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폭스의 일기

왜 조지 폭스의 일기인가?
금년 여름 ‘고전읽기’를 두 달 앞두고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냐, 아니면 <조지 폭스의 일기>냐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할지 적지 않게 망설였다. 어거스틴의 책은 함께 읽어내기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워낙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알찬 작품이라 이번 기회에 한번 소화해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의 ‘고전읽기’ 모임은 혼자 눈으로 읽는 방식이 아니라 차례대로 윤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화해내기에 어거스틴의 책은 분량이 너무 많은 편인 반면에, 470쪽에 이르는 조지 폭스의 일기는 적당한 분량이었다. <폭스의 일기>로 잠정 결정한 다음에 일단 내가 몇 대목을 훑어보니까 돌아가면서 읽기에는 편한 문장으로 되어 있었지만 내용이 그렇게 충실한 것 같지 않아서 약간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평소에 꽤 괜찮게 생각하고 있던 퀘이커 교도의 수장이 쓴 일기라는 사실 때문에 그대로 밀고 나갔다. 꼼꼼히 읽다보면 지난 1회 때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2회 때의 <루터선집> 못지않은 영적인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약간 막연한 기대감도 이런 결정에 한몫 했다.
사실 정확히 계산해서 472쪽 짜리 책을 여러 사람이 돌려가면서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읽어낸다는 것은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고는 힘들다. 더구나 이번 여름은 10년 만에 찾아왔다는 무더위가 아닌가? 원래는 이 더위가 한 고비 꺾인 8월 말쯤에 모임을 가질 생각이었는데, 다음 학기의 강의 준비가 부담이 되는 분들이 몇 있어서 더위 문제를 무시하고 8월9일(월)부터 삼 일간에 걸친 일정을 잡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모임을 가졌던 1회와 2회 때 좀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금년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글을 써야할 일들이 제법 밀려 있었기 때문에 좀 줄여서 3일의 일정을 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위를 별로 타지 않는 체질 탓에 그런 대로 견딜 만했다. 그러나 실내 기온이 34-5도를 오르내리는 좁은 공간에 에어컨 없이 그저 선풍기 바람으로 견딘다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내년에는 작은 용량이라도 쓸만한 에어컨 하나 장만해두어야겠다.
조지 폭스의 책을 3일 안에 모두 읽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서 이 책 앞에 수록되어 있는 폭스와 그의 일기에 대한 제 삼자의 평은 일단 제외했다. 그게 60쪽 가까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은 410쪽도 벅찬 분량이다.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2시간 읽고, 점심 1시간 쉬고, 오후에 4시간 읽는다면 전체적으로 하루에 6시간이 확보되는데, 짬짬이 코멘트를 달거나 음료수 마시는 시간을 빼면 순전히 읽는 시간만은 4시간가량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계산과 지난 경험을 통해서 볼 때 하루에 대략 100쪽 정도가 소화해내기 가장 적당한 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20장(章)으로 구성된 그의 일기 중에서 그의 인생 여정을 따라잡는데 곤란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몇 장을 뛰어넘기로 했다.

조지 폭스
조지 폭스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일반 신자들만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별로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사실 그가 단지 퀘이커 교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흐릿한 추정만 있었을 뿐이다. 조지 폭스가 이렇게 우리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는 그의 신학적 사상이나 신앙 체험이 좀 별나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를 태두로 시작된 퀘이커 교가 이렇다할 대중적인 힘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몇몇 교파만이 정통파이며, 그래서 세계 교회의 주류로 자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소종파의 주장은 아무런 반향을 일으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런 선입관을 제거하고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직시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일종의 마이너리티였던 사람들이나 그런 신앙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의 한 사람이 조지 폭스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직폭스의 일기> 앞표지 날개에 실린 짤막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퀘이커라고도 알려져 있는 친우회(親友會)의 창설자이다.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한 마을, 페니 드레이턴에서 태어났다. 그가 공식적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19(?)세 때 그의 종교적인 수업 또는 체험을 얻기 위하여 집을 떠났다. 그의 일기는 폭스 자신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퀘이커교의 발생에 관해서도 가장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열정이 또 하나의 정통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대였다. 특히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청교도들이 각축을 벌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왕권이 축출되고 공화정이 꽃을 피웠던 격랑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조지 폭스는 그야말로 불꽃처럼 자신의 삶을 태우다가 친우회라는 일종의 소종파 조직을 남겨두고 67세라는 적당한 나이로 죽었다.
우리가 4세기 전에 살았던 인물의 자세한 내력을 살피는 일은 그것 자체가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지 폭스처럼 철저하게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살았던 사람의 경우에는 거의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교육 과정은 그의 사상과 행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일기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조직 폭스에 대한 평을 쓴 사람의 글에도 그런 내용은 별로 없었다. 조지 폭스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살았던 칼빈이나 루터, 또는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들의 학문적 훈련이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져 있는 반면에 조지 폭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는 이 사실은 십중팔구 그가 이렇다 할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학문은 자기의 경험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그것이 종교이었건, 예술이었던, 다른 인문학이었건 진리에 이르는 토대인데도 불구하고 조지 폭스에게서 그런 흔적이 없다는 점이 말이다. 이 사실은 그의 일기를 읽어가면서도 계속 확인된 바였다.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대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적으로 매우 민감했다고 한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순결함과 의를 알았다. 그동안 순결함을 지키며 행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모든 것에 성실하라고 가르치셨으며, 두 가지 측면 즉, 안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성실하라고 가르치셨고 모든 일에나 예나 아니오 하고 대답하도록 나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입에 거짓말과 변하기 쉬운 말들을 담아도 나는 모든 일에 예 혹은 아니오 하고 말해야 하며, 말을 조심하여 내가 하는 말이 은혜로 단련되어 향기를 풍기는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지에서 사역을 하다가 건강에 좋도록 음식물을 창조하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정도로 적당하게 피조물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나를 부정하게 만드는 음식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60쪽, 이하의 숫자는 본서의 쪽수를 가리킴).
조지 폭스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예와 아니오’로 대답하며 평생을 살아간 사람이라고 대답해도 좋으리라. 그는 도대체 어디서 전폭적으로 진리에 속한 사람들에게서나 나타나는 이런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다른 진리도 역시 그렇겠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는 길도 역시 반드시 공적인 교육에 의해서만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 가지의 이치만 배워도 열 가지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조지 폭스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일류대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그런 대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훨씬 진리 자체에 가까이 접근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회가 형성한 교육 제도의 양면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을 진리에 이르게도 하지만 그 반대로도 작용한다는 양면성 말이다. 또한 그런 교육 제도 안에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공교육이라는 제도는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당위성을 갖지는 못하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서 어떤 결과를 맺는가에 따라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공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영적 각성의 세계에 들어간 조지 폭스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략 19세가 되는 1643년 9월9일 출가했다. 그 뒤로 그는 유랑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영적 구도자의 길을 평생 동안 지속해나간다. 나는 여기서 그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성장해나갔는지, 또한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 경험을 축적해나갔는지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19세에 출가한 이후로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에만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그의 신앙적, 인격적 특징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리라 본다. 특히 그는 자기가 만나는 대상이 누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확보한 영적 감수성의 탁월성이 높이 드러난다. 보통 사람들은 높은 사람에게 비굴하고 아래 사람에게 교만하며, 약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적당하게 자기에게 유리한 처신을 하는 법인데, 조지 폭스는 오직 거룩한 영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한번도 흩트리지 않고 살았다. 참으로 놀라운,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놀라운 정신력의 소유자이다.

올리버 크롬웰 방문
우리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가 대략 30세쯤 되었을 때 자기보다 26살 더 먹은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을 만난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크롬웰은 19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함으로써 왕정의 뿌리를 뽑아내고 영국을 ‘공화 자유국’으로 만든 장본인으로서 이미 호국경(護國卿)의 지위에 올라 있던, 그야말로 그 당시 영국의 최고 실권자였다. 지금 우리는 조지 폭스가 크롬웰을 만나게 된 깊은 사연을 알 수 없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일찍이 청교도적 신앙경험을 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정치세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던 크롬웰이 조지 폭스에게서 영적인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추정해볼 따름이다. 폭스가 전하는 한 대목을 여기 인용하겠다.
“그래서 나는 호국경에게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값없이 전하였으며, 값없이 전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였고 그러한 사람들은 더러운 이익을 얻으려고 설교를 하며, 돈을 받고 예언하며, 대가를 받으며 설교를 하는 탐욕과 욕심에 찬 사람들로, 결코 충족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가지고 있던 동일한 성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리하였듯이 이제껏 이야기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고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내가 말하는 동안에 호국경은 몇 번이고 ‘참 좋은 말이오. 그 말이 맞소이다.’하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소위 말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전하여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동일한 능력과 성신을 얻기를 원하는데 사람들이 아들과, 아버지와 성경과, 또한 사람들 간에도 교제를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능력과 성신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다.”(177).
조지 폭스는 그 뒤로도 크롬웰이 죽을 때(1658년)까지 여러 번 만났다. 그럴 때마다 폭스는 크롬웰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주었는데, 이게 참으로 불가사의이다. 삼십대 초반의 방랑 전도자가 환갑에 가까운 최고 권력자 앞에서 할말을 다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거리낄 게 하나도 없다는 증거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롬웰이 갈등하고 있을 때 폭스는 그것을 거부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이 일기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이것을 편집한 사람에 의해서 과장된 것인지 내가 판단할 길은 없으나 폭스라는 인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한편으로 크롬웰도 역시 주변에서 폭스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이 올라왔지만 폭스의 신앙적 순수성과 열정을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비록 노회한 정치인이었지만 매우 민감한 영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크롬웰이 병으로 죽은 다음에 다시 왕정이 시작되자 크롬웰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지 폭스를 음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특히 그 당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어가던 ‘친우회’ 모임에서 역모가 일어나고 있다는 고발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지 폭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왕 앞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의 신앙적 관심을 표명했다. 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찰스 왕 보십시오. 왕께서 이 나라로 다시 돌아오신 것은 칼로 들어 온 것도 아니며 전쟁에 승리하여 들어온 것도 아니고 오로지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된 일입니다. 이제 그 주님의 능력 안에 살지 않으면 왕께서는 번영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왕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셨는데 왕께서 용서와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며,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핍박을 중단시키지 않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그만두게 하지 않으신다면, 또한 신앙을 핍박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법률들을 없애고 그리하여 그러한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핍박을 해 나간다면, 국왕께서는 이전에 사라졌던 사람들처럼 맹목적인 사람들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핍박이라는 것은 언제나 거기에 빠진 사람들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능력으로 뒤집어엎으시며, 용감한 행동을 계속 나타내 보이시면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294).
폭스의 관심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성령을 내면적으로 경험하는가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국경이나 왕 앞에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며, 더 나아가서 그런 기준에서 나름대로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생각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비록 적지 않은 정치적 핍박을 받았지만 결국 그런 모든 오해 및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도 교회를 부정함
조지 폭스를 중심으로 한 ‘퀘이커 교도들’이 정치적, 종교적 시련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이들이 영국 국교의 모든 체제를 부정한다는 사실과 성령의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한다는 데에 있다. 폭스는 십일조와 성직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목사들은 성경 어디에서 십일조를 금하고 있는지, 혹은 십일조 제도가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히브리서 7장을 펴 보이며 십일조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거두는 제사장직도 끝났다는 것과, 제사장직을 정하고 십일조를 내라고 명령하고 있는 율법도 끝이 나고 이제 폐기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두 목사는 사람들을 부추겨 소요를 일으켰다.”(170).
이런 표현은 그의 일기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끊임없이 십일조와 성직제도를 부정하는 조지 폭스가 영국 국교회 쪽에서는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이 두 요소는 바로 영국 교회를 지탱해주는 핵심이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변함없다. 나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가 여전히 십일조 헌금을 유지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아무리 원칙적인 면에서 극복된 문제라고 하더라도 교회가 이 세계 현실 안에서 제도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적인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기왕에 십일조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면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금을 의무로 강요함으로써 헌금의 본질이 왜곡되는 일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것이다. 성직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폭스의 주장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이미 마틴 루터 역시 ‘만인 제사장’론을 제시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성직 하이라키는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현실의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성직이 일종의 봉사 카리스마로 운용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여러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하니까 더 이상의 언급은 그만두자.
다만 폭스의 주장이 원칙적인 면에서 옳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방향에 쏠림으로써 현실성을 잃을 염려가 있다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의 주장과 조직에 담긴 영적인 에너지가 17세기 영국을 뒤흔든 신앙 운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확대 재생산되지 않고 소멸의 길을 걸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아직 퀘이커 교가 어느 정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그 역동성이 위축된 것 자체만으로 폭스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성령의 직접적인 소통
조직 폭스가 종교적 제도권을 그렇게 철저하게 배격한 이유는 일단 그 당시 영국 국교의 정통주의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즉 신자들에게 죄책감을 불어넣음으로써 교회에 의존적이게 만드는 인간적 모습을 보았다는 데에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다. 성직자 없이도 기독교 신앙이 유지될 수 있는 힘은, 또한 헌금 없이도 예배와 기독교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힘은 모든 기독교인들 각자가 성령의 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을 수 있다면 굳이 목사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도 퀘이커 교도들은 말씀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성직자 없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꾸려나가고 있으며, 예배도 역시 그런 설교 전문가 없이 회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서 드려진다.
나는 폭스에게 어떤 경험이 있었기에 종교 전문가 없이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일기에 진술되어 있는 그 내용만으로는 그의 경험을 정확하게 따라잡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사실 언어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근원적인 사태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 한 두 대목만 인용해보자.
“내가 어떤 고통 속에 있었는지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갖 고통 가운데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또한 크고 엄청난 것이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오, 엄청난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내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이란! 고통과 괴로움이 커질 때는 주님의 사랑 또한 지극하게 넘쳤나이다. 주님, 주님은 기름진 들판을 황량한 광야로 만드시며 황량한 광야를 기름진 들판으로 만드는 분입니다! 주님은 허물어뜨리고 또한 세우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죽이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오, 영광의 주님이시여. 모든 영광과 존귀를 주께 드리나이다! 성령으로 하는 것은 생명이요, 육으로 하는 것은 죽게 하는 것입니다.”(70).
“나는 또한 어둠과 죽음의 바다가 있지만 무한하신 빛과 사랑의 대양이 어둠의 바다 위로 넘쳐흐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점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달았으며 커다란 열림을 경험하였다.”(75).
조지 폭스가 경험한 ‘열림’은 일종의 돈오(頓悟)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세계가 점진적으로, 또는 갑자기 자기의 전체 존재를 휩싸는 경험이라 할 이런 열림의 사건으로 인해서 조지 폭스는 이제 좌고우면 없이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향해서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조지 폭스의 이런 열림의 경험을 제 삼자가 간섭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삶을 보면 그의 경험이라는 게 매우 심원하고 확실했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것의 내용은 그의 일기에서 충분하게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뭐라 말할 상황이 아니다. 흡사 모차르트 같은 사람에게 음악의 세계가 한꺼번에 열렸던 것처럼 조지 폭스에게는 십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그런 영적인 깨우침의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조지 폭스에게 있었던 그런 영적인 경험은 누구에게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적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경험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의 신앙생활과 성서공부, 더 나아가서 신학훈련을 통해서 조금씩 영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 이런 경험도 부단히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그런 노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게 흡사 옛날 흑백사진을 보듯이 흐릿한 영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 노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도덕성과 경건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걸음(Anrede)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은 대개 일상과 자기 성취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일 조차도 혁명적인 변화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비록 조지 폭스와 같은 영적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면 희미하게나마 그런 ‘열림’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조직 폭스의 이 ‘열림’ 경험은 그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있는 놀라운 신앙 경험이지만 자칫 신학 무용론에 빠질 염려가 없지 않다. 만약 과거의 신학 역사를 부정하게 되면 조지 폭스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이단으로 빠져들 위험이 없지 않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같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경험한 ‘열림’이 신학적 반성을 거치지 못함으로써 결국 이단의 길을 걷게 된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두 가지 기준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조지 폭스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영적인 열림의 경험과 신학적 해석 사이의 긴장 말이다. 이런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한편으로 일종의 주관주의적 성령 열광주의에 빠지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 지성주의에 빠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조지 폭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면서도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았으며, 비타협적이면서도 인간학적 토대를 상실하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비슷한 대중적 카리스마를 확보했지만 본질적으로 전혀 달랐던 사이비 교주들과 조지 폭스와의 차이점이다.

왜 모자를 벗지 않을까?
<조지 폭스의 일기>를 읽는 중에 반복되는 신앙 용어나 체험, 또는 사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하나의 에피소드는 폭스와 그 일당들이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서로 인사를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로 모자를 벗었던 것 같은데 폭스는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붇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습관을 과감하게 거부한 것 같다. 법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불이익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행동이 우리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과 공연한 시빗거리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폭스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신앙적 태도로 여겨진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삶의 자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보며, 다만 그런 사소한 문제에서도 신앙의 근본을 유지시켜나가려는 그의 태도는 여전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모자를 벗지 않는 문제와 거의 비슷한 차원에서 조지 폭스는 ‘맹세’나 ‘서약’을 완전히 배격했다. 그 당시로서는 관행이기도 하며 형식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문제, 즉 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어려움이 적지 않았는데도 그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모자를 벗지 않는다는 문제는 성서가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지만 맹세하지 않는 문제는 성서에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또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예루살렘은 그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나 검게 할 수 없다.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 5:33-37).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 세상의 모든 서약과 맹세를 거부하는 폭스의 태도를 우리가 무조건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흡사 요즘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혈을 거부하거나 집총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것과 마찬가지로 퀘이커 교도들도 당시의 모든 풍습과 예의범절을 배척함으로써 상당한 오해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는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들은 근본주의자, 또는 극단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그들의 평화주의는 인류 역사를 폭력으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통교회는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거나 더 나아가서 매우 세속적인 이유로 현실을 이용한 반면에 퀘이커 교도들은 자신들에게 그 어떤 불이익이 주어진다고 해도 자신들의 신앙과 배치되는 것을 과감하게 떨쳐내려고 최선을 다 기울였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좁은길’을 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주장 자체가 무조건 옳다는 말은 아니다. 그 문제는 여전히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의 삶의 태도는 지나치게 문화 우호적인 정통교회과 비교할 때 매우 단호하다.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단지 평화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동물애호가이며 남녀평등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에 동물학대나 남녀차별 문제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조지 폭스의 영성이 기독교 본질에 얼마나 깊이 천착해있는가에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한쪽으로 깊이를 발견한 사람은 다른 쪽에서도 그만한 깊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이렇듯 영성의 깊이로 인간과 생명의 깊이를 볼 줄 알았던 인물이 곧 조지 폭스다.

뾰족집
폭염지절에 흡사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그려진 순수 무구한 주인공 같은 조지 폭스를 간접적으로 만나보았다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참으로 뜻 깊은 여름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비해서 매우 무기력한 나의 영적 세계를 돌아보면서 약간 우울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내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마저 감사한 일 아닐까.
마지막으로 교회성장주의에 매몰되어서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거의 잊혀진 오늘 한국교회에 조지 폭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자못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기성교회를 향한 그의 주장에 극단적인 요소들이 없지 않지만 그것마저 그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순수한 영성에 의해서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교회를 뾰족집으로 낮춰 부르는 그의 쓴 소리도 크게 불순하게 들리지 않으니 말이다.  
“목사들의 세상적인 생각은 내 삶에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뾰족집으로 불러들이는 종소리를 듣기가 괴로웠다. 그것은 마치 목사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시장의 종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주교에서 가장 낮은 사제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팔아, 설교를 통해 벌어들인 그 엄청난 돈이란! 세상에 어떤 장사와 비할 수 있겠는가? 성경이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일꾼들에게 값없이 전하라고 명령하셨으며 예언자들과 사도들도 돈을 위해 일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거저 베푸시는 주 예수님의 영 안에서 생명의 말씀과 값없이 이룩하신 화해를 선포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후히 베풀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은 이전에 타락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91).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