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설교는 어떤데?”

요즘 어쭙잖은 ‘설교비평’ 글을 <기독교 사상>에 연재하면서 주로 설교 명망가들의 설교를 읽고, 또는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평생 한쪽으로 굳어진 생각으로 설교하던 분들이 그것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며, 또 어떤 점에서는 이 작업이 대중 설교자를 향한 내 개인의 불만을 분출하는 배설의 공간으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교비평이라는 창을 통해서 아직 굳어지지 않은 젊은 설교자들과 더불어 설교와 기독의 본질에 관해서 서로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박한 기대와 전공에 따라서 거의 분파적 성격까지 보이고 있는 오늘의 신학이 조직신학과 설교학의 접목이라는 이런 시도를 통해서 새로운 통합적 구도의 작은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이런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밖으로는 그럴듯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 내심으로는 신학적 사유의 재미로 설교비평을 즐기고 있는 중에 당신 설교는 어떤데, 또는 당신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설교하는데, 하는 질문을 받고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남의 설교를 비평할 자격이 있는지, 그런 비평을 하기 전에 자신의 설교나 똑바로 하는 게 옳은 게 아닌지, 하는 복잡한 생각이었다. 어쨌든지 우리가 문학비평이나 예술비평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 행위라 할 수 있는 설교와 분석 행위인 비평이 서로 다른 장르이기 때문에 반드시 설교를 잘 해야만 설교비평을 하는 건 아니라는 진부한 변명으로 자위한 채 그동안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뭔가 아는 척하고 떠들어댄 책임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내 글을 좋게 읽어주신 송기득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설교에 대한 내 생각을,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편안하게 풀어놓을 생각이다.

1. 존재에 대한 막막함

그런데 풀어놓으려면 우선 내 내면 세계에 무언가가 담겨 있어야하는데, 이 글쓰기 초장부터 그게 좀 꺼림칙하다. 물론 몇 가지 정보나, 생각의 흔적들을 몇 가닥으로 정리해 볼 수는 있겠으나 그런 것들은 강의실에서나 통용될 뿐이지 자신의 모든 실존을 담아야 할 이런 글쓰기에서는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부터 웬일인지 막막한 심정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기분은 나의 알량한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에 늘 어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철저한 무력감의 발로라고 보는 게 옳다.
바로 여기에 내가 대중 설교자들의 설교 앞에서 짜증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놓여 있다. 나는 어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막막한 상태가 되는데 반해서 그들은 왜 그렇게 자신 만만한가에 대한 불평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나는 안개가 잔뜩 낀 숲속에서 조금씩 길을 헤쳐 나가는 것조차 힘겨워하는데, 그들은 고속도로에 들어선 최신형 승용차를 탄 사람처럼 신바람을 내며 달려가고 있는 것에 대한 시샘인지도 모른다. 내 앞은 모든 게 깜깜하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무언가 분명한 걸 찾아보려고 해도 그게 잘 되질 않는다.
나에게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게 어둠이다. 모든 게 은폐되어 있다. 이 세상이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특히 요즘처럼 어둠이 없는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너무 확실하게 보이겠지만 나에는 이 세상이 늘 깜깜하다. 내가 연구실로 쓰고 있는 작은 아파트에는 아마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조성한 듯한 아주 작은 꽃밭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 그 꽃밭에는 노란색깔을 분수처럼 뿜어내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다. 나는 그 꽃의 정체를 도대체 알 수 없다. 흙에서 푸른 줄기가 뻗어 나온 것 하며, 푸른 줄기와 잎에서 또 다시 노란색깔의 꽃잎이 생성된 근거와 이유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내 인식 안에 잡히지 않는다. 태양과 땅이 어떤 조화를 부렸기에 이런 꽃을 이 시간에 이 공간으로 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은 이 꽃과 어떤 사연을 주고받았단 말인가? 아침 안개와 이 꽃이 나누었을 법한 은밀한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을 요정을 만나보고 싶은데, 나는 아직 그 요정을 만나볼만한 영적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도대체 세상의 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단지 이 세상의 표면적인 것에 대한 몇 가지 정보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나에게 어둠일 수밖에 더 있으랴.
이런 막막함은 단지 존재 차원만이 아니라 이런 글쓰기와 설교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나는 삶의 세월이 쌓일수록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예컨대 박 아무개가 김 아무개에게 건넨 “오늘 참 날씨가 좋군요.”라는 말이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박 아무개의 이 말은 삶에 대한 기쁨을 담고 있는데 반해서 김 아무개는 이렇게 반복되는 날씨에서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놓인 이런 소통의 부재는 그들이 주관적인 생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 강도가 심해지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단지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어떤 독단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소통의 불능 상황은 그 어떤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훨씬 심각한 편이다. 그런데 대중 설교자들은 이런 대목에서도 거칠 게 없다는 듯이 그 소통부재의 벽을 마음대로 뚫어내고 있으며, 그게 대중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사태 앞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할 내가 어떻게 막막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있으랴.
설교의 원(原)자료라 할 성서 텍스트 앞에서 설 때 나의 이런 경험은 훨씬 심각해진다. 창세기 1장1절은 다음과 같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나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우선 이 문장의 속내가 나를 두렵게 만든다. ‘한 처음’이라! 도대체 한 처음이 언제라는 것인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나이라고 말하는 120억 년 전이 곧 구약성서의 첫 마디와 일치한다는 것인가? 그 한 처음 이전은 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뒤로 등장하는 하느님, 하늘, 땅, 지어 내셨다는 단어도 역시 내 사유의 세계를 어지럽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신약성서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2장20,21절은 이렇다.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도대체 예수가 다시 오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예측했다는데, 그의 재림이 이렇게 연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대답들이 이런 사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해결해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타당하기나 한 것일까? 성서 첫 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그것이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한발걸음만 더 들어가도 나는 어지럽고 막막하고, 그래서 두렵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텍스트 자체라기보다는 그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한 처음’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삶에 어떤 원한이 사무쳐 있기에 그들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남녀노소를 전멸시키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새겨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 또 얼마나 심각한 삶의 절망감과 무의미 가운데서 나름으로 성서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했는지 나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곧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는데, 하물며 수백, 수천,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 성서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꽃과 아침 안개와 요정들 사이의 대화에 전혀 끼어들지 못하는 내가 느끼는 그 소외감이 성서 텍스트와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앞에서도 똑같이 작동되고 있다. 이게 곧 설교자로서 내가 처한 엄정한 실존이다.

2. 성서 텍스트의 지평 속으로!

결국 “당신은 무얼 설교하는데?”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게 하나도 없다. 세상과 인간과 성서와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훨씬 많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 내가 무얼 설교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설교자로 나선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서 텍스트를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이 요청 앞에서 무작정 도망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곧 우리 설교자로서 내가 처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처한 숙명이다. 이는 곧 실제로는 사랑의 능력이 없으면서도 그 사랑을 설명하고, 더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사람의 처지와 비슷하다.
내가 보기에 이런 상황 앞에서 설교자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성서 텍스트의 표면을 아는 것에 만족한 채 그것을 적당하게 포장해서 청중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둘째는 성서 텍스트 앞에서 자신의 인식론적 무능력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청중들과 그 성서 텍스트가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앞의 작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대중 설교자들의 설교행위이다. 그들은 성서에서 종교 규범을, 심한 경우에는 세상살이의 요령을 찾아내고 그것을 청중들에게 강요하거나 판매하는 것을 설교로 생각한다. 이런 작업은 신자들의 일반적인 종교적 욕망을 자극하며, 아울러 설교자 자신들의 목회 업적을 확대하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를 도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일반 신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그런 대중 설교자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도 역시 나름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나는 그런 행위를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청중들의 영성을 파괴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 글이 설교비평에 목표를 둔 게 아니니까 이 문제는 접자. 그것보다는 위에서 내가 두 번째로 제시한 길, 즉 청중과 성서 텍스트의 만남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설교자로서 내가 선택한 길이다.
청중을 성서 텍스트와 만나게 한다는 것은 곧 그들을 성서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인데, 우선 이 말에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나에게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서 텍스트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용빼는 재주가 없다. 그들의 인식론적 지평을 활짝 열어줄만한 능력도 없고, 성서의 세계를 완벽하게 해명할 자신도 없으며, 그들이 빠져들 만한 간증거리도 없다. 다만 나는 그저 성서 텍스트의 무게와 깊이를 내 존재 전체로 느끼고 거기에 반응할 뿐이다. 이 말은 곧 내가 청중을 향해서 설교한다기보다는 단지 영의 현실을 향해서 내 나름의 손가락질을 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나는 청중들을 설득하거나 은혜를 끼쳐야겠다는 생각도 없으며, 그런 능력도 없고, 더구나 그들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야심은 더더욱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인식하고 경험한 세계라는 게 너무 작기 때문에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청중들에게 전한다는 건 오히려 그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막아버릴 개연성이 훨씬 높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감동적으로 설교함으로써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목사들만큼 삶의 변화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다른 나라에는 없을 것이다. 미국 청교도 설교자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은 지금도 청중들을 향해서 변화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설교자들이 아무리 삶의 변화를 외쳐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기독교인들의 변화된 삶을 강조했지만 그런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금 한국교회가 그런 변화를 아무리 외쳐도 실제적인 변화는 없다. 설교를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설교를 듣지 않아도 이미 변화되었거나 다른 방식으로도 변화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설교자들이 말하고 있는 그 변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교회 생활에 모범적이고, 도덕적으로 반듯해지고, 사회봉사 잘하는 삶으로 변화한다는 게 과연 가능하며, 그게 바로 성서 텍스트가 요구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설교와 삶의 변화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참된 변화는 그렇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는 데서 가능하기 보다는 설교자가 다음 먹은 대로 다룰 수 없는 성령의 존재론적 활동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나는 설교자로서 성령의 역할을 대신할 자신이 없다. 나는 가능한대로 청중의 영혼을 책임지는 자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인간구원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서 내 역할을 축소하면 할수록 성령이 훨씬 역동적으로 활동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설교를 대하는 이유는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활동했던 생명의 영인 성령만이 성서를 읽는 오늘의 우리에게 성서 텍스트의 내막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설교 행위에서 설교자의 주관보다는 생명의 영인 성령이 주도적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굳이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성령론적 설교’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내 생각에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최소화하고 성령이 활동하는 역사를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데만 마음을 둘 것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성령론적 설교라는 게 설교자의 모든 주체적 활동을 해체시키고 흡사 오순절 계통의 설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막연한, 혹은 주술적 차원의 신비주의에 빠져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아무리 인식론적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 텍스트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또한 성서 텍스트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종교생활을 위해서 성서를 도구화하는 청중들의 태도 앞에서 설교의 근본적인 한계를 절감하지만 그래도 성서 텍스트를 가능하게 한 그 영이 오늘 이 시간에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준비만은 설교자가 빈틈없이 수행해야 한다. 자기의 주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의 실체적 진실을 아는 일에, 그 지평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출발은 곧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다. 나는 설교자로서 성서 텍스트의 그 전승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그것의 전승과 문서 및 편집과정, 그리고 정경화에 얽히고설킨 그 역사가 궁금하다. 그 삶의 자리가 궁금하다. 성서 기자들이 표현하고 있는 그런 방식의 하나님 경험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담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청중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그게 알고 싶다.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일단 역사 비평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물론 이런 작업도 여전히 한계가 있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성서 텍스트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바로 역사비평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역사 비평의 중요성도 역시 이번 글쓰기의 핵심주제가 아니니까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 말고, 대신 그것보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성령론적 설교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역사비평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평은 텍스트 안에 고정된 실체로 자리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지평의 역사적 운동을 따라잡는 게 곧 해석이다. (역사 비평적) 주석은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가 형성된 과거의 지평을 여는 작업에 머물지만, 해석은 그것의 움직이는 역사적 지평을 여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청중들에게 설교해야 할 설교자에게 필수적인 작업이다. 성서 텍스트의 지평이 역사적으로 열려야 한다는 말은 곧 성서 텍스트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오늘과 미래로 소통되어야만 실제로 살아서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최소한 두 가지 훈련을 철저하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는 오늘의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자리를 중층적이고 심층적으로 읽을 수 있는 준비인 인문학적 소양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가 성서와 시대정신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해명한 조직신학 공부이다. 다른 설교자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인문학과 조직신학을 통해서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늘의 자리로 해석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가서 바로 이런 방식의 성서읽기와 해석이야말로 늘 생명의 영으로 작용하는 성령에 의존적인 설교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3. 설교의 해석학적 토대

나는 이번에 가능한 대로 설교자로서 나의 실존적 경험을 말해보고 싶었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처럼 남을 가르치려는 듯이,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변명하려는 듯이 글을 쓰게 되어 독자들에게 송구스럽다. 널리 이해를 바란다.
어쨌든지 나는 위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저 변죽만 울렸을 뿐이지 핵심은 건드리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붙잡아야 할, 또는 내가 붙잡혀야 할 ‘무엇’이 나에게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위에서는 역사비평, 인문학, 조직신학이라는 세 구조로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 지평의 새로운 역사적 운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또 다시 ‘무엇’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는 게 서로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인식하고 경험한 그 생명의 리얼리티들은 이미 완료된 대답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질문으로 다가올 뿐이다.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에서 열린 질문으로 다가오는 그 세계를 청중들에게 실증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어떤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곧 설교의 내용이며 주제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명제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수사학적 기법을 통해서 전달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이미 답은 주어졌으니까 그것을 포장하는 일만 남아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수라는 말에 담긴 삶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 채 우리가 구원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또한 구원이라는 언어의 존재론적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믿음을 거론한다는 것도 무의미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와 그의 사건과 운명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그 역사적 과정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 명제를 강요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해석했다는 사실은 오늘 설교자의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예수에 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해석은 여럿으로 갈렸다. 예컨대 팔레스틴 기독교인과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 그리고 그리스 이방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들에 의해서 예수는 다윗의 후손, 인자, 또는 퀴리오스 등등으로 해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부들은 헬라 철학과의 매우 긴밀한 대화를 통해서 신학을 해석하고 구성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명제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역사적 교회의 신학적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들이 내놓은 정답을 지금 우리가 무조건 따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답에 이른 과정을 다시 추적하고, 오늘 우리가 새로운 답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오늘 설교자로서 내가 이런 작업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활동한 진리의 영을 내가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단지 세례문답으로 끝날 수 없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 경험이 내게 있을까? 물론 지금 내가 그런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눈치 채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긴 하지만, 바람(루아흐)을 내가 소유할 수 없듯이 그 세계를 내가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게 바로 내가 처한 딜레마이다. 도대체 나의 모든 존재 근거가 포함되어 있는 그런 영적 세계를 무슨 수로 청중들에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설교자인 내가 처한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설교해야 할 성서 텍스트의 그 세계를 한 마디 짚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4. 생명

내가 설교해야 할 그 세계는 ‘생명’이다. 이것 말고 내가 설교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명이라는 말은 오늘날 성서 시대의 그 풍부했던 영적 차원들을 모두 상실한 채 거의 상품과 비슷한 어떤 것쯤으로 간주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밖의 사람들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마 죽음 이후나, 종말 이후에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영원하게 살아가는 게 곧 생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밖의 사람들은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말 것이다. 특히 황 아무개 교수의 베아줄기세포 연구 이후로 이런 조짐은 훨씬 심하다. 이런 유전공학이 충분히 발전하기만 한다면 생명(목숨)을 무한정 연장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오늘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을 텐데, 이런 기계공학적 생명이 얼마나 초라한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기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설교 문제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만난다는 것은 곧 생명과 조우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감동적인 설교라고 한다면 아마 청중들이 설교를 들은 다음에 생명에 대한 신비가, 그 다층적 성격이 열리고, 그래서 놀라고 황홀해하고,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의 창조 사건이 곧 생명을 말하는 것이며,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요한계시록이 바로 생명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곧 궁극적 생명의 알짬인 예수의 부활 사건이 놓여 있다. 결국 설교는 생명의 신비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doxology이다.
물론 설교는 생명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명제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예수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고 했으니까 많은 대중적인 설교자들도 이 말에는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역사 전체를 총괄하는 종말론적 차원에 속하는 그 생명을 우리가 간단하게 포착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생물학과 물리학, 인간론이나 사회과학도 역시 설교자의 관심 대상이지만 종말의 전망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훨씬 근원적인 데 집중해야만 한다. 나는 수학문제를 풀듯이 그런 생명의 근원을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생명의 세계가 나에게 다가오기를, 나를 통과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런 점에서 그런 기다림의 태도를 청중들에게 알려주는 게 곧 나의 설교행위이다.
그렇지만 내가 기다림의 신앙적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모든 설교를 끝내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대로 나는 바로 생명으로서의 하나님을 지시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일관성을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접어두고 일단 방향만은 분명하다. 교회를 말할 때나 사회 윤리를 말할 때나, 또는 생태학에 대해 말해야 할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생명으로의 하나님에게 가 닿는 설교이어야만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한다든지, 기도의 응답이 어떻다는 말은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런 부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또는 인간의 기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는 분이지 어떤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이 아니라면 기도에 의해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어떤 규칙들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문제도 역시 그렇다. 지속가능한 이 땅을 목표로 하는 에콜로지가 창조론의 관점에서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이런 목표와 하나님의 통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소비 지향적 삶의 결과로 이 지구가 완전히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와 종말의 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이끌어 가실 것으로 나는 믿는다.

5. 민중에 대한 질문

소위 민중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사람들에게 임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할 경우에도 나는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 기본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생태를 지향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를 내다보는 것처럼 민중의 정치, 경제적인 해방을 치열하게 견인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중심에 두면서도 역시 그것 너머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그 뿌리로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민중들에게 어떤 방식의 구원이 참된 구원으로 실현되는 것인지 결정적으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나의 이런 태도는 아마 민중 신학자들에게 욕먹기 안성맞춤일 것 같다. 내 주제가 그것 밖에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기상> 11월호에 기고한 졸고 “민중에 대한 질문”은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이다. 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앞에서 민중에 대한 애증이 나에게 교차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 내막을 조금 풀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 조 목사에 의해서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 아주 쉽게 농락당하는 민중들 앞에서 내 마음은 편치 못하다. 도대체 민중은 누구인가? 왜 그렇게 쉽게 자신의 영혼을 파는가? 민중 신학자들께서 답변 좀 주시기 바란다. 욕먹을 각오로 묻는다. 왜 그들은 역사의 주체로 반듯하게 서지 못하는가? 세속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 목사의 삼중축복 논리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민중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기대한단 말인지, 대답해달라.
이런 점에서 내 생각에는 민중들에게도 역시 조 목사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몫이 있다. 그것도 아주 큰 몫이다. 1만 명도 아니고 10만 명도 아닌, 70만 명의 신자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태가 조 목사의 정당성에 대한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지금 내가 나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조 목사의 삼중축복 논리에 쉽게 부화뇌동하는 민중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참담한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구체적인 ‘사람들의 무리’인 민중(民衆)에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 사이에서 나는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먹을 만큼 충분하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내 영적인 수준이 왜 요 모양인가? 아마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엮어내는 이 역사 안에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구는 깨어있는 민중과 어리석은 민중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이중적 잣대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중이면 민중이지 어떻게 역사의식이 살아있는 민중이 따로 있단 말인가.

이 졸고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끝으로, ‘민중에 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면서도 헤매기만 하다가 어떤 대답도 옳게 찾지 못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동료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고 싶다. 민중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게 좋다. 그들을 닦달하지 말고,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라. 우리 설교자들이 구원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생명의 영인 성령이 그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설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는 말이다.

6. 신앙은 태도이다.

내가 글머리에서 내 삶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이 세계와 성서 텍스트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이 심해진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곧 내가 설교해야 할 궁극적 생명으로서의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똑같다. 이는 곧 내가 그 생명을 해명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길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나의 실존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설교는 청중들을 생명으로서의 하나님 앞에서 막막함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 막막함은 막연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 경험, 혹은 생명 경외이다.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주관적으로 규정해낼 수 없는 그런 생명 세계의 신비야말로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유일한 하나님 체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그 생명의 신비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청중들을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 과연 가능한가? 오늘의 교회에서 그런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영적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즉 생명의 신비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 자체가 우리의 인식론적 체계 안으로 간단하게 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우선적인 이유이다. 아무리 청중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친다고 하더라도,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복음 찬송을 부른다고 하더라고 그것으로 생명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는 어떤 왕도가 준비된 건 아니다. 설교자는 나름으로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영적인 소로(小路)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뿐이며, 그것이 청중들에게 전달되는지의 여부는 별개의 것이다. 아니 그가 가고 있는 그 소로는 그가 걸어간 다음에 다시 지워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대로 따라올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길을 청중들에게 알려줄 수도 없다. 다만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뒤는 생명의 영인 성령의 영역이다.
내가 설교해야 할 결정적인 ‘무엇’이 실증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혹은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남는 것은 이제 설교의 ‘어떻게’의 차원이다. 이것은 물론 설교 방법론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삶의 방법론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떤 절대적인 힘에 사로잡히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갑작스럽게 쓰나미가 발생했다. 누가 주민들을 살릴 수 있을까? 주민들에게 쓰나미의 발생 조건과 그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보다는 해일에 몸을 완전히 말길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힘을 빼게 하는 게 가장 바른 길이다. 해일을 제어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에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길 말이다. 어쩌면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을 쓰나미 방식으로 경험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훨씬 엄청난 방식으로 벌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허둥대지 말고 그것에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 곧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가르침을 그들은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결국 신앙은 태도이다. 절대적인 생명에 직면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 ‘어떻게’의 문제는 ‘무엇’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설교자는 여전히 그 하나님, 생명의 영인 성령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그칠 수 없다. 위에서 예를 든 쓰나미 현상 앞에서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해일에 완전히 의존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을 결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쓰나미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험도 곧 그런 것과 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람처럼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평소에 바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대신 나르시시즘에 걸린 사람처럼 자기에게 도취해서 살아갈 뿐이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삶에서는 결국 생명의 신비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설교자의 일은 바로 이것이다. 청중들이 평소에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도록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그 영성을 자극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그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7. 설교 결과로부터의 자유

별로 귀담아둘 만한 것을 언급하지도 못한 채 어수선하게 글쓰기를 하다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성령론적 설교를 지향하고 있다는 내 생각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됐는지 모르겠다. 잘됐건 못됐건 이것을 내 역량으로 받아들이고, 일전에 에프엠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겠다. 그 이야기는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주자들은 자기 연주가 끝난 다음에 청중들이 보내주는 열광적인 환호에서 연주자로서의 만족감을 느끼는데 반해서 미켈란젤리는 그런 청중들의 환호를 보면 화가 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환호는 자기가 받아야할 게 아니라 그 곡을 작곡한 베토벤이나 쇼팽 같은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을 구도의 차원에서 접근한 피아니스트의 전형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음악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연주회 장 안에서는 피아니스트도 없고, 쇼팽도 없고 오직 음악 자체만 전적으로 지배해야할 것이다. 설교 행위도 역시 이런 연주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설교자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성서 텍스트와 그것이 열어가는 생명의 능력만 지배하는 설교가 곧 성령론적 설교라는 말이다. 이처럼 생명의 존재론적 능력만이 온전히 지배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그 설교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내 바램이다.

<위의 글은 '신학비평' 겨울호에 실릴 졸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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