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해방



-기독교 구원론에 대한 여성신학적 담론-



여성신학의 세 흐름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은 이미 세계교회와 신학 분야에서 1960,70년대의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에 이어서 1980년대부터는 아주 확고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여성신학자들이 남성 신학자들에 비해서 양적으로 태부족이긴 하지만 한국 교회와 신학에서도 역시 여성신학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등장한 바 있으며, 지금도 역시 여성신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외국 여성신학자들은 가장 극단적인 메리 데일리(Mary Daly)로부터 시작해서 로즈메리 래드포드 류터, 레티 러셀, 엘리자베트 피오렌자 등이 있으며, 국내로는 손승희, 안상임, 강남순, 최만자, 박경미, 황혜숙, 그리고 젊은 구미정 등이 있다. 이들이 주로 여성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각론적인 부분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체주의자들이 있는 반면에 그 전통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여성신학적 토대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갱신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런 해체와 갱신의 구도를 뛰어넘어 새로운 제3의 길을 찾는 생태주의자들이 있다.

해체주의자들의 입장은 아무 명백하다.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교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발전된 도그마와 교회 구조에 이르는 모든 기독교적인 전통이 근본적으로 가부장질서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해체하고 새롭게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호칭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남성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탐탁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메리 데일리가 대표적인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근본이 위태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부분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으로 용납되기는 힘들 것이다.

해체주의적 입장의 여성신학자들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개는 기독교 경전과 전통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새롭게 해석하고, 오히려 여성 해방적인 역동성을 재발견하려는 갱신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여성신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아도 좋다. 이들은 기독교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남자라는 사실, 예수의 열두 제자가 남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그들에게서 시작한 기독교의 도그마를 대체적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지난 2천년 동안 유럽의 남성 신학자들이 간과했던 여성해방적인 요소를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다시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이런 작업이 상당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앞으로 여성신학이 이런 관점에서 전개시켜나가야 할 내용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해체와 갱신을 함께 아우르면서 훨씬 여성신학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제 삼의 길은 에코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천년 동안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신학은 생명을 일구어내기보다는 오히려 정복하고 그 결과로 파괴시켰다는 현실 인식 가운데서 여성신학적 통찰을 통해서 신학을 생명 지향적 방향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자칫 여성 신학을 출산이라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에 치우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생태의 관점으로 여성신학의 자리를 잡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훨씬 역동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주의는 기독교의 근본을 허물게 된다는 자기 모순이 있고, 갱신주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통 신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생태주의는 21세기의 시대 정신과도 맞물려서 훨씬 광범위한 작업을 전개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여성의 경험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성신학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걸어온 구체적 경험과 그런 숙명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신들의 인식론과 해석학적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흑인신학은 흑인의 경험에서,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경험에서 신학의 자리를 발견하듯이 여성신학은 여성의 경험이 그렇게 작용한다. 만약 신학이 단지 선험적이거나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그 역사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해석되어야 한다면 당연히 남성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여성의 경험도 역시 신학의 구성요소로 인식되어야 한다. 우리의 속담에 '과부 심정은 과부만 안다'고 했듯이 여성만의 고유한 경험이 배제된 신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성을 위한 신학으로서의 그 진정성과 현실성이 부족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히브리인들의 구체적인 역사 경험에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상응한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의 유랑생활, 이집트의 이민, 또는 노예생활, 엑소더스와 40년 광야생활 및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영토분쟁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해나갔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경험을 외면한다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부분적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나사렛 예수 사건도 역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 신학의 자리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확인해준다. 예수가 시공을 초월해서 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난 분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쇠락해버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등장하신 분이다. 그의 가르침은 신선들의 선문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에온)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묵시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경험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정통신학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신학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은 신학의 자리가 인간 삶의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 경험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구체적인 경험만 참된 것이라고 한다면 여성신학 이전에 '며느리 신학'이라거나 '과부 신학'을 핵심 주제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사람 숫자만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아니 그것의 근본적 역동성을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그것 위에 있는 것에 대한 경험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즉 인간학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도구로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인간의 경험을 치유하고 통전시킬 수 있는 근거라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서양신학의 관념주의 소산이라고 비판할 지 모르지만 아무리 처절한 현실적 상황 속에서도 결국 신비의 방식으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의 서술이 곧 성서이며 기독교 교리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해방의 프락시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경험은 가부장제와 여성차별적 구조로 인해서 여성들이 겪은 고유한 삶을 가리킨다. 아마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의식하는 남성들도 있긴 하겠지만 여성이 아닌 한 그렇게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여성차별적 구조를 공고히 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려는 노력도 없지 않았다. 이는 흡사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오랫동안 유지된 것과 비슷하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동력이 절대 부족하다는 현실적 요구로 아프리카 흑인을 물건처럼 매매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비인간적으로 대우받는 노예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앞장서서 노예제도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서 노예제도가 폐기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떤 거룩한 인간애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거의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에는 아주 결정적인 힘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거의 인간적인 이해타산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비인간적 구조의 폐기 내지 갱신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구원과 연관되어 상수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이 얼마나 심각한 구조적 불이익을 당해왔는지 세세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약간만 배려할 줄 아는 눈이 있다면, 그리고 역사의 현상을 읽을 수 있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가부장적 요인으로 인한 여성차별적 구조를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 역사도 이런 여성차별적 인류의 역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역사를 고착화시키는 데 기독교가 기여한 부분이 상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의 여성들에게 잠잠 하라고 타이른 바울이나 여성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헬라, 로마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는 교부들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수녀와 결혼한 종교 개혁자 루터 같은 이들도 이런 여성차별적 언급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교회의 역사와 여성차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따라서 여성들의 해방을 외치는 목소리에 다른 소리를 낼 여지는 없다. 특히 한국교회의 환경은 세계 교회에 비교할 때 말할 수 없이 열악하다. 교단에 따라서 여성들에게 성직을 부여하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교회의 정치가 완전히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교회의 실정을 알만 하다. 이런 점에서 여성 해방의 프락시스는 여성신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모든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마땅한 과업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신학을 훨씬 발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여기서 두 가지 관점만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이런 현상에 대한 여성신학의 원인 분석이 얼마나 정당한가? 둘째, 여성신학의 현상분석에 문제가 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과 여성차별주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회 안에 여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바로 기독교 자체의 책임인가에 대해서는, 즉 기독교의 본질과 관계된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많은 여성신학자들이 신구약 성서를 인용하면서 성서가 여성을 차별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다거나, 또는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머리에 천을 둘러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예를 든다. 그 이외에도 우리는 성서 안에서 남녀 차별적인 요소를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이브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거나 여성의 달거리가 부정하다는 투의 성서 본문이 그런 것들이다. 교회의 역사에는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개입되었는데, 심지어 '마녀사냥'을 통해서 여성의 마성을 합리화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을 기독교 자체에서 찾는 것은 별로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도와 여성차별 문제는 기독교 세계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 종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야만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은 차도르를 입고 다니고,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일부다처가 용인되고 있으며, 교육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슬람 교리 자체가 그런 것을 합리화하고 있을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지역도 역시 여성 차별은 기독교 세계에 못지 않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더 심각하다고 보아야 한다. 열녀문에 얽힌 사연들, 칠거지악으로 인해 벌어진 비인간적인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여성들에게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기독교를 뿌리로 하는 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여성들이 남성과 똑같은 권한을 누리고 있다는 이런 역사적 결과를 놓고 본다면 기독교가 여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진보적인 입장을 보였는지 확인된다.  

나는 여기서 여성차별적인 요소의 다소(多少)에 따라서 종교의 우열을 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며, 기독교의 성차별적인 문제점을 호도 하려는 생각도 없다. 다만 이런 여성차별적인 문제는 종교의 본질에 속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계사회의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역사 발전의 한 현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만약 고대 인류사에 잠시 있었던 모계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면 이런 여성차별적인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생존의 차원에서 부계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남성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높은 생산성을 올릴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생산성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면 결국 남성 중심적인 체제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성들은 가장 창조적인 생명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사회 특성상 사냥이나 농사, 또는 전쟁의 능력이 실제적인 생산성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남성중심의 사회는 어쩔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이었다.

정치제도를 예로 들어보자. 인류 역사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왕정시대가 유지되었다. 만약 오늘의 잣대로 그 제도를 평가한다면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악한 질서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것을 해체해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 왕정제도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간과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씨족사회에서 부족국가로 발전하고, 그 부족국가가 왕정국가로 발전해나갈 수밖에 없는 그 시대적 당위가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무엘서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다.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싸움에서 자신들도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요구에 담겨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지 않고 그대로 판관제도로 유지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는 없다. 생존의 방식으로 왕정제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역사를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엄격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역사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진보시켜야할 사명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왕정제도가 비록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는 요소로 짜여졌지만 나름대로 생존해보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정통신학이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자라왔으며, 따라서 여성에 대해 차별적인 구조를 안고 있는 게 역사적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가 왜곡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은 그런 역사적 한계 안에서 생명의 단초이자 완성자인 야훼 하나님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변증해보려는 노력을 가열차게 기울였다. 비록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주로 남성 중심의 성직 제도가 고착화되었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의 여성차별적 행태가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신비인 하나님과 그 계시를 언어와 종교적 상징으로 표상화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를 구원시킬 수 있는 심원한 깊이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차별적 요소를 신학의 중심과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이 아니다.  



여성신학의 길은 어디에?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유가 어디에 있건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는 가부장적 요소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성차별적 경향이 적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여성해방의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고자하는 여성신학의 기본 오리엔테이션에 동의한다. 다만 이런 재해석과 도전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곡해함으로써 결국 기독교의 근본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빚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약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신학이 나름대로 기독교 신학에 기여하려면 기초신학에 훨씬 충실해야 한다는 점만은 명백히 하고자 한다. 지나간 역사에서 여성들의 운명이 아무리 가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구 위에서의 생존을 상위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적 한계였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 과정으로 접어두어야만 한다.  여성신학이라는 특수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신학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근본적인 신학의 주제에 천착해야만 한다. 즉 기초신학에 충실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신학의 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기초신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여성신학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유행 신학은 신학의 역사와 인류사에서 파생되는 몇 가지 지엽적인 문제들을 신학의 근본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다. 예컨대 여성신학의 신학적 동기를 제공한 해방신학만 해도 그렇다. 해방신학은 정치, 경제, 문화적인 차원에서 왜곡된 인간 현실을 바르게 잡아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학 작업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런 주제는 신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시즘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산업혁명 이후로 자본이 축적됨으로써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의 현실은 당연히 해방의 구도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런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고 영육이원론적인 시각에서 영적인 구원의 세계만을, 또는 도덕성 회복 문제만을 강조함으로써 사회과학적인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민중의 아편'이라고까지 낮추어 부르게 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이런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마르크시즘이 말하는 그런 구도로 인간 구원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말하게 된 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보충하기 위해서 마르크시즘을 흉내낼 필요까지는 없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해방이 물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이런 마르크시즘은 자본의 힘을 축적해서 인간의 삶을 키우겠다는 자본주의의 이면에 불과하다. 한쪽은 자본을 적대시하고, 다른 한쪽은 자본을 숭배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양측 모두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물적 토대에서 찾아보겠다는 발상에서는 같은 길을 가는 이념들이다. 기독교는 물신적 자본주의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 자본의 마성을 넘어서겠다는 마르크시즘도 극복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해방이라는 그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구원론적 깊이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사회 분석과 혁명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내겠다는 사회과학 프로그램으로서의 해방개념은 거부해야만 한다. 기독교 경전과 기독교의 역사는 마르크시즘이 말하는 그런 사회과학적 해방보다 훨씬 뿌리깊은 해방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해방신학의 해방은 유행처럼 잠시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기독교 전통의 해방은 우리를 생명의 근거와 마주서게 한다.

참고적으로, 해방신학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또는 서로 영향을 받는 소위 '정치신학'도 역시 이런 유행신학의 한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정치신학자라 할 수 있는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역사를 변혁시켜 나가는 데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 무게를 두고 있다. 역사 변혁이라는 주제는 기독교 신학보다는 사회과학에서 다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몰트만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마르크시즘의 도전을 받은 해방신학이 혁명과 계급투쟁을 신학의 도구로 삼은 것처럼 신학적 전통보다는 철학과 사회과학의 전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철학과 사회과학의 문제제기를 귀담아들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서쯤으로 접어두고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전승시켜온 하나님과 그 계시를 인식하는 데 진력해야만 한다.



기다림의 신학  

기독교 신학은 현실의 역사가 아무리 리얼(real)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너머의 현실을 중심 주제로 삼아야만 한다. 신학(神學)은 바로 그 어떤 지상의 사물과 개념으로도 완전하게 담아낼 수 없는, 그것을 형상화하는 순간에 우상 숭배가 되어 버리는, 그래서 신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에 관한 학문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모순의 이 역사를 우리가 개혁하는 것을 우리 신학의 핵심으로 삼는다면 결국 신학은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머물게 될지 모른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상대화가 곧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예수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과 희망이 곧 우리 기독교 신학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진정으로 변혁하는 방식이다.

이런 기다림의 신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나타낼지 모르겠다. 그런 역사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가는 이 세상이 정말 악마의 힘에 의해서 지배당할 것이라고, 그리고 교회는 장례식이나 집행하는 종교 기관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진보를 희망하는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은 이원론적으로 나누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이 현실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따라서 변혁시켜 나가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겨우 남녀평등이나 복지사회, 또는 지속가능한 생태에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인간의 인간다운 삶, 인간과 자연의 일치, 창조적 노동구조 등,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가치들을 우리가 성취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혀 새로운 생명형식이 부활이다. 주님이 재림하는 종말에 우리 모두에게 들이닥칠 부활의 생명을 어떤 태도로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곧 기독교 신학의 근본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구원론에 대한 여성신학적 담론의 가능성과 한계가 놓여 있다. 만약 여성신학이 예수의 부활에서 선취된 새로운 생명을 해석하고 끌어내는 데 기여한다면 신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인류 역사에 드러난 왜곡된 역사 현상을 중심 주제로 삼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에 머문다면 말 그대로 잠시 유행하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질지도 모르겠다. 결국 신학은 구원의 깊이를 얼마나 진지하게 열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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