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제로서의 "생명"문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5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1. 인간론으로부터 신론으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설교의 틀을 크게 보면 인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지만, 조금 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이 세 유형이다.



1)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은 설교자나 청중 양측이 말씀에 대한 진지한 태도 없이 그저 감정적인 일체감에 빠지는 경우다. 예컨대 어떤 설교자는 거의 2,3분 간격으로 "축복합니다", 또는 "믿습니까?"를 연발함으로써 청중들에게 "아멘"이라는 화답을 얻어내려고 애를 쓴다. 물론 설교자와 청중들 사이에 래포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학의 기초이지만 이것도 사실은 말씀과 성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인간들의 감정적 일체감은 아니다. 감정에 치우치게 되면,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반응만을 생각하게 되면 설교의 내용은 늘 부차적인 자리로 떨어져 버리고, 전달 기술만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노래 실력 없이 청중들의 인기에만 영합하려는 수준 미달의 가수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창력에 승부를 거는 게 아니라 매우 자극적인 노래말과 멜로디, 또는 현란한 춤으로 팬들의 관심을 끄는 데만 마음을 둔다. 이런 연예인들이야 인기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이런 설교에는 양면성이 있다. 적극적인 면에서 이런 설교를 듣는 사람은 일단 심리적인 자기 초월, 카타르시스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자유와 기쁨의 경험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 이런 설교는 신앙을 심리화, 감정화 하며, 더 나아가서 희화화 한다. 유아적 신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이 감정적이어어서 그런지 내용없이 허풍스러운 설교가 먹히는 일이 적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감성적인 접근이 훨씬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은 반응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런 설교는 죽은 설교다. 왜냐하면 이런 설교에는 삶(생명)의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매일 저녁 우리나라 티브이에 방영되는 시트콤이 아무리 재미 있어도 결국은 인간의 참된 삶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감정적 일체감은 내용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때는 허상에 불과하다.

이호형교수는 "영화보다 더 수준 높은 설교를 위하여"라는 글에서(기상2002.12) 대박을 터드린 영화가 반드시 좋은 영화이라거나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나쁜 영화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감독과 설교자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작품성을 중시하는 뛰어난 영화 감독들은 사실 설교자 못지않게 인간의 삶과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든 작품은 어떤 설교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어떤 설교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 나라의 설교자 중에서 유명한 감독만큼 인간의 삶과 사회 현실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바탕 위에 복음을 새롭게 해석해서 선포하는 설교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164쪽). 많은 경우에 우리의 설교는 단지 오락성만 추구하는 영화처럼 대중추수주의에 빠져 있는 셈이다.



2) 다음으로는 비교적 세련된 교회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교양강좌와 비슷한 수준의 설교가 그것이다. 이번 강좌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명성이 자자한 설교자들의 설교집을 찾아보았다. 박조준(위기에 직면할 때, 1999), 이동원(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 1998), 옥한음(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 1998), 이재철(요한과 더불어, 1998)이 그들이다. 그들의 설교를 직접 듣지는 못하고 설교집을 통해서 평가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무슨 설교를 하고 있는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설교는 이미 한국 교회 안에서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좋은 점들은 접어두고, 전체적인 문제점을 짚으라고 한다면 위에서 말한 바로 그것, 즉 교양강좌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나는 이분들의 설교를 읽으면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시형박사의 교양강좌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양강좌는 말 그대로 교양에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강좌다. 때로는 그런 강좌를 듣고 우울증을 치료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정리할 수도 있다. 우리의 많은 설교도 역시 성서라는 재료만 달랐지 그것이 교양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위기는 기회가 된다거나,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거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때로는 아주 세련되게 전할 뿐이다. 책의 제목만 살펴보아도 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앞의 세분은 바르게 살자는 뜻으로 제목을 잡았다. 이재철목사는 요한복음 설교 시리즈였기 때문에 예외로 쳐야한다. 특히 옥한음목사는 "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고 매우 선동적인 제목을 잡았는데, 굳이 선의로 이해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론과 달리 오히려 업적신앙에 기울어져 있다. 이는 곧 설교행위에 나타난 인간론의 과잉현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목사들의 공부가 거의 목회상담에 몰려있다고 한다. 정신분석, 심리치료, 상담기술 같은 공부를 통해서 인간을 이해해보자는 뜻이 거기에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무작정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려는 자기 성찰이라면 이런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범생을 만드는 게 바로 설교의 목적이라는 생각으로 인간을 기술적으로 다루어보려는 시도라고 한다면 그건 아무 쓸모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비복음적이다.

이런 윤리적, 또는 교양강좌식의 설교에도 양면성이 있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이런 설교를 듣는 신자들에게 나름대로 윤리적 성취감을 제공한다. 교회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동기를 제시해준다.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이런 설교는 겉으로만 하나님을 말하지 실제로는 인간만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 체계를 고착화시킨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라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듯이 자신의 겉모습에 치중하게 된다. 앞서 열광주의적 설교가 인간의 심리와 감정에 치우쳤다고 한다면 이 율법적 설교는 도덕에 치우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즉 양측 모두 인간이 핵심으로 작용하다.    

3) 가장 바람직한 설교 유형은 청중들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나라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자기 삶을 초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설교는 인간론이 아니라 신론에 중심축이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여기 바람이 있다고 하자. (구약에서 영을 뜻하는 루아흐는 바람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예수는 성령의 성격을 임의로 부는 바람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이 바람은 때로 우리의 머리칼을 흩날리게도 하고, 태풍으로 돌변하면 건물을 허물어뜨리기도 한다. 나무로 밥을 하는 재래식 부엌에서는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지핀다. 사람들은 각각의 형편에 따라서 바람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나름대로 이용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데,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그것 자체에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을 바르게 아는 방식이다. 이처럼 궁극적인 존재이며 만물을 결정하는 현실성(Wirklichkeit)인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이용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오히려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곧 위에서 말한 인간의 심리와 윤리에 치우친 설교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역사경험을 뛰어넘어 활동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세계 경험 안에, 그것도 자기의 주관적 경험 안에 붙들어 맨다. 이런 상태의 극단화가 곧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us)이다.

이 문제는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율법주의라는 닫혀진 종교되고 말았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모든 행태에 종교적 교양의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상대화함으로써 진리와 자유와 해방의 종말론적 나라로 개방되었다. 따라서 예수와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행태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성취에 불과하다. 설교는 바로 이 자기 성취에 매달리는 삶으로부터 자유의 영에 의해서 작동되는 하나님 나라로 삶의 자리를 옮기도록 자극하는 작업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설교가 인간이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떤 사명감을 가져야하는가에 매몰되어버리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자유와 해방보다는 오히려 억압감과 부담감, 또는 자기도취에 사로잡히고 만다. 신론을 완전히 인간론으로 변질시켜버린다는 말이다.

사랑을 예로 들어 조금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판넨베르크 설교집 "여기 계신 하나님" 참조).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사랑에 대한 설교를 자주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이 본문으로 기독교인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청중들은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강압감에 휩싸여서 결국 말씀의 진지성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사랑하는 척 위선이나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이런 현상은 본문을 인간 중심으로 읽기 때문에 벌어진다. 본문은 인간의 행위가 아무리 철저하게 도덕적이고 자기 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론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無) 말한다. 바울은 인간의 온갖 수고와 노력을 사랑 자체가 아니라고 구별하는데 대개의 설교자들은 그것을 동일시한다. 우리가 듣는 설교의 대부분은 이렇게 자기 희생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인간론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교회를 절대화하려는 선동이거나 아니면 신자들의 계몽을 위한 교양강좌에 불과하다. 설교는 이런 자리에서 빨리 털고 일어나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자"(Seiende)가 아니라 "존재"(Sein)에 대해서, 노자식으로 말해서 위(爲)가 아니라 무위(無爲)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하나님, 생명, 하늘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할 차례다.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한 가지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행위, 계시, 하나님 나라, 종말, 창조 등 여러 항목들이 하나님과 연관된 주제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이 모든 신학적, 성서적 개념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생명을 공급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완성시키는 분으로 서술된다. 이 문제는 굳이 창세기의 창조사건, 복음서의 부활사건, 요한계시록의 새예루살렘에 대한 환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본문들도 역시 생명이라는 주제와 직간접으로 연관된다. 예컨대 출애굽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전하려는 메시지도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과 후손을 약속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살게 될 것이고 자기 머리를 굴리는 처세술에 의존하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신명기사관인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생명은 바로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생명 이해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사실 이 생명 문제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기독교만이 아니라, 또는 그 이외의 모든 종교만이 아니라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개인이나 공동체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사색의 주제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만 살지 않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직관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렇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과 세계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아주 잠시 살다가 병들고 늙어 죽는다. 땅에 묻혀 약간 지나면 썩는다. (사실 썩는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박테리아가 우리의 몸을 먹는다고 말해야 옳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유기물은 이렇게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망 속에서 유기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물리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불교의 윤회관에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다.). 순식간에 삶의 실체가 사라지는 이 사태 앞에서 인간은 완전히 무력하다. 손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 생명의 실체를 파악해보려고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서 그 결과로 생명 유전자 암호까지 거의 해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는 생명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실질적 수명이 지금보다 10배 이상 늘어난다고 해도 역시 생명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명 현상 자체를 이해하거나 그 내용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과 소유가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 순간에 아주 시시한 것이 되어버릴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들을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노력들은 늘 한정적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적인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 즉 생명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 기독교는 이 생명을 하나님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려는 바의 핵심은 하나님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있는 곳에는 생명 사건이 일어나며, 생명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는 곧 하나님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핵심주제로 삼아야 할 설교는 생명을 주제로 삼아야 하며,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늘 생명을 화두로 삼아야만 한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예수의 말씀으로부터 풀어가려고 한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나 에스겔의 묵시문학적 환상도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지만 그래도 예수의 말씀이 훨씬 중요하다. 위에서 인용해놓은 성구에는 예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진술되었다. 그 떡이 곧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능력이다. 이렇듯 성서가 말하는 생명은 하늘과 연관되어 있다. 이 땅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생명이 가능하지 않다. 생명을 구원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구원도 역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신앙의 공식화가 곧 성육신(incarnation)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양식이야말로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 단초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사도신경에도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하늘"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곧 생명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늘이란?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만이 아니라 자주 하늘과 연관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만에 구름을 타고 승천했으며,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믿었다. 이미 바울이 빌립보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가르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땅에 미련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에 대한 희망에 근거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이런 초월적인 신앙에 근거해서 로마 정권의 억압이나 현실적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미국의 흑인 노예들도 역시 이런 하늘 나라에 대한 희망 때문에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하늘을 향한 초월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속적인 세력에 대한 관심과 그런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서 최소한 18세기까지 유럽의 역사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해왔다. 이런 태도는 분명히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이나 딜레마를 극복하고 우리의 신앙이 바른 자리에 서기 위해서, 또한 설교의 토대인 하늘의 생명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셨으며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하늘"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하늘은 곧 우주 공간인가?

초보적인 우주 물리학을 알고 있기만 하더라도 하늘은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거시우주 구조와 미시물리 구조가 너무나 비슷하다. 거시나 미시가 결국은 비어 있다. 어쨌든지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은 1광년 거리에 놓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고, 기껏해야 빅뱅 당시 생긴 흑암과 별빛뿐이다. 지금 인류의 우주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지 축소되고 있는지,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그 시작과 끝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만이 확실하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지구와 다른 종류의 생명체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는 하지만, 태양처럼 위성을 갖고 있는 항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우주 공간에 생명체가 있을 개연성은 거의 무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 현상이 없는 곳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런 우주 공간을 성서가 말하는 하늘, 혹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는 결코 없다.



둘째, 성서의 하늘이 우주 공간이 아니라면 인간의 마음 속을 가리키는 걸까?

언젠가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하늘 나라는 바로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긴 하다. 지금도 지식인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이렇듯 실존적인 의미에서 하늘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마음을 절대적인 세계로 여기는 태도는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를 인간의 "절대의존 감정"이라고 규정한 이후로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신앙의 중심 자리로 여겼다. 헤르베르트 브라운은 인간과 인간의 참된 만남, 또는 동료성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개인의 심령적 차원에서 왜곡시킴으로써 개인의 주관주의적 실존을 강조한 역사가 앞서 전개된 바 있었다. 각성신학이나 경건주의신학 등이 이런 것들이다. 이 세상살이가 인간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주장이 보편화 되어있듯이 이 마음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그들의 생각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부처가 들어있다는 불교의 입장이 이런 생각에 훨씬 가까운 것 같은데, 반면에 우리 기독교는 인간의 주관적 실존이 아니라 분명히 그 인간을 초월하는 세계를 지향한다. 절대생명이 거하는 하늘을 담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부실한 게 아닐는지. 만약 하늘 나라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면 신학보다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이 훨씬 하늘 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지상천국이 성서가 말하는 하늘일까?

안식교인이나 여호와의 증인으로 대표되는 이런 지상천국론자들의 주장은 하늘을 이원론적으로 간주하는 정통 교회의 입장보다는 훨씬 그럴듯해 보인다. 이 땅에 다시 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상기해보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지상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렇게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입장의 내면을 들어가보면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아니라 민중신학이나 생태신학도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땅에 민중들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는 후천개벽설이나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지상천국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그와 비슷한 구도가 담겨 있다. 땅의 차원에서 궁극적 생명 문제를 모색하는 이런 입장은 곧 지상천국론과 비슷한 것인데, 이 문제를 기독교 비판과 더불어서 훨씬 설득력 있게 접근한 인물은 프리드리히 니이체다.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명제로 그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땅에 충실하라고 외쳤으며, "도덕 계보학"에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죄의식에 기초한 도덕심을 떨쳐버려야만 인간의 삶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니체는 기독교의 하늘이 아니라 철저하게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생명을 강조함으로써 반 기독교적 운동에 선봉자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땅에 토대를 둔 <생의 철학자>였다. 그 이외에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기독교의 하늘이 인간의 삶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혹한 비판과 독설을 던진 사람들이 많다. 신이란 인간의 투사일 뿐이라고 말한 포이에르바흐, 어린애로 남는 자들의 환상이며 따라서 집단적 히스테리라고 말한 프로이트,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 등이 그렇다. 그들의 주장이 비록 기독교를 부분적으로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에 현상하고 있는 비실질적 흔적을, 즉 하늘에 대한 이원론적 추상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늘이 매우 불확실하다면, 니체 같은 이들이 말하는 땅은 확실한가? 인간이 이 땅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해서 달성한 결과는 구체적이며 영원한 가치가 있나? 하늘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땅을 경작해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었나? 인간의 계몽과 진보는, 특히 현대의 생산성은 외면상 풍요로운 생명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 털끝만큼도 나아지지 못했다. 하나님에게서 해방된 인간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정치 이념이었든, 자본주의였든, 세계 혁명이었든 상관없이 인간이 만든 것은 결국 인간을 노예화 한다.

이 땅에서 우리 인류가 수 백만년 동안의 삶을 지탱해왔으며, 온갖 문화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기 때문에 이 땅이 아름다워보이고, 또 어떤 면에서 아직 이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나 당위가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절대적인 삶을 경작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절대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지상천국이 현실화되었다고 하자. 인간이 이 땅에서 이런 방식으로 영원히 산다고 하자. 병도 없고 굶주림도 없이, 억압과 미움도 없이 천년 만년 살 수 있다고 하자. 완벽한 복지사회가 성취되었다고 하자.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그들이 말하는대로 기독교의 하늘이 공허하다면, 인간의 땅도 역시 황폐하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비판가들의 역사적 교회에 대한 비판은 일단 정당하다. 동시에 그들도 역시 인간 구원과 그것의 성취 문제에서 결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 기독교 역사에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제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허락할 그 하늘의 생명은 무엇인가?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론에 속하는 질문이다.



4. 하늘과 생명의 은폐성



우리가 하나님을 꽃이나 새, 또는 안개처럼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할텐데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다. 아주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이런 답답증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과 평화의 마음에 휩싸이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 때마다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다. 아마 이 문제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야, 또는 종말이 온 다음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한가? 그 답이 곧 하나님의 은폐성(Deus absconditus)이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지만 동시에 은폐되어 있는 분이다. 성경을 구구절절이 꿰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물리학, 철학에 관한 학문에 능통하더라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성서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하게 밝히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증언되며, 이 거룩한 분을 직접 본 자는 죽는다고 까지 했다. 즉 못볼 것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건이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앞에 이렇듯 명백한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생명도 역시 그 궁극적 사실은 은폐되어 있다. 여기 민들레 꽃이 있다고 하자. 그 꽃은 햇빛과 물과 탄소를 결합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분을 생산한다. 우리의 모든 먹거리가 그런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기초 단위는 햇빛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탄소, 또는 물인가? 그 모든 것인가? 그 중에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생명공학자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은 현상에 대한 추상적 접근에 불과하지 근본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못된다. 오늘의 첨단 과학이 생명의 기원에 상당히 접근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명현상에 대한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무식한 셈이다. 그 이유는 (자연)과학의 속성이 어떤 현상을 단순하게 설명할 뿐이지 그 근원을 인식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자의 세계를 규명하게 되면 물질의 세계가 모두 해명되는 게 아니라 그 원자보다 훨씬 작은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만 밝혀질 뿐이다. 인간의 유전자 암호가 모두 풀린다고 해서 인간의 생명이 완전히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것 이외에, 또는 그것 안에 더 넓은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만 밝혀지는 것이다.  

이 물질문제를 좀더 검토해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원자를 기초로 한 어떤 물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빈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는 입자가 아니라 너무나 작아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핵과 그것보다 더 미세한 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의 핵은 원자를 대형 교회당으로 확대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찬송가 악보의 작은 콩나물 대가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핵 마저도 역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물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것, 즉 물질 자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있음"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간다. 앞서 잠간 거론한 하이덱거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질문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각 범주 안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무엇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존재(Sein)이다.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우리의 감각범주에 들어와 있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절대적인 것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나 명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여전히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힘이다.



그러나 생명, 존재, 물질의 은폐와 연관된 하나님의 은폐는 그렇게 어둠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계시 마저도 역시 완전한 노출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을 취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에서 자기를 은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바로 신학이며 설교다. 바로 이 예수 사건에 이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토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모든 세계와 사물이 그 존재의 비밀을 벗게 되는 종말이 이미(schon)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아직은 완료되지 않은(noch nicht) 상태라고 믿는다.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으로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하고 구원론적 지평을 제시하는 중이다. 작은 예를 하나 들자면 씨앗과 꽃의 관계가 이와 같다. 씨앗에는 꽃의 세계가 드러나 있는 게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숨어 있다. 그러나 씨앗이 없으면 꽃도 없기 때문에 이 두 관계는 계시와 은폐를 동시에 갖고 있는 셈이다.



5. 부활의 생명을 향하여



근본적인 면에서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니체나 프로이트, 혹은 포이에르바흐가 비판하듯이 인간 삶을 왜곡시키고 소외시키는 요설이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추상적인 데 묶어두지 않고 참된 리얼리티와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힘이다. 또한 하늘은 이 땅과 대립적인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땅은 현실이고 하늘은 관념이지만 결국은 동일하다. 땅은 생명의 질료이며, 하늘은 생명의 형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두 세계가 온전한 생명을 이루어낸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에게 임했던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킨다고 보았다. 예수님에게 임했던 영광의 몸은 바로 부활을 가리킨다. 영광이라는 독일어(Verherrlichung)에는 주(Herr)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영광은 왕 같은 통치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부활은 그가 영광의 세계로 높임을 받았다는 뜻이다.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도 결국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왕처럼 살아가는 때이다. 그때를 가리켜 우리는 종말이라고 한다.

예수의 부활 사건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했듯이, 우리 기독교가 생각하는 종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일어난다고 본다. 우리가 영광을 생산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한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은 하늘 사건이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그런 부활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믿음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생명에 대한 명증한 인식이다.

이러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세밀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다만 소극적인 면에서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변화는 현재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이 몸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활한 예수님은 죽기 이전의 인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제자들과 대화를 했고, 식사를 함께 했다. 즉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현재의 몸과 아무 상관도 없는 혼령이나, 혹은 기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둘째, 영광의 몸은 현재의 몸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을 덧입는(변한)다. 비록 현재의 몸과 깊은 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다. 예컨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된다고 할 때 그 나비는 애벌레 상태의 그 몸으로부터 변화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몸이 되었다는 것과 비슷하다. 애벌레의 상태에서는 나비의 세계를 도저히 인식할 수 없다. 사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비와 밑에서 올려다보는 애벌레의 관계가 서로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인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덧입게 될 부활과 생명의 세계도 역시 현재 우리의 삶과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이다.

궁극적 생명 형식인 이 영광의 몸은 (앞서 말한대로 꽃이 씨앗 속에 숨어있듯이) 오늘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이 생명을 선취했다고 믿는다. 즉 예수 사건에서 이미 하늘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에 좀더 확실한 것을 말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확실한 것(Wirklichkeit, reality)은 늘 이미 오늘 우리의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니라 미래로부터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종말의 궁극적 생명이 선취형식으로 일어난 예수 부활이 무슨 근거에서 온 세계의 생명을 결정하는지 설명(설교)해야한다. 특히 우리의 이런 신앙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은폐된 생명인 하늘을 우리의 삶에 현실화 시키고 세상사람들에게 변증해나가도록 청중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이 곧 설교의 근본 작업이다.



6. 마무리 - 생명지향적 설교



1) 청중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청교도적 설교는 인간을 파괴시킬 뿐이다. 죄책감은 자기를 학대하는 심리로서 결국 반생명적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다.

2) 소위 "세계선교"로 포장된 근대주의적 설교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소비하게 만든다. 선교는 교회의 일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일이다(Missio Dei).  

3) 이 시대의 생명운동과 연대하는 방향의 설교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생명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4) 이 시대의 인문학과 대화해야한다. 인문학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인간 삶(생명)의 문제를 풀어보는 작업이기 때문에 설교는 이런 작업과의 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5) 생명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는 타종교를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가 투쟁해야 할 대상은 고등한 타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물화시키는 세속정신이다.

6) 생명(구원, 하나님 나라)의 개방성을 전제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드러난, 드러나는 생명은 이미 완료된 게 아니라 잠정적이며, 미래 개방적인 성격을 갖는다.

7) 따라서 설교의 중심주제인 생명(구원) 사건은 그리스도 일원론적 시각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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