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하나님 중심성 회복을 위해
-마르바 던(Marva J. Dawn)의 <고귀한 시간 낭비>를 중심으로-

정용섭 목사


투덜거림
10년 만에 찾아왔다는 이 무더위를 다스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글 부탁을 받고 우선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참고문헌과 미주를 빼더라도 62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고 서평을 겸해서 한국교회의 예배에 관한 총괄적인 글을 쓰란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름에는 몇 군데 보내야 할 글과 다음학기 강의 준비로 좀 시달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좀 긴장하고 있는 마당에 또 하나의 숙제를 안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오죽 부담스러웠겠는가. 그래도 딱 끊어서 안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일단 책을 보자고 했다.
바로 다음날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요즘은 ‘택배’인가 뭔가 하는 고도로 발달한 물류산업으로 인해서 너무 빨리 배달된단 말이야. 배달사고도 별로 없고. 이럴 때는 좀 책이 늦게 와야 이런 저런 핑계도 대련만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으니 내 형편만 딱하게 되었다. <고귀한 시간 ‘낭비’>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입에서 예의 냉소가 흘러나왔다. 좀 상투적인 제목 같군. 그렇지 않아도 과도한 예배 때문에 예배 전문가가 될 뿐 삶의 능력이 훼손되고 있는 한국 교회 신자들에게 예배를 열심히 드리라는 주장인가? 큰 제목 밑으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분의 무한한 광휘(光輝)에 잠기라!”는 문구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이 책을 쓴 사람은 신비주의자인가? 내 취향과 다르군. 그뿐만이 아니라 출판사의 광고 카피가 이어졌다. “<안식>의 저자 마르바 던이 이 시대에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 ‘예배’”. 그럴듯한 말로 치장하는 책 치고 내용이 충실한 것 별로 못 봤는데 이 책도 그 중의 하나인 것 같군. 미국 사람은 원래 좀 가벼우니까 이 책도 그런 수준이겠지. 표지 가장 밑으로 “유진 피터슨, 월터 브루그만, 윌리암 윌리몬 추천”이라는 문구도 눈에 뜨였다. 역시 그렇구나. 자기의 이름으로는 자신이 없으니까 권위 있는 사람의 이름을 파는구나.
표지의 하단 우측에 겨우 4제곱 센티미터 크기로 저자의 사진이 실렸다. 그런데 여자 아닌가? 지난 학기에 ‘여성신학’을 강의하긴 했지만 여전히 내 의식 밑바닥에는 “여자가 뭐...” 하는 식의 못된 가부장적 선입관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지 이건 ‘마초’ 근성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두껍기만 하지 별 내용도 없는 책을 이 폭염의 계절에 에어콘 없이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내 연구실에서 읽어야할 내 처지를 생각하니 좀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글을 부탁한 사람은 내가 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 테니 이제 발을 빼기도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나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는 경우에 분명하게 거절해야지. 약간 불편한 마음으로 7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책읽기에 들어갔다.

마르바 던
책을 읽어갈수록 좀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글의 무게가 내 의식의 중심을 짓누르면서 앞에서 내가 투덜거렸던 게 부끄러웠다. 아무리 날씨가 덥기로서니, 시간에 쪼들리기로서니 책을 읽지도 않은 채 별 것 아닌 걸로 시간을 쓰는 게 아깝다는 태도를 보였으니, 참으로 딱한 사람이다. 이번 기회에 나의 냉소적 습관을 딱 끊어내도록 해야겠다. 내 생각이 옳을 때가 아무리 많아도 단 한번의 판단 착오로 겪게 되는 부끄러움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부끄러움만 느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렇게 강권의 방식으로 실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크게 깨달았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더구나 떠밀린 것이지만 이 책을 읽었다는 이 사실은 나에게 일종의 생기(生起, Ereignis)였다. 또는 카이로스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마르바 던 박사를 통해서 미국의 실천신학은 지나치게 실용적인 것만을 추구할 뿐이라는 나의 선입관을 교정할 수 있었다. 마르바 던, 그는 누구인가?
안타깝지만 주로 독일어권의 조직신학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나에게 미국의 실천신학 교수인 마르바 던은 아주 매우 생소한 학자다. 책 뒤 표지 날개에  있는 저자 마르바 던에 대한 약간의 소개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유진 피터슨과 함께 “탁월한 영성 신학자”로 국내에 알려져 있는 마르바 던(Marva J. Dawn)은 캐나다 리젠트 대학과 Christian Equipped for Ministry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며 성가대 지휘자, 작곡가였다고 한다. 그런 탓에 마르바 던은 어려서부터 루터교회의 정통 예전에 익숙했으며 음악적 자질이 풍부했다. 결국 그녀는 북미 신학계에서 매우 뛰어난 실천신학 선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각종 모임의 강연자와 예배의 설교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마르바 던의 신앙, 또는 그녀의 영성을 이해하려면 위에서 소개한 어린 시절 루터교 전통의 가정에서 받은 신앙훈련만이 아니라 그녀가 어려서부터 감당해야 했던 질병과의 투쟁도 역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본인이 직접 진술한 내용을 잠시 보자.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단지 관찰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십대 시절 홍역 바이러스가 췌장을 망가뜨려 놓은 이후로 건강 문제와 늘 씨름해 왔다. 그 후로 망막 출혈 때문에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7개월 동안 완전히 앞을 보지 못했었다), 콩팥이 나빠졌고(내 콩팥은 20%의 기능도 못한다), 양쪽 다리와 소화 기관에 신경 장애가 일어났다. (고귀한 시간 낭비, 399, 이하 숫자는 이 책의 쪽수를 가리킴).

이런 정도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많은 장애와 질병을 끌어안고 살았다. 치아를 잘못 뽑아서 턱이 내려앉았고, 갑자기 생긴 난청 증후군으로 한쪽 귀가 먹었고, 창자를 15인치나 잘라냈고, 유방암으로 유방을 잘라냈으며, 양손의 관절염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심한 통증으로 고생한다. 물론 헬렌 켈러처럼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통해서 오히려 영성을 심화시킨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바 던 박사는 최악의 육체적 조건 가운데서 최고의 예배의 세계에 들어갔으며, 사람들에게 그런 세계를 알려주고 있다.
마르바 던의 경우를 통해서 보더라도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과 나누는 관계는, 또는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세계는 이 세상의 조건이나 상태와는 별로 큰 연관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그의 세계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거꾸로 아무리 열악한 조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나는 이런 영적인 세계의 특성을 마르바 던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마르바 던의 루터교적 경건생활과 육체적 한계를 특단의 정신력으로 극복한 것만으로 감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마르바 던의 영적 깊이, 신학적 토대가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핵심이다. 특히 자칫 실용적 방법론에 치우치기 좋은 실천신학을 다루면서 끊임없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 나를 적지 않게 놀라게 했다. 대개의 실천신학자들이 자신의 신학적 토대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해서 약간의 신학적 포즈를 취할 뿐인데 반해서 미르바 던은 부단히 신학의 중심부에서 자신의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이 글이 전개되면서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
마르바 던의 이 책 ‘고귀한 시간 낭비’를 읽으면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예배 신학적 구도 안에서 아주 철저한 ‘하나님 중심성’을 보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로 여기에 일반 사람들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 있다. 당연히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져야할 예배가, 또한 당연히 그렇게 드려진다고 생각하는 예배가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좀서 세밀하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책의 요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예배하는 삶과 예배로 가득한 생활의 중심에 둔다면 그분의 무한한 임재를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과 한없는 자원과 수없이 많은 방법을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무한한 하나님의 계시를 탐구하면서 고귀하게 시간을 ‘낭비’하려고 매주 모여 진지한 모험을 갖는다면 잘못된 질문과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의 압력과 비성경적 해결책을 놓고 벌이는 논쟁이 그칠 것이다.(20,21).

나는 위에서 인용한 마르바 던의 진술에서 두 대목을 좀더 풀어서 설명하겠다. 한 가지는 하나님을 우리 예배의 중심에 둔다면 그의 임재를 표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그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다양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을 과연 그 중심에 둘 수 있는가에 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용어가 고급의 종교적 수사라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의 중심에 둔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지는 못한다. 예컨대 어느 장로가 겉으로는 “영원 자존하시며 무소불위 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고상한 기도를 드리지만 속으로는 청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는 데 신경을 썼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될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은 들러리로 서고 사람들에게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예배를 나는 한국 교회에서 신물나게 보았다. 이는 곧 우리에게 재미를 주는 시트콤이 단지 말장난만 할 뿐이지 인간 삶의 리얼리티를 간과하거나 훼손시키는 경우와 비슷하다.
나는 여기서 음악을 예로 들어 다시 한번 더 이 문제를 설명하겠다. 어떤 사람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할 실력이 되었다고 하자. 일반적으로 손가락 테크닉이 그 곡을 소화할 수 있으면, 그리고 좀더 세련되게 연주할 수만 있다면 좋은 연주가라고 간주하지만 실제로 음악의 세계는 그런 테크닉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기술이 있기 전에 연주가가 이미 베토벤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소위 음악 경험이 있은 다음에 테크닉이 필요하고 그 테크닉을 통해서 음악 경험을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예배도 역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거나 자신을 표현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중심을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차이를 구분하기는 그렇게 녹녹한 게 아니다. 흡사 사이비 연주가가 베토벤의 월광을 그럴 듯하게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그럴 듯하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마르바 던은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와 삶이 유지되면 쓸데없는 다툼으로부터 벗어난다고 강조한다. 옳은 지적이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과 인간의 욕망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고 활동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가 아무리 양적으로 부흥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극심한 교회 분열 현상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성이 취약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는 다른 왕도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와 기독교인의 삶을 회복하는 데서만 그 길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마르바 던의 이 책은 우리 한국교회에 많은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버거킹 예배
하나님 중심성이 예배와 기독교적 삶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신자들이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실제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우선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 자체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어려운 길보다는 쉬운 길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대답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일 뿐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예배와 그런 삶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고 쉬운 길을 찾으려고 하고, 거꾸로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길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영적으로 약간 고된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우상숭배의 핵심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으로 이어져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종종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위가 우리의 눈에 거슬리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야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언어와 역사이지만 우상의 존재방식은 매우 그럴듯한 가시적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따른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들은 우상을 섬긴 게 아닌가 하고 따지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야훼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는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 밖에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우상숭배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오늘 우리가 정통 기독교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려고 한다면,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만나기 위한 심연의 길을 가기보다는 현대인들이 원하는 방식에 치우친다면 우상숭배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그래서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하는 태도인 반면에, 우상을 따르는 길은 그런 은폐의 방식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 성과가 나타나는 것을 바란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인간 의존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생각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비록 기독교인으로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뿐이고 내면적으로는 구약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을 섬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런 증거는 예배와 신앙생활이 인간의 만족에 초점을 맞춘다는 데에 있다. 이런 현상을 마르바 던은 패스트푸드 ‘버거킹’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버거킹은 ‘스피드’라는 것 외에 또 어떤 필요를 채워주는가? 우리의 ‘예배’가 버거킹과 같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취해야 할 습관과 의식, 관습과 태도를 어떻게 형성하겠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고귀한 시간 낭비, 깊은 묵상, 경외심에 찬 침묵, 질긴 교리에 대한 숙고, 음악적 깊이, 많은 성경 구절 암송, 참 하나님과의 탄탄한 친밀함, 교회의 연속성, 진정한 공동체, 진실된 회개, 슬픈 탄식, 십자가를 지는 훈련, 시간을 초월한 진리, 거룩의 아름다움, 신실한 선과 같은 것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우리의 ‘예배’가 버거킹과 같다면 과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겠는가?(105).

마르마 던이 재미있게 표현한 ‘버거킹’ 식의 예배는 아마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예배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것만이 아니라 일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온갖 청중 중심의 예배가 여기에 포함된다. 어려운 주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싫어하고, 그저 시트콤이나 개그 프로그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는 예배 말이다. 이런 개념의 예배가 우리의 경우에는 ‘찬양과 경배’라든지 ‘열린 예배’ 형식으로 소개되어있다. 어느 특정한 교회를 거론해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온누리 교회가 이런 유형의 예배를 시도해서 큰 반향을 일으킨 뒤로 최근에 많은 교회가 이런 예배 형식을 끌어들이고 있다. 만약 교회 부흥만이 교회 예배와 설교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들에게 할말은 없다.

온누리 교회의 열린 예배, 닫힌 하나님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주창하는 마르바 던의 생각을 좀더 사실적으로 우리의 상황과 접목해서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얼마 전 인터넷으로 참관한 온누리 교회의 예배에 대한 경험을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정통 교회의 예배가 엄숙주의에 사로잡혀 있는데 반해서 온누리 교회의 예배는 흥겨운 한마당 잔치 같았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솔깃해 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 선교사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파송 세리모니를 베풀 때 나름의 감격이 있었고, 예배 전반을 이끌어가던 성가대의 복음 찬송도 역시 무언가 감동적인 느낌을 전달했다. 한 시간 반에 이르는 예배가 흡사 완벽하게 연출된 거룩한 버라이어티 쇼처럼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지만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한 자락도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사람들의 고조된 심리와 감수성, 그리고 그들의 뜨거운 신앙적 결단만 경험했다. 그것은 열린 음악회를 감상한 것에 불과했지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는 사라지고 온통 사람들의 흥겹고 따끈따끈한 정만이 차고 넘치는 예배였다. 아무리 인간의 사귐과 결단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바 던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광휘’에 사로잡히고 싶을 뿐이지 사람들의 센티멜털리즘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아래는 기독교 사상에 게재했던 ‘온누리 교회 참관기’의 한 단락이다.

처음 시작은 찬양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줄곧 따라다니던 부흥회의 시작이 열광적인 찬양이었던 것처럼 온누리 교회의 예배도 최소 20분 이상 열광적인 찬양으로 채워졌다. 물론 겉모양은 상당히 달랐다. 단지 빠른 리듬과 열광적인 박수 소리의 반복에 불과한 부흥회의 찬양과 달리 온누리 교회의 찬양은 최신의 감각과 형식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콘서트 발표회장처럼 회중석을 마주하며 서 있는 성가대원들의 배치가 특징적이었다. 그 흔한 가운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을 차려입었다는 것도 파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찬양의 기쁨이 얼굴 표정과 몸의 율동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그 찬양을 끌어가는 목사의 상투적인 멘트만 없었다면 훨씬 은혜롭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그 찬양 담당 목사는 자기 딴에는 전문가처럼 생각하는지 찬양의 중간에 끼여들어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또는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외쳐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맛있는 수박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옆에서 “맛있죠?”라고 묻는 것처럼 맛을 느끼는데 방해가 되거나 무의미한 발언들이었다. 이렇게 찬양을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회중석은 거의 꽉 찼지만 드문드문 그 시간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훈련이 잘 된 안내자들이 이런 찬양 순서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신자들을 빈자리로 물 흐르듯 인도하고 있었다.
온누리 교회가 자랑하는 ‘예배와 찬양’은 그들만의 특별한 예배 형태이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뭐라 할 말은 별로 없다. 거의 찬양과 춤과 “아멘”, “할렐루야” 같은 환호성으로 진행되는 흑인들의 열광적인 예배가 그들만의 독특한 기질에서 만들어졌듯이 온누리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나로서는 “아, 저렇게 예배를 드리는구나!”라고 지나칠 뿐이다. 다만 이런 방식의 예배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아니 이미 빠져버린 함정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점만 가볍게 지적하려고 한다.
흡사 ‘열린 음악회’ 정도의 세련미와 감동을 확보하고 있는 온누리 교회 예배의 찬양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심리를 고도의 테크닉으로 조작해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찬양이 형식을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옛날 경험했던 부흥회의 준비찬송과 비슷한 심리적 효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의 부흥회 때는 북도 등장했으며, 인도자가 강대상을 손바닥을 치든지, 또는 흰손수건을 흔들면서 청중을 끌어갔다. 일단 그런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다하더라고 대개 최면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탓인지 사이비 소종파 집단에서도 그런 방식을 자주 이용한다. 내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박태선 전도관 모임에서는 거의 한 두시간 씩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불렀다. 그런 광기에 휩쓸리면 박태선 씨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먹히게 되어 있다. 몇 년 전 물의를 일으켰던 영생교 교주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회중들을 농락했다. 여대생들을 추행한 혐의로 구속된 JMS의 교주 정명식도 역시 강단에서 춤을 추는 듯, 그런 열광적인 방식으로 집회를 그런 방식으로 끌어갔다.
다른 한편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비싼 값으로 건강식품을 파는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다. 일단 할머니들을 온갖 방법으로 즐겁게 만든다. 함께 신나게 노래부르고, 춤을 추고, 게임을 하고, 심지어는 업어주는 등, 할머니들의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에 약을 판다. 이미 심리적으로 자기 방어력이 제거된 할머니들은 아무리 비싼 값이라고 하더라도 십중팔구 그 약을 산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곧 감성이 이성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 예배에서도 찬양을 통해서 감성이 극대화하면 인간의 이성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온누리 교회의 예배가 예술적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이단이나 약장사들의 모임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이성이 억압되고 감성이 중심적으로 작동된다는 기본적인 점에서는 소통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예배당을 꽉 메운 회중들과 마주서서 환한 미소로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원들, 아름다운 반주를 끌어가는 현악과 오르간, 거기다가 온갖 아름다운 신앙적 구호를 자유 자재로 다룰 줄 아는 인도자,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부족할 게 하나도 없었다. 이런 장면을 처음 경험하는 경우에는 약간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업’될 수밖에 없다. 이런 감정적 현상을 그들은 영성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나도 인간의 종교적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정통 교회의 리터지(예전)라는 것도 결국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서적이고 심리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리터지와 온누리 교회에서 꾸려 가는 그런 찬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 예배의 리터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감정과 심리를 고조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훨씬 심층적 영성을 깨우는 데에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온누리 교회의 예배는 그것과는 반대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원래 정통 기독교 예배의 시작은 준비 찬송이 없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독일교회의 예배는 바하 같은 사람의 종교 음악을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의 전주로 시작된다. 가능한대로 인위적인 요소를 극소화함으로써 가장 깊은 영성으로 침잠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온누리 교회의 찬양은 사람들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온갖 모양과 꾸밈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흡사 인기 가수의 흥겨운 노래에 따라서 청중들이 두 손을 흔들며 열광하는 라이브 콘서트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들은 그런 것이 “열린예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소비주의
온누리 교회의 예배가 흡사 버라이어티 쇼처럼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현상은 반드시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통교회의 모든 교회 활동이 단지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너무 많은 인간적 볼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망각되는 온누리 교회의 예배 현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마르바 던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교회의 ‘소비주의’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많은 세일즈 전략이 교회에 침투하여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깨어있는 것 같지 않다. 만족스런 교회 성장에 대한 보장이 확산되며, 예배 스타일을 바꾸는 간단한 기술만으로, 진정한 공동체 건설과 하나님의 통치 확대라는 어려운 일을 피할 수 있다는 제안이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소비주의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유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겠는가?(169).

교회의 소비주의는 결국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통해서 끌어가야 할 이 세계의 시대정신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교회의 세일즈 전력은 세상의 것들과 다르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파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주장에는 근본적인 함정, 또는 착각이 내재해 있다. 복음은 삶의 내용에 담기는 것이지 그것 자체의 초월적인 세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복음이 담겨야 할 삶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 사건이 일으키는 생명의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복음은 기독교의 교리와 형식을 사람들에게 무조건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확대하는 일에 집중되어야 한다. 복음 사건 자체에 깊이 들어가기보다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온갖 방법론으로 교회 안의 상품을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는 분명히 소비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과 거리가 먼 행위이다. 마르바 던은 위리암 포어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이런 현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광고의 기본 목적은 사람들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히 ‘전자교회’(electronic church)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복음의 상품들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판매전략만이 그것들을 진열대에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로건, 팝송, 유쾌한 인상과 불쾌한 인상, 부정한 방법, 입소문 등 광고의 기본이 되는 모든 기술은 ‘전자교회’의 상투적 수단의 일부이며, 그런 방법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것, 즉 피상적이며 마술적인 하나님을 팔고 있다.(윌리암 포어), (205).

오늘 한국 교회의 예배가 어느 정도로 소비주의에 물들었는지, 세속의 광고 효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여기서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어린이 주일학교마저 상품, 간식, 또는 ‘달란트’ 같은 이벤트로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교회의 어린이 교육을 맡고 있는 책임자들이 이것을 문제로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 큰 위기인지 모르겠다. 장년들의 예배도 거의 한결같이 예배 참석자들의 종교적 소비욕을 강조하는 쪽으로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여기서 어떤 원칙에 사로잡혀 예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 우리의 예배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경향이 지나치게 인간의 가벼운 종교적 욕망인 감상주의에 기댐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세계가 축소되거나 망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의 전통
마르바 던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예배의 중심은 아주 또렷하다. 그는 현대인들의 현실을 간과한 채 단지 신학 개념만 제시하는 학자가 아니다. 이 시대의 모든 현상들을 충분하게 풀어내지만 그 대답을 그저 단순하게 현대인들의 감상적 욕망이라는 눈높이에서 찾지 않고 훨씬 근원적인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각 시대에서 우리의 생각에 맞는 것은 유지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모순되는 것은 거부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주의자들처럼 프로모더니즘의 참호 속으로 후퇴하는 대신, 최전선에 나서서 주변 세상에 더 나은 포스트모더니즘, 분열과 혼돈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공동체와 신앙의 참된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85).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적 풍토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값싼 처방이 아니라 기독교만이 제시해줄 수 있는 근본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본 처방이 곧 ‘하나님의 광휘에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러나 마르바 던은 반동적 전통주의자는 아니다. 청중 중심의 교회와 예배를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소비주의에 빠지고 세일즈 전략을 세우며, “실용주의적 예배를 강조하는 현재의 추세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뿐이다. 그녀는 멀티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오히려 우리의 온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와 그런 교육을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다. 그녀에 중요한 것은 현대적이냐, 아니면 전통적이냐 하는 극단적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무한중심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세상에게 가장 잘 다가갈 수 있는가? 사람들이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게 하려면 예배를 가능한 한 주변 문화에 가깝게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그러한 주장을 반박한다. 오히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우리의 모습은 예배 가운데 시간을 고귀하게 낭비하며, 그 결과 교회가 되는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세상과는 다른 백성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크나큰 광휘라는 선물을 헤프게 퍼 주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다. 우리는 세상에서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본받지 않으면 그분의 이름(즉 그분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에게 돌릴 수 없다.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의 풍성한 광휘에 잠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관대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무한 중심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54).

교회력에 따른 예배
마르바 던에 따르면 하나님의 풍성한 광휘에 잠기는 길은 포퓰리즘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전통 안에 온전히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일반 청중들이 정통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을 상품처럼 다루는 현대주의적 교회에 끌리는 이유는 기독교의 전통이 시대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전통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런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오늘 우리의 경험 안으로 견인해내는 길 중의 하나는 교회력에 따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교회력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켜야 한다. 지혜롭게도 우리의 선조들은 가장 암울한 달인 12월에 우리의 죄를 생각하고 메시아를 갈망하는 4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북반구에서 볼 수 있는 이 계절의 어두움과 차가움이 남반구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반구와 북반구 모두 세상의 스케줄을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은 교회보다 세상을 우위에 두는 파괴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77)

책 한권으로 다루어도 충분하지 않은 교회력 문제를 여기서 한 두 마디로 간단히 처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방향만이라도 제시하면 괜찮을 것 같다. 이런 교회력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일부 교회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한국의 교회가 교회력과 무관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런 형편은 지금도 역시 계속되고 있다.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교회력 중심의 예배를 회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정통교회나 현대교회나 모두 한결같이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자들의 신앙적 결단을 조속히 끌어내기 위한 프로그램에만 마음을 두고 있지 종합적인 신앙의 깊이를 마련해주는 데는 소홀하기 때문에 교회력 중심의 예배가 자리잡을 기회는 많지 않다.
특히 언제부터인가 소위 ‘강해설교’라는 이름의 설교 브랜드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예배의 중심이 훨씬 천박해지고 말았다. 강해설교를 하는 분들은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특정한 절기를 제외하면 한편의 성서를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설교한다. 작년에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만 15회에 걸쳐 연속 설교를 했을 정도니까 그 상황을 알만 하다. 이렇게 교회력을 파괴하는 강해설교는 본인들이 원하는 성서만을 집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청중의 균형적인 신앙성장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세계 교회의 일원임을 망각하게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착각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마르바 던도 지적했지만 예배와 전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와 성서연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족
마르바 던의 책 ‘고귀한 시간 낭비’(2004년, 도서출판 이레서원)를 번역한 김병국, 전의우 두 분께 수고하셨다는 말과 감사의 말을 같이 드리겠다.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분들이지만 이 분들로 인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지평을 새롭게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미주를 포함해서 667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책을 번역한 그 수고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신학대학교의 예배학 과목에서 필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역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하게 느낀 대목이 거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영어에 대한 깊은 이해만이 아니라 우리말 쓰기에서도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역자들인 것 같다. 독자들을 위해서 ‘옥의 티’를 찾는다면 다음과 같다.
1) 제목: 고귀한 시간 ‘낭비’(A Royal 'Waste' of Time): 여기서 ‘고귀한’은 시간에 붙는 수식어가 아니라 낭비에 붙는다. 이런 차이를 우리말로 표현하기는 물론 쉽지 않다.
2) 부제: 하나님을 예배함과 세상을 위한 교회됨의 광휘(The Splendor of Worshiping and Being Church for the World): 부제는 마르바 던의 예배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그 예배에서 하나님의 광휘, 존엄을 경험하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는 여기서 약간 실수를 한 것 같다. 광휘는 교회됨에 있는 게 아니라 예배드림에 있다. 교회는 광휘를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부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어야 한다. 예배드림의 광휘와 세상을 위한 교회됨.
3) 매스터 스토리(master story),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 역자들이 음역을 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없을까? 혹시 ‘거시담론?’(43,47쪽)
4) 힌덴미트(Hindemith): 독일 작곡가인 이 사람의 이름은 ‘힌덴미트’가 아니라 ‘힌데미트’다(224,235쪽).
5) 마티아스 그린발트(Matthias Grünewald): 이 사람의 이름도 역시 ‘마티아스 그륀네발트’라고 발음해야 옳다(235쪽).
6) 마틴 니몰러(Martin Niemoeller): 마틴 니묄러(350쪽).
7) 젠슈흐트(Sehnsucht): 제엔주흐트, 또는 젠주흐트(405쪽).

폭염지절에 이렇게 두툼한 책을 읽고 뿌듯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경험이다. 내 글이 무디어 이 책에 담겨 있는 감동을 충분하게 풀어내지는 못했지만, “꼭 한번 읽어보세요”라고 권할 수 있는 책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년 여름은 나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2004년 7월30일)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