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법’과 국가보안 ‘법’
-법에서 복음으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죄를 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굴 안에 갇혔다. 이들의 발에 채워진 족쇄와 동굴 안의 어둠이 그들의 행동을 불편하게 했지만 이들은 차츰 동굴 안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동굴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의 후손들은 그곳에서의 삶에서 전혀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동굴 밖의 세계는 시나브로 잊혀지다가 급기야는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족쇄를 풀게 된 어떤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동굴 밖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동굴 안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여러 생명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색깔, 꽃향기, 나비와 벌, 산과 강, 호수, 들판, 태양과 별이 제 각각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충격을 받은 이 사람은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가서 자기 동포들에게 어서 빨리 이 동굴을 벗어나야 한다고, 동굴 밖은 정말 멋진 세상이라고 외쳤다. “당신들은 동굴 안에 갇혀 있습니다. 빨리 해방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동굴 밖으로 함께 나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동포들은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들었어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살아온 동굴만이 변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동굴 세계의 원로들은 동굴 안의 법을 어기고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엉뚱한 말을 하는 이 사람을 ‘미쳤다’고 단죄하고 옥에 가두었지만, 이 사람은 옥에 갇혀서도 동굴로부터의 해방을 계속 외쳤다. 그러자 원로들은 이 사람 때문에 동굴의 질서가 허물어지고 자칫 그 근본이 위태롭다고 보고, 의논 끝에 이 사람을 없애버렸다. 그 사람이 사형을 당한 이후로 동굴 안의 세계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동굴을 모든 세계라고 믿고 있는 그들은 동굴 안에서 이전처럼 행복감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이왕주의 <철학풀이 철학살이>에서 참조).
2천4백 년 전 아테네의 원로들에 의해서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자기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어리석은 아테네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그 오랜 세월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플라톤은 단지 그 시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상만을 빗대서 이런 우화를 만들었다기보다는 더 근원적으로 참된 ‘이데아’에 대한 인식만이 이 세계의 실체를 밝히 보여준다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이런 우화에 담으려 한 것 같다. 그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지 이미 우리에게 남겨진 ‘동굴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삶에 내면화되어 있는 허상과 허위를 직관하도록 압박한다. 이 우화에 나오는 동굴 안의 실정법과 종교법, 관습헌법과 조례 같은 온갖 종류의 법과 규범이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를 원천 봉쇄했다. 정치와 종교에 의해서 금지된 법은 세월의 두께와 더불어 그 동굴 세계 안에서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이데올로기가 동굴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 의식까지 지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어 결국 그들은 동굴 밖의 황홀한 생명의 세계를 알지 못한 체 그 동굴 안의 칙칙한 삶을 행복한 것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동굴의 허상이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 같다.

나는 간혹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이런 동굴을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섬뜩해진다. 최근에 나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설교비평’에 관계된 작업을 몇 번 했다. 스스로 설교를 잘 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는 게 약간 부끄럽지만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었다. 설교비평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솔직히 은혜로운 설교를 듣고 싶다는 생각에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으로 나오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원로들과 똑같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비록 동굴 안에 묶여있지만 동굴 밖의 세계를 가리키고 함께 그쪽을 향해서 조금씩 가까이 나가야할 설교자가 청중들을 동굴 안의 질서에 적응시키는 일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 다만 그런 현상을 오늘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설명한다면 그들은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여러 종류의 ‘규범’만 강화하고 있었다. 성서를 규범으로 접근한다는 말은 곧 기독교가 율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헌금문제일 수도 있고, 사회봉사, 복지, 봉사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 접근방식이 한결같이 ‘율법’의 차원이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스스로 바람처럼 자유롭게 생명의 세계를 열어가는 영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도와 프로그램 안에 갇히는 법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율)법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안식일 ‘법’
유대교의 율법을 압축하면 십계명일 것이며, 그것을 다시 압축하면 안식일‘법’이다. 물론 이런 규정이 구약신학의 관점에서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여기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벌어진 긴장과 충돌이 주로 안식일 논쟁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안식일 제도에서 안식년으로, 안식년에서 희년으로 훨씬 포괄적이고 심층적 차원으로 변화해간 그 역사를 감안한다면 안식일은 모든 율법의 단초라 할 수 있다. 물론 십계명에는 안식일보다 훨씬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이는 계명이 있다. 야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 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둘째 계명,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세 번째 명령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의 계명들은 약간 관념적인 데 반해서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는 계명이라는 점에서 율법의 정수라 할만하다.
안식일은 두 가지 전승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창조 전승이며, 다른 하나는 출애굽 전승이다. 출애굽기 20:8-11절에 보도되어 있는 안식일 규정은 육일 동안의 창조 행위가 끝난 다음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해명되었다. 신명기 5:12-15절에 보도되어 있는 안식일 규정은 출애굽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앞의 전승은 생명창조와 쉼이며, 뒤의 전승은 해방과 쉼이다. 양측 모두 기본적으로는 인간과 짐승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의 참된 쉼을 지향하고 있다. 신명기 전승의 본문을 읽어보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분부하는 대로 해야 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과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억센 손으로 내리치고 팔을 뻗어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러므로 너희 하느님 야훼가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 5:12-15).

출애굽기(20:8-11) 본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십계명 중에서 이렇게 전후 맥락을 철저하게 규정하고 있는 항목은 안식일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는 구절은 안식일 규정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노예들까지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만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이러한 규정은 고대 문명 가운에서 여기 이스라엘의 십계명에만 지시되어 있다. 어느 신학자는 안식일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에게 물려준 가장 소중한 정신유산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 안식일 제도를 강제로 규정함으로써 노예들까지 창조와 해방의 기쁨에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모든 인간들, 그러니까 자유인이나 노예나 나그네, 그리고 가축들까지 생명의 환희에 참여해야 한다는 유기적 생명에 대한 본질적 인식과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구조가 그것을 자율적으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한계 사이의 갈등에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강제규정을 만들어서 그 정신을 계속 유지해보려고 했다. 이게 바로 법의 정신이다. 안식일 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그 법은 결국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생명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에 있는 것이지 그 안식일이라는 법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말은 곧 모든 ‘법’은 인간과 세계의 생명을 심화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참된 쉼을 얻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이 근본적인 생명정신을 온전히 살려나가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은 바뀌든지, 아니면 최소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막 2:27)는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바로 이런 사태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며 해석이다.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
나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읽고 전달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굳이 신학 공부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비난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태도와 오늘 우리의 태도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외면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가 칭찬한 세리와 우리를 일치시키고 있지만, 찬찬히 그 속내를 뜯어보면 오늘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은 일주일에 행한 금식과 십일조 헌금 행위를 자랑스레 쏟아내는 바리새인에 가깝다. 그 이유를 이제 안식일을 중심으로 한 바리새인들과 예수와의 갈등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제시해보자.
공관복음이 함께 다루고 있는 안식일 논쟁은 기본적으로 두 대목이다. 하나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막 2:23-28, 마 12:1-8, 눅 6:1-5)과 곧 이어서 예수가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장애인을 고친 사건(막 3:1-6, 마 12:9-14, 눅 6:6-11)이다. 누가복음은 그 이외에 두 가지 전승을 보충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자를 고친 사건(13:10-17)과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자를 고친 사건(14:1-6)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의 보도를 외면하고 두 가지의 독립 전승을 기록한다. 하나는 예수가 안식일에 38년 동안 누워 지내던 사람을 고친 사건(5:1-18)과 성전에서 행한 안식일 논쟁(7:14-24)이다. 요한복음은 논쟁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9:14).
각각의 본문이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에 안식일에 대한 이해가 상반된다는 기본 골격에서는 똑같다. 바리새인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매우 합리적이다. “예수 당신이 장애인들이나 만성 질환자를 고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뭐라 할말은 없지만 당장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치료하시오.” 비록 이런 바리새인들의 주장 뒤에는 어떤 음모가 깔려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그 주장 자체만 놓고 본다면 아무에게도 책잡힐 일이 아니다. 안식일이 어떤 날인가? 모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모든 율법의 총체가 담겨있는 법이 아닌가? 치료도 좋고 자선도 좋지만 굳이 안식일 법을 어길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하루만 늦추면 해결되는 문제니까 그들의 제안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만약에 나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왔다면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루를 연기한다고 하더라도 장애인이 죽거나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안식일 법 준수에 목숨을 걸어놓고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의 체면도 살려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대안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예수는 안식일에 장애인들과 환자들을 고쳤다.
이런 예수의 태도가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비록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싸움을 좀 멀리 보고 가능한대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게 바람직했을 텐데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중재안을 단호하게 배척해버리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절대 이데올로기인 안식일을 해체한 것이다. 예수는 무슨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배수진을 친 것일까? 이스라엘의 주류인 바리새인들과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다면 아직도 갈 길이 먼 예수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을 거라는 상황 판단은 약간의 생각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다볼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안식일을 범했다. 그때 예수의 심정과 태도가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너희들은 적당한 선에서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다그치지만, 나는 내 길을 갈 뿐이다. 내가 안식일 법을 어겼으니,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 내가 소설을 쓰듯이 예수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예수의 이 도발을 이런 방식 말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일이 있은 직후에 바리새인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처치할 모의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한다.(막 3:6). 이 때가 바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였으며, 그 이후로 회당 출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채 그는 일종의 반체제 인사로서 유랑 전도자의 길을 가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예수가 십자가로 처형당하게 된 그 단초는 도발적 행동을 통한 안식일 해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율법과 복음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떻게 보면 작은 해프닝에 불과할 수 있는 안식일 논쟁이 바리새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왔으며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까지 이르게 된 이 사건진행 안에 개입되어 있는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복음서에서 늘 예수와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별난 사람들일지 모른다고 예상하겠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타가 인정할만한 전형적인 종교인들이었다. 좋은 대학교 나오고 높은 연봉을 받고 교회에 잘 다니고 성경에 대한 정보도 많고 교양 만점이고 인격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예수에게 적대감을 갖고 대할 정도로 인격과 신앙이 뒤틀린 사람들이 절대 아니었다. 안식일만 피해서 환자를 돌보라는 그들의 제안만 보다도 그들이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이 안식일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예수를 처형해야겠다는 결단과 실천에 이르게 된 이 사태의 중심에는 일종의 ‘율법 지상주의’가 놓여 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 이후로 1천년 이상 내려온 종교전통인 율법, 그 중에서도 안식일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 기준에 따라서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식일은 고대 문명 가운데서 그 어떤 문명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그 안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절대화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탓할 게 못된다. 어떤 점에서 율법을 향한 그들의 열정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율법은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가치와 세계를 담는 틀이며 그릇이라는 점을 그들이 놓쳤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율법이 담아내야 할 훨씬 상위에 속하는 가치는 곧 하나님이며, 생명이며, 자유와 평화와 해방과 쉼이다. 이런 상위의 절대적인 가치를 담을 수 있을 때만 율법은 그 존재 의미가 있지 그것 자체를 위해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안식일 법 자체를 절대화하는 ‘율법 지상주의’는 결국 그것을 지향해야 할 생명을 파괴하게 된다. 그런 현상을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발견한다.
기독교가 자신의 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지난 2천년 역사 안에서 반생명적인 일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재판,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종파 전쟁,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가한 만행 같은 것들은 부끄러움의 극치이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7주년을 기념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만약 우리가 업적신앙과 교권주의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절대주의에 빠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진정한 복음에 근거한 교회로 개혁해보고자 몸을 던진 마틴 루터를 따르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부끄러운 과거의 역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줄 안다면 자기 절대화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 개신교회는 루터 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 훨씬 배타적으로 자기 절대화에 빠져 있다.
예컨대 얼마 전에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했을 때 명색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따른다는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은 “그들은 양심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체복무를 반대했다. 지난여름 어느 유명 목사의 설교집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은 공식적인 예배에서 동성애는 하나님의 저주라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에이즈로 심판하셨다고 선포했다. 한국 교회 안에 팽배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거의 신경증적인 현상으로 고착되어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타종교인들의 평화 운동을 공격하고, 성적 마이너리티를 단죄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율법이 아니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종교 방식이라 할 복음을 알게 되었다.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세계와 직접 만나는 길이 곧 복음이다. 복음이 율법과 어떻게 다른가? 복음은 구원을 하나님의 전권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서 어떤 대상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지 않는다.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 앞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던 사람들이 그 구원에서 제외되는 이 반역(反逆)이 복음의 세계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야 경쟁력과 업적으로 사람을 평가할지 모르지만 복음을 중심축으로 움직이는 교회는 그 역설의 세계를 내다보고 열어간다. 여기서 구원이 하나님의 전권이라는 사실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배타적 판단에 의해서 실현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오직 은총, 오직 믿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게 하나의 의미이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원은 너무 어렵다는 게(업적 의) 다른 하나의 의미이다.
만약 우리가 율법이 아니라 복음 공동체라고 한다면 인간의 삶을 억압적으로 규정하는 ‘율법 지상주의’가 아니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복음에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할 것이다. 칼 바르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율법은 단지 복음 안에서만 실효성이 있다는 게 바로 그 이유이다. 이 ‘복음’이라는 개념을 위에서 언급한 안식일 문제와 연관시켜서 말한다면 바로 생명 지향성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막 2:27)는 말씀은 안식일이라는 법은 단지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한시적으로 필요한 장치일 뿐이지 그것이 사람의 생명을 지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법은 법이고 생명은 생명이다. 왜 법으로 생명을 훼손시킨단 말인가.

국가보안법과 인권
율법과 복음의 구도는 신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이 사회가 어쩔 수 없이 법에 의해서 어떤 질서를 잡아나가야 하지만 많은 법 전문가들이 생각하듯이 ‘법(法)실증주의’에 빠지게 되는 순간부터 그 법은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결국 생명 자체를 담아낼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법은 일종의 칼과 같아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생명을 파괴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극단적인 ‘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 ‘법치’가 문명사회의 바람직한 토대이기는 하지만 그 법을 누가 운용하는가에 따라서 생명을 세울 수도 있고,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법의 질서를 최소화하는 게 훨씬 바람직한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더욱이 이런 정치와 경제 및 윤리의 근거를 하나님 나라에 두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일종의 ‘법 만능주의’와 대결하려는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유신헌법 시대에 신학대학을 다녀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사법계에 대한 생각이 곱지 않다. 그 당시 누가 유신헌법을 만들었는지 확인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야말로 법에 대한 지식을 가장 악하게 나쁜 방향으로 사용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금년처럼 헌법재판소가 우리 사회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 때가 대한민국 역사 이래로 없었을 것이다. 지난 번 대통령 탄핵 사건과 이번 행정수도 이전 사건에 대한 헌재의 결정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법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아무리 법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아도 그 사람의 세계관에 문제가 있으면 법은 무용지물이거나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사용될 뿐이다. 법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한국의 실정법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 접기로 하고, 다만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에 대해서는 신학적 토대에 근거해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 있는 ‘국가보안법’이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현재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하나도 없다. 다만 개정이냐, 대체입법이냐, 아니면 무조건 철폐인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는 개정이나 대체입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다만 두 가지 사실만은 아쉽게 생각한다. 하나는 위의 안식일 논쟁에서 살펴보았듯이 율법과 복음, 법과 은총, 규범과 생명 사이의 차이점을 그들이 날카롭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만 기다렸다가 장애인을 고쳤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그 상황에서 예수가 거의 도발적으로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는 복음서의 보도에서 우리는 법과 생명 사이에서 어중간한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국보법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데 사용된 악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체 없이 철폐되어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을 파괴한 국보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사안을 정략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들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할 기독교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국보법 철폐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국가 지상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보법이 우리와 군사적으로 적대하고 있는 북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안식일 논쟁과 결부시킨다면 안식일 법이 하나님 야훼 신앙을 지켜준다는 논리와 똑같다.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질문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하나님보다 상위에 있는 것일까? 인권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안보보다는 인간의 생명과 인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지만 국가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또한 알고 있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서 반인권의 실체이며 상징이라 할 국보법 철폐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설령 그들이 염려하는 국가 안보의 진정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부시에게 호소하는 따위의 행동을 복음의 이름으로 자행한다는 사실은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연민에 앞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국보법 철폐를 반대하는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서 현재 우리가 북한과 군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여기서 이런 남북문제, 더 나아가서 6자회담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국제질서, 그리고 국내의 정치적 역학에 관한 문제를 다룰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그것을 다룰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최소한 상식적인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반적인 맥락을 꿰뚫어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 사회학적 요소들을 적절한 선으로 밀어놓고 우리는 상식적인 신앙의 눈으로 이 사태를 잠시 들여다보자.  
나는 이들의 북한을 향해 내보이고 있는 불신과 적대감이 북한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한다기보다는 어떤 종교적 선입관에 의한다고 본다. 북한은 공산주의니까 종교를 부정한다든가, 해방 이후 그들이 북한의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다든지, 그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우상이라든지, 북한에는 기본적으로 인권이 말살되어 있고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는 등등, 대충 이런 논리들이 그들에게서 나온다. 그런 논리 중에서는 옳은 것도 있고 과장된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논리의 옳고 그름보다는 이런 요인들을 이유로 북한을 상종 못할 사탄의 앞잡이쯤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무의식에 지난 날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 또는 수많은 종파전쟁을 가능하게 했던 그런 선악이분법적 패러다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훨씬 본질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 자신들만 하나님의 편에 섰다는 이 오만불손, 자기들만 선하다는 이 자기도취,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자기확신,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교를 독점하고 있다는 자기착각이 이렇게 북한을 향한 끝없는 증오와 불신을 키우고 있다. 신앙의 순수성과는 상관없이 선악이분법적인 배타성으로 인해서 결국 그들에게는 반인권적인 국보법이 예수의 사랑보다 훨씬 중요한 질서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런 배타적 종교심이 곧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쳤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바리새인들의 정체이며, 이런 현상은 플라톤의 우화 <동굴의 비유>에서 확인되었듯이 오늘 우리의 역사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동굴 밖을 흘깃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제 안식일이 아니라 부활의 주일에 예배드린다는 사실의 신학적 깊이를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영역에 불과한 국가의 안보를 핑계로 신성불가침인 인권을 근본적으로 파괴했던 국보법이 더 이상 우리의 이 현실에서 작동되지 않도록 우리의 아팠던 추억의 세계로 넘겨버리는 일에 모든 힘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2004년 10월29일, KNCC 대구인권위원회, 대경목정평 주최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 신학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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