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
2003.9.22.  정용섭

아는 것만큼 보인다
바르트는 성서에 담긴 세계가 한낱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작용과 더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어떤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곧 그가 신학을 해석학적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해석학은 숨어있거나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풀어내는 인식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지평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들어간 세계만큼 그에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성서에서 언제나 우리가 찾는 만큼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것을, 신적인 것을 찾을 때 위대한 것과 신적인 것을 찾는다. 우리가 무가치한 것을, 역사적인 것을 찾을 때 그것을 찾는다. 우리가 아무 것도 찾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10).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생각하는 계시는 단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힘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힘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시의 쓰여진 형태라 할 수 있는 성서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세계는 곧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에게만 그 하나님이 보인다. 그런데 간혹 성서에서 처세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있고, 심리학을 배우려는 사람, 또는 종교사나 미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눈에 그런 요소들이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성서가 원래 전하려는 그 세계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에 바른 것을 찾는 자세를 성서를 읽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자기초월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해야만 한다. 우리가 바르트의 신학을 계시신학, 또는 하나님 중심신학이라고 부르듯이 ‘초월신학’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기독교의 경전이 성서가 해명하고 있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여러 족장, 왕, 예언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똑같은 인간사가 서술되고 있지만 결국 성서는 하나님에게 집중되고 있다. 성서가 때로는 몇몇 위대한 인간에 대한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그런 사람을 주목하게될 위험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성서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런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초월’이라는 말을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어떤 대상에게만 적용시키는 습관이 있다. 바르트가 말하는 초월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지평을 달리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꽃의 지평과 나비의 지평이 다르듯이 인간과 하나님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우리는 일단 그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전적 타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해야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은 곧 바르트 신학의 핵심개념인 ‘전적 타자’(ganz Anderer)와 연결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 안에 있는 모든 역사, 문화, 왕, 사랑, 희망, 약속 등, 그 모든 인간 역사의 파노라마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 전적으로 다른 존재가 개입됨으로써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역사로 전개된다. 만약 역사학자들이 성서 안에서 역사관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 기자들이 그런 역사관을 서술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는 곧 성서기자들이 역사서술을 통해서 전달하려 했던 그 대상이 전적 타자였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이질적인 어떤 힘이 역사 안으로 개입된 상태에서 역사학자의 역사해석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거기에서 역사가 중단한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 거기에 서 전적인 다른 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한다. 전적으로 특별한 근거와 가능성, 전제를 지닌 역사가 거기서 시작한다.”(14).
우리는 성서 안의 하나님을 전적 자타로 해명하는 바르트의 입장에 동의한다. 이 문제는 성서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해명하는 관점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즉 전적타자 개념은 판넨베르크 신학에서도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우연성’ 개념과도 연결된다는 말이다. 일단 우리 앞에 소여된, 또는 소여되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다. 만약 이 세계가 우리의 계산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존재와 생명의 신비는 사라지고 단지 거대한 기계 덩어리로만 우리 앞에 놓여질 것이다. 뉴턴 시대까지는 이 세계를 그렇게 보려고 한 학자들이 많았지만 이제 양자물리학 이후에는 그런 기계적 역학을 주장하는 소리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세상의 우연성을 개념을 신학적인 용어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와 사유범주를 벗어난 하나님의 의지가 이 세계에 작동되고 있다. 이 하나님을 바르트는 절대타자로 불렀다. 이렇게 우리를 초월하여 절대타자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범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바르트는 소위 자유주의신학이 주장하는 그런 인간학적 시도들을 거부한다. 다음과 같은 몇 관점이 이에 해당된다.

도덕성
바르트는 분명히 성서를 도덕 교과서로 사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성서의 대부분은 학교를 위해서, 그리고 가장 좋은 경우에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서 거의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제적인 삶의 지혜와 감동적인 모범들이 거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15). 간혹 우리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교회에 나가는 거 좋지요. 다 잘되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거니까요.” 이것만큼 기독교를 오해하는 말도 없다. 기독교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개신교 역사에서 칸트와 리츨만이 아니라 종교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오늘의 민중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색채를 띄고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더구나 하나님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고 있는 현재의 주류 교회도 역시 상당한 경우에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날 교회가 너무 개인의 신앙에만 치우쳐서 사회봉사와 개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교회들이 경쟁하듯이 복지관을 세우기도 하고 사회시설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설교도 역시 이런 윤리적인 점들을 강조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은 많이 할수록 좋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이 성서의 고유한 세계는 아니다. 바르트가 바르게 보고 있듯이 성서의 세계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17) 초점이 놓여 있다.

종교성
19세기 신앙과 신학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윤리만이 아니라 ‘종교성’에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감정의 신학자인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인 트릴취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기독교를 종교 일반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가 성서 안에서 인간들이 갖는 종교적 경험을 발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여러 종교현상들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서는 인간들의 경건한 종교체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르트는 이렇게 끊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본다면, 종교는 전혀 없다. 다만 ‘다른’ 새로운 더 위대한 세계가 있을 뿐이다.”(19). 바르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성서의 중심이 인간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다.”(20). 여기에 바로 바르트 신학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데우스 딕시트). 성서에서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 은폐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인간의 생각만으로는 그가 은폐된 분이며, 반면에 하나님에게서 그는 계시된다. 따라서 성서 안에서 인간의 종교성을 찾으려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야만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성서가 인간의 윤리나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 성서의 세계는 새롭다. 갈매기에게 인간의 세계가 새롭고, 인간에게는 민들레의 세계가 새롭듯이 우리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은 새로운 존재이다. 그래서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다. 대신 거룩, 영광, 전권이라는 개념으로 진술해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의 근원인 이 하나님의 새로움이라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이다(Gott ist Gott)
바르트는 성서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표상을 의문시한다. “성서 안에 전개되는 강력한 수단들, 백성의 운동들,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전쟁들과 진동들, 거기서 계속 일어나는 기적과 계시들, 언제나 가장 새롭게 만들어지는 무한한 미래의 약속들, 이 모든 것들이 성서가 갖는 유일한 결과들이라면 아무 작은 결과들과의 이상한 관계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 위대하지 않은가?”(23).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 자체를 봉쇄시킨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말문이 막힌다. 인간들의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어쩌면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만져보고 설명하려는 것과 비슷할 지 모른다. 욥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입을 다문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인식으로 하나님을 그려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성서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다음의 문장에 담겨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24).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인간의 인식으로 그 하나님을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 초월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 안에 묶어둘 수 없다. 하나님의 속성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설명한다면 그런 설명과 더불어서 하나님은 그 속성을 뛰어넘는다. 무한한 양파 껍질처럼 한 껍질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껍질을 만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 인식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증언에 기대어 이 하나님에 대해 “단지 몇 마디로 더듬거리고 암시하고 약속할 수 있을 뿐”이라면서, 삼위일체론적 시각으로 설명한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하늘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땅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믿은 자들 안에 있다. 성령은 불의한 세계 한 가운데서 “하늘의 정의를 세우고 모든 죽은 자들이 살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존재할 때까지 멈추거나 쉬지 않는다.”(26).

진보가 아니라 새로움
바르트는 19세기 역사 낙관주의에 근거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그런 신학을 성서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해버린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이 세상의 체제와 제도와 사상을 개량해나감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자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것과 전혀 다른 지평에서 나오는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고 기다리자는 데에 있다. 그 새로움(노붐)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이 사회의 개량주의와 대립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조금씩 쓸모 있게 만들어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투쟁한다. 그것이 종교적이었건, 정치적이었던 불문하고 개량주의적 모든 속성들과 싸운다. 간혹 기독교적 생태주의나 해방신학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투쟁에 연대해야 하지만, 그것을 성서의 고유한 미래로 생각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정치 경제적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새로움’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서의 뒷부분과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묵시문학적인 새로움을 지향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하나님은 성서에 한정되는가?
이렇듯 역사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새로움을 역설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진보사관에 철퇴를 가한 바르트의 공헌을 인정한다. 인간이 계몽에 의해서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워진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성서 실증주의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모두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물론 그가 하나님을 설명한다기보다는 그런 설명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모든 사유 논리의 밑바닥에는 성서가 준거로 작용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의 인식으로 하나님을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면 성서 자체가 그런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서, 또한 그것을 뛰어넘어 모든 세계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계시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성서적 질문, 통찰과 전망

나는 오늘(9월18일) 오전에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계 신앙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청중의 입장으로 참석했다. 요즘 ‘잘 나가는’ 목사님들의 설교 방식과 그들의 관심을 알고 싶은 까닭이기도 하지만, 더 원천적으로는 말씀에 대한 갈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였다. 설교자가 개인적으로는 목회에도 성공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도 어느 정도 균형 감각이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해서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통찰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설교를 ‘선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설교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어떤 목표를 이루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 담지하고 있는 영적 깊이를 만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선동이 아니라 예언이어야 한다. 즉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가 20세기 초에 활동한 바르트의 신학적 착상도 이해하지 못한 듯 하다.  
바르트는, 앞에서 다룬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에서도 확인했듯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관심을 기울였던 인간론으로부터 성서의 관심인 하나님에게로 신학의 초점을 교정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사람 자체를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는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에는 관심을 잃는다. 겉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열을 내고 있는 같지만 그것도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열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존재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더구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실성을 확보해나가는 일에 모든 것을 걸어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학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학의 더 근원적인 토대가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이 간과했던 하나님의 타자성과 초월성을 성서읽기에서 새롭게 찾아내려고 한다.

성서적 질문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신앙과 신학의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바를 믿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하나님’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바르트의 주장은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의 생각을 조금만 진지하게 따라가다 보면 그 주장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의 핵심 질문인 하나님 안에 인간의 “모든 자연적, 역사적, 미학적 및 종교적 해석들”(52)을 포함시키면서, 동시에 지양시키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모든 인간적 인식의 토대가 되는 것일까? “우리의 모든 인식은 신인식 때문에 존속한다”(52)는 바르트의 과감하고 극단적인 주장은 옳은가?
우선 바르트의 진술을 들어보자. “성서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우리에 대한 질문으로 변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로 향한 이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긍정과 부정, 부정과 긍정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이상야릇하게도 진퇴양난에 빠진다. 바로 형편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53).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에 대해 질문하는 우리 인간은 성서 안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객체가 될 뿐이다. 창조와 완성의 주인인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피조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 하나님 안에서 인간은 부정되기도 하고 긍정되기도 한다. 이 성서의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위기’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는 것이 ‘신학과 교회’가 아니며, ‘종교적 감정’도 아니고, 철학적 계몽에 의해 구성된 ‘교의학적 사고’도 아니다. “성서에 관한 이성적이고 결실있는 대화는 성서의 인간적 역사-심리학적 특징에 대한 통찰 너머에서 시작한다.”(59). 결국 바르트가 말하려는 바는 성서의 질문은 창조와 종말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인데, 그것은 인간학적 사유방식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개입되는 그분의 계시에 의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사적인 접근이나 심미적 차원에서 추적해본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먼지와 재”에 불과한 자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59). 이렇게 우리를 초월해 있는 그분에 대한 증거를 우리는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런 성서의 증거들은 어떤 통찰인가?

성서적 통찰
위에서 지적한 대로 바르트는 성서를 종교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거부한다. 성서 안에서 그런 요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스러기에 불과할 뿐이지 성서는 근본적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통찰이다. 그 어떤 새로운 것, 바르트의 수사적 멋을 그대로 살려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손을 눈에 대고 단층 지붕 위에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쳐다보는 광경을 우리가 창문 밖으로 본다면”(61) 우리는 그들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해할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행기를 보려고 그런 모습을 취한 것일지 모르니까. 그러나 성서 인물들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예를 든다. 바울, 요한, 누가, 야곱, 아브라함, 모세 등등.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전적인 타자’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이들의 이런 통찰은 그 어떤 종교사학적 분석으로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나 새롭고 독특하고 달랐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종교사학파들의 잘못을 이렇게 진단한다. “즉 이 모든 사건은 종교학의 범주로서는 결코 충분히 표현하고 기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것은 사실을 이해한 것처럼 착각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성서의 체험 안에는 그 어떤 심리학적 감정이입과 재구성의 수단으로써도 체험으로 보여줄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64).  
바르트가 기독교를 종교 비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말은 곧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 문화의 모든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리는 긍정이나 부정 속에 있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원천인 시초를 인식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70). 이런 면에서 그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며, 전적인 초월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분을 인간의 인식능력 안에서 규정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며, 죄이기도 하다.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문화적 인식을 뛰어넘는 이런 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통찰하고 있다.

변증법적 패러다임
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같은 자리에 놓여질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변증법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바르트는 생각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긍정이 부정을 거쳐서 나온다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세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모든 긍정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전혀 고려될 수 없는 가능성과 예외 없이 관련되며, 바로 그렇기에 항상 동시에 새로운 질서에 속하는 가능성보다 철저히 앞서가는 거대한 비판적 부정과도 관련된다.”(76).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을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패러다임은 전적인 타자로서 자리매김된 성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신학적 착상임에 틀림없다. 성서의 하나님 경험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직관과 믿음의 차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술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변증법적 신학을 다른 말로 하면 ‘기다림의 신학’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바르트의 신학은 성급하게 대결하거나 성취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활동하기를 기다린다.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진술은 새겨둘 만하다. “십자가를 걸림돌과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자들과 너무 성급히 맞서지 말자. 우리 모두도 본질적으로는 그들에게 속해 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의 동료들 전체가 닫힌 죽음의 문 앞에서 불안과 괴로움을 겪고 있고, 그 뒤에서 대기해 있을지 모르는 새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관념적 체계를 갖고, 복음전도나 사회봉사의 일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체험했노라 자처하며, 그들에게 달려가는 일은 아무튼 좋은 일이 못된다는 사실이다.”(80).  
우리가 이런 바르트의 변증법적 패러다임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간 삶에 관계된 사태를 이런 변증법적 구도로 해석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해야만 한다. 예컨대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타종교 문제를 이런 변증법적 신학으로 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변증법적 패러다임은 어떤 사태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행위가 따라오는 결단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성서적 통찰의 차원을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에서 해명함으로써 인간 역사의 일방적 진보사관에 기울어져 있던 당시의 자유주의신학을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인간의 온갖 인식론적 근거와 상상력으로 가려진 성서의 하나님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작위적 태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니셔티브를 변증법적 구도로 폭로시킨 이 바르트의 신학적 착상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설득력이 있다.

되돌아오는 질문
끝으로,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 또는 성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질문은 결국 그런 질문을 하는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으로 돌아온다. 바르트는 그것을 가리켜 ‘성서적 전망’이라고 일컬었다. 바르트가 인간의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말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라고 요구한 바르트도 역시 이렇게 질문하는 인간실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논문에 실려 있는 그의 마지막 설명을 들어보자. “궁극 이전의 성서적 전망은 결국 불가피하게 우리 자신의 존재의 문제점을 다시금 꿰뚫어보도록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또한 이 불안, 바로 이 불안의 뿌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추구와 실패, 우리의 서고 넘어짐, 우리의 기억과 망각, 우리의 긍정과 부정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에워싸여 있고 지탱되어 있다.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피조물인지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는 먼지임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인식되었다. 이 말은 너무 많은 말도 아니고 너무 적은 말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튼 이것은 궁극적인 성서적 전망이다.”(89).  

종교지양과 진리의 보편성 문제
우리는 이 논문에서 바르트의 핵심적인 기독교 이해는 종교 지양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 현상은 우리의 인식으로 대충 그 윤곽을 잡아낼 수 있지만 성서에서 진술되고 있는 하나님 체험은 그런 종교 일반을 근본적으로 뛰어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한지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엘리아데 같은 종교학자들은 기독교를 그런 종교학의 범주 안에서 판단할지 모르겠다. 19세기말에 종교사학자가, 또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의 보편성을 종교현상이나 사회주의 운동에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바르트는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아주 독특하게 지켜냈다고 볼 수 있긴 하지만 그의 주장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타당한지는 좀더 논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겪었던 기독교의 위기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위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19세기 신학이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세상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즉 당시 유럽의 교양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학자들이 기독교를 교양과 학문, 즉 종교성으로 덧칠했다고 본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르트는 좀 과격한 입장에서 기독교를 이 세상의 문화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질적으로 접촉이 불가능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우리는 그런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미 자연과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굳이 우리가 그들과 ‘다름’만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가 변증해야만 한다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방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차원에서 기독교의 보편성을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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