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자로서의 설교자

-주관주의적 해석을 넘어 기다림의 해석으로-



프로에게 도전한다

가족이 모두 잠든 늦은 밤 나는 간혹 바둑 티브에서 ‘프로에게 도전한다’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아마추어 바둑 기사가 석 점 내지 다섯 점을 깔고 프로기사와 접바둑을 두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바둑인데, 깔아놓는 바둑 숫자에 따라서 아마추어의 단수가 달라진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다섯 점을 깔면 아마추어 3단, 네 점을 깔면 4단, 세 점을 깔면 5단 정도의 실력이다. 이런 바둑의 초반 형세는 대개 도전자인 아마추어들의 절대적인 우세로 진행되다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오히려 프로 기사들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아마추어기사들이 좋은 시합을 망치는 이유는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발전해나가는 중반과 종반에 이르러 정확한 수읽기를 놓치고 거듭해서 완착이나 패착을 두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설교자들도 이런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처럼 세계, 인간, 하나님의 깊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의 고수인 성서 기자들과의 영적인 대화(게임)라 할 수 있는 한편의 설교에서 완착이나 심지어는 패착을 두는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대국에는 당사자 두 사람만이 아니라 옆에서 해설하는 사람이 큰 역할을 한다. 프로기사와 아마추어기사의 대국이 갖는 특수한 상황을 시청자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는 이 해설자는 그 자리에서 대국하는 프로기사와는 대등한 수준이고, 그에게 도전하는 아마추어 기사보다는 훨씬 윗길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 해설자가 프로기사의 착점은 거의 정확하게 미리 맞추는데 반해서 아마추어의 착점은 놓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아마추어기사가 최선의 길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이 장면에서 해설자는 프로기사가 어떻게 아마추어를 요리하는지, 또는 아마추어기사의 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설명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바둑의 묘미를 제공한다. 만약 이 해설자가 프로 기사가 아니라 아마추어기사라고 하다면 이 대국을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하고 ‘프로에게 도전하는’ 아마추어의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설교자의 역할이라는 것도 영적인 세계의 최고수인 성서와 거기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청중들 사이에서 정확한 수를 읽고 해설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성서의 바른 길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청중들의 완착과 패착을 교정하는 일이 곧 설교자의 작업이라는 말이다. 이런 일을 무리 없이 감당하려면 설교자는 바둑의 프로기사들처럼 성서와 신학의 고수가 되어야만 한다.

꼼수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의 전문가적인 특성을 좀더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프로기사와 아마추어기사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점 하나를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간혹 동네바둑에서 힘 꽤나 쓰는 아마추어기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특히 하수를 농락하는 요령과 재주가 탁월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프로기사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올린다. 그들이 하수들에게 자주 사용하는 수를 ‘꼼수’라 한다. ‘꼼수’는 ‘정석’과 달리 상대방이 실수 할 경우에만 통하는 수이기 때문에 프로기사에게는 결코 통할 수 없지만 동네바둑에는 제법 통한다. 바둑의 전문기사들은 돌을 던지면 던졌지 이런 꼼수는 절대 두지 않는다. 그만큼 바둑의 도(道)에 투철하다는 뜻이리라. 아마 목회와 설교에도 이런 ‘꼼수’가 통한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모르겠다. 설교의 꼼수 중에서 두 가지만 간단히 짚어보자.
첫째,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는 설교는 가장 원초적인 꼼수라 부를 만하다. 한국사회가 전체적으로 빈곤에 시달리고 교회도 생존이 위태로웠던 시절에는 소위 ‘기복설교’라는 형태로 각광을 받았으며, 지금은 일명 ‘청부론’으로 논의되고 있는 설교 유형들은 그 어떤 그럴듯한 명분을 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내에는 인간의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교회의 물적 토대가 그 어떤 집단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탄탄해졌는지 모르지만 참된 영성은 근본적으로 훼손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먹어도 늘 허기가 졌다는 어느 헬라 신화 이야기처럼 성장 만능주의라는 우상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탐식증은 거의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어떤 분들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사독재자들의 돌진근대주의 덕분으로 지금 우리가 이런 정도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기복설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성장론자들의 노고로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설령 그런 우리의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한국 교회가 더 이상 생존에 묶여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한국사회가 더 이상 이런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금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분명히 꼼수라 할 수 있다. 기복적인 것에 한눈을 팔고 있는 주변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가 솔깃하게 들리겠지만 정신이 바로 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결국 외면당하고 만다는 의미이다.
둘째, 설교자가 청중의 죄의식을 공격적으로 자극하는 것도 역시 복음의 ‘정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꼼수’에 가깝다. 물론 죄의 문제가 기독교의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설교 현장에서는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그들의 주체성을 말살하며, 더 나아가서 설교자의 권위를 옹호하려는 일종의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이미 니체와 프로이트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심리상태를 가리켜 ‘노예근성’이라느니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지적했는데, 죄에 대한 모든 설교가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거의 그렇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이제 죄의식을 자극하는 설교가 의존적이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바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꼼수’에 틀림없다.  
설교의 꼼수 현상과 동네바둑의 꼼수 현상은 비슷하다. 동네 바둑에서 꼼수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경우이다. 하나는 당사자가 바둑의 길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거나, 다른 하나는 바둑의 길을 가기보다는 승부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경우는 겹치는 게 일반적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바둑의 깊은 수를 읽을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아는 수 안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속아주기를 기대하는 수는 두지 않는다. 설교자가 자기도 모르게 꼼수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나쁜 경우는 설교자가 성서, 인간, 역사,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청중들을 기만하려는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지만 정통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신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는 성서의 세계”를 추상적으로만 알거나 또는 거의 모르면서도 의도적으로 청중들의 영성을 훼손시키는 설교자들에게는 내가 할 말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말한다 하더라도 무의미하기 때문에 제쳐놓기로 하고, 스스로 문제의식을 안고 있는 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이 이 글의 목표라 하겠다.

창조적인 신학과 설교

필자는 바로 위에서 성서가 “생명의 신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바로 이 문장에 설교자가 설교행위에서 직면하게 되는 당혹감과 위기, 또는 유혹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놀라게 될 뿐만 아니라 설교할 수 없다는 위기에 빠지게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세계로 난 ‘좁은 길’을 포기하고 쉽게 가기 위해 ‘넓은 길’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거꾸로 성서 안에 놓인 이런 사태는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위대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명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대한 근거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신학과 설교는 여전히 창조적인 지평에 속한 작업이라는 말이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오늘 설교 현장에서의 문제는 설교의 초보자나 베테랑을 막론하고 그들이 설교의 창조적 지평을 무시하거나 포기한다는 것이다. 무시하는 사람은 설교의 창조적 지평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며, 포기하는 사람은 그 지평에 들어가는 게 힘들거나 두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매우 독특한, 또는 기발한 설교 내용과 방법론이 제시될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극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늬만 창조적이지 실질에서는 표절 행위에 불과하다. 이미 세례문답에 규정된 케리그마나 성서의 내용들을 자신이 확보한 전달기술에 근거해서 선포하고 있을 뿐이지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담긴 ‘하나님의 현실성’을 새롭게(창조적으로) 이해하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흡사 관광 가이드가 유적지 자체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연구는 게을리 하고, 이미 주어진 안내문을 익살과 멀티미디어, 또는 여러 이벤트로 꾸미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형국과 같다. 이 가이드가 성형수술을 통해 특별한 미모를 갖추게 되었다거나 대화술을 배워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해서 그의 안내 멘트가 창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학자나 설교자들의 행위가 창조가 아니라 표절로 기울어지는 여러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이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바르트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미 충분하게 해명되었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만큼 큰 착각도 없지만. 어쨌든지 그들은 그런 생각과 착각에서 설교의 내용보다는 무늬와 포장으로만 승부를 걸려고 한다. 사실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이미 제시하고 있는 그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 자체도 우리에게 역부족일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만 말하자면 창조적인 설교를 위해서 우리는 이런 신학과 기독교 영성의 대가들을 끊임없이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가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를 넘어서는 일이, 혹은 바르트보다 더 창조적으로 신학하는 일이 가능할까? 우리는 여기서 한 신학자와 설교자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얼마나 뛰어나는가 하는 점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 그런 위대한 학자나 설교자들처럼, 그들과 버금갈 정도로, 그들을 넘어설 정도로 업적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창조적으로 신학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창조적으로 설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 근거는 우리 모두가 진리의 영인 성령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틴이 기독교 진리를 독점하는 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성령은 어거스틴을 비롯한 지난 2천년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을 뛰어넘어 지금도 자유롭게 활동하고 계시다는 게 분명하다. 좀 거칠게 끊어서 말한다면 어거스틴은 궁극적인 진리 인식의 세계에서 네 살짜리 유아에 불과할 것이다. 이 성령과의 만남이, 그와의 영적인 소통이, 그리고 그런 영의 문이 열리기만 한다면 비록 우리가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위대한 신학자나 설교자는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당연히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
이런 창조성은 시작(詩作)의 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동양과 서양 역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들이 창조적으로 시를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 세계가 고갈된 것은 아니다. 이미 쓸만한 것은 모두 쓰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창조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사유가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사유가 심층에서 작동한다는 말은 단지 그 시인의 머리가 좋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 삶은 결코 동일한 짝을 찾아볼 수 없는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바둑의 길(道)를 알고 있는 프로기사들이 둔 대국이라고 한다면 그 좁은 바둑판 위에서 두어진 수천만 번의 대국이 한번도 똑같지 않았다는 사실도 역시 이와 비슷한 이치이다. 신학과 설교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성서 텍스트, 동일한 기독교 역사를 소재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읽고 해석해야 할 사람의 사유 운동에 따라서 그것은 전혀 다른 지평을 열어가게 된다. 이 설교자의 책읽기, 역사경험, 환경조건, 교육 등등, 여러 요소들이 이 사람만의 고유한 사유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 있기만 하다면 창조적인 신학과 설교를 수행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까다로운 신학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간의 사유 활동에 의해서 설교가 창조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이 주장은 자칫 인간의 주관적 사유 능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사유가 창조적인 활동의 근원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바로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학적 사유 능력보다는 성령의 근원적 창조성이 설교가 창조적인 활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토대이다. 이 두 문제, 즉 인간론과 성령론의 관계는 우리가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에서 상당히 많은 논의를 거쳐야할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는 말고, 한 가지 관점만 짚도록 하자. 인간론과 성령론 문제가 양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에 설교 현장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 한쪽의 극단은 인간의 주관적인 사유 활동에 치우침으로서 성령이 겨우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성령 해체주의이며, 또 하나의 극단은 성령의 절대적인 역할에 치우침으로써 인간의 사유 활동이 근본적으로 폐쇄된 인간 숙명주의이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책임과 능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낙관론에 빠지기 마련이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 회피주의나 역사 허무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인간과 성령의 관계는 앞으로 생물학과 철학, 고고학 등, 여러 학문의 발전과 더불어서 더 많은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쨌든지 신학과 설교에 작용하는 모든 창조적인 힘은 바로 성령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가 비록 신학과 설교에서 큰 업적을 쌓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창조적인 능력이라 할 성령과의 소통이 열리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설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창조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으로서, 개체인 우리가 주관적으로 사유하기 훨씬 이전인 창조 때부터 이미 거기서(schon da)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설교

그렇다면 우리가 창조적으로 설교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설교에 창조의 영인 성령이 활동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어떤 분들은 성령과의 소통 부재로 인해서 창조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에게 성령의 경험은 충분하지만 대신 머리가 좀 따라주지 않거나 입담이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들이 성령 충만으로 설교를 꽤나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매일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해서,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기도회가 있으며, 설교현장에서 ‘성령충만’이 흡사 시위대의 구호처럼 외쳐지는 우리의 설교 현장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신학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현상을 성령 활동과 일치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성령과 설교’의 관계는 더 이상 논의하지 말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만 짚도록 하겠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론이 왜곡되거나 축소되었기 때문에 설교 현장이 이토록 거칠어진 게 아닐까?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설교 행위에서 한편으로는 창조적인 능력을 상실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관적이고 열광적인 인식과 체험을 청중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진리와 생명의 영인 성령이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성령론이 교회론에 의존적이라는 훨씬 구조적인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성령의 하부구조에 불과한 교회론이 한국 교회 안에서 최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 비극적인 현상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모든 교회 개혁론은 무용한 담론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런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하는가? 모든 설교자가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창조적인 설교를 할 수 있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일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시를 쓰지만 실제로 시다운 시를 쓰는 사람은 소수인 것처럼 설교 현장에서도 창조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만약 자신이 내세울만한 시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청중들에게 자기의 시를 읽어주지 말고 오히려 훨씬 깊은 시의 세계에 들어간 시인의 시를 읽어주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것처럼, 설교자들도 본인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어느 수준에 도달한 설교를 전달하는 게 훨씬 지혜롭기도 하고 신앙적이기도 할 것이다. 목사들의 서재에 설교집이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보면 이미 많은 설교자들이 남의 설교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기왕이면 괜찮은 설교집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회력’에 의한 공동 설교문을 사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필자는 여기서 설교자들의 고유한 설교권을 박탈하려는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말씀선포와 성례전 집행이라는 목사의 고유한 기능이 바르게 집행되면 청중들의 영성을 살릴 수 있겠지만 거꾸로 꼼수에 가까운 설교로 인해서 청중들의 영성이 파괴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설교자의 신학적 미숙성이나 정서적 장애나 심리적 불안 등으로 인해서 청중들이 당하는 정신적 피해는 특히 설교권이 당회장 목사 한 사람에게만 독점되고 있는 한국교회 구조 안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런 주제로 논문을 써도 실천신학 박사학위로는 충분할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방지하려면 목사의 설교권을 개인의 자유에 일임할 게 아니라 공동의 차원으로 자리를 잡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것은 설교권의 제한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 ‘이니셔티브’를 제공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소극적인 설교’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대구성서아카데미’의 홈페이지(dabia.kehc.org)에 게재한 적이 있다. 참고적으로 여기에 인용한다.

내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모든 교구가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 주보도 교구 차원에서 만든다고 한다. 개별 성당을 위한 공간은 비워두고 전체적인 골격은 교구에서 작성한다는 것이다. 개별 성당에서는 자기들 성당에 관한 소식을 그 빈곳에 넣을 수 있다. 오래 전에 서울 교구의 주보에 연재된 박완서 소설가의 말씀묵상이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 나는 평신도의 시각으로 성서의 깊이에 접근한 그 책에서 새삼스럽게 큰 감동을 받았다. 박완서 선생은 어떤 성서 신학자보다 훨씬 뛰어난 영적 감수성으로 성서를 풀이하고 있었다. 그런 주옥같은 ‘말씀묵상’을 교구 차원의 주보에 연재한다면 주보가 단지 교회 소식을 알리거나 예배 순서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신자들의 영성을 키우는 데 큰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는 우리의 눈에 매우 낯설게 보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종교의식(儀式)이 거의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겠다. 이런 부분은 기회가 있을 때 좀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미사의 ‘강론’과 예배의 ‘설교’를 좀 비교하기로 하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권을 반대하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부여한 마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에 성당의 미사에서 강론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은 좀 형편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옛날에는 겨우 10분도 되지 않는 강론으로 끝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기껏해야 15분 정도 될까 말까 한 실정이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강론이라는 게 교회력에 의해서 본문과 내용이 거의 짜여진 것을 읽는 정도이니까 열정적이고 ‘간절한’ 설교에 길들여진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좀 아이러니컬하게도 요즘 나는 우리 개신교회도 미사의 ‘강론’ 형태로 돌아가는 게 바람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다. 이것은 목사로서 설교 준비하는 게 부담이 되기 때문이 아니며, 더구나 일종의 형식주의에 빠진 미사가 마음에 들기 때문도 아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만큼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매우 전문적인 작업이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오늘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 만큼 오늘의 세계를 읽어내는 작업 또한 전문적이라는 점에서 이 설교는 닫혀 있는 작업이다. 흡사 괴테의 시를 아무나 해석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설교자들은 신학대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그 교육이라는 게 워낙 초보적인 것이며, 더 나아가서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전문적인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한다면 설교 문제를 모든 설교자 개개인에게 맡겨두지 말고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어떤 틀을 잡아나가는 게 훨씬 바람직 할 것이다. 교회력을 중심으로 설교 내용을 미리 안내해주면 개별 교회 목사들은 그것을 중심으로 개별 교회의 상황에 맞도록 약간의 첨삭을 하면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개별 교회의 목사들이 실제적으로 설교준비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여력으로 다른 일을 좀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목사가 창조적으로 설교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렇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일 뿐이다. 아마 로마 가톨릭의 신부들도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은 교구별로 강론이 짜여지기 때문에 말씀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없는 대개의 신부들이 혼자 말씀을 전하려다가 길을 잃거나 심지어는 왜곡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그런 제어장치가 없기 때문에 설교는 많지만 복음적이지 않은 설교가 훨씬 많게 된다. 물론 여기에도 장단점이 없지 않다. 아직 전문적인 설교자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반복해서 스스로 설교하다 보면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 있지만 교회력에 의해 만들어진 설교에 의존하다가 결국 말씀을 해석할 능력을 영원히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는 설교준비의 부담감으로 벗어난다는 것이 그를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긴 하다. 이런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요즘의 우리 설교 현장을 놓고 본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중심을 잡아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설교 행위의 중심을 ‘소극적인 설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설교는 이 세상의 기업적 가치처럼 적극적으로, 더 정확하게는 공격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논문 한편이 필요할 정도로 할 말이 많지만 한 가지 관점으로 줄여서 말한다면 설교자의 공격성으로 인해서 신자들의 영혼이 훼손된다는 게 그 대답이다. 예컨대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구원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설교함으로써 신자들도 역시 그것을 곧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설교자들은 늘 자신 만만하게 청중을 향해서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낼 것처럼 설교하고 있다. 그러다가 청중을 도구적으로 다루게 되고 그런 군중심리에 설교자 자신도 빠져든다. 그러나 소극적인 설교는 청중을 향해서 설교하는 게 아니라 청중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설교하는 것이다. 청중을 도구로 다루는 게 아니라 청중과 더불어서 함께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향해 영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이런 소극적인 설교는 설교자의 주관적 체험이 철저하게 줄어들고 오히려 성령이 활동하게 된다.
지금 우리 설교의 현장에는 성령이 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교자의 단순한 생각과 주관적인 판단이 인플레이션 상태를 이루고 있다. 나는 설교자들이 왜 그렇게 스스로 흥분하기도 하고 청중들까지 흥분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내용은 둘째 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청중들을 어떤 목표로 설득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그걸 설교자의 사명감이라고 내세우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명감에 투철한 설교자들도 있긴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좀더 냉정하게 그 속내를 들어야보면 인간적인 욕망의 표출일 가능성이 많다. 내 생각에는 “설교자가 죽어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산다.” (2004년11월7일)  
청중으로부터 텍스트로
여기서 소극적이라는 말은 설교 행위에서 우리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자라는 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을 위해서 설교자의 ‘주관’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원론적이거나 현학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이런 염려를 조금 줄이기 위해서 ‘소극적 설교’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다.
설교자들이 설교행위에서 가장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동시에 설교가 가장 공격적으로 변질되는 부분이 바로 청중의 반응이다.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일종의 ‘대중추수주의’라 부를 수 있는 그런 현상에 매몰되는 순간에 이미 설교자는 말씀에만 직면해야 할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고 싶다는 생각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대목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어떤 점에서 그것이 곧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런 생각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 강단에 내재해 있는 이런 포퓰리즘은 큰 홍수로 인해서 적정 수위를 넘어선 붕괴 직전의 저수지 같은 상태이다.
그것을 극대화한 인물이 바로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장경동 목사이다. 그의 설교가 평신도 대중집회만이 아니라 장로 모임이나 심지어는 목사 모임에까지 잘 팔리고 있다는 이 한국교회의 현상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강단에 뿌리내리고 있는 대중추수주의의 극치를 볼 수 있다. 한편의 목사들은 그가 복음을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며, 다른 한편의 목사들은 거침없는 그의 입담에 의해 복음이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에 환호를 보낼 것이다. 비판하든, 동조하든 상관없이 일단 장 목사의 대중적 설교가 끌어내는 폭발적 인기에 대해서는 모두가 부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직 청중들의 호응만을 설교 평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온 한국 강단에서 장경동 목사가 출현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서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성장이 멈추거나 뒷걸음질치는 한국 교회가 장 아무개 목사 같은 사람을 통해서 힘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장 목사가 지나치게 웃기기는 하지만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 이런 논의를 끌어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신바람 넘치는 설교 현장에서 필자는 일종의 ‘허무주의 영성’을 맛보았다는 사실만 지적하려고 한다. 오직 청중의 호응에 따라서 힘이 나기도 하고 빠지는 설교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된다. 설교의 내용은 날이 갈수록 심하게 형해화 하고 대신 사람을 웃기게 만드는 온갖 재료, 정보, 기술만 그 설교 자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장 아무개 목사의 설교만을 비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흡사 피에로처럼 연기하고 있는 그는 곧 한국교회 설교자의 일그러진 한 자화상일 뿐이다. 귀납법적 설교, 스토리 텔링, 청중 중심의 설교 등등, 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들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도 대개는 청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설교 테크닉이다. 설교만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안에서 ‘상담학’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목회 전반이 인간을 다루는 기술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청중을 말씀으로 변화시켜야 할 설교자가 청중들의 정서적, 심리적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이에 적합한 설교 방식을 채택하는 일은 옳다고 본다. 그렇지만 청중 중심주의가 설교 현장에서 과도하게 작동함으로써 결국 텍스트가 담고 있는,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그 생명의 신비는 더욱 단단하게 은폐되고 사람들의 심리, 정서, 업적만 드러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은 교회성장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민중신학적 노선에 있는 일부의 설교자들에게서도 상당한 정도로 나타난다. 물론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이 다루는 인간론과 근본주의적 성장론자들이 매달리는 인간론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우선 민중신학은 인간을 주체로 다루는 반면에 근본주의는 도구로 다룬다는 점에서 극차(極,差)를 보인다. 전자의 복음 운동은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와 해방이 살아 움직이게 되지만 후자는 인간이 노예화하고 죄의식에 물들게 하고 종속적이게 만든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설교와 목회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민중신학자들도 그 해방의 근원이 우리의 정치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칫 복음운동이 또 하나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곧 예수가 전한, 그리고 우리의 대림절 신앙에 근거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인간학적 복지사회 건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이 놓여있다. 여기서 필자는 이 두 사건이,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역사가 관계없다고 말한 게 아니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만 지적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는 역사의 변혁과 개혁에 철저해야하지만 시민단체와는 다르며,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끊임없이 추구해야하지만 구호단체는 아니다. 우리는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가 20세기 초에 잠간 빛을 발하다가 그 힘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극적인 설교는 청중(의 반응)으로부터 텍스트의 근본 지평으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작곡가나 예술가들은 청중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하지 않거나 크게 상관하지 않고 그 음악과 예술의 세계에 천착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들은 가급적으로 청중의 반응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되, 텍스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런 근본을 이룬 설교자들은 텍스트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기 때문에 그 이외의 부분들로부터는 별로 큰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고 설교자의 정신적인 자유가 풍요롭게 보장되는 상태가 설교자의 고유한 영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텍스트에 대해서는 거의 천편일률과 진부성에 떨어진 반면에 청중을 향해서는 도에 넘치도록 예민하고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한국교회 강단의 그 틀을 바꾸기 위해서 필자는 ‘소극적인 설교’ 태도를 제시한 것인데, 이것이 한국 교회 안에서 설득력이 있을는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거의 모든 대중적인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이비 영성으로 치장한 장경동 목사 같은 유형의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참된 기독교 영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좀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우선적으로 청중으로부터 텍스트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텍스트 해석의 근본문제

청중보다는 텍스트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분분한 논의가 가능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특히 교리적인 설교나 교회 중심의 설교 유형으로부터 소위 ‘강해설교’ 유형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설교자들조차도 일단 필자의 주장에는 동조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행하는 강해설교자들이 말하는 텍스트 중심성과 필자가 생각하는 텍스트 중심성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의 핵심은 ‘해석’의 유무, 또는 해석의 성격에 달려 있다. 그들도 역시 성서를 해석한다고 말을 하지만 대개 규범론에 머물거나 또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던 알레고리 해석에 머문다. 즉 그들이 강해설교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설교자들과의 차별화를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조용기, 김홍도, 김삼환, 이동원, 하용조, 김동호, 김서택 등등,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권위주의적이냐 민주적이냐에 상관없이, 도덕적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그들은 한결같이 성서를 해석하지 않고 목회에 필요한 부분을 끌어들여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성서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설교가 철저한 성서 해석에 근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한국교회 강단의 함정과 위기가 있다. 성서를 인용하고, 간혹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사용하고, 때로는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이나 유명한 주석학자들의 주석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성서를 해석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 청중들도 그런 생각에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큰 착각이다. 십일조 헌금으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청중들을 협박하는 설교자들은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들을 향한 바울의 비난을 그대로 오늘의 청중들에게 적용시키고(하용조, 이동원), 반공주의를 기독교 신앙인 것처럼(이수영 목사) 성서를 해석하고, 천국의 열쇄로 천국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억지를 쓰는(김동호 목사) 상황이니까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서가 바르게 해석된다기보다는 이현령비현령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확인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청중이 아니라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그들 강해설교자들에게 성서가 상당 부분에서 이렇게 농락당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해석은 무엇인가?”로 돌아간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해석은 성서 텍스트에서 우리의 삶과 신앙에 필요한 요령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텍스트의 ‘지평’(Horizont)으로 들어가는 사건이다. 설교자가 텍스트를 주관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에 휩쓸리는 경험(Erlebnis)이며 사건(Ereignis, 生起)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설교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듯이, 설교자가 여전히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에 허우적거리면서 각종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처럼 텍스트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해석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자기의 주체(cogito)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 주체가 의존해 있어야 할 텍스트는 계속 은폐될 수밖에 없다. 이를 하이데거의 ‘존재망각’ 개념에 빗대서 표현한다면 주관주의적 해석에서는 결국 ‘하나님 망각’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청중들에게 실용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성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결코 성서의 지평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성서의 지평 문제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작은 예를 들어보겠다. 상당히 오래 전이라고 생각되는데, 서울 강남의 어느 대형교회 앞에 현수막이 걸려있는 걸 보았다. “ㅇㅇ 여리고 작전”이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 교회는 그 지역을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여리고를 함락시켰던 여호수아를 흉내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여리고만이 아니라 ‘홍해작전’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엑서더스와 광야의 유목생활을 거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사건에서 오늘 우리가 신앙적인 가르침을 받고, 더 나아가서 그런 삶을 실현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성서를 그렇게 신앙적 실용성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그 해석의 옳고 그름은 둘째 치고 텍스트의 지평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함락되는 그런 사건들의 지평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특한 역사 경험을 전제한다. 아이 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아무리 적이라지만 군인도 아닌 민간인까지 남녀노소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눈에 전쟁의 신, 광기의 신으로 비친다. 성서 기자들이 역사를 그렇게 해석하고 기록한 이유는 그 당시 그들에게는 ‘생존’이 곧 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안 정복 사건들은 그런 지평에서만 타당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생존이 아니라 본질의 지평에서 살아가야 할 오늘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규범적으로, 또는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나안 정복 역사에 대한 성서의 보도에서 주변을 정복해나가는 힘의 논리를 읽을 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생존의 문제가 무엇인지 깊이 통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그런데 성서의 지평을 바르게 포착하지 못하고 단지 오늘의 목회 현장에 확대 재생산해낼 규범만 찾고 있는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단지 ‘종교사’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일종의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또 하나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미 종교 다원주의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왔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논란의 긴 줄기는 그만 두고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의 주장만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오강남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철저하게 신화적인 신학과 세계관,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종교적 배타주의, 세속적 물량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소리로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왜곡을 교정하고 본질로 접근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의 ‘근본’까지 훼손한다면 그것은 흡사 “이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또는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린” 꼴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예컨대 그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유보하고 있다. 그에게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신성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체현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자라기보다는 우리가 본받을 자에 불과하다. 결국 예수 부활의 역사성도 실종되고, 단지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예수의 가르침이 되살아난 것쯤으로 처리된다. 하나님의 역사가 철저하게 인간의 실존으로 떨어진 모습이다.  
종교학자 오강남의 종교사적인 접근은 교양인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만하고 나름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에 일조를 할지 모르지만, 그가 기독교를 지나치게 표면적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한계다. 그가 대단한 것처럼 밝히고 있는 성서관, 기독론은 신학의 초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를 문자적인 의미에서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신학에서는 극복된 문제를 대단히 새로운 발견이나 되듯이 이렇게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었다. 본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 <예수는 없다>는 자신의 형이나 누이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 쓴 기독교 해설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깊이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을 해체할 뿐이지 복음과 신학의 근본을 놓치고 있다. 그의 장황한 논리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보다 빨리, 또는 좀더 깊이 하나님을 인식하고(頓悟) 살았던 사람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이런 예수상은 유대교의 주장과 비슷하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기독교 신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예수 이후의 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이 세상은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런 변화도 없다. 여전히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폭력과 증오가 지배하고, 삶의 무의미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는 말인가? 부버의 논리는 정당하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들은 이 세상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그런 ‘유대인의 왕’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교수도 역시 이 세상의 정치, 경제적 변화와 메시아 상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서의 미션(misson)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의 생각에 따른다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결국 ‘복지사회’ 건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게 된다. 이 세계를 조금씩 인간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꿈을 현실화하자는 말이다. 이런 꿈을 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익이나 좌익 이데올로기 모두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 이 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교회 이기주의, 기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새마을 운동’ 차원에서 일종의 개량적 도덕주의와 일치시키는 일은 기독교 영성을 기껏 도덕성 회복과 교회 민주화에서 확인하려다가 결국 그것을 놓치거나 훼손시키는 대중 설교자들의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강남 교수는 그 책에서 요즘 ‘뉴 라이트’ 운동의 선봉에 나서고 있는 김진홍 목사를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물론 ‘뉴 라이트’ 운동은 <예수는 없다>와 시기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김진홍 목사가 옛날부터 부르짖었던 사회개혁론에는 기독교 영성을 천박하게 만들 요소가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인식론적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오강남 교수는 “현각 스님의 책을 읽고 눈물 흘린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글(부록1)에서 현각의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와 현각의 행위를 매우 감동적으로 평하고 있었지만, 필자는 책광고와 그 제목에 끌려 그 책을 읽었다가 실망한 기억밖에 없다. 현각은 그 책에서 자기 깨달음의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게 아니라 단지 자기의 삶이 바뀌었다는 그 사실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흡사 짝사랑에 빠진 소녀가 자기 사랑의 내용과 깊이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 남자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가출했다고 고백하는 정도였다.
필자는 여기서 오강남의 모든 주장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기독교라는 현상, 특히 한국 교회의 왜곡된 현상에 분노하느라 기독교와 역사적 교회의 심층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근본까지 상대화하는, 또는 은폐시키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결국 기독교 절대주의 못지않게 기독교 상대주의도 역시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인 지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렇다면 설교자가 우선적으로 경험해야 할, 그러나 기독교 문자주의와 상대주의가 놓쳐버린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인 지평”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서 고유하게 작동하고 있는 ‘계시’야말로 근본적인 지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계시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도 있고, 생명과 진리의 나라, 또는 그런 통치라는 여러 신학적 용어로 바꾸어 부를 수도 있다. 이 큰 주제 안에 또 다른 여러 지평이 개입될 수도 있다. 몰트만 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지평, 사회적 지평, 생태학적 지평, 영적인 지평, 실존적인 지평 등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서와 지난 교회의 역사에서 이렇게 저렇게 얽혀있는 계시 사건과 그 개념들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야 할 새로운 지평들을 해명해나갈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신학적 착상은 하나님의 계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다. 이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라는 개념은 계시를 ‘계시하는 주체’인 하나님과 구별하지 않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말하는 주체와 그 내용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론과 계시론에서는 그것이 하나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이다. 이는 곧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어떤 시공간을 점유하는 분이라기보다는 ‘나라’(Reich)로서, 즉 ‘통치’(Herrschaft)로서 존재하는 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 하나님 나라, 계시라는 용어는 기독교가 가리키고 있는 궁극적인 세계와 그 능력의 그 어떤 동일한 사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터미놀로지’이다. 결국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고 있는 성서는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 설교자들은 근본적으로 계시(하나님) 자체가 아닌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결국 계시를 말해야 한다는 딜레마 속에 놓여 있다. 성서에 있는 수많은 사건과 가르침을 충분하게 이해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이 곧 계시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계시가 무엇인지 모르며, 따라서 그것을 전할 수도 없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보자. 여기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다. 그런데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벌레가 코끼리의 털 하나를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벌레의 세계는 그가 기대어 있는 하나의 털과 그 옆에 있는 몇 가닥의 털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벌레에게 코끼리의 실체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요구는 언어도단이다. 사실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하나님 경험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벌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 또는 그의 계시를 파악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계시, 생명의 나라라는 거창한 개념을 굳이 거론할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과 사물들이 거의 끝없이 아득한 역사를 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 책상 하나를 보자.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 책상은 아주 쉽게 우리의 인식과 오성에 포착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만들었으며, 어디에 소용되며,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상의 내면으로 조금만 자리를 옮기면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상의 소재인 원목은 인도네시아의 어느 원시림에서 자란 나무일지 모른다. 그 원시림은 수백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이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 동원된 에너지의 비밀을 우리는 도저히 계산해낼 수 없다. 직관적으로만 본다고 하더라도 태양빛과 물과 탄소가 광합성을 일으켜야만 나무가 자랄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책상은 결국 태양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 에너지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생명운동이 지금 우리 앞에서 하나의 책상까지 진행되었다는 사실의 내면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사물을 단지 정태적인 물건으로만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물(物, Ding)을 신성, 죽을 자, 땅, 하늘, 이렇게 사중자의 회집이라고 보았다. 필자는 하이데거의 이런 인식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의 주관적 해석만으로 이 세상과 하나님과 역사, 즉 계시를 표상하거나 계량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엄격한 차원에서 생각할 경우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성서를 해석하거나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매우 실증적인 차원에서 진술되고 있는 것 같지만, 근원적인 차원에서 성서가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으신다”는 고백이 아닐까? 모든 왕들과 귀족들도 놀라고, 예언자들도 놀라고, 모든 사람이 놀랄 수밖에 없는 그 하나님을 누가 인식하고 해석한다는 말인가?

인격적인 하나님

성서도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고 설교할 수 없다면 지금 설교자들은 침묵해야만 한다는 말일까? 성서 텍스트와 기독교 역사에 대한 해석 작업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원칙적으로는 말한다면, 오늘 강의 제목인 “해석자로서의 설교자”에 어긋나는지 모르겠지만, 해석을 포기하는 게 훨씬 지혜로울 것이다. 노자도 ‘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했듯이 우리가 설명해야 할 하나님, 그 계시가 너무 아득하고, 두렵기 때문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不立文字’라는 말에서도 이런 일단의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약간 다른 뉘앙스이기는 하지만 바르트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구든지 신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신학에서 손을 떼고 편견 없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숙고해야만 한다.”(복음주의신학 입문, 75).
결국 우리는 성서 해석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주관주의적 해석으로부터 존재론적인 해석으로 그 틀을 바꾸는 것이다. 코끼리의 털 하나를 붙들고 있는 우리가 코끼리 자체를 해석하려고 안간힘을 쓸 게 아니라 그 코끼리가 자기를 드러내는(계시) 걸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털 하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하는 코끼리 자체의 ‘나타남’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말건넴’(Anrede) 중심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계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넨다는 표현을 자주 발견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가능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다고 보아야 옳다. 인간에게 말을 거는 하나님을 우리는 인격적인 분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인격적이라는 표현, 또는 말을 건넨다는 표현에는 인격으로서의 인간과 인격적으로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차원만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인격적인 하나님은 곧 인간의 인격과 상관없이 자신의 고유한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신다는 의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처럼 자유의 영으로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것이 바로 그의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가 우리에게 말걸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이런 소극적인, 또는 기다림의 해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설교행위가 보험 상품이나 자동차를 파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와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도 역시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존재론적인 기다림의 해석은 자기의 생각을 확대하거나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말건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간혹 예술가들이 경험하는 영감이라는 게 이런 방식과 비슷하다. 참된 시인이나 화가나 작곡가들은 자기의 생각을 기술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언어와 형상과 소리를 포착할 뿐이다. 그들의 예술 행위는 자기표현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 형상의 본질, 소리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대한 작곡가는 자기가 작곡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소리가 자기를 끌어간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변화의 영성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이 하나님의 말건넴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만약 이런 준비를 ‘해석학’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최소한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동서양의 여러 철학, 역사, 문학, 더 나아가서 생물학과 고고학에 이르는 모든 것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내존재’인 인간의 실존에 해당되는 공부가 필요할 것이며, 그 이전에 이미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관통하고 있는 계시의 흔적들을 또렷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준비에 대해서는 필자가 여기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과정이 사실은 이런 준비이기 때문에 대략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모두 공부할 만큼 공부하고 받을 만큼 충분한 신앙훈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건넴에 대한 해석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은 하지만 다소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를 닫고 있는 것 같다. “귀 있는 자”가 되어야만 말씀이 들리고 열리지 않겠는가? 누구나 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서 말하는 귀는 어떤 범주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진리의 말건넴에 응답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자기의 경험과 선입관에 묶인 채 선전 선동의 기술만 습득하고 있을 뿐이다. 계시의 말건넴에 응대하려면 자신의 모든 전이해, 선입관을 우선 버려야하기 때문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요청된다.
이런 혁명적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설교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좀더 직접적으로 질문하자. 도대체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의 하나님 이해를, 또한 고린도전서 15장에 진술되어 있는 바울의 부활이해를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설교자들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말이다. 16세기 교회는 이미 물리학적 논증을 거친 이론이었던 지동설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지금도 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동성애자들을 저주하고,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매도한다. 토마스 쿤이 이미 밝혔듯이 패러다임 쉬프트는 기존의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죽거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계시에 마음을 열고 그것이 우리에게 말거는 것에 응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죽거나 아니면 사유의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야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른 ‘해석자로서의 설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부단히, 혁명적으로 가능한, 그것마저 근원(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하겠지만, 그런 내면적인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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