓여 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말하는 구원의 내용과 현실성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 다양한 구원경험을 교회가 무시하고 독단론적으로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가 말하는 구원은 오직 한 가지, 즉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방식이다. 이 말만 갖고 생각하자면 옳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다는 게  문제다. 도그마만 있지 그것의 해석학과 그 내용이 빠져 있다. 죄론에만 단단히 묶여 있는 구원론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증에 사로잡히게 된다. 기도할 때 마다 눈물 흘려야 하고,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아 무언가 붙잡으려고 여러 집회를 쫓아다닌다. 심지어는 구원파가 말하듯이 구원의 일시 까지 확인해 두어야 할 정도로 우리는 구원문제를 교리적인 죄론의 차원에서만 매달린다. 구원파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다미선교회, 레마성서연구, 빈야드운동 등이 한 시대를 풍미했거나 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구원론의 미숙으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라 하겠다.
만약 교회교육이 인간구원을 지향한다면 인간이 터하고 있는 다층의 삶을 배려해야 한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세계와 역사의 풍성한 경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존적 차원, 문화적 차원, 정치 경제적 차원, 생태학적 차원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모든 삶의 현실성들을 놓치지 말고 구원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이란 피교육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신앙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것에 걸맞게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 주는 것이다. 결국 삶의 문제다. 그 삶의 과정이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순종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오.”(빌2:12)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구원을 삶의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며, 여기에 바로 교회교육의 자리가 놓여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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