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두레교회(김회권 목사) 전교인 여름수양회, 장소: 강화도 성산예수마을
주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일시: 2006년7월22-24일

<주제 강의 1>        
평화의 존재론적 근거
마 5:1-12

아람어와 헬라어
쿠어트 알랜트 외 여러 학자들이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서(The greek New Testament)의 마태복음 5장9절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마카리오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호티 (아우토) 휘오이 테우 클레테손타이.” 이 문장의 번역을 몇 가지만 찾아보자. 개역성서는 다음과 같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공동번역: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The New Teatament on Today’s English Version: “Happy are those who work for peace; God will call them his children!” 루터번역: “Selig sind die Friedfertigen; denn sie werden Gotteskinder heißen.” 모든 번역이 큰 틀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화평, 또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게 될 테니까 행복하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헬라어 에이레네를 개역은 화평으로, 공동번역은 평화로 번역했다는 사실, 그리고 Today’s English Version은 두 번째 문장을 능동태로, 루터는 수동태로 번역했다는 사실뿐이다. 이 네 번역본 중에서 어떤 번역이 원래 헬라어 성서에 가장 가까울까 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헬라어 성서의 ‘에이레네’가 화평, 평화, 피스, 프리덴이라고 번역될 수 있을까? 더 좁혀서 에이레네와 평화는 서로 도치가 가능한 단어일까?
번역을 해본 분들은 모두 동감하는 사실이지만, 한 언어로 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작품이 자연과학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형편이 낫겠지만 인문과학이라고 한다면 더욱 힘들다. 그 이유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덱거의 경구가 가리키듯이 언어가 단순한 의사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삶과 세계가 담기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의 삶과 역사가 담겨 있는 에이레네를 그들과 전혀 다른 삶과 역사를 살아온 우리 한민족의 언어로 직접 옮겨 적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가 성서 언어인 에이레네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평화에 대한 개념을 접어두고 일단 헬라어에 담긴 개념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런 작업 없이 팔복의 일곱 번째 항목을 단순히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말씀의 상당한 부분을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왜곡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놓여 있는 또 하나의 어려움은 복음서가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는 예수님의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로 알려져 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어는 단지 구약성서를 전승한 문자로만 남아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사용되던 언어가 아니었으니까 예수님이 아람어로 대화하셨다는 건 당연하다. 복음서에 아람어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달리다굼, 아빠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헬라어 신약성서를 오리지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그건 틀린 말이다. 또한 아람어 역본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헬라어 성서를 다시 아람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조건 오리지널이라고 할 는 없다. 오늘 우리는 아람어가 헬라어로, 헬라어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를 받아들고 있는 셈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왜 처음부터 아람어로 기록하지 않고 헬라어로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복음서를 비롯해서 전체 신약성서의 독자가 바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과 아람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완전히 지역적으로 구분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한쪽 언어로만 치우쳐 있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헬라어가 신약성서의 중심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다. 그 역사를 조금 훑어보자.
초기 그리스도교의 지형을 큰 틀로 본다면 예루살렘 공동체와 헬라 공동체로 구분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일곱 집사 선정 보도에서(행 6:1-6) 알 수 있듯이 이 두 공동체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아람어를 사용하던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열 두 사도가 모두 포함된다. 막강한 지도력을 행사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언어는 사라지고 대신 헬라어가 교회의 중심 언어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경쟁에서 결국 헬라파가 승리했다는 데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물론 바울이다. 그러나 이런 지도자 몇 명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를 거쳐 로마로 이행된 것은 아니다. 이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에 이런 역사의 반전이 가능했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결국 3,4세기에 헬라 철학을 과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세계 보편적인 종교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핵심에는 어거스틴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어거스틴을 비롯한 로마 중심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언어는 이제 라틴어로 자리 이동을 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 언어는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변화한 셈이다. 어쨌든지 헬라어 중심의 바울에 의해서 유대교의 율법이 극복되었다면 이제 라틴어 중심의 어거스틴에 의해서 복음의 보편적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서의 역사성
아람어와 헬라어, 예루살렘 히브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헬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헬라 철학의 접목 같은 문제들이 오늘 우리의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위의 언급이 말하려는 핵심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성서는 한 순간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갑자기 위에서 뚝 떨어진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두고 점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런 역사적 과정을 충분히 전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라는 종교개혁의 신학적 구호를 마틴 루터가 처한 신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서 절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세 가지 신학개념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는 규범이 아니라 다른 개념과의 대립적인 관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즉 ‘오직 성경’은 로마 가톨릭이 강조하는 교회의 권위와 대립적으로 신앙과 삶의 기준이 성서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오직 믿음’은 행위와 대립적인 차원에서 칭의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며, ‘오직 은혜’는 업적과 대립적으로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신학개념에 생명을 걸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대적인 도그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언급한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했듯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절대적인 게 아니며, 본회퍼가 말했듯이 은혜는 자칫 값싼 은혜로 빠질 수도 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을 히틀러가 나치즘의 철학적 근거로 도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복합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해명되어야 할 신학개념을 견강부회 방식으로 해석할 경우에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열광주의, 또는 원리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원리주의는 성서의 문자적 절대화와 도구화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절대화하는 입장을 일반적으로 ‘축자영감론’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은 17세기의 정통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7세기 신학자들에게는 이런 논리를 펼칠 만 배경이 있었다. 로마가톨릭은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교회에 두었다. 이 교회는 곧 교황을 의미한다. 프로테스탄트는 이들과의 대립적인 의미에서 성서 해석의 권위가 교황이 아니라 성서자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축자영감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 이전에 칼빈이 말하는 성서해석의 ‘성령의 조명’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 성령 해석의 주체라는 뜻이다. 칼빈 신학의 이런 배경 없이 성령의 조명 운운하는 건 칼빈 신학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어쨌든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시작된 축자영감론을 오늘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화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신학과 성서의 역사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 하겠다.
한발 물러서서,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화한다면 최소한 그 텍스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 대개 그들은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높다. 그들은 성서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역사적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결국 성서의 존재론적 계시의 세계를 외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데 마음을 쏟는다. 종교적으로 세련되게 살기 위해서 성서에서 필요한 것들을 적당하게 취사선택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자주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복적인 도구로, 종교적 교양을 쌓아가는 도구로, 종교적 결사단체를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문자적인 절대화와 도구주의적 접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성서가 고유하게 담고 있는 그 역사로부터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단지 기도만으로, 또는 믿음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성서의 지평 앞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성서를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그리스도교가 처했던 ‘삶의 자리’가 성서 텍스트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그 자리로 뚫고 들어가야만 성서는 우리에게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성서를 은혜와 믿음으로 읽어야지 그렇게 학문적으로 읽어서 되겠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은혜와 믿음도 모든 이해의 과정을 통해서 작동하는 영적인 사건이지 단순히 열광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원래는 아람어로 선포되었을 이 말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에 어떤 역사적 무게가 담겨 있는지, 그 경구가 말하려는 게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천천히 길을 떠나자. 일종의 암호*로 그려진 보물지도를 들고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나선 탐험가들이다.

*성서를 암호라고 말하는 이유는 성서 텍스트가 계시 자체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성서 텍스트는 음악에서 악보와 비슷하다. 여기 모차르트의 악보가 있다고 하자. 이 악보가 곧 모차르트의 음악 자체는 아니다. 악보는 음악의 기호에 불과하고, 음악의 실체는 소리이다. 우리는 기호와 실체를, 즉 악보와 소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모차르트의 음악을 배우거나 그의 곡을 연주하려는 사람들은 그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가 경험한 음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 모차르트의 악보와 소리의 관계는 곧 우리 설교자들의 관심인 성서와 계시의 관계와 비슷하다. 악보가 기호이듯이 성서 텍스트는 기호이고, 소리가 실체이듯이 하나님의 계시가 실체이다. 악보라는 기호가 소리라는 실체를 담고 있듯이 성서라는 기호는 계시라는 실체를 담고 있다. 오늘의 모차르트 연주자들이 악보를 통해서 모차르트의 소리를 찾아내야 하듯이, 오늘의 설교자들은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마태의 산상수훈과 누가의 평지설교
필자는 청중들에게 어떤 평화에 관한 일들을 청소년 교양강좌처럼 구체적으로 가르치거나 그런 프로그램을 제시할 생각은 없다. 그런 일들은 그리스도교 윤리나 목회 실천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그것보다는 평화의 신학적인 의미를 풀어내는 일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평화는 인간의 능력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어떤 업적이나 교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그의 통치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 행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예수님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막 1:14) 하신 말씀도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의 없다. 그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앞에 가까이 임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요한계시록의 표상으로 말한다면 문을 두드리는 주님에게 문을 열어드리기만 하면 된다.(계 3:20)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평화가 온전히 하나님의 배타적인 통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가 그 평화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의 복은 무엇인가? 우선 팔복의 구조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의 팔복에는 여덟 종류의 복이 나열되어 있다. 여덟 항목에는 비슷한 내용이 중복되기도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는 자와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비슷하다. 또한 여기서 “복이 있나니”로 표현된 문장을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본다면 팔복이 아니라 구복(九福)이라고 해야 옳다. 11,12절을 보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헬라어 성서에서도 이 문장을 “마카리오이 에스테”로 시작한다. 다만 이 아홉 번째 복에 관한 문장은 앞의 문장이 삼인칭인데 반해서 이인칭이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팔복에서 제외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병행하고 있는 누가복음을 마태복음과 잠시 비교하자. 마태, 마가, 누가를 가리키는 공관복음서는 근원적인 자료, 예컨대 Q나 원(原)마가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는 건 성서읽기에서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누가복음 6:20-49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대비되는 평지설교이다. 양쪽 모두 복 선언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래위에 세운 집의 가르침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조이지만 양적으로 볼 때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을 훨씬 능가한다.(도표 참조) 팔복에 관한 부분만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은 넓게 보아서 네 가지 복을, 좁게 보아서 세 가지 복을 언급한다. 누가복음은 세 가지 복에 이어서 세 가지 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은 이 ‘화’를 산상수훈이 아니라 훨씬 후반부인 23:13-36절에서 다루고 있다.

<도표>
<마태>복의 조건           <마태>복의 종류           <누가>복의 조건            <누가>복의 종류
1심령의 가난                    천국(5:3)                      가난                        하나님의 나라(6:20)
2애통                              위로(5:4)                      울음                        웃음(6:21)
3온유                              땅(5:5)
4의에 주림                       배부름(5:6)                   굶주림                 배부름(6:21)
5긍휼                              긍휼(5:7)
6마음의 청결                     하나님(5:8)
7화평                               하나님의 아들(5:9)
8의를 위한 박해                 천국(5:10)
결론-나(예수)로 인한          큰 상(5:11,12)            인자(예수)로 인한    큰 상(6:22,23)
        핍박                                                         박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지상설교를 비교할 때, 그리고 양쪽의 지복(至福)선언을 비교할 때 마태가 누가의 내용을 확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공동체와 마태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가 달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 그런 신학적인 문제까지 우리가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대충의 흐름만이라도 한번 짚는 게 좋겠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편집하면서 여덟 가지 복을 제시하고 있는 마태 공동체는 12절이 묘사하고 있듯이 순교를 각오해야 할 정도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어려운 상황은 내외적으로 두 가지이다. 우선 외적인 어려움은 유대교로부터 압박이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함락된 이후에 유대교는 내적인 결속력을 다지게 되었다. 여기서 나사렛파는 경계 대상의 일 순위였다. 마태가 속한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몰릴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적인 어려움은 율법 폐기론자들의 대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마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마 5:20) 또한 누가 공동체의 세 가지 복이 마태 공동체에서 여덟 항목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일곱 번째 항목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 등장하는 세 가지 복과 비교할 때 마태 공동체의 신앙적 특성이 강조되는 대목이다. 이 에이레네는 누가복음의 세 가지 복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나머지 일곱 복에 비해서도 훨씬 역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평화
지금까지 팔복의 배경에 관한 설명이 많았는데, 이제 성서가 말하는 ‘평화’ 문제로 좀 더 깊이 발을 들여놓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르나? 평화를 주제로 하는 노래가 생각나기도 하고, 늑대와도 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영성이 깊었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또는 죽음의 집을 운영하던 마더 테레사, 떼제 공동체의 로제 수사가 생각날 수도 있다. ‘평화의 집’이라는 단체도 있고, ‘평화 콘서트’도 있고, ‘평화 방송국’도 있는 것 같다. 유엔에서 파송한 군대는 대개 평화유지군으로 불린다. 이스라엘 사람은 ‘샬롬’이라는 말로 인사를 한다. 미국에 의해서 일어난 이라크 전쟁도 명분으로는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기야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로마도 역시 평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팍스 로마나’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2천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짝퉁으로 반복된 것 같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조금 더 우리 자신에게 밀착시켜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생각이 아주 복잡해질 것이다. 대충 세 가지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깨는 사람, 그런 집단, 그런 세력이 누구인지는 대충 말할 수 있는데, 내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하는 실존적인 질문 앞에서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이런 성서의 요구 앞에서 불안을 느낀다. 둘째, 우리는 평화라는 단어와 별로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평화 문제는 주로 전쟁을 막으려는 행동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그저 일상에서 울고 웃으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별로 필요 없다고 말이다. 오늘날 평화는 우리의 삶과 관계없는 거대담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설교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회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세계 ‘교회성장’ 운동의 지도자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의 아래와 같은 진술을 들어보자.

그리스도인이 된 지 30년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왜 그렇게 듣지 못했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을 읽으면 그에 대한 말씀이 분명 많이 나온다. ... 그러나 이제껏 내가 거쳤던 목사들 가운데 실제 하나님 나라를 설교한 사람은 솔직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설교 노트를 들춰보니 나 역시 거기에 대해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Dallas Willard, 하나님의 모략, 100 쪽에서 재인용)

셋째, 어떤 사람들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보고, 이런 주제를 진부하게 생각한다. 필자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진부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화만이 아니라 기쁨, 자유, 사랑, 종말, 인내, 구원, 하나님 나라, 심판 등등, 수많은 성서 언어들이 박물관에서 구경거리로 남는 유물처럼 죽어버렸다. 심지어 예배와 기도, 성만찬마저도 이미 고정된 형식 그 이상의 의미는 상실해버렸다. 성서 언어가 죽어버리면 결국 그리스도교 영성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위기가 도덕심이 떨어진 것이나 교인 숫자의 정체라기보다는 성서 언어의 고착화, 또는 형해화(形骸化)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헌금과 예배와 선교사 파송 등등, 그리스도교 영성이 가장 역동적인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들이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동성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생명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대개 인간의 심리적 작용이거나 종교적 업적에 의한 만족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라는 언어도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서로 싸우지 않고,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곧 평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브로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성서의 평화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평화는 우리가 실현해 내야 할 어떤 인간관계와 상태를 말하는 걸까? 우리가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되어서 분쟁지역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곧 성서가 말하는 평화인가? 그래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평화라는 단어 앞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평화의 일들은 중요하지만, 평화는 우리가 그렇게 생산해낼 수 있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나 행사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평화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평화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통치함으로써 존재하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은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이 실체론적으로 어느 곳에 따로 계시면서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게 아니라 통치가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라는 뜻이다. 평화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은 곧 평화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듯이 평화는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분에게 우리의 운명을 온전히 맡기는 신뢰가 없는 한 우리는 결코 평화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화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평화와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당연히 평화를 위하여 일하게 된다.
평화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이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한 사람은 당연히 평화를 위하여 일하게 된다는 위의 설명이 대체로 이해가 가기는 하겠지만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대충 그렇겠지 하는 생각은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어렸을 때는 바나나가 귀했다. 부잣집 아이들이 아니고는 먹어보기 힘든 과일이었다. 바나나 그림만과 그 설명만 듣고 바나나 맛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자. 헬렌 켈러를 가르치던 설리번 선생은 어느 수준에서 교육의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 헬렌 켈러가 사물과 이름을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설리번 선생은 헬렌 켈러를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펌프 앞으로 데리고 갔다. 펌프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물을 헬렌 켈러가 손바닥으로 느끼게 했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에 ‘워러’라는 영어 스펠링을 손가락 언어로 알려주었다. 그 순간에 헬렌 켈러는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순간은 마치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에서 꽃을 꽃이라고 불렀을 때 꽃과 하나가 되었다는 그 순간과 비슷하다. 이런 깨우침은 단지 정보를 알아듣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근본에 대한 경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은총으로서의 평화
평화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통치와 일치할 때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은총론으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즉 우리의 노력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라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선물이 바로 평화라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평화에 대해서 바울은 꾸준하게 진술했다. 로마서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여기서 평강은 물론 평화, 에이레네를 의미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예수가 우리의 평화라는 사실을 이렇게 진술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4-17) 그 이외에도 고전 1:3, 고후 5:19, 살전 1:1, 살후 1:2, 골 1:20, 빌 1:2 등등에서 평화를 언급하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 평화는 은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이 평화를 그리스도론적인 근거에서 해명하는 롬 5:1 말씀을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하자.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바울의 진술(롬 5:1절)은 칭의가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로 가기 위한 전단계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평화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평화는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정확한 통찰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더 이상 버릴 것을 발견할 수가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라. 이것이 뜻하는 바를 깨달아 그것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한 보상이며 정당한 거래이다. 그대들이 그대들의 행동에서 얼마만큼이나 자이를 제거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그대들의 행동 속으로 많지도 적지 않게 들어오신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그것에 전념하다. 다른 것이 아닌 이런 방식에서 참된 평화는 발견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보다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선하게 되도록 하라. 그러면 그들의 길과 행위는 밝게 빛날 것이다. 그대들이 외롭다면 그대들의 행위도 의로울 것이다. 성스러움이 직업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일의 종류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소명이 아무리 “성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이 소명인 한 성스럽게 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스러운 한, 그리고 내면에 신적 존재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곧 먹고 자고 철야하는 일과 그 외의 모든 일들을 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이 하는 일을 헛되다.
그러므로 선해지는 것이, 수행되어야 할 일의 양이나 종류보다 강조되어야 함에 유의하라. 그대들의 일이 의존하고 있는 근원적인 것을 오히려 더 강조하라.(레이몬드 블레크니 엮음, 이민제 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36,37 쪽)

물론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실제적으로 다소간 평화에 참여할 수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틱낫한이나 법정 같은 불교의 영성이 나름대로 인간의 심연에 접근하고 있긴 하지만, 또한 우리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배울 게 많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길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 착하게 살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결정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이지도 않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자는 바울의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자기 절대화로부터 돌아서서 자기의 피조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만 하나님과의 평화가 가능하다. 본훼퍼의 명상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지구의 손님이다.”(Ich bin ein Gast auf Erden).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결코 우리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주제 강의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맺자. 요한복음 14:27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의 은총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묵상주제>
1. 나는 평화(에이레네)를 신앙의 화두로 삼은 적이 있나?
2. 평화가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인 이유는 무엇인가?
3. 은총으로서의 평화를 경험한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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