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지적 글쓰기와 설교문제







1. 탈식민지적 글쓰기 문제



인문학에서는 이 <식민지성> 문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상당히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오늘의 지식인들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거나 글쓰기를 하지 못하고 외국, 소위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의 학문적 방법론에 치우침으로써 앎과 삶이, 즉 지식과 실천이 철저하게 이원화 되어 있다는 데에 놓여 있다. 결과적으로 인문학은 학계나 사회에서 거의 무용지물이나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당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이 처한 위치를 살짝 들어야 보기만 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개의 대학교에서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강의는 별볼일 없는 반면에 토익이나 컴퓨터 같은 강의는 만원사례다. 지금도 철학개론을 교양 필수과목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학교가 대한민국 어디엔가 있기는 하겠지만 아마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상을 단지 급변하는 이 시대정신의 탓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인문학자들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보려는 시도가 바로 이 <탈식민지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직접 당사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문외한이기도 한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의 정신 사회적 현상에 대한 그들의 통찰이 정확하다는 점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인문학적 지식인 집단에 속하는 목사의 설교도 역시 이런 정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때문에 그들의 문제제기에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속을 들여야 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선생들의 학문적 성과를 지식 자랑하듯, 또는 상품 소개하듯 우리의 삶과  무관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인문학의 역할을 끝냄으로서 한국의 인문학이 공소한 논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는 지적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적실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이 근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소위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게 또 하나의 일방성이나 부분성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으며, 더구나 이 세계와 인간은 그 인간이 예상하는 것을 뛰어넘는(초월적으로) 어떤 힘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작동하는 힘을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 영이 인간 이해에서 훨씬 실질적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의 이러한 인간 중심적 노력이 그것 자체로만 끝나지 말고 종교적 차원과 접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철(인문)학과 신학의 관계설정에 대한 문제는 오늘 강의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우선 탈식민지성을 주체적인 글쓰기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전주의 한일장신대학교 철학과 김영민선생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가자.



다시 정리해두자: 이 글의 중심에 자리잡은 개념, '인문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세상'을 만들려는 정신이며, 삶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가는 사람의 무늬(人文), 그리고 묘(妙)의 지극함을 존중하려는 태도다.  ...중략...  아울러 그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기술패권주의의 그늘에서 제대로 피지 못했던 정신의 꽃을 다시 가꾸는 정신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이 땅,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의 정신은 삶의 터와 역사에 충실해서 생각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기르고 사대(事大)의 눈치와 추수(追隨)의 허위의식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우리 현실과 우리 언어의 괴리를 메우려는 용기와 지략이며, 삶과 앎 사이의 소통과 공조를 구체화하려는 말하기와 글쓰기인 것이다. (김영민, 진리.일리.무리, 31.).



위의 인용된 글을 따라 읽다보면 언어의 수사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지 인문정신의 개념을 정확하게 요약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간추려진다. 사람의 무늬와 그 신비함. 앎과 삶의 연속적인 연관. 올바른 합리주의정신. 자생적, 주체적 사유와 글쓰기. 이것을 다시 줄여보면, 인문정신이란 인간 삶을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식민지적 글쓰기는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나마 약간의 흔적이라는 것도 여전히 비주체적으로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문정신과 동떨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인문학자들은 외국에 나가서 혼신을 기울여 공부한 내용들을 그대로, 또는 적당하게 가공해서 서양과는 전혀 다른 삶의 정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오늘 한국의 지성인들은 헤겔, 니체, 푸코, 데리다, 하버마스 같은 이들의 사유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도록 강요받는 셈이다. 이들 거장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에서 생각한 것을 우리의 자리에서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인문정신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악공부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의 음악대학에서는 서양음악과 국악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데, 두 음악 세계의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의 한계나 함정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즉 성악과 교수들이 하는 일이란 단지 서양음악의 대가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했지 그것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이 못되었다는 말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결국은 소리를 통해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보자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정서와 삶의 경험에서 어떤 소리가 그런 미학적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그 대답이 주어진다. 아직 대답이 없다면 그것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남도창과 이탈리아의 아리아를 적절히 혼합해서 당장 써먹을 수 있도록 새롭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 행위를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기본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김영민 선생이 외에도, 이 문제를 여성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대표적인 학자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조(한)혜정 선생이고, 동양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학자는 부산 경성대학교 신학과 김승철 선생이다. 이들의 접근 방식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주체적 사유와 책읽기, 글쓰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식민지성> 문제는 우리가 일제 하에서 한 세대 이상 피식민지 생활을 했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표면상 피식민지 상황이 끝난 이후로도 그런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이들이 이 사회를 견인해 나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제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이룬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비주체적인 상태에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만해도 그렇다. 최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치사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정부와 일반 대중은 무의식적으로 미국에 의존적이다. 1,2백년이 지난 다음 우리의 후손들은 미군 주둔문제를 부끄럽게 평가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런 정치, 사회적인 식민지성 문제는 우리의 삶 전반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사회학적 현상을 이용하고 있는 정치집단과 기업집단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진리에 충실해야 할 인문학자들 마저 자신도 모른 사이에 이런 식민지성에 물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화뇌동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식민지성에 근거한 권위주의와 허위의식에 안주하면서 자기의 학문적 재주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가 아직은 어두운 시절이지만, 그나마 이런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고 새로운(주체적) 글쓰기와 말하기의 장을 열어가는 일단의 인문학자들이 있다는 게 다행한 일이다. 이런 정도의 인문학적 상황을 말머리로 삼아 이제 우리의 문제로 넘어가자.  



2. 설교(목회)의 식민지성 문제



요즘은 기독교 신문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아서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지난 8,90년대에는 미국의 유명한 모모 교회를 탐방할테니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광고가 신문에 자주 실렸다. 한번 다녀오는데 수백만원이 들고, 나간 참에 관광과 물건구입을 하느라 더 많은 돈이 드는데도 적지 않는 목사들이 앞다투어 이런 이벤트성 행사에 참가했다. 이 비용도 자기 돈이 아니라 대개는 교회의 헌금으로 충당했겠지만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신학대학의 분교형식으로 학위를 주는 프로그램도 거의 유행처럼 우리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다. 대개는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여름과 겨울, 몇 주일씩 현지에 가서 공부하는 것으로, 또는 현지 대형교회를 탐방하는 것으로 과정을 끝내고 대충 논문을 쓰면 학위를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이런 미국 교회 탐방이나 성지순례, 또는 무슨무슨 분교 따위의 학위 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행위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또한 반드시 권위있는 학위과정만 절대적이라는 뜻도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런 전반적인 행태가 거의 우리의 의식,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식민지적 사유에서 토대를 두고있다는 점이다. 외적인 힘을 가진 나라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판단하는 삶의 유형을 식민지성이라고 한다면 한국 목회자의 의식은 바로 여기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교회 문제 안으로 들어와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찬송가 문제가 그것이다. 558장에 이르는 우리의 찬송가에 수록된 찬송은, 독일 곡도 약간은 있지만, 거의 18,19세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 역사 1백년이 훨씬 넘었고 남한의 기독교인 수만 1천만 명이라고 하는 한국 교회가 여전히 이 삼백년 전의 영국과 미국 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정서적 기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예술적인 품격이 있다면 아직 우리의 준비가 없는 탓으로 자책하면서, 또는 예술의 범세계성이라는 허울을 방패막이로 삼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기독교 신앙을 일종의 개인적인 감상주의나 탈역사주의라는 한계 안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바로 우리 신앙의 병적인(식민지적)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직접 설교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 식민지적 현상을 생각해보자. 지난 여름에 서울의 중대형 교회에서 시무하는 친구 목사들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설교자들을 언급하면서 그중에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도 포함되었다. 직접 그분의 설교를 들은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일단 그분의 설교집을 한 편 읽는 게 그래도 한국 강단을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되어서 두란노에서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라는 설교집을 빌려왔다. 그 내용은 접어놓고 우선 그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특징을 발견했다. 옥한흠 목사가 인용하는 예화나 인물들이 거의 외국의 상황에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엘에이, 워싱톤에서 벌어졌던 일들, 외국 철학자들의 말들을 너무나 자주 인용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의 진면모"(목?)이라는 첫 번 설교에 쇼펜아우어, 스펄전, 마르셀이 등장한다. 왜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없이 단지 그들의 그럴듯한 경구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했다. "성도의 제사장"이라는 세 번째 설교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이야기가 무려 세 군데나 인용되었다. 15편의 설교가 모두 이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가 이렇다. 내가 언젠가 짧은 시간 들여다본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도 역시 미국 예화가 즐비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미국의 가치가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도 이런 점에서는 떳떳하지 못하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웬 영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지 모른다. 대학 강단에서도 가능한대로 우리 말을 바르게 사용하는 게 바람직한데 설교 중에 영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어딘가 고장나도 한참이나 고장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이 자리에서 몇 설교자들의 설교를 공연히 트집잡으려는 것은 아니다(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트집잡는 일이 재미가 있긴 하지만). 단지 많은 젊은 후배 목사들이 따라가고 싶어하는 그런 분들의 설교에 내면화 되어있는 그런 의식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우리의 목회와 설교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 암호라는 점에서 한번 짚어본 것 뿐이다.



지난 9월25일 저녁에 미국 대사관의  홍보 참사관이 대구 지역 목사 몇몇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가졌다. 이런 간담회라는 게 늘 형식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지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분의 얼굴을 생각해서 참석했었다. 그 참사관이 하는 말이 미국인들은 남한을 자기들의 고귀한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한 나라로 본다고 한다. 즉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현한 나라가 바로 남한이라는 것이다. 그가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의 기독교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성장했다는 점도 역시 미국인들이 한국을 보는 시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이들의 평가가 얼마나 사실에 접근해 있는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다만 남한은 미국의 가치를 열심히 따라온, 그래서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성취한 나라로 여긴다는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남한은 미국이라는 선생이 잘 키운 수제자라는 말이다. 그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우리도 그런 생각에 물들어 있다. 특히 기독교는 거의 일방적으로 이런 미국 편향적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어떤 분은 그 참사관에게 미국 비자 좀 잘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위에서 설교와 목회에 드러난 식민지성의 몇 가지 사소한 예를 들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작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내면에 숨어 있는 문제를 짚어보는 게 훨씬 바람직 하다. 그 문제의 핵심은 곧 인간 삶을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소위 선진국의 문화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가 공소성(空疎性)에 빠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개의 설교가 일종의 종교적인 잔소리나 여담일 뿐이지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회심(메타노이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방향 전환)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설교의 공소성은 두 가지 극단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리의 설교는 가현설적 성격이 지나치게 강하다. 설교의 가현설적 성격에 대한 문제는 이미 헬무트 틸리케가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명쾌하게 해명해 준 바 있는데, 이런 현상은 우리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는 훨씬 노골적이다. 헬라의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 가현설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한다. 영과 육, 선과 악, 빛과 어두움 등등. 이 세상에 이런 대립적인 요소들이 없진 않지만 늘 그런 식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이런 부분적인 현상에 휩싸이지 않고 그 모든 근원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설교가 세계, 인간, 역사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가운데서 진행된다. 예를 들어서 옥한음목사의 설교 "성도의 제사장직"의 결론 부분을 한번 발췌해보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함부로 땅에 굴리지 마십시오. 죄와 타협하지 마시고,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추종하지 마십시오. 대궐같은 집에 초대받아 가 보면 의외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은 말할 수 없이 황폐한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작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생활을 했다면, 그 사람의 제사장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보이겠습니까?(54).



이 설교는 참으로 좋은 말들로 채워졌지만 너무나 추상적이며, 동시에 이원론적 세계 이해에 머물러 있다. 물론 옥목사는 앞부분에서 제사장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설명 조차도 여전히 가현설적이라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예컨대 제사장답게 사는 것은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아주 당연한 공자 말씀처럼 하고 있지만 거기서 생각하는 죄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예를 들 듯이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다가 예수 믿고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결국 나이트 클럽이 망하게 되었고, 그래도 영적으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제사장다운 삶일까? 그가 생각하는 죄는 세상을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죄악시하는 청교도적인 차원에서 한걸음도 더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죄 이해는 아주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공허하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그리고 이 사회 내에 교묘한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죄의 뿌리를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에서 잡아내지 못하고 단지 개인적인, 사회적인 부도덕성에만 집중하고 있다. 약간이라도 생각이 있는 회중이라고 한다면 이런 설교에서 흡사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인 빌리 그레함의 설교를 다시 듣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다른 한편으로 설교가 지나치게 값싼 실용성에만 머물러 있다. 설교의 가현설적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화 시켜버렸다면 이 실용주의적 성격은 신앙을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도구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공소성에 빠지고 말았다. 일종의 인간중심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화가 바로 우리의 신앙과 설교의 특징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괜찮다고 이름난 설교를 약간만 들여다보면 아주 확연하게 드러난다. 금년 10월호 <기독교 사상>의 "내가 추천하는 이 한편의 설교"에 실린 이재철(前주님의 교회)목사의 설교 "하나님께로부터"에 나오는 결론 부분은 이렇다.

한 가정 주부가 쓴 아름다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이들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귀하고 복된 삶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만, 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딸꾹질을 멎게 해주십시오. 아이가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 트림 잘 나오게 해주십시오. 토하면 어떡해요. 하나님, 변을 본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빨리 변을 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소화가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조금씩만 먹는데 소화까지 잘 안 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지금 손톱을 깎아줍니다. 이 작고 여린 손가락, 다치거나 피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코가 막혔습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뚫어주세요." 정말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 주부는 아이의 트림 속에서, 아이의 딸꾹질 속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이처럼 매사에 하나님을 뵙고 느끼며 사는 이분의 매일이 새날이 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107).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된다는 그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또한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만,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도구화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설교를 신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도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미 이목사는 이 설교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시간은 인생이고 인생은 곧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객체가 되느냐 아니면 주체가 되느냐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1994년을 정녕 새해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변함없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다가오는 새해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경우 흐름의 주체가 된 1994년은 또다시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1994년 속으로 뛰어드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흐름의 주체가 된 나는 객체인 시간을 새 시간, 새해로 가꿀 수가 있습니다.(100).



이 얼마나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인 생각인가? 이목사는 서양근대주의의 <주객도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주권인 시간마저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만만한 인생을 구가할 수 있다고 부추겨주니까 은혜를 많이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고 진작에 어떤 의도를 포기하고 <솔라 그라티아>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설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은 우리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소위 <아이 켄 두 잇> 이념을 기독교 신앙으로 변호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의식 속에는 인간중심주의, 업적주의, 자기만족주의가 가득 차 있다. 이런 설교는 비록 종교적인 단어를 나열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성취해야할 도덕성, 사회봉사, 능력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세속적이다. 신앙 마저도 자기 능력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약간 세련되었다는 교회의 설교도 역시 초등학교 교장의 훈계나 아니면 대학 선생의 주부교양강좌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주의가 이성을 도구적으로 여겼듯이 우리는 여전히 이 신앙을 통해 이 세상에서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서로 대립적인 이 두 요소가, 즉 이원론적인 가현설과 도구적 실용주의가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는 교묘하게 착종되어 있다. 열광주의적 소종파처럼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어떤 피안적 구원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독교인들이 훨씬 이 세속의 차안적 구원에 매몰되어 있다. 영적인 면에서는 관념적이고 실제 삶에서는 세속적이라는 말이 된다. 이 세속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물질이나 사회적 입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사회봉사와 도덕성의 강조라 하더라도 결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니까 결국은 세속적인 가치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요소가 식민지적 사유의 근거에서 배태되었다고 보는 까닭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강한 세력의 구도에 치우침으로써 이런 가현설적 설교와 실용주의적 설교로 흘러들었다는 데에 있다. 만약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안다면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거룩한 삶, 영생을 거들먹 거리거나 이 세상의 죄와 짝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자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영합하도록 설교하지는 않을 것이다.



3. 식민지적 설교(신앙)의 역사적 토양



황석영 씨가 작년에 펴낸 장편 소설 <손님>은 6.25 당시 북한 어느(황해도?) 마을의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원수들처럼 싸우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앞장을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황석영의 눈에는 이 두 집단이 모두 손님이었다. 그는 이들 손님 때문에 주인들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그 역사적 비극을 현실과 초현실의 교차방식을 통해서 찬찬히 그려냈다. 황석영이 말하려는 바는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또는 공산주의를 긍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양측 모두 우리에게 손님일뿐인데도 우리가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주인이 주체적이어야만 손님들도 손님으로서의 주제 파악이 되고 주인과 손님의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이런 자리매김이 불충분하거나 아니면 왜곡된 셈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의 행태와 설교 안에 이런 비주체적 식민지성이 뿌리박게 된 역사적 실마리를 몇 대목만 간추려보자.



1) 근본주의 선교사

기독교를 한국에 전파한 선교사들이 대개 미국의 근본주의 노선에 속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 기독교의 태생적 한계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선교사는 단지 복음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문화를 이식하기 때문에 이들 근본주의 경향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우리 한국 기독교는 미국 문화의 못자리가 되었다. 조금 더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그 당시 선교사들은 열강의 식민지배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17,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중남미에서 식민지를 개척해나갈 때 로마 교황의 이름도 한몫 단단히 한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선교만 보장된다면 그 피식민지 문화가 파괴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오히려 선교라로 보았다.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이 모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개는 미개한 나라를 미국식으로 계몽시키는 것이 바로 선교의 열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 덕분에 서양 의료기관이나 교육기관이 생긴 것까지는 좋지만 우리의 모든 가치관 마저 거의 사대주의적 식민지성을 면치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계몽이 다른 한편으로는 미몽의 덫으로 작용한 셈이다.



2) 미국 유학파

그런데 이들 미국 선교의 근본주의적 성격은 그들이 활동하던 한 시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온 우리의 1, 2세대 유학파 신학자와 목사들에 의해서 지속되고 고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신학교와 교회에서 부지불식간에 미국의 정신과 가치관을 이식시켰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몇몇 교수들에게서 신학을 배운 기억이 있다. 정 아무개 교수는 성품이 원만한 분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존경할만 했지만 가르치는 내용은 형편 없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필기했던 내용을 적당하게 번역해서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우리에게 받아적게 했다. 우리는 그가 불러주는 조직신학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베껴쓸 뿐이었다. 또 다른 조 아무개 교수는 박사학위를 획득했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받아적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천편일률이었다. 1970년대에 공부하는 신학생들에게 18,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신학을 아무런 해석학적 작업도 없이 일방적으로 강의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 세계, 하나님을 폭넓게 배운 게 아니라 형해화된 교리의 체계만, 그것도 매우 개인주의적인 교리만 배우고 말았다.



이미 70년대부터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큰 물결을 일으켰던 CCC의 <사영리>나 <순모임>, 그 뒤로도 이런저런 성서연구 단체의 <제자훈련>과 <큐티> 방식들이 오늘도 한국 교회에서 모범적인 신앙 교육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런 흐름들이 단순히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성격의 특징이 근본주의의 속성이라 할 성서 문자주의와 탈역사적 경건주의 및 성속이원론적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거의 십자군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런 흐름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한국이라는 사회로부터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게토화되고 있다. 교회라는 아주 특별한 조직 안에서만 인정될 뿐이지 교회 밖에서는 그 어떤 구원론적 타당성을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는 다시 신앙을 주체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3) 교회 외적 요소- 7,80년대 군사독재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7,80년대의 군사 독재 시대가 한국의 기독교로 하여금 위에서 언급한 식민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그 당시 이 사회가 안고 있던 그 숱한 문제들을, 즉 민주화, 경제정의, 생태문제, 남북분단체제, 미군문제를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게될 경우에 직접적으로는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서 사찰을 받게 되며, 간접적으로는 교인들의 냉담한 반응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당연히 우리 사회와 민족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또는 교회는 세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설교하는 게 편했다. 이렇듯 편한 설교에 기울어지게 되면 결국 우리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던 미국의 사고방식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말이지만 드러내놓고 친일, 부일한 사람만이 아니라 사실은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곧 식민지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오늘도 소위 박정희 개발독재론이 통하는 걸 보면 식민지성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닌 것 같다. 흡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도 종종 애굽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었듯이 말이다.  



4) 신학의 부재

아무리 우리의 뿌리가 미국의 부흥운동이나 복음운동의 근본주의 선교사들에게 있다거나, 7,80년대라는 독재시대를 거쳐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기만 했더라면 그런 숙명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인해서 한국 교회에는 신학이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전도된 흐름을 바로잡지 못했다.

특히 설교(목회)는 기독교의 근본을 해명해주는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교회 발전이라는 단 한 가지의 목표로 집중되었다. 흡사 기업가가 그 어떤 수단 가리지 않고 기업의 외연을 확장시키려는 것처럼 교회의 설교가 이런 상품논리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신학적 반성 없는 설교는 당연히 미국이 표방하는 힘의 논리에 영합할 수 밖에 없었다.  



4. 탈식민지적 설교

-주체적으로 설교하기-



주체적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일체의 서양 사상이나 신학을 배제하고 순전히 우리의 전통에서만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 아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그런 순수한 것은 없으며, 그런 순수만 참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배타적이거나 독단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포괄적이며 진리론적이며, 보편적인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적인(한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의 적절한 조화를 찾아보자는 것도 아니다. 이미 우리 설교자는 남도창이 아니라 리트나 아리아를 배운 성악가와 비슷하기 때문에 오히려 서양사상에 더욱 익숙하며, 그런 방식에서 훨씬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체적인 설교는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말하는 그 근본을 바르게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1) 성서의 고유한 세계 바르게 알기

우선 하나의 예를 드는 것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자. 여기 이창호와 조훈현이 둔 기보(棋譜)가 있다고 하자. 이 기보에는 가로 세로 19줄이 그려진 바둑판에 1번부터 일련의 번호가 메겨진 흑백의 돌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바둑을 전혀 둘줄 모르는 사람이 이 기보를 대한다면 아무 내용이 없는 어수선한 그림만 보이겠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둑의 길이 대충 보이며, 이창호에 버금가는 실력자라면 온갖 묘한 길들이 훤히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보는 자기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다. 일종의 기보와 비슷한 성서에서 길(道)인 하나님을 읽으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깊이가 있어야만 한다. 바둑 9급짜리에게 이창호의 바둑이 보이지 않듯이 성서의 세계가 그냥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바둑을 잘 모르거나 실력이 별로 없는 사람에게 이창호의 바둑을 해설하라고 한다면 바둑 자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겉으로 나타난 모습만 스케치하듯 설명하고 말 듯이, 우리 설교자들도 대개는 성서의 세계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못하고 단지 주변적인 문제만 두루뭉실하게 언급하고 만다. 성서 세계의 정곡을 찌르지 (않)못하고 변죽만 울린다.

다시 옥한흠목사의 설교를 예를 들어보자. 그는 그 설교집의 표제로 삼은 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존심>(행26:19-29)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존심을 가져야 할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세상의 부귀 영화는 헛되다. 둘째,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내세에서 영원히 누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구조에다가 자신의 경험담이나 예화집에서 베낀듯한 내용을 적당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렇듯 아주 상투적인 설교를 그는 자기 설교집의 표제로 삼고 있는데, 이런 설교는 아주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성서의 고유한 세계(계시)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주변적 상황에 대한 교훈이며 해설일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인간적 처세술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는 아니다. 흡사 바둑의 깊이가 없는 사람이 기보를 해설하면서 이창호의 깊은 수읽기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저 "기발한 수군요", "침착한 수군요"만 목청 높혀 외치는 것과 같다. 영생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설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가? 아! 구원 자체를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구원받으라고 떠드는 설교가 얼마나 흔한가. 바둑의 정석과 변형과 기사 나름의 독특한 길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해설은 아무리 감동적인 말을 늘어놓아도 바른 해설이 아닌 것처럼 성서의 세계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설교는 아무리 뛰어난 수사학을 발휘한다고 해도 결국 교언영색에 불과할 뿐이다.  

성서의 세계가 아무에게나 저절로 보이는 게 아닌 이유는 기보에 바둑의 길이 숨어있듯이 성서의 세계 안에 하나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은폐의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과 그 생명이 늘 은폐되어 있기만 할 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다. 은폐와 계시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다. 계시가 은폐의 형식이기도 하고, 은폐가 계시의 내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에서 하나님의 은폐를 보고, 그 은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기도 한다. 예컨대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은폐의 형식을 띈다. 역사적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모두에게 확연하게 인식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인식된다는 말이다. 만약 확연하게 인식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예컨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그의 메시야성이 은폐의 방식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만약 예수가 메시야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왔는데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불행이 끝나지 않았으며 평화가 여전히 정착되지 않았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집어넣으면 죽는다. 그렇다면 예수의 메시야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이들의 문제 제기 앞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대답은 예수의 메시야성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다고,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다.

미켈란젤로가 어느날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대리석 덩어리 하나를 내다버렸다. 그것을 본 미켈란젤로가 "왜 버리시는가?"하고 물었다. 그 주인은 "이건 쓰고 남은 덩어리이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는 그 대리석 안에 피에타 상이 보이는군요." 진리가 우리의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이 대리석 이야기가 말하고 있듯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가 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리학적 사실도 약간만 우리에게 드러나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것은 숨어 있다. 물론 지금까지 드러난 물리적 현상만 하더라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는 흡사 인간의 무의식 세계가 의식보다 훨신 심층적인 것처럼 부분적인 것만 물리적 현상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앞으로 얼마나 다르고 새로운 물리이론들이 드러나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뿐이다. 이창호의 바둑에 숨어 있는 수가 무궁무진하듯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식론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세계와 하나님을 결국 완전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설교자들이 감당해야할 몫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비록 바르트의 표현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없다"는 불가능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부단히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영의 활동에 민감한 자세를 갖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말할 거리가 주어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걸어가면서 길을 내고,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안내하는 역할이 주어진 사람들이다. 이런 구도자적 자세를 갖출 때만 우리는 주체적으로 세계, 인간,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제야 주체적으로 구원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한, 우리는 늘 시대적 사조에만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결국 힘의 논리로 우리를 압박해오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 그들의 나팔수 노릇만 하게 될 것이다.  



2) 인간 바르게 알기

인간 구원을 선포해야 할 우리 설교자들이 유럽이나 미국의 문화에 치우치지 않고 주체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성서의 고유한 세계를 인식하는 작업만이 아니라 <인간이해>가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인간은 인간종(種)으로서의 보편적 특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역사경험을 통한 민족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구체적인 인간을 이해하지 않는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 구원을 바르게 전달할 수 없다. 예컨대 19세기 미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나 18세기 유럽의 대각성운동을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 한민족에게 우격다짐식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그 적실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툭하면 탕자의 비유 같은 설교를 통해서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그것도 청교도적인 도덕적 정당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강조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죄의식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런 설교는 인간학적 타당성을 상실한다. 물론 이런 현대인의 의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설교해도 좋겠지만 죄의식에 근거를 둔 설교가 18,19세기 유럽과 미국의 감수성에 의존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성서적이거나 기독교 전통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안 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설교를 계속한다면 이 세상의 건강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즉 정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미숙한 이들만 교회에 남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이런 현상이 점차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얼마전 영남신학대학교 신학교육원 3학년 과목인 <조직신학2>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이 <오아시스>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장애인 여자와의 지고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 목사에 대한 한 대목이 나온다. 남자 청년이 장애 여자에게 성폭력을 휘둘렀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폭력이라기 보다는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구치소에 찾아와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이 불쌍한 영혼이 한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범죄하였나이다. 다시는 이런 유혹에 빠져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이 영화를 본 신학생은 극장을 나오면서 인간의 심층적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죄를 재단하는 그 목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세상에 투영된 목사의 모습이 바로 그게 아닐까?  



우리가 인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인문학>에 대한 공부에 있다. 인문학의 주류인 문학, 역사, 철학만이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고고학, 언어학, 더 나아가서 예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이 남긴 흔적들을 추적해봄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약간씩이나마 손에 잡히게 된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으며, 얼마나 숙명적이며,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 그 실질을 명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우리의 설교가 극단적인 추상성을 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의 책읽기는 심층적이면서도 광범위해야 한다. 신학책만이 아니라 주변의 인문, 사회, 과학분야까지 아우르는 책읽기를 통해서 우리의 인간 이해가 한층 탄탄해질 수 있다. 최소한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를 꼼꼼히 읽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인문학적 소양은 풍부해질 것이다.



앞서 말한 성서의 세계를 바르게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조직신학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며, 인간 공부를 위해서는 철학이 그 역할을 한다. 오늘 설교자들이 조직신학이나 철학은 외면하고 상담학이나 설교학 기술만을 습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설교의 위기이다.  

이렇게 성서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공부가 튼실하게 되면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의 정서에 편향된 설교를 하지 않게 된다. 즉 우리 한민족이 살아온 삶의 자리에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적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탈식민적 설교의 길이다. 여기서 그런 탈식민지적 설교의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라고 한다면 말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이지 이미 주어진 모범 답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한민족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전통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 하나님 나라와 그의 계시를 주체적으로 반성할 때만 우리는 건강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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