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성서연구, 2001.11.9.(금). 오후7:00,

대구 YMCA 중앙지부 교남실



사람다움의 시작

정용섭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로와 디모테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필립비의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보조자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공동번역, 빌립보서1:1,2).



1. 단순하게 생각하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칼 마르크스는 현대사에서 가장 탁월하게 인권을 위해서 투쟁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그의 작업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느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느니, 혹은 가난이 죄라는 말은 인간의 실존이 바로 먹고사는 데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하는데 그 당시의 노동 시장이 인간다움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창조적 행위이어야 할 노동이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자본 중심적인 사회구조가 인간과 그 노동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은 매우 정확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대하고 확신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결코 사람다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습니다. 왜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말았을까요? 저는 여기서 이런 사회 과학에 대해서 논의해보자는 게 아니라 그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들을 챙겨보자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해석과 그 대안이 별로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레닌과 스탈린, 혹은 모택동 등을 거치면서 지나치게 이념화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면 그들이 매우 인간적이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저는 노동해방이든지, 여성해방이든지, 이런 저런 인권운동이 어떤 교조적인 이념으로 고착화되는 것보다는 좀더 단순화되어야만 정말 생명이 살아 숨쉬는 운동으로 발전, 심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곧 사람다움의 시작이 무엇이냐 하는 기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권을 말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이념적 투쟁이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사실은 간단한 문제지요. 이런 인권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문제는 이렇게 간단합니다. 간단하게 보아야 그 길이 열립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먹고살다가 죽어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구도를 원활하게 만드는 게 바로 정치이며 문학이며 예술의 사명입니다. 이현주 목사는 최근에 낸 시집 "그러니까 뭐냐하면"(?)에서 이런 말을 했다지요? 똥을 누면서 생각하기를, 인간은 두 개의 구멍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로구나. 위에 난 구멍으로는 무언가를 먹고, 아래로 난 구멍으로는 똥을 싸며 살아가는구나. 모든 사람들이 마음 편히 이렇게 먹고 싸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인권이 살아있는 세계가 아닐까요? 어떤 면에서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소화 장애가 많고 변비와 치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인권이 상실된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회가 인간의 삶에서 최소한 이런 조건들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조건들을 너무 지나쳐서 생각하기 때문에 거의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그저 자기 혼자 가벼운 마음으로 유유자적하면서 살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회 구조의 병리적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내고 치유해나갈 수 있는 운동을 해야합니다만, 그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욕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좀더 정확하게 직관해낼 수 있는 자세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오늘 말하는 인권이라는 것도 역시 어떤 프로그램이나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존재론적 각성, 혹은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메타노이아>(회심)으로 시작해야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런 인권과 삶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간 행위의 한계로 인해서 벌어질 수 있는 과오를 막아보자는 일종의 안전 장치이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가 겉으로 바라보는 인권이라는 게 늘 정확한 게 아니며, 또 한편으로는 때로 상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북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를 어느 정도나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까? 또는 회교권의 여성 인권을 우리가 어떻게 재단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예가 극단적이긴 합니다만 이런 예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와 생각이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고상한 이념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절대화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삶에 대한 단순한 직관에 근거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2. 섬김의 질서와 군림의 질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기원 후 50년대 초반은 로마의 질서가 지중해 연안에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용맹스러운 로마 군을 통해서 많은 곳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피정복지에서 많은 이들을 포로로 끌고 와서 노예로 삼았습니다. 사실 로마는 노예의 노동에 의해서 그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예를 다스림으로써 자신들의 품위를 지켜낼 수 있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두 번 로마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도 로마 시에는 2천년 전의 건축, 미술품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현재와 같은 철근 콘크리트도 없이 순전히 기하학적인 기술로 콜로세움을 건축할 수 있었다는 건 그 시대의 문명 정도에 대한 적나라한 예증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건축과 도로가 거의 노예들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한쪽의 무한정한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문명의 꽃을 피운 셈입니다. 그게 로마의 힘이며, 오늘도 역시 그런 군림하는 질서는 여전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그 당시를 일방적으로 재단해버릴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지 로마 시대의 노예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청교도들로 시작한 미국이 인디언들을 강압적으로 밀어내고,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부리면서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권의 파손은 이렇게 군림하는 힘의 질서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인권, 즉 사람다움이 상실됩니다. 이 문제는 2천년 전 로마나 2백년 전 미국만이 아니라 가장 진보된 문명 사회라 할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권의 사각 지대를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처지에 빠졌습니까? 오늘 우리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왜곡된 힘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만이 살길이다, 따라서 경쟁만을 최고의 사회 가치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 당연히 일부분에서는 사람다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컨대 장애인을 몇 퍼센트 이상 고용해야한다는 의무조항이 실정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이 법을 지키는 기업은 거의 없습니다. 벌금을 낼지언정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생각과 태도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파렴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 중심적 가치관에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애인들의 사람다움을 지켜낼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불법 외국 노동자, 미혼모, 동성애자, 양심수 등이 모든 그렇습니다. 군림의 질서는 늘 그렇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입니다. 노예를 부리는 군림의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의 질서, 즉 섬김의 질서를 택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가르침에 근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가 표방하는 힘의 질서나 유대교가 내세우는 엄격한 (율)법의 질서는 한결 같이 이념적입니다만 종의 질서는 생명 지향적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군림하는 힘이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섬기는 사랑이 강합니다. 기독교의 출발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로마와 유대교의 틈바구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종의 질서를 바탕에 두고 말입니다. 약간 여담입니다만, 교회 안에서 "주의 종"이라는 말은 교회 지도자의 특권을 내세우는 상투어로 변했습니다. 주의 종을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거나, 주의 종을 노엽게 하지 말자는 말은 도대체가 바울이 말하는 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원한다면 몇 가지 제도를 개혁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삶의 바탕 자체를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곧 하나님 나라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종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람다운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거 너무 낭만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렇게 나이브하게 접근하니까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 아니냐, 좀더 사회 과학적인 방식으로 분석하고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필요한 작업은 해야지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사는가하는 점이 핵심이지요. 그렇지 못할 때 자칫하면 인권운동은 또 하나의 이념투쟁으로, 혹은 개량주의(?)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통합적인 사람다움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섬김이라는 종의 질서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자기 집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적 태도를 갖게 될 수 있으며, 또는 반생태학적 시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이는 흡사 예수를 잘 믿지만 세상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서는 둔감한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다움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삶의 자세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의식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그게 회심(메타노이아)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인권 운동은 근본적으로 군림의 질서가 아니라 섬김의 질서에 따라 살겠다는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그런 게 아닐까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것이 곧 인간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판단 때문에 예수가 자진해서 선택한 결과는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나라에만 자신의 운명을 위탁한 인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온전히 회복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시작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계를 지향해야하는가 라는 점을 규정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힘과 군림의 질서를 상징하는 십자가에 의해 죽은 예수의 삶을 뒤따른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섬김의 질서가 온전히 사람다움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입니다.



3. 사람다움을 위한 은총과 평화



바울은 빌립보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축원의 인사를 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저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의 세계관이며 신앙이 담겨 있는 용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본질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은총

일반적으로 "은총"(카리스)은 하나님이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은사"(카리스마)라는 단어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는 게 아니라 개인에 따라서 특별하게 베풀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원과 영생은 은총이지만 예술적 기능과 지적인 능력은 은사입니다. 어쨌든지 바울이 여기서 다시 한번 역설하고 있는 이 은총은 기독교인들이 인생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되새겨 살펴야만 할 용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서두에 이 용어를 통해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총은 어떤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타당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삶에 해당됩니다. 물론 종교라는 게 인간의 삶을 그 바탕에 놓고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은, 그게 진리를 향하고 있기만 하다면, 늘 보편적인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생산해 내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명확합니다. 땅과 하늘과 공기와 물, 태양과 달과 별은 우리 인간의 생존 조건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인데, 그냥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능력이 무한할 것 같지만 실상은 별 게 아닙니다. 이 문명의 힘이라는 게 매우 취약합니다. 인간의 기술에 의해서 가상 공간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는 하루살이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저 생명을 변형하는 기술만 갖고 있을 뿐이죠. 인간이 생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그저 선물로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기쁨 같은 것들도 사실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그냥 주어지는 것이지 돈으로 매매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순전히 하나님(혹은 자연)의 은혜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인간 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는 모든 삶의 조건들을 값으로 매깁니다. 인간의 능력과 품위마저 돈으로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은총으로 생각할 수 있나요? 모든 게 자기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마당에 누구에게 감사할 마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능력만큼 세상을 이용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이 일종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도구주의가 바로 근대주의가 생산해낸 가치관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 인간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질서에서는 경쟁력이 높은 사람만 살아남게 됩니다. 이 나라의 교육 풍토를 생각해볼까요? 어떤 면에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은 인권이라는 점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집단입니다. 생명의 에너지가 가장 역동적으로 흘러 넘쳐야 할 청소년들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와 학원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문학이나 예술에 심취해야하고, 여행도 해야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과 세계를 풍부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경쟁은 성인이 되어서 사회에 들어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데 우리의 청소년들은 너무 일찍 그런 경쟁 질서에 빠져듭니다. 사람다운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 청소년들은 인권을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느 한 두 사람이 대오각성해서 자기 식대로 살아가겠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치관에 달린 문제입니다. 삶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서로가 유일회적인 생명을 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은총의 의미를 가열 차게 확대시켜나가야 합니다.  



2) 평화

   바울은 은총에 이어서 평화(에이레네, 샬롬)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인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갈라디아서, 에베소 등에서 은총과 평화의 인사를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이런 인사법이 바울의 편지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역사와 연관됩니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제국들과 더불어서 그들은 한 순간도 평안할 날이 없이 지냈습니다. 고도의 문명을 일구어낸 제국일수록 훨씬 호전적이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면서 로마 문명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원래 "작은 우물"이라는 뜻의 "크레니데스"로 불리웠는데, 기원전 356년 빌립 대왕이 이 마을을 정복하고 자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빌립보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으며,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동서 문화의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유럽의 첫 선교 지역으로 이 빌립보를 택하게 된 이유가 이런 데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두고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나(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바로 위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평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강압적인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 약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평화가 하나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상생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평화가 다른 하나입니다. 바울은 외면상 로마의 힘이 빌립보의 체제와 질서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으로는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일까요? 오늘의 실정법은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보장해주고 있습니까? 노동법이?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양심수를 감옥에 가두고 있는 이 법들이 평화를 지향합니까? 노점상을 강제로 밀어내는 행위, 불법 건축물이나 재건축을 위한 세입자 강제 철거 같은 것들이 평화 지향적입니까? 물론 사회의 기초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강제적인 힘이 행사될 필요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경험하는 이 문명 사회의 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로마가 보장하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평화가 아니라면 이 세계에 사람다운 질서를 정착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자기의 힘을 강화하는 억압된 질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살려내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세계와 이웃을 바라볼 때만 사람다운 세계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투쟁해 나갈 수 있습니다.  



4. 휴매니즘과 기독교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좀더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결론 삼아 정리할까 합니다. 도대체 인권과 기독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점이 그것입니다. 원래 인권이라는 말은 무언가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지켜내려는 일련의 노력에 의해서 자리를 잡았던 용어입니다. 중세기 때야 어디 인권이다 뭐다 있었겠습니까? 교황과 황제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이제 인간 개체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아마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 명제로 인해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만물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그 뒤로 많은 철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의 생각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니체는 이런 점에서 탁월합니다. 그가 볼 때 기독교는 이 땅의 삶을 가볍게 여기고 초월적인 저 세상만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또한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무지하고 위선적이었습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찾지 않고 그저 자신의 고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초월적인 기독교는 그야말로 아편과 같았습니다. 이제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신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죽어야 인간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서 휴매니즘이 활짝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무신론적인 경향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며, 어떤 면에서 기독교의 자업자득입니다.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그저 교회 문제만을 최상으로 생각하다보니, 또한 차안의 문제는 등한히 하고 피안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다보니 결국 세계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휴매니즘은 정말 반기독교적이어야 합니까? 기독교는 인간다움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 단체입니까?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인간미가 없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휴매니즘과 기독교는 무언가 차원을 달리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만 제기하려고 합니다.

첫째, 반종교적 휴매니즘이 정말 사람의 사람다움을 온전하게 담보합니까?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한 공산주의를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인간학적으로 생각한 수많은 철학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사회혁명은 그것이 달성되면 다시 반동으로 돌아갑니다.

둘째, 기독교의 본질은 가장 철저하게 사람의 사람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삭개오를 친구처럼 대한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점에서 "천국이 가까이 이르렀으니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혁명이며, 여기서 자신과 이웃의 인간다움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 해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옳게 해석했다면 이것은 곧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이로써 확보된 인간의 휴매니티에 대한 신뢰다. ... 죄에 대한 고백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그것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현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의 죄의식은 자기 부정이거나 반생명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왜곡 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위의 강연은 <지성인을 위한 성서 연구, 빌립보서> 중에서 일부를 기초로 해서 재작성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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