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올바른 삶
-신앙하며 산다는 것에 대한 단편적 질문들-

1. 신앙의 본질에 관한 질문

1. 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다음의 세 가지 무장으로 우리의 상황을 성격 지우려 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sollen).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nicht k nnen). 우리는 이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무능력을 알아야만 하며, 그리고 이로써 하나님께 경외를 드려야 한다."(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이런 면에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의 올바른 삶에 대해 논의할 만큼 임간과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확실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현학적인 언어놀이 내지는 행동주의에 빠지게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우리는 역사의 종국을 보지 못한 상태에 있다. 완성된 진리의 왕국을 아직 우리는 맛보지 못했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비록 점진적인 발전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자유와 기쁨의 왕국을 향한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러한 과정 중에 있음에도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해야한다는 모순 속에 우리는 놓여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논의를 우리는 의미 있게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의 불확실성, 미확정성 그리고 과정(process) 중에 있음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확실성을 지향하게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신앙인의 올바른 삶에 대해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토의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확실성을 찾으라는 것이 이 시대가 교회를 향한 요청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를 당위로 생각한다.

2. 신앙적 삶이 처한 딜레마: 오늘 우리는 도대체 기독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어떠한 실천을 가져야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신앙과 교회란 교인들에게 다만 종교적인 아주 작은 부분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설교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아멘" 소리를 연발하지만 과연 그 설교가 교인의 삶을 올바른 곳으로 이끌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에벨링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바 있다.

아주 객관적으로 보면 오늘의 기독교 선교의 난점은 설교가 현대인에게 마치 외국어처럼 들려서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설교에서 듣는 개체 낱말, 숙어는 잘 이해된다. 그것들은 오히려 너무 익숙해져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은 물론, 감격이나 놀라움도 자아내지 못한다. 또 이런 무감각은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으며 바른 신앙의 척도 역할도 한다. 그러나 설교의 어귀와 낱말을 현재 우리 주위에서 우리에게 관계된 것과 연결시켜 그것이 본래 뜻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만일 이미 잘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 자체에 오직 현실과의 관계를 맺는 것만 조금 보충하면 이 잘못은 잘 메워지리라고 낙관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 문제 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과의 관계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이해를 재는 척도이며, 그것은 결코 모든 일의 뒷정리에 불과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우리의 현실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독교 선교를 통해 우리 현실 아닌 다른 현실을 우선 말하고 나서 고작해야 사후 무덤과 같이 양자의 관계를 찾는 습성에 너무 젖어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딜레마는 신앙의 현실(reality)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에 윤리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나 프락시스가 없다는 말이 모두 이것에 연결된다. 신앙이란 인간의 삶을 정당화시켜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셈이다. 이러한 신앙에서는 어떻게 올바르게 살 것인가의 고민은 필요 없다. 최소한 우리가 이 시간에 신앙인의 올바른 삶에 대해 숙고한다는 것은 신앙의 현실성을 찾자는 말이다.

3. 오늘의 주제 "신앙인의 올바른 삶" 에 대한 전이해
1) 신앙인과 그리스도인은 같은 의미인가, 아니면 다른가? 신앙인이란 모든 종교에 해당하는 말이다. 불교인이나 이슬람교인, 또한 민속종교인에게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믿음을 갖고 있음은 틀림없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저들과 다른 점은 기독론에서 그렇다. 예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 라 다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주제인 "신앙인" 이란 바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적 신앙은 단순히 유신론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신론은 세계 도처에 있다. 오히려 본훼퍼의 말대로 기독교는 비종교화를 통해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비종교화의 출발점은 기독론에 있다. 역사적 예수를 하나님(그리스도)으로 신앙한다는 것은 일반적 유신론은 뛰어넘는 말이다. 동시에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아니다. 유일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이다. 여기서 유신론적이며 단신론 것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신앙의 내용과 대상이 그리스도에 놓여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신앙인과 그리스도인을 편의상 같은 것으로 생각함을 전제한다.
2) 우리는 과연 올바른 것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인간은 올바른 것(진리)을 소유할 수 있는가? 진리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하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서로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인간은 매우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는 동물이다. 통일교의 문선명씨도 진리를 말한다. 그 이전에 전도관의 박태선씨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소위 정통 기독교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교파들도 서로 다른 진리를 말하고 있다. 때로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취한다. 교리문제만 해도 어려운데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윤리의 차원에서 논의하자면 더욱 큰 차이를 내보인다. 역사 참여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실존만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한계인가? 한국의 신앙형태는 이런 면에서 너무도 큰 , 그래서 도저히 메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차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은 항상 유보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냉소적이어야만 하는가? 아무리 진리파악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결단해야한다. 다만 우리가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바탕에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전제하고 말이다.
3) 우리가 오늘 말하고 있는 주제에 "삶" 이 나오고 있다. 이것 또한 우리를 무력감 속에 빠뜨리기 쉬운 개념이다. 우리는 죽음을 건너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해서 단언할 수 없다. 무엇이 인간의 삶이며 생명인가? 생물학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은 다른 것인가 아니면 하나인가?
본인은 이 자리에서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신앙인의 삶에 대해서 말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관념을 떠난 실제가 어디 있으며 초월을 떠난 내재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행동 없는 내적 성찰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알 분만 아니라 본질에 대한 추구 없는 행동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안으로부터 시작해서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취하고자 한다.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될 것이지만 밖으로만 내 돌아도 안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인 실존이 갖고 있는 문제들, 즉 인간, 그리스도, 세상에 대해 논의한 다음, 이를 바탕 하여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국교회의 신앙을 분석하면서 그 본질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어서 사회주의 퇴조에 즈음하여 이데올로기와 신앙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언급하고,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 삶이 터하고 있는 두 지평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으로 본 강좌를 마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 실존

1. 인간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라 해도 인간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실존은 인간됨에 있다. 인간 이상도 아니고 인간 이하도 아니다. 인간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인간 지평을 전제하고 시작할 때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지평에 근거를 두고 존재하는가? 예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때로는 이론적으로 때로는 실천적인 작업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려고 노력하였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의 차이가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이 동물보다 생물학적으로 열등할지 모른다. 19세기에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동물과 비교연구 하였다. 그 외에도 인간에 대한 사회학적인 연구, 철학적인 연구, 종교적인 연구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본 강좌에서 인간론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니 당연히 인간이 무엇인가의 질문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더도 덜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해야한다. 지적인식 능력의 한계, 윤리적 실천의 한계를 갖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카테고리를 그리스도인 역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 인간이 아니라 반신(半神)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인간은 한계 안에 존재하지만 또한 초월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역시 사랑할 줄 알고 정의와 평화를 궁극적으로 추구할 줄도 안다. 인간의 역사에서 휴매니즘이 어떤 면에서 종교보다 훨씬 창조적 실천을 이룩했다고 보아야한다.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 실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와 인본주의는 모순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인본주의자일 수 있고 인본주의자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 무릇(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실증주의 등, 그 유래야 어떻든) 그리스도교 이후 인본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훌륭한 인본주의를 실행하는 경우 , 그것은 인본주의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
2. 세상(역사)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늘이 아니며 땅 속도 아니고 바로 땅위에 존재한다.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땅은 인간이 존재해야할 유일한 터전이다. 우리의 신앙은 이 땅을 떠난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향하여 말한다. 간혹 우리는 이 세상과 역사를 떠난 피안의 세계만을 향해 나아가려는 신앙을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흡사 이 땅위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위에서 역사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이 세상은 전혀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지배한다. 유전공학은 인간의 삶의 바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나간다. 오늘의 새로운 세계 경험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전혀 이것과 무관한 진리를 기독교는 소유하는가? 그리스도인 역시 이 세상 밖에서 진리를 초역사적으로 가져오거나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3. 그리스도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과 무엇이 다른다? 다만 인간으로서 존재하면 충분한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함은 그리스도와 연대하여 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실존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우리 행동의 특이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우리가 물론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갖고 살아야함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일단락 되는 것은 아니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시작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에 우리는 관련되어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고와 행동을 요청 받고 있다. 과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이라함은 조롱받은 용어였다.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구원의 표징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을 누가 좋게 생각하겠는가? 이 이름을 갖는 우리는 과연 거기에 합당하게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우리를 각성시키기보다는 무감각하게 만들고 말았다. 다시 그리스도와의 연대를 철저하게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올바른 삶을 규정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에 대해 논의할 때 최소한 이 세 가지 지평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이며 세상 안에 존재하며 그리스도와의 관련성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됨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이러한 전체적인 틀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찾아나가야한다.


3. 신앙과 삶

1.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 유형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2천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크게 주목받을 만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말이다. 현란한 구호가 많이 등장했다. 세계복음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몇십 만명 돌파 기념 성회.....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그 큰 교회당들, 일년에 수천 명씩 전도사와 목사가 양산된다. 새벽기도 소리로 한국의 아침은 밝아온다. 수천 명씩 모여서 철야기도회를 한다. 종교적 열성이 하늘 꼭대기에 닿았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 많은 에너지가 과연 얼마나 창조적으로 쓰여지는 것일까? 각 교단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자랑하고 있다. 이 종교적 열정이 분열의 열정으로 변질되고 있다. 본인은 한국 교회를 전반적으로 진단하고 싶지 않다. 그럴 시간도 부족하다. 다만 올바른 삶을 찾아보기 위하여 필요한 현재 신앙의 현상에 대해서만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는 무속(巫俗)적이라는 것이다. 무속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특징은 엑스타시의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 흔한 부흥회에서 되어지는 것들은 거의 어느 특정인의 신앙경험에 의한 것이다. 경험이 신앙을 규정한다. 이러한 경험주의는 매우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 경험이란 항상 같은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원칙인 것처럼 선포한다. 또 하나의 현상은 도덕주의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도시 중산층교회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다. 도덕주의가 갖고있는 내적인 특징은 경건성의 강조에 있다. 이 경건은 일종의 율법주의이다. 앞의 것을 신비주의라 한다면 후자의 것을 합리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두 가지 현상인 무속적인 것과 도덕주의적인 것은 서로 다른 형태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거의 같은 삶의 틀에서 출발한다.
저들이 갖고 있는 틀이란 첫째로 이원론이며, 둘째는 기복적이고, 셋째는 몰역사적이다. 이러한 삶의 틀에서는 결코 창조적인 것이 나올 수 없다. 겉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것 같으나 속으로 매우 세속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앙 현상과 내용을 볼 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해 교회를 각성시킨다는 말(몰트만)이 옳다.


2. 기독교와 이데올로기
1) 사회주의 이후: 지난 10월24일 저녁KBS에서 가소르망 敎授(파리대학)와의 대담이 방영되었다. 그는 탈(脫)사회주의라는 책을 썼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국유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없다는 말이다. 구라파의 사회당(프랑스)이다 노동당(영국), 사민당(독일)은 자본주의를 전제한 정치제도인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는 그 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없는 제도이기 때문에 자체붕괴를 가져온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없고 다만 자유민주주의만 있게된다.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을 자유라고 부르냐의 것이다. 소위 자본주의 사회도 완전한 개인의 자유는 가능하지 않다. 공산주의 사회라도 자유가 절대적으로 빼앗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를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또 한가지 자유에 대해 생각해야할 것은 보다 큰 이념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유보해도 인간은 보다 참된 삶의 의미와 내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특히 종교적인 행위에서 그렇다. 자본주의 자유 민주사회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유를 유보하고 살아가는가? 공중질서에서 그렇고 사유재산권에서도 그렇다. 법이라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장치가 아닌가? 이러한 제한을 통해서만 그 사회는 지탱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이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자유에 대해 지나치게 자본주의시장경제 질서에서만 볼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원칙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과연 인간의 참된 인간 됨을 위하여서는 개인의 자유를 늘리는 것이 우선인지, 아니면 평등을 위하여 그 자유를 유보하는 것인지에 있다.
여하튼 소련을 비롯한 동구라파는 사회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가소르망 교수는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은 다만 선택할 뿐이라고 하였다. 동구라파의 사회주의 포기라는 역사는 왜 일어났는가? 그 이념이 문제인가? 비합리적인가? 아니면 그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성인가? 혹은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인가? 그 어느 것 하나만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분석할 수도 없다. 다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혁명적인 역사의 변화 저변에는 경제적인 동기가 높여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다행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나는 단언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저들의 입에서 좀더 잘살아야 하겠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념보다는 빵이 저들에게 더 중요했다. 레닌像이 빵 때문에 수모를 당하는 소련의 현실이다. 인간은 역시 입으로 들어가는 빵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과연 고전적인(원칙적인) 면에서 마저 사회주의는 오류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적용하는 프롤레타리아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과 부도덕성 때문일까? 역사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다시 인류역사에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의 이데올로기로 대신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사회주의가 결국 실패의 혁명으로 끝나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론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낙관론적 인간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도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구원론적 의미에서 낙관론이지 사회주의처럼 현실적 낙관론은 아닌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주의는 능력대로 노동하고 필요한대로 분배받는 사회를(어쩌면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포도원의 일꾼들과 같다.) 꿈꾼다. 이 꿈이 가소르망의 표현대로 하자면 악몽이 된 것이다. 인간은 능력만큼 일하지도 않을뿐더러 더 많은 소유욕에 근거하여 살아간다. 인간에 대한 이상주의는 결국 이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사회주의 이후는 무엇이 대안인가? 더 이상 인간은 이상을 포기해야하는가? 빵으로만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 또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하는가?

2) 자본주의 이후
가소르망 교수가 지적했다시피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몰락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체 내분으로 몰락했다. 이 말은 동시에 도덕적으로, 이념적으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가소르망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자체 안에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직결되는 말이 되기도 한다. 본인은 여기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 경제학적인 언급을 하지 않겠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된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현실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비관론이라고나 할까? 경제적 동기로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다. 일한 만큼 소유하게된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 재산증식을 삶에 역동적 기능으로 이해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부동산 투기를 통한 엄청난 불로소득이 가능한 사회제도인 것이다. 각설하고 이 자본주의가 기독교적인 대안일 수 있는 것일까? 그 가능성을 무조건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서유럽이나 북유럽은 상대적이나마 비교적 기독교적인 정신에 가까이 다가간 사회제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가 바로 최후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제도를 지향해야하는 것 아닌가?

3) 하나님 나라: (생명의 나라, 오메가 포인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를 이 자리에서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이데올로기는(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자유와 평화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인간의 설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이미 시작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종말론적으로 이루시게될 나라이다. 우리는 이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어긋나는 제도와 사상을 대항하여 우리는 투쟁한다. 신앙인의 올바른 삶을 어느 누구도 다른 이가 구체적으로 설계해줄 수 없다. 스스로 결단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우리는 책임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평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본인은 최소한 두 가지 지평으로 규정지어야된다고 생각한다.
   1) 인간실존: 삶의 의미물음
인간은 항상 자신의 실존에 대해 그 의미를 추구해야한다. 왜 내가 존재하는가? 시간성은 무엇인가? 존재와 무(無)의 관계는? 고난이 나에게 주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관계. 이러한 질문과 대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게된다.
   2) 세계와 역사(Context):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우리가 실존적인 지평에만 머물게 된다면 새로운 역사를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 참여를 믿는 이들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우리는 일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이 세상의 질서가 움직이도록 우리는 싸우는 자들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최근의 세계교회가 설정한 방향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이다. 아마 이러한 명제는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가 부둥켜안고 애써야할 우리 삶의 지평이다.

이 두 지평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의 내용이 두 개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본훼퍼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오늘도 그리스도 신자의 삶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두 가지, 즉 기도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는 의로운 일에만 있을 것입니다." (옥중서간 중에서). 그렇다.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믿는 자들이다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의 실존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자들이다. 기도의 내용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어두운 시절에 하나님의 희망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그 희망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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