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갱신과 청년의 역할
-생명 운동체로서의 교회를 항하여!-

성청(聖靑) 전련(성결교회 청년회 전국연합회)에 대해서 본인은 깊이 알지 못한다. 어렴풋한 인상만 갖고 있을 뿐이다. 매년초 금식 기도회(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는데), 성청주일(주로 헌금을 보내는 일), 성청기관지 '성청마당' 발행(요즘에도 발행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교단 청년들과의 연대활동(통일교 생산품 불매운동 등), 그리고 오늘 모임과 같은 정치총회 등이 성청 전련에 연관되어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전련 임원들이 어떠한 신앙과 의지를 갖고 있는 걸까? 불행하게도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다만 남전도회나 여전도회, 장로 연합회, 혹은 성결교회 전체 총회와는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예를 들자면 전련 총회시에 시시콜콜한 회무에만 매달리지 않고 정책 협의회 같은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말이다.
금년 성청주일 행사 건에 대한 총회장 명의의 문건을 받았다. 거기에 성청의 세 가지 목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설교, 교육, 봉사! 무엇이 참된 선교인가? 교회 확장인가? 총회의 문건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본질적인 선교의 의미가 변질되어 있었다. 무엇이 참된 교육인가? 몰(沒)역사적이고 개인적 경건(성결?)을 기독교 교육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는가? 무엇이 참된 봉사인가? 봉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정치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치적인 결단 없이 세상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말인가?  
오늘 부탁 받은 원래의 제목은 "교회갱신 과제 하의 청년의 역할"이다. 그러나 과제라는 말을 빼어버려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간단히 위와 같은 제목으로 정했다.
오늘의 제목을 보면 세 가지 중요한 용어가 나온다. 하나는 교회, 또 하나는 갱신, 다음으로는 청년이다.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청년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몇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 우선 오늘의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갱신을 위해 청년의 역할이 있다는 전제이다. 이 전제에 대해 다시 한번 거꾸로 질문하고 싶다. 즉 오늘의 교회가 갱신될 가능성을 아직도 남겨두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미 치유가능의 시기가 지나버린 것은 아닌지? 암에 걸린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은 그 암세포를 얼마나 조기에 발견해 내느냐에 달려있다. 이미 말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둘째의 질문은 첫째와 관련된 것으로서 갱신으로 교회가 과연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말이다. 보프(Leonardo Boff)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도를 개혁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해방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민중이 자신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반드시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보다 정의롭고 형제적인 사회를 탄생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해방의 과정말입니다." (Kirche: Charisma und Macht, s.42). 이 말에 비추어 볼 때 오늘 교회에 필요한 것은 갱신이 아니라 해방은 아닐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오늘의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까? 지엽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근본적인 데서부터 풀어가야 한다. 원칙적인 데에 돌아가면 그만큼 잔가지가 잘 보이기 마련이다. 오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도 여기에 있다. 본질과 원칙이 아니라 값싼 실용주의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런 출발점은 교회가 현재 어디로 가고있는지의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오늘의 발제에 있어서 두 가지 관점을 두고 진행하고자 한다. 하나는 이론이며 또 하나는 프락시스이다. 우리의 교회가 건강하려면 이론과 실천의 균형을 갖추어야한다. 이론에 강조를 둔 신학이 2천년 유럽신학이며 실천에 강조를 둔 신학은 해방신학일 것이다. 전자는 관념주의로 후자는 행동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본인은 양극단을 지양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중도 통합론은 결코 아니다. 건강한 신앙을 위하여 이론과 실천의 두 기둥을 그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말이다.

1. 교회의 "삶의 자리" 와 그 정체성

1) 삶의 자리
우리가 삶의 자리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야만 하는 이유는 역사상 어느 한 순간도 교회가 이 세상성을 떠나 존재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역사 내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 사회, 그 시간에 요청된 교회이었지 초(超)공간적, 초시간적 교회는 아니었다. 오늘의 교회갱신을 논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에 대해서 밝혀야만 한다.
우선은 공간적인 자리이다. 남한과 북한의 갈라진 나라이다. 한쪽은 자본주의이며 다른 한쪽은 사회주의이다. 양쪽 모두 오랫동안 독재를 경험했습니다. 일단 남한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자. 경제적인 악순환,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 산업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경쟁심만 키워주는 교육, 부동산 투기, 부도덕한 정치, 물량주의의 팽배 등등. 다음은 시간적인 자리이다. 1991년은 21세기를 몇 년 남겨두지 않은 때이다. 오늘의 물리학은 우주의 세계와 전자의 세계를 밝혀내고 있다. 성경형성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이다. 2천년 대에는 삶의 이해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평에 도달될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행동과 존재는 어떠해야 할까?
2)정체성
오늘의 한국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교회의 현상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여기서 본질과 현상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시간은 없다. 현상은 본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현상을 말하면 자연적으로 그 본질이 무엇인지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분열(일백개 가까운 교단), 매머드 교회당, 수천 수만 수십만 교인,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부흥회, 성경공부, 제자직 등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면, 이원론적 사고(영지주의), 신앙의 이기주의, 신비주의, 기복사상 등은 불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현상이다. 물론 일부에서는(주로 진보적인 교회야 교역자) 도시산업선교, 민중교회, 통일운동, 경제정의실천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결교회는 아마 전자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 성결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면(일종의 복고중의) 교회개척과 선교사 파송과 장학사업일 것이다. 성결교회의 교단誌인 "활천" 450호(1991년 2월호)에 특집 좌담회가 실렸다. 언뜻 보니 오늘 발표해야 할 발제와 비슷한 제목이라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교회는 계속 ...되어야한다." 당연히 계속 갱신 혹은 개혁되어야한다는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러나 정작 제목은 "교회는 계속 개척되어야한다"였다. 이러한 제목으로 특집 좌담회를 계획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매우 성결교회다운 생각인지도 모른다. 교단 창립 100주년 되는 해에 일만 교회, 삼백만 성도를 거느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 개척되어야한다는 주장이 당연하다. 바로 여기에 우리 성결교회의 적극적, 아니면 부정적 모습이 담겨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특히 성결교회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여기서 한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잘 잘못을 논하고 싶지 않다. 절대 약한 교회도 절대 선한 교회도 없는 것 아닌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도 않다. 또한 한두 가지 문제를 뜯어고친다고 해서 온전히 건강해 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역시 우리는 원칙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분명한 기준을 상실하지 않았을 때에만 교회는 계속 개척이 아니라 갱신되는 것이다.

2. 교회의 근거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다. 로마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동방정교회 등 ... 오늘의 교회는 매우 방대한 조직체로 되어 있다. 개교회만 보더라도 당회로부터 시작해서 직원들과 교사, 성가대, 구역장, 각부 기관장, 그리고 교회에 딸린 재산도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한 편이다. 교회를 통한 다양한 실천들도 많다. 섬세한 예배행위에서부터 사회 봉사에 이르기까지 흡사 대기업처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교회를 통해 사람들이 경험하는 종교경험 또한 다양하다. 종교적 경건성, 각종 신비체험, 신자들끼리의 친교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 모든 교회현상의 근거는 무엇일까? 무엇에 근거해서 교회는 이 땅 위에 존재하는가? 교회는 일종의 당위(Sollen)는 아니다.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 다르게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존재근거를 지탱시켜준다. 왜 기독론적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 이전에 교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교회를 설립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가 교회 설립을 명령하지도 않았다. 물론 베드로를 향해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나,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교회설립의 명령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엄격히 말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러한 조직화된 교회를 예수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의 공생애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부활에 터해서 시작했으며 역사적으로 발전하여 왔습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예수의 공생애가 없었다면 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부활로 올림 받은 예수가 오늘 이 교회의 존재근거가 된다.
몰트만 교수는 그의 명저 <성령의 능력 속에 있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초요 힘과 희망이다. ... 그리스도만이 지배하고 교회가 그의 음성만을 듣는 곳에서만 교회는 진리 속에 있고, 자유로워지고, 세상에 있어서 해방하는 힘이 된다" 계속해서 그는 "교회에 관한 모든 명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독일어로 교회를 Kirche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主)에서 온 말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근거는 없다. 물론 여기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기독론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기독론이 담고 있는 내용(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의 행위와 선포는 모두 이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존재근거는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드러나는 나라이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할 시간적 여유는 없다. 다만 인간이 만들어 가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런 것과는 전혀 지평을 달리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항상 비유로서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다르게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항상 진리이해에 있어서 한계성을 드러내곤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이미(schon) 왔으나 아직은(noch nicht) 기다려야할 나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하여 교회가 존재한다고 할 때 오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나라에 직면해 있는 존재가 이렇게 교파주의로 흐를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개교회주의로 경도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도 하나님의 선교에 무관심하고 교회 자체의 세력확장에만 부심할 수 있는 것일까?

3. 교회의 종말론적 존재양식

앞서 교회의 존재근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는 존재양식이다. 이에 대한대답도 역시 앞에서 시도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존재근거가 되는 동시에 존재양식의 출발점도 된다. 여기서 바라보는 각도는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며 확장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교회도 그 존재 양식이 결정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종말론적으로 찾아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말론적인 양식으로 존재해야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근거를 두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확정된 구조나 형태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이다. 종말론은 교회의 존재양식을 규정한다. 발터 크렉(Walter Kreck)은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우리가 교회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로서, 그리고 하나님이 그 주제인 공동체의 모임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로서 교회의 근거와 기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목표에 대해서도 결정되는 것이다."(Grundfragen der Ekklesiologie).
일반 기독교인들은 1992년 한국 교회와 사회를 소용돌이에 빠뜨렸던 '다미선교회'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종말론을 자칫 초월적이고 피안적인 지평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기독교에서 피력되고 있는 종말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물론 종말의 사건은 우리의 지상적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실증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신학적 종말론은 종말 현상을 흡사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이해의 역동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결정주의를 뛰어넘는다. 기독교적 종말론은 역사의 핵심을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지평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즉 역사를 미래로부터 역망(逆望)하는 노력이다. 그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의해서 인과율적인 구도 속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열려 있다. 그 종말의 시간에서부터 역으로 현재의 시간을 바라봄으로써 역사의 창조적 역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현재의 구조 속에 있으면서 미래를 향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미래로부터 현재를 역망할 수 있을까? "선취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역사의 상황 속에 있는 미래의 현재이다"라는 몰트만의 진술처럼 기독교는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이 오늘에 선취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오늘의 우리 교회는 인류의 미래를 향해서 개방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을까? 종말론적 예기에 근거해서 사악한 시대정신과 용감히 투쟁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교회 조직을 확장하고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근본주의자들과 거의 같은 발상에서 행해지는 외국 선교를 하나님의 유일한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사회는 앞서 나가고 있는데,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역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가?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향해 투쟁의 준비를 하고 있는가?

4. 종말론과 생명운동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언급할 때 핵심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할 종말의 내용이 무엇인지 해명해야 할 단계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확보해야만 종말론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고, 또한 오늘의 역사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종말에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 사랑, 정의의 나라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쁨과 만족의 나라, 또는 모든 이들이 형제애를 회복할 수 있는 나라일 수도 있다. 히브리인들은 그런 세계를 새로운 '에온'이라고 일컬었다. 여러 용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런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단어는 아마 '생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유, 평화, 사랑 등, 이런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속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은 곧 생명이다. 이 생명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개념들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온통 생명을 살리는 일로 채워졌다. 안식일 논쟁이라든지,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라든지, 간음한 여인을 도운 일이라든지, 아니 결정적으로 부활은 모든 죽음의 씨앗까지 극복한 사건 아닌가? 구약의 안식년 제도 또한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과 땅의 생명까지 살리는 제도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참된 생명)으로 창조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성서는 진정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증거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지하씨는 얼마 전에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라는 수필집을 출판했다. 70-80년대의 반체제운동에서 이제는 생명운동으로 선회했다. 그는 '밥'을 통해 생명에 대한 사고를 시작한 것 같다. 그가 기독교의 종말론과 종말론적 역사 이해에 대해 상당한 부분 오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종말론을 이제 생명의 나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만물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로 말이다.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이런 면에서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념해야한다. 생명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실존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에서부터 우주론적인 생명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따라서 교회는 개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부터 우주의 생명에 이르는 부분에 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이원론이다. 개인의 영과 육에 대한 이원론, 개인의 실존과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원론이 그것이다. 소위 전통주의 내지는 보수주의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은 개인의 영적인 생명만을 생각한다. 여기에는 큰 함정이 놓여 있다. 인간은 영적인 생명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실제를 경험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필요하다. 또한 인간은 개인의 실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 경험은 한 개인의 실존적인 신비 경험이 아니다.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실재(reality)의 경험이다. 소위 "영적 구원" 이라는 말은 충분한 보충설명을 추가하지 않을 때 비기독교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원론은 초대교회가 거부한 이단(영지주의)에 속한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가? 오히려 죽이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바리새적인 경건에 빠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는 일이라야 자기의(義)를 세우는 것이다. 종교적인 성취감이나 도덕적인 성취감이 오늘의 종교현상이다. 이러한 교회는 아무리 많아도 이 세상은 결코 새로워지지 않는다. 삶의 질적인 제고(提高)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일지 모른다.

5. 생명운동의 프락시스

기독교는 하나의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출발했다. 신학이 먼저가 아니라 선포가 먼저였다. 예수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일종의 행동주의라는 말은 아니다. 신앙적 행동은 분명히 신앙적 실존이 무엇인지의 이론으로 무장되어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의 문제는 기독교의 열매이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나무와 열매는 서로 다른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 다만 두 가지의 현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교회와 신학은 실천의 장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
무슨 실천입니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실천이다. 즉 생명운동의 Praxis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허한 넋두리나 허상이 될 수 없다. 확고한 신앙과 이론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 기독교의 Topos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종말론적인 미래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자들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미 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자로서, 그러나 아직은 미완인 이 세상 가운데서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 싸움은 바로 생명의 프락시스이다.

1) 프락시스의 두 원칙
어떤 특별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보다 명료하게 실천의 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방향을 설정하자는 것이다. 한가지는 끌어내리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마리아 송가(눅1:46-55)와 이사야서의 인용(눅3:4-6, 4:18-19)에서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복음이 갖고 있는 비판의 기능과 위로의 기능이다. 이 비판과 위로를 통해서 복음은 진정 종말론적인 생명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비판과 위로의 기능은 바로 메시아적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길이다.
판넨베르크는 '신학과 하나님 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사회 안에서 생동적이고 비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수행하고 못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 비판적 증언을 상실한다면 교회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단지 종교적인 욕구를 가진, 그리고 그 수가 급속히 감소되어가고 있는 소수자들에게 그런 종교적 욕구를 조달해 주는 하나의 제도로서만 존속하게 된다." 칼 바르트도 1934년 4월 행한 설교에서 당시의 독일교회가 문화, 정치, 사회적 선입관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서했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해주는 역할인 것이다. 모든 교만한 인격과 세력에 대해 교회는 비판의 종말론적 그리고 메시아적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 높은 산이 평지가 되는 것이야말로 종말론적 징표이며 거기서 생명이 활성화된다.
교회는 비판의 기능에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있다. 위로하는 일이다. 낮은 곳이 돋아지는 것이야말로 종말론적 징표이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이런 골짜기는 지천으로 널려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을 교회는 위로해야한다. 그들에게 종말론적인 희망을 알려주어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두 가지 기능을 만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가?

2) 프락시스의 제(諸)차원
첫째, 개인이다. 어느 때나 개인의 실존은 위협 당하지 말아야한다. 개인의 생명이 충만한 세계를 향해야한다. 삶의 의미를 개인들은 찾아야한다. 교회는 모든 개인으로 하여금 대중화시대에 자기의 특성과 존엄성을 상실하지 말도록 자극해야한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영적인, 도덕적인 각성이며 해방인 것이다.
둘째, 사회이다. 이 사회가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안목이며 사회 구조에 대한 사회과학이다. 특별히 교회의 정치적 책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이미 정치적인 결단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선교는 오고있는 하나님의 현재에서 모든 노예성, 즉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노예성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에 봉사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주로 구제사업에 한정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비정치적 입장의 아무개 교회는 상당히 많은 재정으로 근로 청소년 회관을 건립한 바 있다. 매우 적극적인 사회참여 같지만 여기에는 매우 큰 문제점이 놓여 있다.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의 특별히 사회적인 활동(복지시설, 보육원, 간호시설, 병원, 학교 등)은 부차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대리인으로서 이런 일들을 하는데 불과하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의 정치적 기구에 속하는 것이 타당한 이런 책임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준비시키고 또 인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를 시기하고 어떤 복지 활동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감을 기묘하게 곡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치단체를 고무하여 그 책임을 인수하게 하는 데에서 만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사회적 공헌은 생의 궁극적 신비, 즉 영원한 하나님과 역사 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목적에 인간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인간적 생의 인격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신학과 하나님 나라).
셋째, 우주론적인 차원이다. 생명은 개인의 영적인 자유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사회적 정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제 더 큰 차원의 생명까지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창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신학은 '창조질서 보존'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파괴와 직결된다. 자연의 생명은 바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뿌리이다. 생명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땅과 하늘도 인간의 생명과 유기적인 관계 안에 놓여 있다. 지난 2천년의 서구 기독교는 자연을 지배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을 소외시키므로 인간 스스로가 소외된다는 사실을 매우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전 우주의 생명을 주는 일은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다. 이 재창조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 자연을 지키고 살리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그 일부이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우주론적인 차원에서부터 인류의 미래는 유일한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스 큉은 '세계윤리 구상'에서 세계정신으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서로 대적하고 구별하고 반대하는 윤리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신자들과 무신론자들까지도 벨트 에토스(세계정신)를 통해 연대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무리 말

오늘 우리의 시간은 이미 "현대이후" (Postmoderne)이다. 여기 모인 청년들은 아마도 21세기에 교회의 핵심적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갖게 될 것이다. 누가 교회의 장엄한 예배나 건물, 혹은 선교사 숫자에 마음일 끌리겠는가? 이 세계에 대한 무책임한 사람들 내지는 종교적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 외에 누가 그렇겠는가? 우리의 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 받는 이 세계를 짊어지고 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세계는 교회를 포기할지 모른다. 늦기 전에 우리는 전신갑주로 무장해야한다. 이 말이 상투적인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직될 대로 경직되어버린 완고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자체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한 교회는 틀림없이 버림받는다. 교회사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많이 보아 오지 않았는가!
물론 이 땅 위에 완벽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령이 내재하는 교회는 항상 개혁의 가능성을 간직하게 된다. 성령이 교회를 갱신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신다. 결국 주체는 성령인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교회로 남아 있어야한다. 그럴 때만이 비록 시행착오를 거듭한다고 해도 끊임없이 새로운 교회로 갱신되어갈 수 있다.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교회는 어떤 것일까? 이러한 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책임이다. 우리 청년들의 책임이다. 어떤 교회일까? 판넨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말로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할까 한다.
"기독교 전통의 권위주의적 형태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후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가 성숙해지고 또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변화에 보다 광범위한 영향을 줄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적 시대의 흔적을 제거하는 일은 교회들의 생에 있어서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인이 되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로서, 고통을 수반하는 변혁들은 진심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학과 하나님 나라).

1991년 2월 28일           성청 전련 정기 총회 정책협의를 위한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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