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적 설교의 토대


“성령의 조명”
난해성구 앞에서, 혹은 신학적으로 논란이 여전하거나 명확하지 않는 주제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하고 손쉬운 무기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성령의 조명’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개신교 신학에서 성령의 조명 개념은 성서 해석에서 이성과 반대되는 포괄적인 준거로 작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옳지만 늘 옳은 건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옳다는 것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 생활은 큰 틀에서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도 안에서, 조금 줄이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혹은 성령의 활동으로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인식론적 토대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빛을 비춘다면 모든 진리 문제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원칙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칼빈이 성령의 조명 개념을 통해서 밝히려 했던 그 어떤 사태를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성서 해석과 설교부분에서 성령의 조명을 전가의 보도처럼 적용하는 것은 그것자체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추상화한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다.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성령의 조명이 과연 칼빈의 원래 생각이었는가 하는 점을 잠시 짚어보자.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지만 칼빈을 비롯한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성서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가장 첨예하게 대결했다.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은 각각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역사에서 전개된 이런 대치국면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수는 없었다. 우선 정경의 과정에 교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그 성서해석의 권위까지 교회에 맡겨야 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밑받침한다. 개신교회도 역시 성서가 있기 전에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교회가 성서를 역사적 산물로 출현시켰다는 이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가능하다. 정경 이전에 이미 예수의 말씀이 있었으며, 비록 역사 안에 구체화하는 과정에 교회가 관여했지만 그것마저 이미 근원적 사건으로서의 말씀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든지, 이미 정경이 결정된 다음에는 교회도 역시 이 정경의 권위에 지배받아야 한다는 말이 가능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 중심적 성서해석의 큰 물줄기를 성령 중심적 해석으로 돌려놓았다. 이것은 곧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성서 말씀은 반드시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교회는 지난 역사의 과정에서 성서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가 성서해석의 권위를 독점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게 나름대로 증명된 셈이다. 어쨌든지 이런 논란에서 핵심은 칼빈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 교회의 배타적 권위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해석학적 방법이었지 인간의 이성과 인식론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그래서 성서와 기독교 진리가 성령에 의해서 초월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처한 신학적 ‘삶의 자리’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개혁교회 신학자들이 본인들의 논리가 궁핍해질 때마다 성령의 조명을 언급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을 아전인수, 또는 침소봉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령의 조명’ 개념을 확대 적용함으로써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성령을 주관주의적으로, 혹은 도구적으로 다루는 근대주의적 ‘주객도식’의 한 전형인데, 이것은 곧 우리의 인식과 의도를 뛰어넘어 진리와 생명의 영으로 활동하는 성령을 인간의 주관적 체험* 안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성령을 인간의 주관적 체험 안으로 축소시키는 일들이 우리 한국교회 강단에서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간증 유의 예화들이 설교에서 과잉생산 되고 있다는 현상이 그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좋은 뜻이든 나쁜 의도이든 불문하고 인간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성령을 이렇게 인간의 주관적 체험 안으로 축소, 훼손하게 된 그 원인이 바로 ‘성령의 조명’ 개념을 곡해하고 잘못 적용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성령론적 설교가 우리의 보편적인 해석학을 해체함으로써 비합리성에 떨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더 나아가 오히려 이런 신학적이고 보편적인 해석학이야말로 성령에 의지한, 또는 성령의 주체적 활동에 의존하는 설교자의 바른 태도라는 사실을 밝혀보려고 한다. 이는 곧 한국교회 강단에 만연한 인간의 주관주의적 해석학을 극복하고 성령의 존재론적 해석학의 근거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계시론적 성령이해
다시 ‘성령의 조명’ 개념으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끌고나가자. 성령의 조명이 교회의 권위, 혹은 사제의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지적은 옳다. 거꾸로 사제의 인식론적인 능력이나, 또는 그 사제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인식론적 능력만으로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성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한 이해도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가 단순하게 그것 자체만으로 독립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인 인식 능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의 존재론적 깊이와 크기를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지 한층만 더 밑으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 병든 얼룩말이 있다. 병들지 않았다면 다른 무리들과 함께 풀과 물을 찾아 떠날 수 있지만 이 말은 어쩔 수 없이 그늘에서 쉴 수밖에 없다. 이 병든 얼룩말은 근처를 배회하는 사자의 밥이 될 운명에 처한다. 얼룩말 자체만 놓고 본다면 불행이지만 이 병든 얼룩말 때문에 한 가족의 사자가 기근을 면하고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얼룩말의 질병은 야생의 세계가 계속 작동되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이런 생태의 메커니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짧은 기간이라면 모를까 긴 기간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는 곧 45억년의 나이를 먹은 이 지구에 이런 생명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걸 아무도 예측할 없었던 것과 같다.
조금 더 심층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무엇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단지 현상하는 부분에만 해당되지 그 근원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왜 어떤 것만 존재하고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왜 토끼라는 생명체가 이 세계 안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왜 토끼와 민들레 중간쯤 되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에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우연일 뿐인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렇게 설명하는 것뿐이지 완전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생물학이나 물리학을 통해서 이런 존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연과학의 방법론도 역시 존재의 신비 앞에서 우리가 겪어야만 할 당혹과 ‘아득함’, 즉 현묘(玄妙)를 해결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서 텍스트는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인식론적 능력에 치우쳐서 접근하는 한 결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가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의지하고 있는 교회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 이런 점에서 신학의 선배들이 신학의 토대를 계시론에 두었다는 것은 정당하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을 모르며, 구원도 모르며, 따라서 성서를 해석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논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능력의 근원적인 한계를 직시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엄정한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처해있는 일종의 인식불능이라는 운명은 이미 고전적인 사건이 되었지만 바르트와 브룬너의 ‘접촉점’ 논쟁에서 신학적으로 촉발된 적이 있다. 그들을 신학적 담론으로 끌어들였던 주제는 과연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일종의 영적인 접촉점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타락 이후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본 반면에 브룬너는 ‘질료적’(material) 하나님 형상은 파괴되었지만 ‘형상적’(formal) 하나님 형상을 남아있기 때문에 그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전혀 없는 반면에, 브룬너에 의하면 남아있다. 이런 문제는 단지 인간의 영적인 인식 능력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자연신학’을 어떻게 성격 규정하는가와 연관된다. 하나님의 창조와 은총을 자연신학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브룬너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자연신학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게시와 이성을 종합하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절대타자(totaliter aliter)로 보고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가능성도 송두리째 포기한 바르트의 입장이 오늘 우리에게 무조건 정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본성을 주셨다는 게 바로 성서의 계시론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단순히 인간의 인식론적 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근원적인 창조의 능력, 즉 성령의 사건에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계시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성령에게 주어졌다. 물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궁극적인 계시 사건이지만 우리의 인식론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삼위일체의 한 인격은 곧 성령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유한한 이 세상과 전혀 달리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가시적으로 자기를 나타낼 수 없으며, 또한 부활 승천한 예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역사 안에 들어왔던 그가 역사 너머의 현실로 갔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역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통로는 성령이기 때문에 계시도 역시 성령론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령이 성부나 아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배타적으로 계시의 주체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구도로 설명한다면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계시는 계시자(Offenbarer)로서의 아버지와 계시(Offenbarung)로서의 아들과 연결되며, 계시실존(Offenbarsein)으로서의 성령과 연결된다.  

은혜의 주체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으로 성령의 사건인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면 설교도 역시 계시하는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도대체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라는 게 무슨 뜻인가? “성령의 불을 받으라!”는 상투적인 언사에 담겨 있듯이 어떤 열광적 감정과 심리 상태에 빠지는 현상을 성령론적 설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문제를 설교 현장과의 관계에서 좀더 선명하게 해명하기 위해서 설교의 목표로 간주되고 있는 ‘은혜‘의 주체 문제를 짚어보자. 이것은 곧 은혜를 가능하게 하는 창조와 생명의 능력인 성령에게 순종해야 할 설교자가 그 은혜를 자신의 업무와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는 설교현장을 향한 문제 제기이다.
대개의 목회자들은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에 감동받음으로써 교회 조직에 깊이 빠져들고, 다른 한편으로 건전한 인격을 갖추고, 허무한 이 세상에서 위로와 기쁨을 알게 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는다. 그들은 청중들이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게 되면 각종 예배가 살아나고 교회활동에 역동적인 힘이 나타나며, 그야말로 ‘장사되는’ 교회로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만의 기이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설교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는 몇 년 사이에 수천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로 발전하는 경우도 제법 있다. 이런 현상의 중심에 있는 소위 대중 설교자나, 아니면 주변부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설교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런 은혜 현상이라는 게 과연 신학적으로 정당한지, 그리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한 건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런 대중적인 은혜 현상이라는 건 기독교 안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종교 안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슬람교도들의 예배행위나 성지순례 행위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장 감격적이고 열정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행하고 있는 전도행위도 역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문선명 씨가 주도하고 있는 국제 합동결혼식에 참여하는 전(全)세계 통일교 신자들의 열정은 우리 개신교 신자들보다 윗길이다. 이런 종교적인 열정과 그들 나름의 은혜 현상에 대해서 종교학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 거의 끝이 없을 테니까 이만 접어두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현상과 우리 기독교 안에 있는 은혜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런 주장이 근본적으로 옳기는 하지만 그런 주장만으로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은혜 현상을 다른 종교의 그것과 완전하게 구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런 식으로 우리가 경험하기를 원하는 구원론적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종교적인 범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나 대중예술, 심지어는 연예, 오락 세계에서도 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은혜와 비슷한 심리적 현상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전국 대도시 광장에 수만, 수십만 명이 모여 “대-한민국!”를 외친 장면은 거의 종교적인 현상과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집단적 응원에 몰입함으로써 자기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연가’의 배용준이 없으면 죽고 못 살듯이 따라다니며 은혜를 받는 일본의 중년 여성들의 그런 심리현상도 역시 자기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종교적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기독교의 은혜를 이런 종교일반, 또는 인간의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현상들과 구별하고 싶을 것이다. 당연히 기독교의 은혜는 그런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도덕적으로 변했다거나 개혁적으로 변했다는 것은 이런 사태에서 거의 무의미하다. 오히려 수백억 원을 들여 교회당을 건축한다거나 담임목사직을 세습한다거나, 교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투구 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현실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의 은혜는 자기를 확대하려는 이 세상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드러내놓고 욕망에 치우치지만 우리는 은밀하게 그렇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거의 조폭의 행태와 다를 게 없는 광성교회 경우만이 아니라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평생 장로와 권사의 직책을 맡으면서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들에게서 기본적으로 ‘영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훨씬 심각한 건지 모르겠다. 그들이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인 영성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은혜의 본질과 실체를 몰랐거나 오해했다는 의미이다. 그 책임은 신자 개개인보다는 은혜를 본질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설교자에게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영적인 리얼리티는 훼손되거나 실종되고 단지 사람들의 열정만 은혜로 포장되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교회현실은 설교자가 근본적으로 무식하거나 부도덕해서라기보다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자면 ‘세계내존재’로서 궁극적인 것을 모른 채 그 궁극적인 것을 설교해야 한다는 설교자의 숙명에 의해서 벌어지는 결과이다. 근원적인 인식론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설교자는 성령의 계시에 철저하게 의존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즉 자기의 능력을 최소화하고 성령의 활동을 극대화하는 입장을 취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증적으로 무언가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 청중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결국 그 모든 주장은 순식간에 선동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오직 진리의 영인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청중들을 다루다보면, 더구나 ‘대중심리’에 의해서 그 선동*이 먹히는 경우에 청중들은 간단히 세뇌 당한다.

*이런 선동은 정치와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교육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평생 피아노와 살면서 현재 피아노 선생으로 있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 피아노 음악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피아노 실력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었지만 시간의 연륜 가운데서 다시 생각해보면 별 게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들이 음악 자체와는 별로 상관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피아노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학생들을 자기의 생각으로 끌어내는 것에만 진력했다는 것은 결국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생이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음악 자체가 가르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후에 그는 피아노 레슨 시간에도 가능한대로 자기의 생각과 의도를 줄이고 대신 음악 자체가 활동하도록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이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그들을 도구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온갖 종류의 인간학적 열망이 과도하게 분출됨으로써 결국 성령의 활동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학적 열망은 우리가 당연하고도 좋은 것으로 여기는 모든 의도들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언제부터인가 대도시 중형 이상의 교회가 경쟁을 벌이듯이 건립하고 있는 복지관도 역시 이런 인간학적 열망에 속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필자는 여기서 이런 복지와 봉사활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표로 함으로써 벌어지는 성령론의 축소를 경계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런 일에 앞장서는 교회들도 역시 인간의 영혼구원이 목표이고 복지사업은 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만 이런 복지활동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할 교회의 존재방식으로서는 그렇게 바람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본질적이지 않은 일을 감당하려면 대신 다른 본질적인 일을 포기하거나 소홀하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자립하지 못하는 이웃 교회를 내버려두고 복지관을 세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단일성이라는 본질에서 볼 때 상당히 곁길로 접어든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무얼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의 대답은 명백하다. 은혜의 주체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성령이 활동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역할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설교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성령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흔하게 들었겠지만 그 실체에 관한 인식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상당한 경우에 우리는 성령을 의존한다기보다는 성령을 이용한다.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와 이용하는 설교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신앙의 강화와 신앙의 심화
여기서 우리는 설교행위의 성령론적 현상을 단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게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통찰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통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가 성령이 활동하시는 다른 사람의 내면적인 경험을 완벽하게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단죄했던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심층적인 차원에서 성령과 소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누가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에게 그런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열린 자세로 신학적이고 영적인 통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와 이용하는 설교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는 있다. 그 단서의 하나가 곧 신앙의 강화와 심화의 차이이다. 즉 성령론적 설교는 신앙의 심화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신앙을 강화하는 설교와 심화하는 설교의 차이를 살펴보자.
예배참석, 철야기도회, 헌금, 봉사, 성서공부와 성서쓰기 등등,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행위들은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신자들이 그런 종교행위를 익숙하고 세련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곧 자신들의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더 나아가 그런 능력 자체에서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종교행위들이 신앙의 강화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는 사실의 증거이다. 장로 선출 문제, 평신도의 위계질서, 헌금제도 등등, 교회 안에서 작동되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신자들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거나 경쟁심을 불붙이는 방향으로 제공되고 있다. 어떤 교회는 심지어 제직들을 특별 새벽기도회에 나오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출석부를 만들기도 한다는데, 이런 기발한 발상은 신앙을 단지 종교생활의 외적인 강화에만 두고 있을 때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신앙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세련된 신앙생활을 강화함으로써 종교적 성취감을 얻으려 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런 모든 종교적 강화 요인들을 폐기처분하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만을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설교가 신자들의 이런 종교적 만족감*을 부추기기 위해서 신앙을 강화하고 있는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예수의 비유인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서 우리가 명분으로는 세리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살아간다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가 일종의 분열현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바리새인 같은 모범생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겉으로는 세리 흉내를 내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정신적 손상의 값은 엄청나다. 그 값은 모범생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열 증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정신분열적 현상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역사 앞에서 매우 무책임하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신앙강화의 특징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강도가 아무리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다른 교회가 ‘총동원주일’ 행사로 재미를 보았다면 자기들도 그 행사를 해야 하며, 다른 교회가 결식노인들을 위한 식사대접 행사를 했다면 자기들도 해야만 한다. 계속해서 무슨 일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런 신앙은 자신의 영성을 풍요롭게 한다기보다는 무덤에 묻힐 때까지 소진시킬 뿐이다. 우리 설교자들의 영성이 황폐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목사의 삶이 이런 신앙의 강화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신앙의 심화는 오직 하나의 사실에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모든 삶을 지배함으로써 그 이외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그것이다. 자신의 심리적인 만족감, 목회의 효율성, 어떤 목적의식을 가능한 제거하고 일종의 ‘존재론적 기쁨’에 참여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것이 곧 심화의 방식, 또는 그런 차원의 세계이다. 이 문제를 설교자와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목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청중들을 자극하거나 또는 그들을 자신의 도덕적 위치까지 끌어올리려고 의도하지 않고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지평에만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을 심화하는 설교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심화는 그리스도교 영성과 동의어인 셈이다. 참고적으로 모새골 공동체를 끌어가는 임영수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의 영적인 통찰력을 심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데서 다른 설교자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오늘 우리에게서 벌어지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강화와 심화를 분간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강화가 오히려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생활을 인간학적 방식으로 강화해야만 교회가 부흥한다고 확신한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목회의 효율성이 교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고 말았다는 일종의 영적인 위기이다. 파머는 백정과 조각가에 관한 장자의 글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위대한 행위의 가치는 효율성으로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이전에 나는 오랫동안 뉴욕 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펼치는 봉사단 ‘교회의 일꾼들’에서 일 해온 친구와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날마다 밀려들어오는 영혼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이러한 요청은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그녀가 하는 일의 깊이를 알지 못했던 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일, 나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는 그 일을 어떻게 해올 수 있었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때 한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파커, 당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Parker J. Palmer, The Active Life, 한역 80).

목회의 효율성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이 교회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심화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영성의 문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억지로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이웃과 모든 생명체들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 안으로 심화하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것을 증언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영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에게 ‘들을 귀’가 필요한 것 같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신앙의 강화는 인간학적 필요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에서 인간학적 설교의 목표이며, 신앙의 심화는 전적으로 영을 향해 열린다는 점에서 성령론적 설교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성령론적 설교를 수행해야 할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영성이라는 것은 결국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서 텍스트와의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설교자에게 성령론적 해석학의 토대가 갖추어졌는가의 질문, 즉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와 영적인 깊이에서 소통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질문이다.  

성서해석의 영성
성서 텍스트를 읽고 주석의 과정을 거친 다음,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을 청중들에게 전하는 것을 설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런 작업이 성서 텍스트와의 영적인 교감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경우에 그건 큰 착각이다. 그들의 그런 작업은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지평이라기보다는 단지 성서의 정보를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요령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요령을 우리는 설교 명망가들에게 자주 발견한다. 그들은 오랜 동안의 목회와 설교 훈련을 통해서 성서 안에 있는 무수한 기독교적 가치와 규범들을 체계화함으로써 어느 상황에서나 그것을 요령껏 풀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다가 청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읽을 줄 아는 내공과 입담만 갖추게 된다면 그는 대설교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태가 우리 한국교회 강단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개인에 따라서 다소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설교 기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그들이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의 주제와 목표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설교자로서 당연하게 갖추어야 할 기본기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런 설교 행위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오히려 성서의 영적인 지평으로 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저해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들이 성서 텍스트를 알고 있다는 그 선입관에 의해서 텍스트의 영적인 지평이 닫힌다는 데에 있다. 흡사 <어린 왕자>에서 똑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어른들은 밀집보자라고만 단정할 뿐이지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로 상상하지 못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다른 하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답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설교자가 기독교의 도그마에만 집착할 뿐이지 거기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대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교묘한 수사학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우리 한국 강단의 경우에는 간증 유의 예화가 범람하는 현상이 곧 그 증거이다.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차원을 전혀 열지 못하고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설교의 한 예를 들어보겠다. 2005년3월20일, 종려주일에 할렐루야 교회 김상복 목사는 누가 19:28-40을 본문으로 <겸손한 왕>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얽힌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본문은 ‘수난설화’의 시작 부분이기 때문에 기독론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서 마을 어귀에 매여 있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김 목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강조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예수님의 이 예견을 일곱 가지로 세분화한다. 김 목사에 의하면 수학적으로도 모두 적중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일곱 가지의 예견이 적중했다는 사실은 곧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네 입구,  두 마리, 사람이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 주인이 이유를 물음, 주님께서 쓰시겠다 말하면 해결됨, 주인이 그대로 따름. 청중들의 사행심을 조장할만한 이런 논리에 근거해서 김 목사는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알고 싶으면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에게 와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 본문에서 나귀라는 동물은 구약과의 연관에서 볼 때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그 나귀를 끌고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예수님의 전지전능과 결탁시킨다는 것은 전형적인 알레고리에 불과하다.
설교자들이 이런 사태에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단지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정보, 또는 극단적인 규범과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은 곧잘 종교적 열정에 떨어지곤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청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설교에 치우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심리적 열정과 성령의 활동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신자들에게 나타라는 열정은 순식간에 악한 영*에 사로잡히거나 단지 주관적 심리작용일 가능성이 높은데 반해서, 성령은 개인의 영을 감정과 심리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차원, 혹은 생명의 차원에서 끌어간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설교에 호기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그들의 일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런 점에서 자신의 설교행위가 성령에 의존하고 있는지 아닌지 민감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아래의 글은 이에 대한 헨리 나우엔의 충고이다.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여 사람들의 영과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에도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 분별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오직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훈련을 통해 형성되고 다듬어진 사역자의 영적인 삶이야말로 영적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비전을 잃을 때 아무것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청사진을 묻어버리면 아무것도 건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계속 교제하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사로잡힌 데서 불러낼 수 있으며 희망을 주는 안내가가 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88>

둘째는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성서는 해석되지 않으면 죽은 말씀이 되거나 아니면 어떤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성서가 기본적으로 시공간적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에 놓인 문서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영이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옳다면 성서 텍스트는 반드시 해석되어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은 성서 해석에 마음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해석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해석학이라는 용어(Hermeneutik)는 헬레 신화에서 제우스의 사자로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전달 작업이 곧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에 근거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정보 차원에서 서술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세계와 연관된다는 뜻이다. 즉 우리에게 오지 않은 미래의 비밀을 선취(先取)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비밀의 세계를, 아직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은 세계를,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내다보며 예언*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점쟁이들의 행위와 같은 주술적인 차원의 작업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설교는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계, 일상, 현실에 개입해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새롭게 열어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신학의 설교만이 아니라 과학도 그렇고 예술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예언의 성격이 있다. 단순한 과학 선생은 이미 나와 있는 과학이론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만 신경을 쓸 뿐이지만 진정한 과학자는 아직 모르는 과학의 세계를 열기 위해서 창조적으로 길을 간다. 아직 오지 않은 물리와 생물의 세계를 내다보고 그 길을 간다면 그는 분명히 예언자인 셈이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에게 배우거나 누구를 가르치는데, 혹은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알리는데 힘을 소진시키기 않고 음악의 세계에 들어다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고 한다. 음악의 존재론적인 세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리는 게 아니라 연주자가 들어간 것만큼만 열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그런 음악의 세계를 내다보고 그쪽을 향해 진력하는 음악가라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예언자이다.

하나님의 은폐, 그 비밀, 그 미래를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해명해야 하는 행위가 곧 설교라고 한다면 결국 설교는 영적인 작업이다. 설교가 영적인 작업이라고 한다면 우리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성서해석의 영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해석은 곧 영적인 행위이며, 영적인 사람은 성서 텍스트에서 정보를 캐내는 게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낸다. 즉 성서 텍스트를 생명의 신비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성령론적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의 간접성
설교자들이 성령론적 해석학의 깊이를 놓치고, 따라서 그 과정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신앙의 심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성서론과 성령론의 오해에 놓여 있다. 이것은 곧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는 무엇인가, 또는 영은 어떤 의미에서 문자로 계시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의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짚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성서에 진술된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성격인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이야기나 모세의 호렙산 이야기는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경험을 진술하고 있는 것일까? 대개의 설고자들은 그런 사건들을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앙과 현실의 연관에 대해 인식론적 혼란에 빠지게 되며, 결국 텍스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업무를 포기한다. 성서 사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해보자.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소위 ‘믿음의 조상’이 된 인물이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담겨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텍스트에 관해서 이렇게 반문해보자.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이 명령이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착각은 아니었을까? 더 나가서 이 음성은 실제로 들렸다기보다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해석은 아니었을까? 즉 이것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근동 종교와 구별되는 유대교 신앙의 역사에서 형성된 전승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사건의 역사비평 연구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신인동성동형론’적인 대화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직접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모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살았던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조우한다.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해방시키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듣는다. 성서는 그 장면을 흡사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세계관에 의한 서술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민족애가 남달랐던 모세가 40년 동안 양치기로 살면서 겪었을 정신적 고통을 전제한다면 그가 ‘엘모의 불’ 현상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이것도 역시 모세의 의한, 또는 모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에 의한 해석이었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의 다마스쿠스 도상의 체험도 이와 비슷하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과는 달리 성령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닐까? 나는 그 텍스트의 실체를 완전히 해명할 정도로 영적인 경지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 판단한다면 그것도 역시 간접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핵심은 바람소리, 불꽃, 방언이다. 아무리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현상 자체를 성령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성령의 작용을 그런 현상으로 경험했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바로 성령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현상도 역시 해석학적인 구도 안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서가 하나님의 현현과 성령의 임재를 매우 직접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성서시대는 신화적인 세계관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중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태양이 동쪽으로 뜨는 물리학적 현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운명이 별에 달려 있다는 점성술이 과학으로 인정받았고, 자연에 주술적인 힘들이 작동한다고 믿고 있었다. 성서기자들도 그 시대의 세계관과 도덕형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체험을 이런 신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성서기자들이 그렇게 신화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 신화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성령 현상과 체험을 주장한다는 것은 여전히 신화적 미숙함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의 진술방식이 신문처럼 사건의 실체적 사실여부를 가리는 데에 충실하다기보다는 우리의 언어로서는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영적인 경험을 문학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충실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는 뉴스가 아니라 ‘시’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고 하자. “바람이 아프다 하네.” 유치원 학생이 아닌 한 이런 시구를 읽고 실제로 바람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성령이 직접적으로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성서 텍스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라기보다는 성서기자의 영적인 지평에서 내린 신학적 해석이다.
신앙적으로 순진한 사람들은 성서를 성서기자의 신학적, 역사적 해석이라는 말을 불안하게 생각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 경험이나 그 활동에 대한 성서의 진술들을, 하나님의 행위들을 직접적인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이 세상을 신비의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인데, 그런 불안은 사라질 것이며, 오히려 우리의 역사적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활동이 간접적이라는 말은 ‘리얼’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창조와 종말의 영이다. 영은 우리가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창조의 지평과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종말의 지평을 함께 아우를 때만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잠정적으로, 부분적으로만 인식하고 경험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성령 보도는 간접적이며, 따라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신학적 영성
우리 앞에는 성령의 간접적인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텍스트가 놓여 있으며, 그 텍스트에 귀를 기울여야 할 청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설교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동시에 전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좁은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성령에 의존적으로만 설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령에 의존적인 설교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의 영성’ 문제이다. 거꾸로 설교의 영성이 준비된 설교자는 곧 성령론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영성과 성령론적인 설교는 똑같은 의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경험하는가, 어떻게 설교의 영성을 확보하는가에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곧 성령충만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성령론적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가장 타당하고, 유일한 길은 바른 ‘신학공부’에 있다. 한국교회 현장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있는 ‘신학무용론’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성령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따라서 우리가 빨리 극복해야 할 어리석음이다. 신학과 영성의 관계에 관한 왈가왈부가 가능하지만 그런 논의는 접어두고, 성령체험에 이르는 길이 신학공부, 더 정확하게는 신학적 사유라는 논리의 정당성만 짚도록 하자.
기독교 신앙은 무슨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교회의 목회와 실천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은총과 성화, 선교, 예배 등등, 모든 신앙적 행위의 토대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핵심 개념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성령론도 역시 그것 자체로 어떤 완료된 체계를 이루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에 의존해야만 한다. 성령을 바르게 이해하는 토대인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당연히 우리가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생명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창조의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 역사적 예수와 어떤 관계인지, 궁극적으로는 본질로서는 하나이지만 인격적으로 셋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 신학적인 사유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예를 들기 위해서 삼위일체만 언급했을 뿐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신학적이지 않은 요소는 하나도 없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해명해온 신학적 사유를 통하지 않고 성령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특히 기독교 도그마에 관한 체계적 해명이라 할 조직신학 공부는 성서 텍스트로부터 청중에 이르는 그 길목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절대적인 요인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신학은 흡사 프로 바둑기사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바둑의 정석공부와 같다. 그 정석공부를 통해서 바둑의 도(道)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신학공부를 통해서 성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영성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신비주의자들은 신학이 아니라 기도, 말씀읽기, 묵상 같은 방식으로 성령 체험을 했다는 반론 말이다. 영성의 내공이 깊은 사람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신학을 이성에 근거한 논리로 보고, 반면에 영성은 믿음과 관계된 것이라는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영성의 대가들은 우리가 현재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그런 방식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서도 고유한 영적인 통찰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옳기는 하지만, 이들의 영적인 직관이 근본적으로 신학적 사유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틀렸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영성은 놀랍도록 신학적이고 논리적이다. 바로 이 사실이 중요하다. 신학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모두 하나의 영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신학자들은 성령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식했다고 한다면 신비주의자들은 직관의 방식으로 인식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양자 모두 신학적 사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여기서 ‘신학적’이라는 말을 영성과의 관계에서 좀더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성은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보다는 영의 존재론적 신비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신학과 구별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학도 근본적으로는 영성과 마찬가지로 영의 존재론적 신비와 연관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신비주의적 영성은 그 신비를 주로 실존적인 직관에서 접근한다면 신학은 역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성령의 존재론적 신비를 2천년 기독교 역사에 근거해서 인식하고 해명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신학적 영성이다. 이런 신학적 영성은 곧 진리의 영인 성령에 의존해야 할 설교의 가장 명백한 토대이다.
(정용섭, 2005년 5월16일, 전주, 온목회자 모임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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