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의 토대


틱낫한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틱낫한의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집사람이 사다놓은 <화>와 <힘>을 대충 훑어보니까 그런 대로 읽을거리가 있긴 하지만 웬일인지 그렇게 수준이 높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같은 해 4월13일 저녁 7시에 <일요 스페셜>이라는 티브이 방송 프로에서 법정에 대한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분이 젊었을 때 쓴 <무소유>는 지금도 꾸준히 팔려나가는, 소위 스테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신 분들은 느꼈겠지만 문학적 완성도가 별로 빼어난 것도 아니고, 또는 유별나게 고유한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틱낫한의 책이나 법정의 책이나 매우 상식적인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불교인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반면에 기독교 목사나 신학자가 쓴 글은 일반 사람들이 별로 호감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어떤 분들은 우리 민족에게 기본적으로 유교나 불교적 정서가 강하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들거나, 불교 쪽에는 어떤 신비주의적인 아우라가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긴 하지만, 이것으로 이런 현상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는 일반적으로 비합리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 쪽의 글은 불교 쪽의 글에 비해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근본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기독교 쪽의 설교집이나 신앙 에세이는 주로 “신앙 간증”이라는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누구나 했을 법한 고생거리, 두레 공동체의 김 아무개 목사처럼 민중 운동에 참여한 목사들의 실존적 체험담, 아니면 장애인들을 돌보는 헌신적인 이야기, 또는 극빈자 복지 운동을 벌이는 다일 공동체의 최 아무개 목사가 쓴 자전적 이야기들이 그래도 일반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들이긴 한데, 이런 정도로는 일반 대중들에게, 특히 지식인들에게 별로 영적인 감동을 줄 수 없다. 재미와 감동은 있지만 영적인 심연에 와 닿는 것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굳이 종교인이 아니라도 진지한 사회주의자이거나 휴머니스트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이런 정도의 감동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전문적인 영적 세계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삶의 리얼리티가 건강하게 담겨 있는 읽을거리가 우리에게는 별로 없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곧 기독교 신앙이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니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 어떤 사람은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한 대로 세상과 다르게 살도록 끌어주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쟁구조와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바른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옳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태도이지만, 이런 신앙적인 가르침들이 이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곡하고 있을 때는 사상누각이 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좀 심하게 말해서 정신 병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정신과에서는 정상인과 정신질환자를 구분할 때 ‘현실검증력’이라는 기준을 적용한다. 현실에 대한 왜곡이 있는가 없는가로 둘 사이의 경계를 긋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자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현실왜곡은 피할 수 없다. ‘자기감정, 자기생각이 곧 현실’이라는 명제는 인간이 가진 현실감각의 본능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의 현실감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사람 vs 사람, 개마고원, 64).

나는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언급해야 할 주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것이기도 하고, 개인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목사들의 저서를 일반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또는 설교가 교회 밖의 세계에서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현실 인식이 별로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전제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지동설과 진화론이 이 세계를 설명하는 중심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 인식의 왜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성서와 기독교는 인간이 영과 육의 신비한 결합체로 보는 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인간을 영육 이원론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세상에 대한 성속이원론도 역시 이 현실에 대한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하면 거의 끝이 없다. 한국교회가 여전히 가부장제에 매여 있다거나 반공주의를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왜곡된 현실 인식에 토대한 신앙은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기보다는 파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19세기에 니체는 그 당시 유럽 기독교 신앙을 단지 사육당할 뿐인 ‘가축떼’ 윤리로 평가하고, 프로이트는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으로 보았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그런 모습들이 없다고 말할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위에서 약간의 과장된 표현이 눈에 띄긴 하겠지만 큰 그림에서 틀린 말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건강한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물론 기독교의 본질은 그렇지 않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영성에 대한 이해가 약간 비틀려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적 골다공증
여기에는 우선 신학의 책임이 크다. 신학(theology)은 말 그대로 하나님(테오스)의 말(로고스), 또는 하나님에 관한 이성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토대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여기에 연루되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신학이 총체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윤리학, 그리고 실천신학에 이르기까지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담고 있는 신학의 체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학문보다 세분화되고 있고 전문화되어 있다. 그런 탓인지 각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신학자들은 전체 신학의 근본 틀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분야의 이론에 치우침으로써 모든 신학의 분과가 나가야 할 그 방향을 놓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즉 신학은 신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인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위한 방법론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자들이 분화된 신학 이론만 알고 있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결여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그저 감정적으로 뜨거운 상태에 몰입된다거나, 도덕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세련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판소리에 득음(得音)이라는 경지가 있듯이, 또는 노자와 장자가 도의 세계를 말하듯이 신학 행위가 드러내야 할 전혀 새로운 세계와의 관계를 말한다. 그런 세계가 없는 신학자가 내놓는 모든 학설은 장광설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는 교회 현장에서 ‘신학무용론’이 득세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 창조론, 칭의론, 종말론, 교회론 같은 신학 이론들이 아무런 영적인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면 결국 영적인 현실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교회 공동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다. 신학과 교회의 신앙생활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이 현상은 결코 건강한 상태가 아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신학의 영적 리얼리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이 신학적인 차원에서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리얼리티가 가장 예민하게 포착되어야 할 교회와 그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문제가 있다. 이런 사태를 일종의 영적인 ‘골다공증’이라 이름 붙여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입만 열었다 하면 영성을 외치는 목회자(설교자)들에게도 역시 이 영성의 결핍증은 여전하다. 문자적으로 율법을 고수하면서 민중들의 종교적 삶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건 그 당시의 유대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나 몸을 불사를만한 헌신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열정이 곧 영성의 기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요즘도 교회 안에서 기도와 전도와 교회봉사가 열정적으로 수행되고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사실 기독교인의 영성과 직결되고 있는지는 좀 더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영성의 결핍, 영적 골다공증 현상은 일단 설교 행위에서 적나라하게 발견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은 황폐화하고, 대신 빈 껍질을 치장하는 작업에 머물고 있는 설교는 천편일률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우리 자신과 주변의 설교를 들여다보면 거의 그게 그 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설교의 상투성이라니! 서울을 직접 가보지 못하고 남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해도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한 단조로운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위대한 화가들은 다른 사람의 그림을 따라서 그리지 않고, 위대한 소설가도 역시 남의 이야기를 표절하지 않는다. 소설가로서의 영감, 화가로서의 영감이 있는 참된 예술가들은 자기의 고유한 영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우리의 설교에 창조성이 없다는 것은 곧 영성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개중에는 입담이 있어서 그럴듯하게 종교적인 미사여구를 쏟아낼 수 있지만, 실제로 영성이 고갈된 그런 설교의 언어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불과하다.
교회 현장에서 설교자의 빈곤한 영성은 평신도의 영적인 빈곤과 직결된다. 평신도들 중에서 기도와 전도와 헌금 행위에서는 열정적이지만 영적인 심층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토의하는 일이 있을까? 교권을 행사하는 당회원들이 생명과 성령을 주제로 세미나를 갖는 일이 있을까? 이들은 대개 교회를 하나의 조직과 관리의 차원에서만 꾸려갈 뿐이지 그 심층의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약간 다른 말이 될지 모르지만 평생 교회 평신도 지도자로 지낸 분들도 자식 교육과 재테크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결국 그에게 영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앎에서 깨침으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신학과 교회 현장에서 나타난 영성의 결핍 현상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기독교를 설명하는 정보로서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지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모아진다. 즉 앎과 삶의 분열이다. 아는 것과 그 아는 것이 자기의 삶에 그대로 녹아드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면 앎에서 깨침의 단계로 올라서야만 한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주변에서 구경꾼으로 남아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를 수영과 연결해서 설명하자면, 수영을 배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물 밖에서 그저 구경만 하거나, 또는 물속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물이 무서워 몸에 힘을 주는 것과 똑같다. 물론 구경꾼도 수영에 대해서 할 말은 있다. 직접 수영하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말은 더 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수영에 관한 말할 거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직접 물속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사람의 즐거움에는 도저히 참여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앎과 삶이 통전화하는 순간을 가리켜 큰 깨침, 즉 돈오(頓悟)라고 한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우리 기독교적인 개념과 연결시킨다면 메타노이아(회심)이나 성령 충만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했듯이(고전 4:19) 이 능력이 삶에 그대로 드러나는 상태야말로 우리가 영성이라고 부르는 그런 순간이다.
성서는 이러한 삶의 능력을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는 뜻으로 굳이 하나를 선택해서 설명하자면 평화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도나 설교나 말씀에서 하나님의 평화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이런 평화가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 체화(體化)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늘 자기의 욕망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평화의 영성과는 거리가 먼 분노와 걱정에 사로잡힌다.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사납게 싸우거나 패거리 집단을 만들어 가면서 감히 평화의 능력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평화에 대해서 무능력하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영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삶의 능력이라 할 영성을 언급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문제는 그것이 방법론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몇 가지 삶의 지혜나 기술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영적인 실체인 성령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영과 하나 되는 데서 시나브로 새로워진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는 심신수련원의 단전호흡이나 명상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영성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간혹 교회에서도 ‘뜨레스디아스’ 같은 영성을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 운운할 때가 있는 데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그 영은 바람처럼 자기가 불고 싶은 대로 활동할 뿐이지, 인간의 심리학이나 정신발달이론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엑스트라 노스 인 크리스토”(우리 밖,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일치됨으로써 칭의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영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고유한 기독교적 영성 문제가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방법론적 차원으로 왜곡되고 있는지 두 가지 관점만 검토해보자.

영성의 주술화
첫째, 교회가 영성을 주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곧 영성의 왜곡이다. 대개 교회 안에서 영적인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방언, 신유, 예언 등, 거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이런 은사들은 종말론적 공동체에게 일어나야 할 구원론적 징표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가 이런 새로운 언어와 병고침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배워야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우리 개인과 사회에서 보편적 차원에서 해석되고 획득되며,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은총으로 받아야 할 것들이지 어떤 특정인에게만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은 아니다. 주술적으로 이해된 영성은 우리를 진리에 집중하도록 돕는 게 아니라 어떤 종교현상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든다. 결국 기복적이거나 열광주의로 흘러감으로써, 극단적인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운명을 점쟁이처럼 예언해 주면서 돈을 받는다거나, 안수기도를 해주고 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는 일이 있다.
이런 현상은 산상집회나 부흥회 같은 특별한 모임만이 아니라 일반 교회에서 행해지는 찬양집회에서도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주일 오후나 저녁에 드려지는 예배 때 상당히 요란하게 찬양을 부르는 교회가 많다. 이렇게 격정적으로 찬양을 부른다는 것 자체는 개개인들의 정서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이 탓할 문제가 아니지만 이런 감정적 엑스타시를 영성으로 착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일종의 심리적 대중치료라 할 이런 열광주의를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난 월드컵 때 수많은 붉은 악마들이 경기장과 대도시 광장에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열광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 열광은 그저 열광으로 잠시 있다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뿐이지 우리 삶의 능력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성의 주술화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현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별난 경우를 짚어본다면 성락교회 김 아무개 목사의 ‘귀신론’이 그것이다. 그는 이 세상이 인격 존재인 귀신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런 귀신을 추방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약간 다른 경우이지만, 연세중앙교회 윤 아무개 목사의 ‘예수천당, 불신지옥’ 구호도 역시 이런 영성의 주술화에 속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그런 구원이 주술적으로 실행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 가르침의 희화화에 불과하다. 간혹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거나 어깨띠를 띤 사람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확성기로 그런 구호를 위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1992년 한국사회를 혼란 가운데 빠뜨렸던 ‘다미선교회’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 공간 어딘가에 마련된 천당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이런 주술화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의 실종이다. 귀신론이나 ‘예수천당’ 구호나 모두 인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역사를 폐기시킨 채 일종의 숙명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물론 그들도 역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역사 없이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역사가 단지 결정론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결국 역사가 해체된다는 말이다. 참고적으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섭리론과 예정론을 문자의 차원에서 고집하면 자칫 이런 역사결정론에 빠질 개연성이 높다.    

경건주의적 영성
둘째, 신앙의 토대를 경건주의에 설정하는 것이 바로 교회에서 발견되는 영성의 왜곡이다. 일명 청교도 영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경건주의 영성은 신자 개인의 실존적 깊이에서 만날 수 있는 종교적 요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표현을 빌린다면 ‘절대의존감정’이라는 종교적 경험*에 근거를 두고 신자들을 끊임없이 이런 경험으로 몰아가는 영성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의 정서가 감정적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종교적 경험이 매우 중요한 신앙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게으름>을 비롯해서 여러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고 열린교회를 개척한 후 짧은 시간에 큰 교회로 성장시킨 김 아무개 목사가 바로 이런 청교도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영성의 대표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최근에 그의 설교를 대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지성적인 한 사람이 그런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과 그가 사로잡힌 그 열정이라는 게 인간 삶에서 매우 부분적인 것이라는 사실에서 말이다. 그의 종교적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생각하면 ‘흐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설교할 때마다 울먹이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설교 후 통성기도 시간에는 거의 통곡하는 일도 잦았다. 자신의 내면적 감동이 아무리 강렬하다고 하더라도 설교자가 그것을 자제하지 않고 마음껏 발산한다는 것은 성령과 자신의 영성을 혼동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경건주의적 영성은 기독교인들의 실제적인 삶에서 두 가지 상반된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힘으로써 늘 불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윤리적 성취감에 만족함으로써 오히려 교만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앞의 것은 심리적으로 자기 학대증(매조키즘)으로, 뒤의 것은 가학증(새디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도덕적 결함에 대한 자책감이 그 사람을 매우 소극적으로 만들어버린다. “내 탓이오”라는 말로 정형화시킬 수 있는 이런 집단적 불안증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사회 안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일종의 자폐증 환자처럼 순수 종교적인 피난처로 숨어들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경건주의적 영성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서 세상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의 사명이 이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있다고 보고 사회윤리에서도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고 마녀사냥에 나선다. 언젠가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예수의 최후의 유혹”을 반기독적이라고 생각한 기독교인들이 물리적 방법을 동원해서 이 영화의 상영을 막은 적이 있다. 또한 동성애자나 사회주의자 같은 마이너리티가 부정한 집단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경건주의적 불안감과 만족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기독교의 신앙을 도덕성과 종교적 경건성에서 찾아 보려한 잘못에 의해 벌어진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성은 이러한 도덕성이라는 매우 축소된 삶의 영역에서만 타당하게 됨으로써 세상 전체의 보편적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로제 슈츠의 “떼제 공동체”나 틱낫한의 “플럼빌리지”나 대천덕의 “예수원”, 또는 임영수 목사의 “모새골‘ 같은 비교적 건강한 영성 공동체는 한결같이 인간의 죄성을 공격하거나 그것의 보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영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심리적 차원이라 할 죄성이 아니라 훨씬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은 무엇일까? 그것의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삼위일체론적 영성으로!
영성이 영(靈)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며, 그 체험에 근거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런 능력이 드러남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체험이야말로 영성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는 통로는 삼위일체론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삼위일체론에 관해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밑그림만이라도 그려보는 게 좋을 것이다.
신약성서 기자들과 교부들은 단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모든 구원 사건을 끌어가는 근원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그 토대로 삼았다. 이미 이러한 신앙적 형태는 신약이 기본적으로 구약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성은 단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다는 사실에, 즉 “그리스도 일원론적 신앙”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세계 전체는 바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의 영성을 확보해야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는 분으로 믿는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우리의 영성이 어떤 지평으로 확대, 심화되어야 하는지 그 길이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 영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보다 좀 낮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거치면서 정통 기독교는 성령을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본질로서의 세 위격 중에 한 분으로 인식하고 고백한다. 이런 성령 이해는 단지 교회의 교리사적 인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서의 하나님 이해이기도 하다. 이미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영적 존재로 해명하고 있으며, 요한복음도 하나님은 영이라고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 영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매우 다층적인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에 대한 성서의 진술이 일치되고 있는 점은 영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힘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곧 살리는 영이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일치와 그 경험과 그것이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영성이라고 할 때 결국 영성은 살리는 능력, 생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곧 생명을 살리는 능력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영, 부활의 영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성령의 살리는 능력을 삼위일체론적 시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영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것 자체로 설명되는 게 아니라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의 관련성 가운데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생명현상 없이 논의되는 영성은 아무리 그럴듯한 경험이 수반된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순수관념에 불과하다. 이런 생명 현상이 발생하는 곳은 바로 이 세상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모든 곳에서 생명의 영이 활동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 영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영에 대한 아전인수적 해석일 뿐만 아니라 모독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회가 영을 생명과의 연관성이 아니라 도그마 안으로 축소시켜버림으로써 기독교의 영성이 빈곤해졌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일으켜 세운다는 차원에서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타종교나 이 세계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대답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영성을 회복하려면 이 세상 안에서 생명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고 심화시켜야만 한다는 말이 된다.
영성의 토대인 생명 문제를 깊이 있게 인식하고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방향만은 확실히 해야 한다. 하나는 이 세상의 보편적 생명 운동과 부지런히 대화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대 철학이나 유전공학도 이런 생명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으며, 시인들도 그렇고 화가들도 역시 생명을 이해해 보려고 구도 정진하듯 애를 쓴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교회가 과학의 세계를 무시하거나 거리를 두었지만 앞으로는 생명의 세계를 열어 가는 물리학과 생물학이 생명의 영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는 신학의 사유를 훨씬 심화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 전문가들처럼 그들의 모든 문제를 소상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인식해가고 있는지 그 방향에 대해서만은 따라잡아야 하며, 설령 그렇게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도 역시 생명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듯 주변 학문이 생명의 현실로 파악하고 있는 것들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의 영성을 인식하고 해명해 나갈 때만 보편적인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 없이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치기만 한다면 이건 통역자가 있을 때만 방언을 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에도 위배된다.
다른 한 가지는, 정말 이게 중요한 핵심적 사안인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영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바로 그 영이 생명의 능력이며, 종말에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영이다. 이런 부활의 영이 활동하는 영역에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영성의 기준이 된다. 만약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은폐의 방식으로 생명의 역사를 끌어가는 이 부활의 영과 일치되어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생명을 미리 앞당겨 경험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종말론적 영성으로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살리는 능력이다.  

영성의 현실들
기독교의 영성은 결국 위에서 말한 대로 부활의 보편성과 그것에 대한 인식 및 해명으로 집중된다. 부활의 영은 틀림없이 우리로 하여금 생명지향적인 삶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런 생명 지향적 현실들을 몇 가지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여기서 제시된 것만 생명의 영에 관계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영이며, 생명의 영인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에 대해 예민한 영적 감수성을 유지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영적 지평을 확대, 심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전망만이라도 제시해보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중에 죽고 가족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전쟁이 결코 생명 지향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거시적으로 이 전쟁이 기독교의 영성에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논리는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영을 믿지 못하는 태도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번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부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 생명의 영보다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인물인 것 같다.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을 (비)의도적으로 죽이는가? 이런 점에서 반전, 평화운동은 영성에 속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어느 초등학교 교장이 전교조와의 갈등 가운데서 결국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었다고 한다. 오죽 했으면 그만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죽었을까 하는 연민이 들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로 생명을 끊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죽음의 충동’을 이 사건에서 읽을 수 있어서 오히려 화가 치밀었다. 즉 교육계도 역시 생명보다는 인간의 명예와 자존심, 또는 경쟁심이 우선적 가치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 된다. 세상의 정치, 교육, 경제가 생명의 영에 사로잡혀서 작동되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
기독교 신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구의 생태학적인 생명과 영성 문제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가운데서 아무런 반영(反靈)적 조짐을 읽지도 못하고, 오히려 소비 지향적, 반생태학적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있다면, 더욱이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면 아무리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찬송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부활의 영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그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우리 삶의 구조를 꾸준히 갱신시켜 나가는 일은 본질적으로 영성의 문제이다. 몇 년 전(2003년) 5월7일 늦은 밤 KBS 티브이에서 새만금 갯벌 살리기 삼보일배 고행에 나선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자기를 비우고 죽이고 낮추고, 반면에 생명의 영을 채우고 살리고 높이는 영성이 아니라면 그분들이 이런 일에 나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개의 교회들은 교회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교회 성장 방법론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영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게 한국 목회 구조의 비극적 상황이다. 거의 모든 교회가 이미 정형화된 목회의 메커니즘 안에서 운영되고 있을 뿐이지 목회자의 고유한 영성이 그 목회의 토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말이다. 당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구조 자체가 이미 교회 공동체를 관리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을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모두 더불어 대오 각성의 자세로 자기의 영성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목회와 설교와 신앙생활이 생명지향성을 유지하게 되며, 더구나 목회자와 신자와 교회의 구원도 이루어질 것이다(빌 2:12).

신앙의 주체성과 연대성
그렇다. 영성은 단지 우리의 종교적 취향을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교회가 신자들의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영성을 자신들의 구조와 프로그램 안으로 축소시키지 말고 성령의 자유에 위임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성의 토대인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 최소한의 일이 곧 예전(liturgy)에 근거한 예배와 신학에 토대를 둔 성서공부,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그 역사를 뚫어볼 수 있는 직관을 키워주는 것이다. 지금은 신자들이 각자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영적 성숙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가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여기서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우리는 이 말을 기독교인 각자가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삶의 내용과 의미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두 가지 차원에서 이 말은 심화되어야 한다.
하나는 신앙의 주체성이다.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 고유한 방식으로 접촉한다. 따라서 기독교인 각자는 아무에게서도 간섭을 받지 않고 성령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성숙한 영성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특징은 신자들이 어린아이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주체적이지 못하고 의타적으로 생활하는 어린이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교권에 의존한다거나 어떤 권위에 굴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처럼 순종의 영성이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어린아이 같은 신자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연대성이다. 이 연대성은 성령의 활동에서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심층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영성이 맑고 깊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성령의 활동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포착되었다면 당연히 자기를 포기하고 그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는 게 분명하게 판단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포기하고 그 일을 중심으로 동료들과 하나 된다는 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다. 이런 구체적인 상황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본인이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부분으로 남겨두는 게 좋은 것이다. 다만 성령의 부르심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런 연대성을 유지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신앙의 주체성과 여기서 언급하는 연대성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성숙한 신앙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주체성이 강한 사람만 연대성을 확보하고 살아갈 수 있다. 실제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남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한정시킬 수 있는 법이다.    
이제 오늘 우리의 논의를 마치면서 짧은 글 한편을 읽겠다. 28세의 젊은 시절에 ‘월든’이라는 숲속의 호숫가에서 스스로 오두막을 짓고 2년 동안 생활했던 경험을 매우 민감한 영적 감수성으로 서술한 소로우의 <월든>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할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영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글이 아닐까 생각해서, 여기에 소개한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던,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천성에 맞는 여러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대신 끌어다 댈 수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애를 써서 머리 위에 청색 유리로 된 하늘을 만들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 그런 것은 없다는 듯이 그 훨씬 너머로 정기에 가득 찬 진짜 하늘을 바라볼 것인데.”  

<위의 글은 기독교사상 2003년 6월호에 게재했던 졸고 “설교자로서 기독교 영성,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완해서 2005년 8월16일 대구남덕교회 청년회 수련회에서 강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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