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텍스트의 침묵 앞에서!


‘사건’으로서의 성서 텍스트

루돌프 보렌이 자신의 명저 <설교학 원론>(박근원 역, 1979년)의 머리말에서 지적한 아래의 말은 설교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지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설교에서 성서가 선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서 본문의 침묵과 그 강조점으로부터의 이탈, 성서를 너무 성급하게 접근한 채 그 가운데 언짢은 것들을 덮어버리거나, 문자의 차원에서 집착함으로써 본문과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는 설교행위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성서가 설교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책을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성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이 침묵을 깨려면 성서 자체가 말을 하게하고, 그 말씀이 청중들에게 들려야 한다.(4쪽, 문맥을 조금 고쳐 적었음).

벌써 40년 전의 진술이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교회의 실천에 집중하고 있는 우리의 목회와 설교 현장에서 볼 때 보렌의 이 지적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설교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내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말을 전하고 있을 때가 허다하다. 청중을 설득함으로써 교회를 성장시켜야겠다는 의욕이 지나치거나 또는 성서텍스트의 근본을 이해할만한 신학적 토대가 터무니없이 부실할 경우에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에 함몰되는 일이 많다. 이런 문제들은 단숨에 해결될 수는 없다. 개별 설교자들이 교회성장이라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교회 구조적 변화가 전제될 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되기 이전의 신학 훈련과 된 다음의 재교육이 끊임없이 뒷받침되어야 설교자가 성서텍스트 자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게 무슨 뜻일까? 자신이 수영을 할 줄 몰라도 수영교본만 보고도 얼마든지 수영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듯이 성서텍스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서와 교리의 정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설교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서텍스트 안에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탕자의 비유’ 설교로 대표되는 빌리 그레함 목사의 경우에 청중의 개인적인 죄와 회심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인 것처럼 선포된다. 아마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설교에 매우 익숙해 있을 것이며, 지금도 경험을 가장 중요한 영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런 태도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실존에서 심층적으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에만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적 성격에서 볼 때 별로 타당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설교는 잃어버렸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죄를 회개하라는 열정에 치우칠 뿐이지 사랑이나 죄의 실체로 들어가는 일이 별로 없다. 즉 막연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대되고 구체적인 죄의 현실은 실종될 뿐이다.
성서텍스트는 훨씬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설교자는 성서가 기록된 그 당시의 ‘삶의 자리’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하고,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벌어졌던 신학적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오늘 독자들이 살고 있는 그 삶의 깊이를 인문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들이 우리의 영성에서 충분히 소화하면 우리는 그제야 조금씩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곧 “언어가 말한다.”는 언어 존재론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성서도 역시 인간의 역사가 그대로 담긴 언어 사건이기 때문에 언어 존재론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으로 자기를 노출시키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글의 흐름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조금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넓게 보아 하이데거와 가다머 철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에른스트 푹스나 게르하르트 에벨링 같은 신해석학파의 논리를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어가 하나의 사건이라는 사실은 성서를 비롯한 고전작품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예컨대 <장자>라는 동양고전이 여기 있다고 하자. 이 <장자>에는 역사적 인물이었던 장자의 글도 있겠지만, 그의 이름을 빌린 제자들이나 다른 익명의 저자들에 의해서 첨부된 글들도 제법 된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었든지 이 책이 이렇게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된 다음에는 저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작품 자체가 ‘사건’이 되어 역사 과정을 통해서 어떤 세계를 계속 열어나간다. 텍스트는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역사를 향해 열린 사건이라는 뜻이다. 글만이 아니라 그림이나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세바스챤 바흐의 <파르티타>라는 피아노 작품은 바흐에 의해서 작곡되었지만 그 뒤로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바흐가 생각하지 못했던 음악의 세계를 끌어가고 있다. 위대한 피아노 연주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작품은 바흐가 생각하지 못했던 음악의 근원적인 세계까지 드러낼 수 있다. 이 말은 곧 고전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은폐의 노출이 곧 언어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성서 텍스트도 어떤 세계를 은폐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해석했지만 그것으로써 성서 텍스트의 정체가 완전히 노출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거스틴이나 루터보다 성서의 영적인 세계를 조금 더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성서 텍스트는 훨씬 근원적인 것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성서 텍스트가 완전하게 극복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성서가 하나의 굳어진 체계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늘 ‘사건’(Ereignis)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독일어 ‘Ereignis’는 신문의 뉴스처럼 어떤 ‘사실 사건’(Faktum)이라기보다는 변증법적 의미를 포함한 의미 있는 생기(生起)라는 뜻이다. 이처럼 성서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변증법적 차원에서 늘 새로운 사건으로, 심층적 사건으로 다가올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게 말을 걸고 있다. 설교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 안에서 성서텍스트가 사건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처럼 성서 텍스트가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는 그 궁극적 세계는 아무에게나 보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프로 바둑 9단의 기보는 프로 기사들에게나 보이지 아마추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서 프로 9단이라 할 성서 기자들의 진술인 성서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성서를 100독 하거나, 수십 번 베껴 썼더라고 그것만으로 성서의 사건은 그의 눈에 결코 들어오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휄덜린의 시를 수없이 읽어봐야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들이 신자들에게 성서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한편으로 성서에 대한 진정성의 표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 안에서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자기만족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본질이 득세하다보면 결국 본질이 훼손당하기 마련이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 현상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성서가 신학자나 영성의 대가들만이 아니라 배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 주장은 나름으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의 논란은 접어두겠지만, 자신들이 성서를 알고 있다는 그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오히려 성서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해야겠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설교 명망가들을 포함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를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컴퓨터나 자동차 매뉴얼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성서텍스트의 침묵현상을 잠시 짚기만 하더라도 이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설교현장에서 나타나는 성서텍스트의 침묵현상은 크게 보아서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첫째는 성서텍스트와 전혀 상관없는 설교가 그것이다. 주로 ‘제목설교’ 형식을 취하는 이런 설교는 성서텍스트가 전혀 무의미하거나 기껏해야 참조용일 뿐이다. 최근에 연세중앙교회의 윤 아무개 목사와 서울성락교회의 김 아무개 목사의 설교비평을 ‘기상’에 기고했다. 이런 작업에서 나는 이들의 설교가 성서텍스트와 완전히 독립된 어떤 것들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 목사는 성서 전체의 기초를 무시하고 오직 청중들을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으로만 몰고 갔으며, 김 목사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주술’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중들이 그의 설교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청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가 그들에게 확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성서텍스트의 변죽만 울리는 설교가 그것이다. 소위 ‘강해설교’ 형식을 취하는 이런 설교는 성서텍스트에 집중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성서의 정보에 머물 뿐이지 어떤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가다머의 개념을 빌려서 설명한다면 이런 설교에서는 본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고유하게 살아있으면서도 서로 변증법적으로 융해되어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비교적 건전한 설교자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들은 기껏해야 성서 본문에서 윤리적이고, 근면하고, 건전한 인간을 향한 열정만 부르짖고 있을 뿐이지 그것 너머의 영적 리얼리티에 이르는 일이 없다. 예컨대 그들은 신약성서 시대의 일반적 윤리관을 채용해서 로마 기독교 공동체에게 주었던 바울의 충고(롬 1:27)를 그대로 인용해서 오늘의 동성애자들을 비난한다. 이들의 설교는 바울이 이런 윤리적 충고를 통해서 언급하려고 했던 훨씬 근원적인 사태로 들어가지 못한 채 성서를 단순히 정보의 차원에서 오늘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에게 효도하자.”거나 “서로 섬기는 부부” 같은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보기에 이건 설교가 아니라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나 또는 결혼식의 주례사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지성적이거나 교양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많은 것 같은데, 여기서 성서텍스트는 침묵한다.
셋째는 성서텍스트를 왜곡하는 설교가 그것이다. 이 왜곡현상은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경우와 구별된다기보다는 그것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성서텍스트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거나, 또는 그 정보에만 매달리는 사람 중에서 기독교 원리주의에 빠지는 경우에 이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난다. 예컨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설교하면서 나사로가 하늘나라의 야심을 가졌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성서텍스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과 가난한 사람을 향한 부자의 무책임을 전하고 있는데 반해서 이런 설교자들은 청중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성서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주장을, 또는 그것과 전혀 다른 주장을 서슴없이 펼친다. 어떤 설교자들은 하늘나라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설교하고, 공산주의자를 반기독교적인 집단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사실 말라기서를 근거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거나 반대로 헌금하면 하나님이 창고의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는 설교는 성서텍스트의 왜곡, 또는 견강부회 아닐까?

텍스트에서 조직으로!

성서 텍스트가 침묵하게 될 경우에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그 이외의 길을 찾게 마련이다. 물론 개중에는 내가 보기에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중들과의 관계를 설교와 성서공부로 견인해 나가는 설교자들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게으름>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 아무개 목사가 대표적이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를 비롯해서 이와 유사한 수많은 책을 집필한 김 목사의 능력은 바로 청중의 감수성을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텍스트의 침묵을 모면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교자는 하나님의 광휘에 휩싸인 사람이 가능한대로 자신을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흡사 “새벽종이 울렸네!” 수준에서 청중들의 불안한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설교하고 있을 뿐이다.
비교적 괜찮은 설교자인 김 목사의 경우도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노력보다는 인간의 감수성에 기울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서 텍스트가 말한다”는 차원을 경험하지 못한 그 이외의 설교자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인간론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지는 불문가지이다. 자신의 내면세계가 공허한 사람은 외부적인 성취를 통해서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것처럼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설교자와 교회도 역시 어떤 작위적인 성취에 기울어질 위험성은 높다.
그 위험성이 곧 교회 공동체의 지나친 조직화이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최소한의 조직은 필요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기독교 영성에서 가장 중요한 성서텍스트의 침묵으로 인한 병리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우려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들은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런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내용을 조금만 추적해 들어가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인간의 자기 성취에 대한 관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 중의 하나가 요즘 일정하게 세를 얻고 있는 ‘목장교회’라는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다. 그들은 새신자의 교회 정착률이 떨어진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침체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역동성을 견인해내겠다는 의도로 이런 방법론을 개발했다. 느슨한 형태로 묶여 있는 현재의 교회조직을 ‘밴드’와 ‘목장’이라는 단단한 관계로 변화시켜야만 교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당제일감리교회의 장 아무개 목사의 경우에 교회는 ‘큰 가정’이고, 밴드는 ‘큰 가정 속의 장성한 가정’이며, 목장은 ‘큰 가정 속의 새 가정’이라는 개념으로 교회를 새롭게 조직하고 있다. 장 목사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특성과 웨슬리의 초기 감리교회 조직에서 이런 목장교회의 논리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이 자리에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하려면 훨씬 진지한 성서신학과 교회사, 그리고 조직신학적인 연구가 동반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거의 ‘다단계 판매조직’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의 조직관리가 종말론적 구원공동체인 교회에 필요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깊은 반성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한국교회가 성서텍스트의 신학적 깊이는 외면한 채 조직관리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게 된 역사는 길다. 여기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는데, 우선 순 모임이나 제자화 운동, 셀 목회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론들이다. 필자가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초에 대학생선교회(CCC)는 ‘사영리’라는 전도용 소책자를 중심으로 자기들 나름의 순모임을 확장시켜나갔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사영리는 비록 기독교의 복음을 간추린 것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비역사적인 방향으로 흘러감으로써 복음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게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 이후로 기독교 신앙은 훨씬 개인주의화했으며, 대신 조직이 득세하게 되었다.
약간 다른 방향이지만 뜨레스디아스, 알파코스 같은 것들도 역시 이런 조직의 한 방편들이다. 도대체 교회가 ‘뭐 길래’ 신자를 공주처럼 대접하는 이벤트를 통해서 자기착각 속에 빠지게 하고(뜨레스디아스), 기도하면 은으로 해 넣은 이빨이 금니로 바뀐다는 것인지(알파코스)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이벤트는 삶이 무료한 노인들에게 값비싼 물건을 팔기 위해서 관광을 시키거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장사와 다른 게 하나도 없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들이 전달해야 할 그 중심 주제가 형편없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런 이벤트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교회의 현실이 급박하다는 데에 있거나, 또는 목회자의 영성이 장사꾼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데에 있다.  
그 이외에 소위 ‘열린 예배’로 통칭되는 방식도 역시 크게 보면 신자들을 성서텍스트의 지평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감수성이나 자기만족을 통해서 교회조직 안에 묶어두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열린 예배를 한 통속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지만, 이런 데 마음을 쏟고 있는 목회자들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대신 인간 사이의 소통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모든 예들은 결국 하나님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이 뒤로 물러가고 사람들의 자기만족, 자기성취가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경우라 하겠다. 물론 한국교회가 성서텍스트의 깊이보다는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만 초점을 두게 된 것은 기존의 정통교회가 신앙적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배, 선교, 사명의 역동성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닦닥하는 방식으로라도 무언가 그럴듯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묶인 형태가 바로 밴드목회, 목장목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천번제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역사적 교회 공동체가 본질에만 천착한 적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모든 인간 기술공학적 방법론들을 일종의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전하기만 한다면, 사실 이런 설교자라고 한다면 알파코스, 밴드목회, 목장목회니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지만, 자기를 성취해야겠다는 인간의 욕망을 교회 현장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현실을 참작할 때,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을 일시적으로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따라서 목장 목회의 대가인 장 목사가 성서텍스트를 정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2005년 6월26일 “생명의 주인”(요 11:38-46)이라는 설교에서 장 목사는 그 특유의 입담으로 1시간 이상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장 목사는 이 본문에서 크게 네 가지 항목을 열거했다. 1. 나사로의 부활은(이 사건은 부활이 아닌데도 그는 부활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건이다. 2. 인간은 한계상황을 만날 때 불신앙에 빠진다. 3. 인간의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게 신앙이다. 4. 예수님의 일을 배척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여기서 그의 설교 전반에 대해서 비평할 생각은 별로 없다. 설교 전에 2,30분가량 열광적인 복음찬송을 부르는 것이나, 설교 끝난 후에 두 손 가슴에 얹고 “주여, 삼창”을 외치게 한다든지, 죽을병에 걸렸다가 치료된 어떤 목사의 간증을 지나치게 길게 끌어가는 설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성서텍스트와 동떨어진 행위들인지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면서 ‘일천번제’를 강조한 장면은 짚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그가 교회의 역동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제시한 ‘목장목회’의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장 목사는 솔로몬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일천번제를 드렸던 것처럼 병에 걸린 사람은 일천번제를 드려야 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천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두암에 걸렸다가 치료된 어떤 목사의 삶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드라마틱하게 전달한 다음에 그는 일천번제 운운했다. 일천번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일천번제로 병이 치료되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일정한 헌금을 천 번에 걸쳐서 드린다는 ‘일천번제’가 나사로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발 더 물러서서, 이런 기회를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헌금을 드릴 줄 알게 하자는 교육적인 목표로 일천번제를 언급했다고 보고 일단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일천번제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부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필자가 설교 본문을 읽은 게 아니라 귀로만 들은 내용이니까 정확한 묘사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인 것만은 분명하다.

'거짓말도 계속하면 진짜로 믿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되뇌면 우리가 믿기 힘든 것도 믿어지게 됩니다. 일천 번만 되뇌어 보세요. 세뇌당할 때까지 계속 외치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일천번제, 일천 번의 되뇜, 세뇌, 하나님의 큰 역사, 이런 것들이 바로 장 목사의 목회와 설교를 이끌어가는 추동력이다. 그는 목회와 설교를 세뇌라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그가 그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의 믿음을 뜨겁게 달구어야겠다는 절박감으로 그런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한 게 아닐까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세뇌당할 때까지 반복해서 외치라고 부추기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곧 목장 목회가 결국 성서텍스트의 깊이는 외면한 채 청중을 세뇌하고 닦달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세뇌는 오랜 동안의 기계적인 반복을 통해서 청중들의 인식론적 비판의식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태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청중을 쉽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독재자들이나 사이비 교주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기 위해서 청중들을 세뇌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정통 교회의 목회 패턴에도 역시 이런 세뇌 작업이 적지 않게 작동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 설교가 바로 이렇게 똑같은 사실을 반복적으로 선포함으로서 청중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설교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알만 하다. 장 목사가 왜 평신도 지도자를 위한 밴드목회 지침서인 <평신도를 흥분시켜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지 말이다. 평신도들이 흥분하지 않으면 결국 세뇌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가 일찌감치 눈치 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장 목사남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교회의 일에 마음이 들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이면 모두 알 것이다. 의도적으로 이런 일에 신경을 쓰는 목회자들은 신자들을 일 년 열두 달 동안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들들 볶듯이 교회 일을 시킨다. 각종 예배는 물론이고, 구역과 여러 선교단체와 교회 봉사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신앙이 좀 있다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온통 교회에 쏟아 부어야만 버텨낼 정도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허튼 일로 삶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교회 일에 쏟는 게 상대적으로 건전할지 모르지만 외면적으로 교회 일을 얼마나 하는가보다는 그 정신 상태가 그런 일들로 쫓긴다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현대 지성인들이 교회 일을 소 닭 보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다.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가 나름으로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천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추진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 결속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어쨌든지 사람들이 평신도를 진정시키는 걸 목회 철학으로 삼고 있는 필자에게 그들을 흥분시키라는 그의 주장은 낯설기만 하다.

청중을 풀어주라

왜 나는 평신도를 흥분시키는 게 아니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할까? 장 목사를 비롯해서 ‘밴드목회’니 ‘열린예배’니 하고 청중들의 열정을 끌어내려는 사람들은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흥분하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전적타자’(tataliter aliter)인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도 없으려니와 바람 스치듯 어렴풋이 경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나팔을 불고 다닐 수는 없다. 에크하르트 같은 영성의 대가들은 내면의 세계로 침잠할 뿐이지 사람들을 긁어모으거나 자신을 선전하러 다니지 않았다. 수도원에서 왜 묵언수행을 영성훈련의 한 방법으로 채택했는지를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조용하게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천착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소금은 단지 짠맛을 유지하기만 하면 모든 게 만족스러운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역시 세상에 자랑할 생각을 하지 말고, ‘없는 듯 있는’ 방식으로 자기를 철저하게 낮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바울이 다메섹 회심 이후에 유럽 선교에 모든 것을 바쳤듯이, 그 이전에 승천하시던 예수님이 ‘땅 끝’ 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듯이 그 사명이 충실하려면 조용하게만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말이다. 전도와 사랑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이런 주장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명에 관한 성서의 증언을 두 가지 각도에서 좀 더 심층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성서시대는 오늘과 달리 기독교가 생존의 차원에서 투쟁해야만 하던 때였다. 유대교와 로마라는 두 제국 앞에서 기독교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쳐야만 했다는 말이다. 그런 시대에 기독교는 전투적인 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기독교의 생존이라기보다는 본질에 천착해야만 할 시대이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사명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모세에게는 출애굽이 사명이었고, 바울에게는 이방인 전도가 사명이었고, 콘스탄틴 이후에는 기독교 신학의 정립이 사명이었으며, 루터와 칼빈에게는 로마 가톨릭과의 신학적 투쟁이 사명이었다. 이제 21세기 한국교회의 사명은 우리가 신학적인 성찰에 근거해서 찾아야만 한다.
셋째,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사명인지 확신할 수 없다. 십자군 전쟁과 마녀재판을 시행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7세기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 인디안들을 몰아내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오늘도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사명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광성교회 사태에서 우리가 보듯이 교회 분쟁도 역시 사명이라는 명분에서 자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늘 불가지론에 빠지거나 일종의 신학적 관념에 치우쳐도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신자들을 풀어주라는 내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늘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구원 행위를 펼치신다. 선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이지 인간의 선교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청중들을 교회봉사, 세계선교, 밴드, 목장 같은 많은 일과 조직에서 풀어주고 ‘하나님의 선교’에 제각각 알아서 참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 유대교의 종교적 권력으로 억압받던 민중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도 교회는 망할 염려는 없으며,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교회 없이도 자신의 일을 넉넉히 행하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내 이야기가 너무 탁상공론에 기울어진 것 같다고 불평할지 모르겠다. 목회 현장은 그런 이론보다는 교회 지체들을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요령이 불가피하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딜레마이다. 신앙의 본질과 목회 현장의 틈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특히 목회가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이 틈을 조화롭게 메울 수 있는 교회는 몇 안 될 것이다. 결국 여기서 목회자의 선택이 요청될 뿐이다. 교회성장이 최종 목표가 된다면 그것을 위한 프로그램에 치우치기 마련이고, 자유로운 성령에게 이끌림 받는 게 목표가 된다면 그런 프로그램을 최소화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한다는 말이 옳다면 우리는 결국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한다. 이런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는 설교자에게 성서텍스트가 열리는지 침묵하는지에 달려 있다.  
(위의 글은 7월28일, 통합측 목회자들 모임에서 강의할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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